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8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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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8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모든 중생의 마음에 두루 미쳐서 이미 동일한 마음이거늘 어떻게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음이 있는가.
  [답] 언제나 나타나서 나타나지 않을 때가 없다. 혹은 한 티끌에 단박에 나타나서 완전히 갖추지 않음이 없기도 하고, 혹은 모든 티끌에 널리 나타나서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
  한 곳에서 단박에 나타난다 함은, 여래의 눈 속[如來眼睫]이요, 문수의 보배 관[文殊寶冠]이요, 미륵의 누각 가운데[彌勒閣中]요, 보현의 털구멍[普賢毛孔]이요, 정명의 방 안[淨名室裏]이요, 마야의 뱃속[摩耶腹中]이요, 겨자씨의 바늘 끝[芥子針鋒]이요, 가까운 티끌의 먼 세계[近麗遠刹]의 것이니, 저마다 단박에 나타난 것들이다.
  『문수반니원경(文殊般泥洹經)』에서 이르기를 “문수의 몸은 마치 자마금의 산과 같았고 그 문수의 보배 관은 비릉가보(毘楞伽寶)로 장식되어 5백 가지의 색이 있었는데, 그 낱낱 색 속에도 해와 달이며 모든 하늘과 용의 궁전 등 세간 중생들의 보기 드[문]일들이 모두 그 속에서 나타났다”고 한 것과 같다.
  『유마경』에서 이르기를 ‘이 대장자 유마힐이 신통력을 나타내어 즉시 저 부처님의 3만 2천 개의 사자좌를 보내자 높고 넓게 장엄되어 깨끗한 것들이 유마힐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모든 보살과 큰 제자며 제석ㆍ범왕ㆍ사천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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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옛날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방은 넓고도 넓어서 그 3만 2천 개의 사자 자리가 다 넣어졌으나 걸림이 없었으며, 비야리성과 염부제의 4천하 역시 좁아지지 않아서 모두가 옛 그대로 나타났다”라고 했다.
  『화엄경』의 「입법계품(立法界品)」에서 이르기를 “마야부인이 선재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 때 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오실 적에, 열 부처님 국토의 극미(極微)의 티끌 수만큼의 많은 보살들이 그의 권속들과 함께 천궁으로부터 내려와 나의 뱃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여러 보살들은 나의 뱃속에서 큰 신통을 나타내어 자재하게 노닐고 다니면서 혹은 삼천대천세계를 한 보(步)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부처 국토의 극미의 티끌 수만큼의 많은 세계를 한 보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또 생각생각 동안에 시방의 말할 수 없는 부처 국토의 극미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세계의 모든 여래 처소의 보살들의 모임과 사천왕ㆍ33천ㆍ수마천ㆍ도솔타천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이며, 내지 색계의 모든 범천왕들이 다 함께 와서 보살이 계신 태 안의 광대한 신변을 보고 공경하고 공양하고 바른 법을 듣고 받으려고 모두가 나의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비록 나의 뱃속에 이러한 뭇 모임들을 모두 넣었으나 몸은 광대해지지도 않았고 좁지도 않았으며, 그 모든 보살들은 저마다 자기가 처한 뭇 모임의 도량이 청정하게 꾸며져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4천하의 염부제 안에서 보살이 태어나셨고, 나는 그의 어머니가 되었거니와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4천하 염부제 안에서도 역시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몸은 본래 둘이 없고 또한 하나도 아니었으며 한 곳에 머무를 것도 아니고 여러 곳에 머무를 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보살의 크신 서원인 지환장엄(智幻莊嚴)의 해탈문을 닦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광대하기 마치 법계와 같고/마지막이기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이것은 태 안에 계신 것의 이치이니, 만약 그렇다면 일체 중생들이 모두 마야의 태 안에 있는 것이어서 석가 혼자만이 아니리라. 왜냐 하면 중생의 마음이 곧 법계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마음이 공(空)함을 요달하면 곧 태 안의 것이 없으리니, 마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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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공을 수행한 보살이거늘, 어떻게 시방의 국토를 노닐면서 중생을 교화하겠느냐.’ 미륵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공을 수행한 보살은 국토를 보지도 않고 또한 부처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부처님 스스로가 부처님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님께서 계시겠습니까.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식(識)ㆍ계(界)와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모두 다 비고 고요하나니, 이 때문에 태 안의 것이 없습니다’”고 한 것과 같다.
  ‘모든 티끌에 널리 나타난다[諸麗普現]’ 함은, 가로로는 온갖 처소를 겸하고 세로로는 온갖 시간에 사무쳐서 엇갈려 들어가 겹치고 널리 원융하여 두루한 것이니,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온갖 부사의한 일이 온갖 곳에서 모두 널리 나타난다”고 했다.
  그것은 한 비로자나의 청정한 법신의 응용일 뿐이니, 이 법신이란 바로 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만약 진실로 마음이 둘 아님을 관찰할 수 있다면, 비로소 비로자나의 청정한 법신을 본다”고 했다.
  한 생각에 악을 일으키면 법신 또한 따라 나타나고 한 생각에 선한 마음이 나면 법신 또한 따라 나타나는 것을 곳마다 서로서로 나타난다고 하며, 내지 색처(色處)가 나타나고 공처(空處)가 나타나서 자재하고 걸림 없는 것이니, 다시는 멀리서 모든 부처를 추구하지 말라. 스스로 한 생각의 공(空)한 마음이 그것일 뿐이다.
  또 마치 해인(海印)이 온갖 것을 널리 도장 찍는 것과 같다. 『화엄경』의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가 정각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하리니, 온갖 뜻에서 관찰할 바가 없고 법의 평등에서 의혹될 것 없으며 둘이 없고 모양도 없으며 감도 없고 그침도 없으며,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두 가지 치우침을 멀리 여의어 중도에 머무르고 온갖 문자와 언설을 벗어나서 온갖 중생들의 생각으로 행하는 바와 근성과 욕락과 번뇌며 물든 습기를 안다. 요약하여 말하면 한 생각 동안에 3세의 모든 법을 모두 아는 것이니라. 불자여, 마치 큰 바다가 4천하 안의 일체 중생들의 육신의 형상을 널리 도장을 찍듯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다 같이 말하기를 큰 바다라 하였고, 그러므로 경 안에서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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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매(海印三昧)가 있다.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해인삼매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근기는 바로 소현(所現)이요, 보살의 정심(定心)은 바로 능현(能現)이며, 마음이 공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삼매라 한다.
  첫째는 마음의 능현이 없다[無心能現]. 경에서 이르기를 ‘공용도 없고 분별도 없다’고 했다.
  둘째는 나타나되 소현이 없다[現無所現].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빛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셋째는 능현과 소현이 하나가 아니다.
  넷째는 다른 것도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큰 바다는 능현이라 능소(能所)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요, 물 이외에서 형상을 구하는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정심과 소현의 법을 드러낸 것이니, 곧 성품의 모양이기 때문에 능소가 완연하고 곧 모양의 성품이기 때문에 물아(物我)가 둘이 아니다.
  다섯째는 가고 옴이 없다[無去來]. 만법이 제 마음에서 나타나되 그것 또한 오지 않았고 몸 구름이 법계에 걸려 있되 잠시도 간 일이 없다.
  여섯째 넓고 크다[廣大]. 경에서 이르기를 ‘널리 다 넣어 싸며 거역하는 바 없다’고 했다. 밝은 삼매 마음이 법계에 두루하면 중생의 물질과 마음이 모두 정심 속의 물건이며, 그 작용도 법계에 두루하여 역시 이 마음을 여의지 아니한다.
  일곱째는 널리 나타난다[普現].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모든 마음의 행을 널리 나타낸다’고 했다. 이것과 넓고 큼이 다른 것은, 여기서는 소현에서 보아 크고 작음을 소홀히 하지 않으나 저기서는 능현에서 보아 그 분량이 넓고 두루하다.
  여덟째는 단박에 나타난다[頓現]. 경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고 했다. 앞뒤가 없는 것이 마치 도장을 단박에 찍는 것과 같다.
  아홉째는 언제나 나타난다[常現]. 밝은 거울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열째는 나타날 것이 아닌데도 나타난다[非現現]. 밝은 거울은 마주 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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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나타나지만 네 하늘[四天]의 형상은 대하지 않는데도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타날 것 아닌데도 나타난다’고 한다. 상대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므로 언제나 나타나며 삼제(三際)를 다 겸한다.
  이 위의 것은 해인이 나타나는 이치로서 본체와 현상ㆍ능과 소를 따르면서 열 가지 문으로 나눈 것이나, 다만 하나의 참 마음이 고요히 비추면서 널리 나타난다는 이치일 뿐이다. 만약 나타나지 않음이 있다면, 바로 객진(客塵)이 스스로 막고 소견의 그물이 저절로 가리는 것이요 법신의 허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평등한 법신은 자연히 온갖 곳에 두루하여 뜻을 지음이 없으며,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이다”라고 했다.
  중생의 마음이란 마치 거울과 같다. 거울에 만약 때가 끼면 색깔과 형상이 나타나지 아니한다. 그와 같아서 중생의 마음에도 만약 때가 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아니한다.
  그것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밝아도 소경은 보지 못하고, 천둥소리가 땅을 흔들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도에 계합되면 이웃이니, 몸의 가까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이 세간에 나오면 임랑(琳瑯)이 나타나지만 박복한 이가 나오면 가시나무가 나는 것이니, 모두가 제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아니한다. 만약 바로 심성을 환히 안 사람이면, 모두가 다 평등하게 나타난다.
  낙포 화상(洛浦和尙)의 신검가(神劒歌)에 이르기를 “군자가 얻게 되면 이것저것 다 잊지만/소인이 얻게 되면 절로 뽐내나니/다른 집이 우리 집의 칼을 쓰지 않거니와/세상의 높낮이가 언제 평탄하리요”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중생에게 분명히 나타나지 못함은 모두가 존재[有]에 걸려서 진실을 미혹하고, 진실에 걸려서 중도를 미혹하며, 중도에 걸려서 성품을 미혹하는 세 가지의 연집(緣集)을 이룬다. 이 때문에 장애가 된다.
  『천태정명소(天台淨名疏)』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기류(氣類)는 한량없고 그지없지만 원래 그 정요(正要)는 세 가지 연집의 기류에서 벗어나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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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첫째는 유위 연집(有爲緣集)의 무리이다. 곧 이 지경 안의 더럽거나 깨끗한 국토에서 모두 진실을 미혹하여 존재에 걸려서 결업(結業)을 일으켜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받나니, 이는 모두 유위 연집의 중생 무리이다. 둘째는 무위 연집(無爲緣集)의 무리이다. 곧 이 지경 밖에 다른 국토와 과보토(果報土)와 하품ㆍ중품까지의 상적광토(常寂光土)가 있는데, 이 세 가지 국토 중생은 중도의 불성을 미혹하여 진공 무위에 걸려서 무위를 반연하여 모든 결업을 일으키면서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받나니, 이것이 무위연집의 중생 무리이다. 셋째는 자체법계 연집(自體法界緣集)의 무리이다. 곧 보살이 자체를 미혹하여 일으킨다. 마치 종문(宗門)중에서 말한, 기 소견을 잊지 않았다>라고 함과 같다”고 했다.
  이제 방 밖에서 지경 안의 유위 연집의 중생을 꺾어 조복하고, 다음에 제자의 한 무리는 무위 연집의 중생을 꺾어 조복하며, 마지막의 보살의 한 무리는 바로 이 자체법계 연집의 중생을 꺾어 조복한다.
  [문] 무위 연집과 자체 연집은 같은가, 다른가.
  [답] 이름은 구별이 있으나 미혹한 체성은 다르지 않다. 2승은 자체에 미혹하여 무위를 일으켜 집착을 내고 무위에 집착하기 때문에 바로 무위 연집이라는 이름을 받으며, 보살도 자체에 미혹하여 무위 연집을 일으키면서 보살은 관(觀)으로 무위의 집착을 깨뜨리나 무위 연집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미혹이 자체에 부착되어 따로 자체 연집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마치 범부가 진실을 미혹하여 유위 연집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며, 학인(學人)이 진실을 보고 견사(見思)를 끊으면서도 생각함이 다하지 않으니, 마치 진리에 탐냄ㆍ성냄의 색(色)이 있어서 무색(無色)의 이름에 물드는 것과 같다.
  [문] 학인은 유위 연집으로 진실을 다 보지 못하여 오히려 미혹이 있으므로 진실에서 보아 자체 연집이라 이름하지는 못하겠지만, 보살은 무위 연집으로 진실을 다 보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따로 자체 연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가.
  [답] 2승이 진실을 보나 이것은 공(空)의 본체일 뿐 공의 본체는 법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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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므로 자체의 이름이 붙여질 수 없지만, 보살이 진실을 본 것은 바로 법신이어서 법신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따로 자체 연집의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
  보살이 혹은 아직 모르기도 하며, 아직 모르기 때문에 꺾어 조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 가지 연집은 없어지지 아니하며 그런 까닭에 법신은 나타나지 아니한다.
  또 원(遠) 대사가 이르기를 “연집의 이치에는 통괄하면 한 가지일 뿐이나 혹은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하는데 진실과 허망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허망의 연집[妄緣集]이니, 3계는 허망하여 하나의 마음에서 지어질 뿐이다. 마치 꿈에서 보는 것은 이 허망한 마음만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진실의 연집[眞緣集]이니, 온갖 법은 다 참 마음에서 일어나며 마치 꿈에서 보는 것은 보심(報心)으로 지어지는 것과 같다.
  혹은 심식(心識)에서 보며 세 가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취사(就事)의 연집이니, 그 사식(事識)으로부터 온갖 법을 일으킨다. 둘째는 허망의 연집이니, 그 허망한 인연으로부터 온갖 법을 일으킨다. 셋째는 진실의 연집이니, 진식(眞識)의 체성 안에는 온갖 항하보다 더한 성품의 덕을 갖추어 있어서 서로서로 쌓이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집이라 말한다”고 했다.
  또 진식으로부터 온갖 법을 일으키기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여래장식(如來藏識)이 없으면 7식(識)이 머무르지 아니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나 여래장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일으킨다”고 했다.
  또, 유위와 무위에 나아가서 세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는 유위의 연집이요, 둘째는 무위의 연집이요, 셋째는 둘을 다 갖춘 연집이다.
  [문] 곧바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아도 다시 8상성도(相成道)가 소용되는가.
  [답] 만약 이 마음을 알면 바로 그가 천진불(天眞佛)이므로 이룸과 이루지 않음을 말하지 아니한다. 만약 부처를 이룬다고 설명하면, 그것은 말참견이요 또한 그것은 군소리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여래의 묘한 원각(圓覺)의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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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보리와 열반이 없고 또한 성불과 성불하지 않음도 없으며 허망한 윤회거나 윤회가 아님도 없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본래 보리와 열반이 없다 함은, 이것은 두 가지 전의(轉依)의 이름이요 또한 관에 머무르는[住觀] 말이기도 하다. 번뇌를 굴려서 버렸기 때문에 보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생사를 굴려서 버렸기 때문에 열반이란 이름을 얻는다. 만약 번뇌의 성품이 공(空)하고 생사가 본래 고요한 줄을 알면 벌써 굴릴 바[所轉]의 모양도 없고 능히 굴림[能轉]의 이름조차도 없다. 성불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허망한 윤회가 없고 또한 성불이 없으면 윤회 아님이 없으리니, 묘한 원각의 마음이라야 다시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다만 종경(宗鏡)의 광명을 얻지 못할까 근심할 뿐이니, 만약 그 광명만 얻으면 저절로 원각의 문에 들어가서 법계를 널리 비추리라.
  그런 까닭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석장(錫杖)을 날려 고국(故國) 길에 오르면/천하에 명성 없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방(龐) 거사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시방으로부터 한 모임에 와서/저마다 무위를 배우는구료/여기가 부처를 선발하는 곳이니/마음이 통하여 급제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절로 등과를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급제해야 되거늘 어찌하여 수기를 받아 이름 드날릴 것을 기다리겠는가.
  옛 사람이 노래하기를 “좌선하지도 않고 계율도 안 지닌다/묘각(妙覺)의 마음 구슬 희기가 해 같으나/그 자체는 오묘하여 한 물건도 없거니/그 뉘가 연등불(燃燈佛)을 이어받으리”라고 한 것과 같다.
  [문] 중생의 업의 과보와 종자(種子)의 현행(現行)은 여러 겁 동안 훈습한 바여서 마치 아교의 칠과 같거늘 어떻게 한 마음만을 알면 단박에 끊어져서 성불한다 하는가.
  [답] 만약 마음의 경계가 진실이라 집착한다면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공(空)하지 아니하여 만 겁 동안 수행하여도 끝내 도의 과위는 증득하지 못할 것이며, 만약 단박에 나 없음[無我]을 알고 깊이 만물이 공허함을 통달하면 능소가 함께 녹아질 터인데 무엇인들 증득하지 못함이 있겠는가.
  마치 작은 먼지가 사나운 바람에 흩날리듯 가벼운 배가 급류에 떠내려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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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니, 다만 한 마음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허덕거릴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종경에 들어가면 어디에 간들 따르지 않으리오.
  이는 또한 용시(勇施)보살이 음욕을 범한 탓으로 오히려 무생법인을 깨쳤고, 성(性)비구니는 수행할 마음이 없었는데 역시 도의 과위를 증득하였거늘, 하물며 일승의 법을 믿고 이해하면서 진실로 제 마음을 알거늘 기필코 증득함이 없겠는가.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어찌 번뇌가 끊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하기도 한다.
  해석하여 보자. 진실로 살생ㆍ투도ㆍ음행ㆍ망어가 한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관하기만 하면 그 자리가 이내 고요하여지거늘, 어찌하여 다시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마음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만 가지 경계가 허깨비와 같다. 왜냐 하면 온갖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허환하게 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이미 형상 없거늘 법인들 어찌하여 모양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고성(高城) 화상이 노래하기를 “설교(說敎)는 본래 모양 없음[無相]의 본체를 궁구함이라/널리 보아도 원래는 마음을 모른다/마음을 알고 경계를 알라/마음 알고 경계 알면 선하(禪河)는 고요하리/경계 알려면 마음 알지니/만법은 모두가 달바(闥婆)의 영상(影像)같네”라고 했다.
  성 비구니는 바로 마등가(摩登伽)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등가 그녀는 오히려 음녀(婬女)로서 수행할 마음이 없었지만 신력의 은근한 도움으로 무학(無學)을 빨리 증득하였거늘, 하물며 이 회상에 있는 성문들로서 최상승(最上乘)을 구하는 너희임에랴. 결정코 성불할 것이라. 마치 순풍에 먼지를 날리는 것 같거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고 하셨다.
  『정업장경(淨業障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무구광(無垢光)이라는 한 비구가 있었다. 비사리성(毘舍離城)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을 하다가 몰랐기 때문에 음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무구광이 그 집으로 들어가자, 이때에 음녀는 음심을 내며 생각하였다.
  ‘나 이제 기필코 이 비구와 함께 성교를 해야겠다. 만약 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죽어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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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서 이내 문을 닫으면서 비구에게 말하였다.
  ‘존자께서는 함께 성교를 하십시다. 만약 저의 뜻을 따르지 않으시면 저는 반드시 죽어버리겠습니다.’
  그러자 때에 무구광은 음녀에게 말하였다.
  ‘잠깐 그치시오. 누이여, 나는 지금 이런 일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나는 받들어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이 계율은 깨뜨리지 않겠습니다.’
  그때 음녀는 다시 생각하였다.
  ‘나 이제 주술(呪術)과 약초로써 이 비구가 음행을 하게 해야겠구나.’
  비구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제 당신이 물러나서 계율을 깨뜨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밥이나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가서 그 밥에 주술을 부리고 비구의 발우에 넣어주자 주술의 힘 때문에 이 비구는 바른 생각을 잃게 되면서 차츰차츰 음심이 왕성하여졌다. 그 때 음녀는 이 비구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이내 나아가 손을 끌어와서 함께 성교를 하였다. 이때 비구는 그 음녀와 함께 서로가 즐기다가 음행이 끝나자, 걸식한 밥을 가지고 정사로 돌아왔다.
  정사에 돌아와서는 크게 뉘우치면서 온 몸에 번열(煩熱)이 생기고 답답해지자 생각하였다.
  ‘쯧쯧, 어찌하여 큰 계율 몸을 깨뜨렸느냐. 나는 이제부터는 남의 보시는 받지 말아야겠다. 나는 지금 파계한 사람이다. 장차 지옥에 떨어지리라.’
  그리하여 이때에 무구광은 청정한 행[梵行]을 같이하던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제 파계하였으므로 사문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옥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러자 여러 비구들은 무구광에게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계를 하셨습니까?’
  무구광은 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때에 여러 동학(同學)들은 무구광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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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진이여, 아셔야 하시리라. 여기에는 문수사리보살마하살이 계십니다. 무생법인을 얻었으므로 파계한 죄를 잘 없애 줄 수도 있고 중생들에게 모든 번뇌[蓋纏]를 여의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이제 당신과 함께 문수사리보살마하살에게로 가서 당신의 근심과 뉘우침을 없애주겠습니다.’
  이때에 무구광은 일부러 밥도 먹지 않고 여러 비구들과 함께 문수사리 법왕자에게로 가서 문안하고 공양 공경하고 이내 위의 일을 말하였다. 문수사리는 무구광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식사나 하라. 식사한 뒤에 함께 여래에게로 가서 여래께 이 일을 물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같이 받아 지녀야 하리라.’
  비구는 식사가 끝나자 문수사리와 함께 부처님에게로 가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아 있었다. 그 때 무구광 비구가 두려워하면서 감히 부처님께 묻지 못하자 이에 문수사리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매만지고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위의 일을 세존께 자세히 아뢰었다.
  이 때 세존께서는 무구광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실제로 그러했느냐?’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본래 마음이 있어서 음행을 범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 본래 마음이 없었는데 어떻게 범했느냐?’
  ‘제가 나중에는 음심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비구는 마음으로 음행을 범했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마음이 더럽기 때문에 중생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이 깨끗해진다고 말하지 않더냐?’
  ‘그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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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일찍이 꿈속에서 성교할 때에 마음으로 깨달아 알았더냐?’
  ‘깨달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 그에게 음행을 범했거늘, 어찌 마음으로 깨달아 안 것이 아니라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구가 깼을 때와 꿈꿀 때에 범한 음행에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깼을 때와 꿈꿀 때에 범한 음행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먼저 온갖 법은 모두가 꿈과 같다고 말하지 않더냐?’
  ‘그러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꿈과 같은 모든 법이 이는 진실한 것이냐?’ ‘진실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깨었을 때와 꿈꿀 때의 두 마음이 다 같이 진실이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이는 법이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있는 바가 없다면 남이 있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법에 남이 없다면, 없어짐이 있고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다고 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이 없는 법이라 오히려 아무 것도 없는데 장차 세 가지 나쁜 길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그리고 다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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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은 본래 성품이 청정하다. 그러나 모든 범부가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법이 없음을 사실대로 모르기 때문에 망령되이 분별을 내며, 분별하기 때문에 세 가지 나쁜 길에 떨어지느니라.’
  다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실제가 없는데도 갖가지 해야 할 일을 나타냄은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집착한 범부들 때문이며, 모든 법을 분별함도 사실대로 모르기 때문이니, 이것은 진실이 아니니라.’
  다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거짓임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꿈과 같되 본래 성품이 자재함은 청정함에 이르렀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마지막임은 마치 물속의 달과 물거품 따위와 같기 때문이요, 모든 법이 고요함은 늙고ㆍ병들고ㆍ죽음의 여러 허물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취할 것 없음은 이것이 물질 법이 아니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무더기가 없음은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요, 모든 법에 성품이 없음은 모든 성품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심히 깊음은 허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요 모든 법이 광대함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 지을 바가 없음은 마침내 고요하기 때문이요 법에 의지할 바 없음은 경계가 공(空)하기 때문이며, 법에 근본이 없음은 필경에는 공이기 때문이요 법이 번뇌[蓋纏]를 여읨은 번뇌와 결사(結使)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법이 왕성함을 여읨은 성품이 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하시자, 그 때에 무구광은 이 설법을 듣고 마음에 기쁨이 생기면서 슬픔과 기쁨이 섞여 눈물을 흘리며 합장하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자세히 보다가 이 네 게송으로 말하였다.
  ‘쾌합니다. 세존의 큰 공덕이시여/하늘과 세간 사람들의 귀의할 곳이오며/온갖 훌륭한 법 잘 깨달으셔서/모든 고행 능히 끊으신 이께 머리 조아리나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에 무구광불(無垢光佛)이 계셨느니라. 때에 용시(勇施)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난승성(難勝城)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을 하다가 장자의 집에 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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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았다. 그 집에는 딸이 있었고 용모가 단정하였는데, 용시를 보자마자 연심을 품고 병을 핑계대어 용시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그 뒤부터 용시는 자주 자주 그의 집에 갔었고 차츰차츰 서로가 친하여졌으며 자주 서로가 만났으므로 바른 생각을 잃고 음심을 내어 이내 그 여인과 함께 음행을 하였느니라.
  그는 마음에 탐착하여 왕래가 잦았고, 때에 그 여인의 남편은 이 비구가 자주 왕래함을 보고 마음에 의심과 성을 내면서 이내 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용시 비구는 이런 사실을 듣고 나서 곧 독약을 가져다 그 여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를 생각하겠다면 이 약을 가져다가 당신 남편을 살해하십시오>라고 하자, 그 때 장자의 딸은 이내 독약을 밥 속에다 섞어 놓고 그의 여종을 시켜 그 밥을 가져다 그의 남편에게 주게 하였으므로 그의 남편은 밥을 먹은 뒤에 바로 죽었느니라.
  그 때 용시는 그가 죽었음을 듣고 마음에 크게 뉘우치면서 생각하기를 지금 내가 한 일은 아주 중한 죄악이다. 어떻게 비구라 하겠느냐, 음행을 하고 게다가 사람의 생명까지 끊었으니, 나는 이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고 하고,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가 죽으면 나쁜 길에 떨어질 터인데 누가 나의 이런 고통을 면해 줄 수 있을꼬> 하고, 이런 일 때문에 한 정사로부터 다른 한 정사까지 두려워하며 내달리는데 옷이 땅에 떨어지므로, 아, 괴상하도다. 나야말로 이제 지옥 중생이로구나>고 하였느니라.
  때에 해무(醢無)라는 정사가 있었고, 거기에는 비국다라(鼻掬多羅)라는 보살이 있었다. 용시 비구는 이내 그의 방으로 들어가 온 몸을 땅에 던졌다. 때에 그 보살은 용시에게 물었다. 엇 때문에 몸을 땅에다 던집니까?> 는 지금 바로 지옥 중생입니다.> 또 다시 물었다. 가 당신을 지옥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까?> 용시는 대답하였다. 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음행을 범하였고 또 사람의 생명까지 끊었습니다> 때에 그 보살은 용시에게 말하기를 구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이제 함께 그대에게 두려움 없음[無畏]을 베풀겠소>고 하였느니라.
  그 때 용시는 그 보살이 두려움 없음을 베풀겠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한없이 기뻐 날뛰었다. 그 때 비국다라보살은 즉시 땅에서 용시를 잡아 일으켜 그의 오른손을 끌고 다른 데로 데리고 가서 숲 속으로 가 앉았다. 때에 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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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라보살은 즉시 모든 부처님 경계요, 대승의 묘한 문인 여래의 보인 삼매(寶印三昧)에 들어갔다. 삼매에 들자마자 이내 그의 몸 위에서는 한량없는 부처님 몸이 나왔고 모두가 금빛의 32상(相)인데 숲 사이에 두루하였느니라.
  그 때 모든 부처님께서는 즉시 소리를 같이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든 법은 거울의 형상과 같고/또한 물 속의 달과도 같거늘/범부의 어리석고 미혹된 마음으로/어리석음ㆍ성냄ㆍ탐냄을 분별한다.
  모든 법은 언제나 모양이 없고/고요하여 근본이 없는 것이요/그지없어서 취할 수 없나니/음욕의 성품 또한 그러하니라>고 하셨느니라.
  그 때 숲 속의 2만 천자들로서 비국다라보살에게 와서 법을 들은 이면, 이 게송을 듣자마자 이내 무생법인을 얻었느니라.”
  [문] 묘한 원각의 마음은 이미 아무 것도 없거늘, 무엇 때문에 교중에서는 모든 부처님이 등정각을 이루고 세간에 출현하신다는 등의 일을 설명하는가.
  [답] 첫째 이것은 근기가 성숙된 중생은 제 마음에서 느껴 나타나며, 둘째 이것은 보살의 인지(因地)에서의 본래 서원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광대하고 그지없어서 정식(情識)으로는 알 바가 아니요, 견성해야만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ㆍ응정등각의 경계를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막힘없고 거리낌 없는 지혜로써 온갖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며, 온갖 3세의 경계와 온갖 세계의 경계와 온갖 법의 경계와 온갖 중생의 경계와 진여의 차별 없는 경계와 법계의 장애 없는 경계와 실제(實際)의 끝없는 경계와 허공의 분량 없는 경계와 경계 없음의 경계를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경계니라.
  불자여, 마치 온갖 세간의 경계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의 경계 역시 한량없으며, 마치 온갖 3세의 경계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의 경계 역시 한량없으며, 내지 마치 경계 없음의 경계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 경계 역시 한량없으며, 마치 경계 없음의 경계가 온갖 곳에서도 없는 것처럼 여래의 경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곳에서도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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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마음의 경계가 한량없고 그지없고 속박 없고 해탈 없는 것처럼 여래의 경계 역시 한량없고 그지없고 속박 없고 해탈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한량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범부와 성인은 끝이 없고 마음과 경계는 하나의 근원이며, 지식은 성품이 없으면서 곧 모양으로 밝히고 모양은 체성이 없으면서 진실로 인하여 이룩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지혜 몸은 고요하고 넓어서 온갖 현상으로 체성을 이루고, 만 가지 현상은 모양이 없어서 지혜 몸으로 체성을 같이한다”고 했다.
  또 화현문(化現門) 안에서 논하면,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의 인지에서의 비원(悲願)의 힘이어서 근기가 성숙된 중생으로 하여금 제 마음에서 느껴 나타나게 한다. 중생의 마음 속에는 모든 부처님이 응하여 나타남이 끝이 없고, 모든 부처의 마음 안에는 중생의 기연(機緣)이 그지없다.
  그런 까닭에 법신은 형상이 없되 느낌을 만나면 모습을 이루고, 묘하게 응함은 방소가 없되 생각에 응하여 자취를 드리운다. 평등함을 알아 뭇 소망에 나아감은 마치 마니주와 같고, 사사로움 없음을 통달하여 뭇 기틀에 맡김은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
  옛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란 중생의 마음 속의 부처니/제 근기 따라 감당하며 딴 물건이 없다/온갖 부처의 근원을 알려 하면/제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칠 것이다”라고 했다.
  『불지경(佛地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중생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다투어 보이나니, 평등한 법성이 원만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논(論)에서 해석하기를 “모든 유정이 여래의 색신(色身)을 보려 함에 따라 여래는 이와 같은 색신을 나투어 보이며, 여래는 비록 희론(戱論)이 없는 지위에 계신다 하더라도 평등한 지혜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대원경지(大圓鏡智)와 상응한 깨끗한 의식으로 유리(瑠璃) 등의 미묘한 색신을 나타내어, 모든 유정들의 선근이 성숙되면 제 마음이 변하여 이와 같은 몸의 형상과 같아져서 제 마음의 밖에서 여래의 몸을 보게 한다”고 했다.
  경에서 말한 “모든 여래의 자비와 선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나투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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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가 있어서, 하늘과 사람들의 제 마음이 변하여져서 여래 몸의 금빛 같은 것 등을 보게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교화해야 할 한량없는 유정이 유리와 마니보의 빛깔을 보고자 하면, 여래는 이내 갖가지의 유리와 마니보의 빛깔을 걸림 없이 나투어 보여 그들의 제 마음 역시 그렇게 변하게 한다(더 설명이 이어간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렇게 나투어 보이는 온갖 여래의 형상은 평등하며 이와 같은 평등은 바로 법성이니, 이 때문에 평등한 법성이라 말한다.
  말하자면 모든 여래는 똑같이 교화할 유정들이 색신의 형상을 보려 함에 따라 이내 저마다 같은 처소 같은 시간에 다른 형상들을 나투어 보이어, 그들의 제 마음에서 이와 같이 변하여 나타나 이익과 즐거운 일을 짓게 한다.
  마치 모든 유정들의 아뢰야식이 함께 서로의 종자가 성숙되어 저마다 세계 등의 모양과 같은 처소에서 비슷하게 변하여 나타나되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같으며, 색신의 모양에서처럼 그 밖의 일도 그러하다.
  이 나투어 보임으로 말미암아 앞에서 닦아 익힌 것과 같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평등성지(平等性智)가 원만하게 성취된다.
  『도일체제불계지엄경(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문수사리가 여쭈었다.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는 그 모양은 어떤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바로 이것이 여래니라. 문수사리여, 마치 대지가 유리로 만들어졌으면 제석의 비사연(毘闍延) 궁전과 공양 거리들이 그 속에 그림자로 나타나는데, 염부제 사람들이 유리로 된 땅의 모든 궁전의 그림자를 보고서는 합장하고 공양하고 향을 사르고 꽃을 흩뿌리면서 컨대 저희도 이와 같은 궁전에 나게 하옵시며 저희들도 제석과 같이 유희하게 하여지이다>라고 함과 같으니라. 그 여러 중생들은 이 땅의 이 궁전이 그림자인 줄 모르나니, 보시와 지계로 모든 공덕을 닦았기에 이러한 궁전의 과보를 얻게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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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리여, 이러한 궁전은 실로 나거나 없어짐이 없으며 땅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 속에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니, 그 궁전의 그림자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느니라.
  문수사리여, 중생이 부처님을 보는 것 또한 그와 같아서 그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부처의 몸을 본 것이며, 부처의 몸은 함이 없어서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생기지도 않고 다하지도 아니하며 빛깔도 아니고 빛깔 아님도 아니며 볼 수도 없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세간 아님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고 마음 아님도 아니니라.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여 여래 몸을 보고서는 꽃을 흩뿌리고 향을 사르고 갖가지로 공양하면서 컨대 저희도 이와 같은 색신을 얻어지이다>라고 하나니, 보시와 지계로 모든 공덕을 지어야 여래의 미묘한 몸을 얻게 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문수사리여, 여래가 신력으로 세간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큰 이익을 얻게 함은, 마치 그림자와 같고 마치 형상과 같이 중생들의 보는 것을 따르느니라.’”
  또 햇빛이 마음 없이 널리 비춘다는 비유와 마니주가 마음 없이 보배를 비 내린다는 비유와 골짜기의 메아리가 진실이 없다는 비유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고, 그 유리의 땅은 중생의 마음에 비유하고 그림자는 부처의 몸으로 비유하셨다.
  또 『화엄경』에서 마니주가 따라 비치는 비유가 있는데, 마니주가 나타내는 빛깔은 자수용신(自受用身)에는 그의 본 빛깔이 있어서 청색ㆍ황색 등의 다름이 없지만 청색ㆍ황색 등의 다름은 근기를 따라 비쳐 생길 뿐이라는 것에 비유했다.
  또 허공을 부처의 몸에 비유한 것은 곧 법성신(法性身)이니, 허공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방향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있지 아니하며, 법신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보신ㆍ화신에 의하면서 세밀함과 거칠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화엄의 「십정품(十定品)」에 이르기를 “불자여, 마치 허공이 벌레에 먹힌다는 것과 겨자씨 구멍 속은 줄어지거나 작아지지도 않는다는 것과 수없는 세계 안이 또한 더욱 넓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 모든 부처님 몸도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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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아서 큰 것으로 볼 적에도 늘어나는 바가 없고 작은 것으로 볼 때에도 줄어드는 바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다.
  위의 여러 비유는 모두가 부처님을 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거울에서의 형상의 비유가 가장 적절하다.
  마치 형질이 와서 거울에 마주 대하면 거울 속에서는 형상이 보이되 그 형상은 형질의 형상인 것처럼, 근기의 느낌이 세계에 마주 대하면 세계 속에서는 부처님이 보이되 그 부처님은 바로 마음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화신불은 공경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또 여러 가지 비유의 대의(大意)는 모두가 체성에 생멸이 없고 생멸에 거리끼지 않는 것이니, 마치 빛깔이 아닌 체성에서 보거나 빛깔이 아님이 없는 작용에서 보면 법보(法報)가 같고 체성과 작용이 차별 없는 것 같아서 모두가 무생(無生)에 모이고 똑같이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또 만약 빛과 소리로써 취하면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요, 만약 빛과 소리를 여의고 취하면 아주 없음[斷無]을 면하지 못한다.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아서 ‘빛깔 있는 몸은 부처가 아니요/음성 또한 그러하거니와/또한 빛과 소리 여의지 않고/부처의 신통을 나타낸다 하니라’”고 했다.
  만약 권교(權敎)에 의하면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네 글귀가 체성과 작용이 모두 분간되지만 만약 이 종(宗)의 의하면 네 글귀 모두가 작용이니,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임을 알기 때문이다. 본질과 영상 또한 이것은 제 마음이니, 가로나 세로에서의 온갖 법이 심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반야(般若) 중에서, ‘빛이 바로 반야임을 안다’고 하며 모든 법에 차례를 매기는 것과 같다. 이는 또 처음에 매긴 5온(蘊)에서 ‘빛은 바로 반야임을 안다’고 하여 온갖 법이 빛으로 향하였으나 빛조차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거나 향함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자세히 차례를 매긴 모든 법도 모두가 그러하다.
  반야의 뜻이 모든 법의 성품에 해당할 때에 빛의 성품과 다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모두가 빛으로 향하나 빛은 얻을 수 없으며, 법성은 공(空)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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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하여 이미 향할 데가 없거늘 어찌 능히 향함[能越]이 있겠는가.
  만약 지자(智者)의 뜻이라면, ‘온갖 법이 물질인 것은 가관(假觀)이요, 물질도 오히려 얻지 못한 것은 공관(空觀)이요, 어떻게 향함과 향함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 함은 곧 중도관(中道觀)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 첫 글귀만을 요약하건대, 물질의 성품을 취함은 모든 법의 의(依)가 되고 성품으로 널리 거두기 때문에 모두가 물질로 향하면 온갖 물질 안에 온갖 법이 갖추어지는 뜻이기 때문이요, 하나의 법이 모두 법계를 거두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이행할 수 있으면, 보고 듣는 모든 경계가 바로 부처가 세간에 출현함이 아님이 없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그 때 대중 안에 혜취(慧聚)보살이 있다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 세간에 출현하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출현이요, 무명과 욕망이 출현하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출현이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출현하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출현이요, 온갖 의심 그물과 번뇌가 출현하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출현이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이러한 법이 세간에 출현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무슨 일로 세간에 출현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선남자여, 실로 말한 바와 같으니라.’
  그때 해혜(海慧)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와 같은 법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때에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겠습니까, 세간에 출현하지 않겠습니까?’
  ‘선남자여, 보살이 처음 보리 마음을 냈을 때에 진실로 이러한 법들을 모르나니, 그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펴서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에게는 네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처음 보리 마음을 내는 이요, 둘째는 보리의 도를 수행하는 이요, 셋째는 견고하여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요, 넷째는 일생보처이니라.
  발심한 보살은 부처의 색상을 보고, 보고 나서는 이내 보리의 마음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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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수행하는 보살은 부처의 두루 갖춘 온갖 착한 법을 보고, 보고 나서는 이내 보리 마음을 내며, 물러나지 않는 보살은 여래의 몸과 온갖 법이 모두 다 평등함을 보며, 일생보처보살은 여래의 온갖 공덕과 온갖 법을 보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얻은 바 지혜눈이 환하고 깨끗하기 때문이요, 두 가지 소견을 끊었기 때문이요, 지혜가 깨끗하기 때문이니라. 만약 깨끗함도 보지 않고 깨끗하지 않음도 보지 아니하며 깨끗함이 아니거나 깨끗하지 않음도 아닌 것을 보지 아니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분명하게 여래를 볼 수 있느니라.’”
  또 고덕이 천태교의 지관(止觀)을 해석하기를 “한 생각의 제 마음이 바로 법계인 줄 통달하기만 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똑같이 하나의 머무름이 없고 본래 하나의 법계로서 몸이 되고 국토가 되나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으며 근원도 없고 머[문]데도 없으며 닦거나 닦지 않을 것도 없고 증득하거나 증득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거늘, 다만 중생들이 스스로가 망상으로 속박된 범부라 닦지도 않고 증득하지도 않았다 말하며 부처도 성인이어서 닦고 증득하였다 말할 뿐이니, 닦음과 증득함과 범부와 성인은 중생 스스로가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요 부처의 지위 안에는 도무지 이런 이름이 없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들에게 보인 바 범부ㆍ성인의 몸은 바로 부처의 법신이요 온갖 국토가 바로 부처의 국토요 온갖 법이 바로 부처의 법이요 온갖 마음이 바로 한 마음이어서, 시방 3세의 끝까지 추구하여도 털끝만큼의 것도 없고 빛깔이거나 마음이거나 간에 보이지 아니한다.
  부처의 본체와 지혜 경계는 환하여 법계에 두루하며 일찍이 하나의 일도 없고 조용하여 몸과 마음으로 하는 바도 없다. 부처 마음이 이미 그러하므로 내가 부처 지혜를 배우는 것은 마치 부처의 용심(用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곧 지관이 밝고 고요해진다”고 했다.
  부처가 나타남은 바로 나의 마음의 나타남이어서 나타남과 나타나지 아니함은 다만 자기 마음 거울 위의 영상일 뿐이다.
  [문] 도무지 그 외에서는 부처님을 볼 수 없는 것인가.
  [답] 자기와 남이 둘이 없고 여래에게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있을 뿐이다. 중생에게 훈습의 힘이 있어서 동체의 지혜 거울을 두드리면, 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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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따라 상호(相好)가 거울 속의 형상으로 느껴 보인다. 그러나 거울을 여의지 않은 것이로되 곧 거울이 비춤을 따라 곱고 추한 것과는 다르다.
  느끼는 이가 천 가지 차별이라 몸매 또한 만 가지다. 혹은 근기의 땅이 깊고 두껍기도 하며, 혹은 부처의 키가 천만 유순에 수명은 한량없는 아승기겁이요 항하 모래만큼 세계의 작은 티끌 수의 부처의 국토가 깨끗하고 묘한 국토가 되어서 한량없고 그지없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법문을 말하기도 하며, 혹은 인간과 천상의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여덟 가지 모양을 나투어 보이되 한 동안의 이익이 불과 수백 년이기도 하나니, 마치 허공의 구름과 물속의 달과 같이 황홀하게 생기는 이 모두는 느끼는 이의 한 생각의 마음으로 말미암는다.
  말하자면 부처의 색신이 와서 응하되 부처는 실로 가고 오는 수고가 없고 형상이 있을 근심도 없으며 말해야 할 법도 없고 제도해야 할 근기도 없나니, 다만 중생들의 착한 인연과 마음의 생각일 뿐이다. 부처가 와서 응하면서 나를 위하여 설법한다 함은, 실로 중생의 제 마음 위에서 이런 모양이 나타나는 것일 따름이다.
  [문] 중생의 선근이 부처의 크고 뚜렷한 지혜 거울[大圓智鏡]을 두드려서 이런 영상이 나타난다면, 영상은 부처에 속하는가.
  [답] 밝은 거울은 부처에 속하지만 영상은 부처에 속하지 아니한다. 영상이 만약 부처에 속한다면 부처는 곧 생멸하고 유동할 것이며, 영상이 만약 중생에 속한다면 중생의 업결(業結)이 속박할 터인데 어찌 이런 상호를 갖출 수 있겠는가. 다만 감응해서 도(道)가 교섭해야 비로소 이런 것이 보일 뿐이다.
  [문] 이것이 부처의 지혜 거울 위의 영상이라면 어찌하여 중생의 마음 위에서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답] 체성이 같은 뚜렷한 거울은 치우치지 아니하여서 부처와 중생에게 속하는 동일한 체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이 닦아가는 자기의 거울이 아직은 온전한 광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잠깐 이런 모양이 나타나서 닦아 나아가는 힘을 표시할 뿐이다.
  [문] 만약 그렇게 중생 스스로가 느끼게 되는 마음 거울 위의 나타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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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라면 부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말하지 못하리니, 부처는 곧 중생에 있어서 힘이 없으므로 헛되이 공경하고 사모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답]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느껴서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부처의 힘이거늘 어찌 중생으로서야 그만둘 수 있겠는가.
  [문] 이것 또한 중생 자신의 부처의 힘이라, 다른 부처의 힘이 아니리라.
  [답] 부처의 자리는 자기거나 남이 없다. 그대가 억지로 자신의 부처요 다른 부처라고 말한다면, 중생의 마음이 다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다만 다 같이 하나의 부처가 될 뿐이니, 저마다 스스로 이룰 수가 없다.
  [답] 다 같이 하나의 부처로 되지도 못하고 저마다 스스로 이루어지지도 아니한다. 이 이치는 알기 어렵다.
  아무렇게나 비유를 들어보자. 마치 국청사(國淸寺)는 법계요, 절에 사는 승려는 옛 부처며, 먼 데 사람이 잠시 와 있음은 잠깐 동안 부처를 느끼는 것이다. 뒷날에 좋아하여 머리를 깎고 절에 와 있게 되면 나의 절이 되며, 다섯 봉우리와 송경대(松徑臺)와 전각ㆍ방실ㆍ행랑 등은 모두 나의 소유여서, 단박에 수용하게 되어도 다른 물건들은 줄어들지 아니하고 나의 집이 되며, 사람마다 따로 하나의 절을 짓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하나의 절을 나누어 가지 아니하는데, 나누면 사람들을 따라가겠지만 언제나 법계에 머물면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이치는 『열반경(涅槃經)』 안에서도 나온다. 마치 길에 하나의 큰 나무가 있어서 나무의 그늘은 맑고도 시원한데, 오는 이들을 이내 받아들이면서 막거나 지키는 사람도 없고 가져가는 이도 없는 것과 같다. 이미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이니, 받들어 지녀야 한다.
  또 기응(機應)이 서로가 관여하고 감응의 인연이 만나면 온갖 끝없는 부처의 일을 볼 수 있다. 부처는 바로 증상연(增上緣)으로서 광대한 비원과 인자하고 선근의 힘이며, 중생은 바로 등류과(等流果)로서 지극한 정성으로 느끼는 바요 근기가 성숙하면 보게 된다. 그러니 모두가 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마치 사자가 손가락에서 나타나자 취한 코끼리들이 발에 예배하고[獅子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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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指醉象禮足], 인자한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고[慈母遇子], 눈먼 도둑들이 광명을 찾고[盲賊得明], 성이 변하여 유리가 되고[城變瑠璃], 돌을 허공에다 들어 올리고[石擧空界], 석씨 여인들의 상처가 아물고[釋女瘡合], 조달의 병이 낫는[調達病痊] 등의 일 모두가 이는 본사(本師)가 오랜 겁 동안 인자하고 선근의 힘을 훈습하고 닦아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제 마음에서 보이게 하신 것이다.
  위와 같은 일들을 이제 경의 글로써 증명하겠다.
  그러므로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아사세왕(阿闍世王)을 시켜 여래를 해치려는 것과 같으니라. 이 때 나는 왕사(王舍)의 큰 성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을 하는데, 아사세왕이 이내 재물을 지키는 취한 코끼리들을 놓아 나와 여러 제자들을 해치게 하려 하였다. 내지 나는 그 때에 재물지기인 코끼리들을 항복시키려고 이내 자정(慈定)에 들어가 손을 펴 보이면서 다섯 손가락에서 다섯 마리의 사자가 나오게 하자, 이 코끼리들은 보고 두려워서 똥을 누면서 온 몸을 쭈그리며 나의 발에 절을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나의 그 때 다섯 손가락 끝에는 실로 사자가 없었으며, 이것은 인자하고 선근의 힘 때문에 그들이 조복되게 하였느니라.
  또 선남자야, 내가 열반하려고 구시나성(拘尸那城)을 향해 가기 시작하였더니, 5백의 역사(力士)들이 그 가운데 있는 길을 편편하게 만들고 쓸고 뿌리고 하였느니라. 그 길 가운데에 있던 하나의 돌을 여럿이 들어서 버리려고 힘을 다하였으나 해내지 못하므로, 내가 그 때에 가엾이 여기어 이내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서 그 여러 역사들에게 내가 엄지발가락으로 이 큰 돌을 허공에 던져 놓았다가 다시 손으로 잡아서 오른 손바닥에다 놓고 입으로 불어서 가루가 되게 하고서 도로 뭉쳐 만들어 놓은 것을 보게 하여 그 역사들로 하여금 뽐내는 마음을 쉬게 하고는, 이내 그들을 위하여 간략하게 갖가지 법요를 해설하여 그들이 다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게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여래는 그 때에 실로 발가락으로써 이 큰 돌을 허공에 던졌다가 다시 오른 손바닥에다 놓고 불어서 가루가 되게 하고 다시 본래대로 뭉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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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하지 않았느니라. 선남자야, 바로 이것은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역사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이 남천축(南天竺)에 수파라(首波羅)라는 하나의 큰 성이 있었고 이 성 안에는 노지 장자(盧至長者)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는데, 이미 과거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여러 착함의 근본을 심었었느니라.
  선남자야, 그 큰 성안의 모든 인민들은 삿된 도를 신앙하여 니건(尼乾)을 받들어 섬겼으므로 나는 때에 그 장자를 제도하려고 왕사성으로부터 그 성읍으로 가면서 그 길의 중간 65유순이 떨어진 데서부터 걸어서 갔었으니, 그것은 그 사람들을 제도하려 했기 때문이니라. 그 여러 니건들은 내가 수파라성으로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 생각하기를 [문]구담(瞿曇)이 만약 여기로 오면 이 여러 인민들은 이내 우리들을 버리고 다시는 공급하지 않아 우리들은 굶게 될 터인데,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하고, 니건의 무리들은 저마다 흩어져서 그 성 인민들에게 말하기를 [문]구담이 지금 여기에 오려 한다. 그리고 그 사문은 부모조차 버리고 이리저리 내달아 다니는데, 이르는 데마다 토지와 곡식이 익지 않게 하므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죽는 이들이 많으며 질병과 야윔이 서로 찾아드나 구제함이 없다. 구담은 교활하여 거짓이 많고 순전히 악한 나찰 귀신들을 거느려 시종을 삼으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 와서 물으면 그들을 제자로 삼고 있다. 가르치는 바는 순전히 헛된 것을 말하므로 그가 이르는 데마다 처음부터 안락함이 없다>라고 하였으므로, 그 사람들은 듣고 이내 두려워하면서 머리 조아려 니건들의 발에 경례하며 아뢰었다. 스승이시여, 저희들은 이제 어떤 계책을 세워야겠습니까?> 그러자 니건들은 대답하기를 [문]구담은 본성이 우거진 숲이거나 흐르는 샘이며 맑은 물들을 좋아하고 있으므로, 바깥에 그런 것들이 있다면 파괴하여야 됩니다. 그대들은 서로가 함께 성을 나가서 그런 것이 있는 곳은 모조리 베어 없애고 흐르는 샘이나 못에는 모두 쓰레기를 집어넣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저마다 무장을 하고 벽에 붙어서 굳게 지키다가 그가 만일 오거든 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니, 오지 못하게만 하면 그대들은 안온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갖가지의 도술을 부려 그 구담을 도로 돌아가게 하겠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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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였다. 그 여러 인민들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할 것을 응락하고는 나무를 베어버리고 모든 물을 더럽혀 놓고 무장을 하고서 굳게 지키고 있었느니라.
  선남자야, 내가 그 때에 그 성에 이르러 보매 온갖 수목과 우거진 숲은 보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벽에 붙어서 지키고 있음만을 보고는 이내 가엾이 여기면서 인자한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쳐다보자, 모든 수목은 다시 본래대로 났고 다시 그 밖의 나무들도 헤아릴 수 없이 생장하였으며, 강물과 못ㆍ우물들의 물도 깨끗하여지며 그 속에 가득히 차면서 마치 푸른 유리씨 같았고, 여러 가지 꽃들이 나서 그 위를 가득히 덮었으며, 그 성벽은 감색 유리로 변하면서 인민들이 모두 나와 대중들을 환히 보게 되었고, 문은 저절로 열려져서 제지할 수 없었으며, 무장했던 병기들은 여러 가지 꽃으로 변하여졌느니라. 노지 장자가 우두머리가 되어서 그 인민들과 함께 서로가 따르면서 나에게로 왔으므로, 나는 이내 그들을 위하여 갖가지 법요를 해설하여 그 여러 인민들로 하여금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그 때에 실로 여러 가지 수목과 깨끗한 물이 강물 또는 못에 가득 차도록 변화시켰거나 그 본래의 성이 감색 유리로 변하도록 하여 그 백성들이 나를 환히 보며 그 성문이 열리고 무기가 꽃으로 되게 하지는 않았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인민들에게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사위성(舍衛城) 안에 바라[문]여인으로 바사타(婆私吒)라는 이가 있었다. 외아들이 있었는데 애지중지하던 터에 병이 들어 죽어버렸느니라. 그 때 여인은 몹시 근심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서는 정신을 잃고 벌거숭이로 부끄러워함도 없이 네거리를 돌아다니며 통곡을 하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면서 의 아들은 어디로 갔는고>라고 하며, 성읍을 두루 다니면서도 지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이미 과거의 부처님에게 뭇 덕의 근본을 심었었느니라.
  선남자야, 내가 이 여인에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자, 이때에 여인이 나를 보자마자 제 아들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본래 마음으로 되돌아와서는 나와서 나의 몸을 안고 슬퍼하며 나의 입을 맞췄느니라. 나는 이때에 이내 시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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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에게 는 옷을 가져다 이 여인에게 주어라>고 하여 옷을 입힌 뒤에 그를 위하여 갖가지로 여러 법요를 해설하였더니, 이 여인은 법을 듣고 기뻐 날뛰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었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그 때에 실은 그의 아들이 아니고 그녀도 나의 어머니가 아니며 또한 안음도 없었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여인에게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바라내성(波羅奈城)에 마하사라달다(摩訶斯羅達多)라는 우바이가 있었는데, 이미 과거의 무량광불(無量光佛)에게 여러 선근을 심었었느니라. 이 우바이가 여름 90일 동안 뭇 대중들을 청하여 의약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때에 대중 안의 어느 한 비구가 몸에 중병이 걸렸었다. 뛰어난 의사에게 진찰시켰더니 사람 살을 먹어야 했었으며, 만약 살을 먹게 되면 병이 나을 수 있지만 살을 먹지 못하면 죽게 되어 있었느니라. 이때에 우바이는 의사의 이 말을 듣고 이내 황금을 가지고는 시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외치기를 가 살을 파시겠습니까? 나는 금으로 사겠으며, 만약 살이 있다면 그 양만큼 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구할 수 없었다. 이 우바이가 이내 자신이 칼을 가져다 그의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서 저미어 고깃국을 끓여서는 여러 가지 양념을 하여 병든 비구에게 보냈더니, 비구는 그것을 먹고 병이 이내 나았느니라. 이 우바이는 상처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으므로 이내 소리를 내어 무 불타 나무 불타>라고 하였다. 나는 그 때에 사위성에 있으면서 그의 음성을 듣고 이 여인에게 큰 인자한 마음을 일으켰으며, 이 여인은 내가 좋은 약을 가져다 그 상처 위에 바르자 도로 본래대로 아[문]것을 보았으며, 나는 이내 그를 위하여 갖가지로 설법하자 설법을 듣고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었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그 때에 실로 바라내성으로 갔거나 약을 가져다 이 우바이의 상처에 바르거나 하지 않았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조달이란 악인이 탐내어 만족할 줄 모르고 소(酥)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배가 불러서 큰 괴로움을 받다가 견딜 수 없자 말하기를 무 불타, 나무 불타>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때에 우선니성(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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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尼城)에 있다가 그의 음성을 듣고 이내 인자한 마음을 내었다. 그 때에 조달은 내가 그에게로 가서 손으로 머리와 배를 만지고 염탕(鹽湯)을 주어서 그에게 먹게 하는 것을 보고 먹은 뒤에 나았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실로 조달에게로 가서 그의 머리와 배를 만졌거나 염탕을 주어서 먹게 하지는 않았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조달에게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교살라국(憍薩羅國)에 도둑 떼들이 있었다. 그 수는 5백이나 되었고 떼를 지어 도둑질을 하였으므로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바사닉왕(波斯匿王)은 그들의 횡포를 근심하여 병사들을 보내어 엿보다가 붙잡으면 눈을 도려 파내고서는 흑사(黑闍)라는 우거진 숲 아래에다 내쫓아 두었느니라. 이 떼도둑들은 이미 먼저의 부처님에게서 뭇 덕의 근본을 심었었는지라 눈을 잃은 뒤에 큰 괴로움을 받게 되자 저마다 말하기를 무 불타, 나무 불타. 저희들을 지금 구호해줄 이가 없나이다> 하면서 슬피 울부짖었으므로, 내가 때에 기원정사에 있으면서 그들의 음성을 듣고 이내 인자한 마음을 내었으며, 이 때에 서늘한 바람이 향산(香山) 속에서 불어오면서 갖가지 향기로운 약을 그들의 눈자위에 가득 채워 주었으므로 이내 다시 본래의 눈들을 되찾았고 도둑들이 눈을 뜨고는 여래가 그들의 앞에 서 있으면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았으며, 법을 듣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었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그 때에 실로 향산 속에서 갖가지 향기로운 약의 바람을 불게 하였거나 그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거나 하지 않았었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떼도둑들에게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유리 태자(瑠璃太子)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 부왕을 폐하고 자신이 임금이 되었고, 또 옛날의 혐의로 많은 석씨 종족을 해치면서 만 2천의 석씨 여인들을 잡아다가 눈과 귀를 자르고 손발을 절단하고는 구덩이에다 처넣었다. 때에 여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말하기를 무 불타, 나무 불타. 저희들을 지금 구호해줄 이가 없사옵니다> 하면서 다시 크게 울부짖었느니라. 그 여인들은 이미 먼저의 부처님에게서 여러 선근을 심었으므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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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그 때에 죽림(竹林) 중에 있으면서 그들의 음성을 듣고 이내 인자한 마음을 내었으며, 그 여인들은 그 때에 내가 가비라성으로 와서 물로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르는 것을 보고 고통이 이내 없어지면서 귀ㆍ코ㆍ손발이 본래대로 회복되었다. 나는 때에 바로 그들을 위하여 간략하게 법요를 말하여 모두가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게 하자 대애도(大愛道) 비구니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었느니라.
  선남자야, 여래는 그 때에 가비라성으로 갔었거나 물로 상처를 씻고 약을 발라 주어 고통을 그치게 하지는 않았었느니라. 선남자야,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선근의 힘으로 그 여인들로 하여금 이런 일을 보게 한 것인 줄 알아야 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마음 또한 그와 같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이치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자사유(慈思惟)를 닦는 것이니, 바로 이는 진실이요 허망한 것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한량없다 하면 불가사의한 것이니, 보살이 행한 바도 불가사의요 모든 부처님이 행한 바도 불가사의며 이 대승 경전인 대열반경 또한 불가사의니라.’”
  이 분명한 글로써 진실한 증거를 삼을 수 있으니, 3계(界)와 9유(有), 온갖 더럽거나 깨끗한 법들이 모두가 법계의 중생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마치 화가가 온갖 경계를 그려내는 것처럼 마음의 화가 역시 그와 같다.
  그런 까닭에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저 비구는 이렇게 관찰하되 ‘어떻게 중생에게 갖가지의 빛깔과 갖가지의 형상이 있고 갖가지의 도(道)와 갖가지의 의지(依止)가 있는 것일까’ 하며, 또 ‘갖가지의 마음과 갖가지의 의지와 갖가지의 신해(信解)가 있으며, 갖가지의 업(業)이 있는가’를 관찰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빛깔과 갖가지의 형상과 갖가지의 도와 갖가지의 의지는, 마치 슬기롭고 솜씨 좋은 화가거나 그의 제자들이 좋고 편편하고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좋은 바탕을 관찰하여 이 바탕을 얻은 뒤에는 갖가지의 채색과 갖가지의 여러 가지의 빛깔들을 곱거나 밉거나 간에 마음대로 그의 형상같이 그리게 되는 것처럼 마음업[心業]의 화가와 그의 제자들도 그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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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좋고 편편하고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업 과보의 땅과 생사의 지경을 그가 이해한 바대로 갖가지의 형상과 갖가지의 도와 갖가지의 의지를 짓는다. 그러므로 마음 업의 화가는 업으로 중생이 된다.
  또 모든 채색에서 백색을 가져다 희게 만들고 적색을 가져다 붉게 만들며 황색을 가져다 누렇게 만들고 암흑색[鴿色]을 가져다 암흑색으로 만들며 흑색을 가져다 검게 만드는데, 마음 업의 화가도 그와 같아서 흰 것을 반연하여 흰 것을 취하면 하늘과 인간 안에서는 백색을 이루나니, 무슨 뜻으로 희다 하느냐 하면, 욕심 등의 번뇌의 때가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에 백색이라 한다.
  또 다시 그와 같아서 마음 업의 화가가 붉은 채색을 취하면 하늘과 인간 안에서는 적색이 되나니, 무슨 뜻으로 붉다 하느냐 하면 이른바 소리ㆍ맛ㆍ감촉ㆍ냄새의 빛을 사랑하여 관찰의 옷[觀察衣]을 그린다.
  또 다시 그와 같아서, 마음 업의 화가가 노랑 채색을 취하면 축생의 길에서 황색이 되나니, 무슨 뜻으로 누렇다 하느냐 하면 피차가 서로서로 피를 마시고 살을 씹어 먹으며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서로서로 살해하기 때문에 황색이라 한다.
  또 다시 그와 같아서 마음 업의 화가가 암흑의 채색을 취하면 반연과 관찰로 아귀의 길에서 암흑색이 된다. 무슨 뜻으로 암흑이라 하느냐 하면 그 몸이 마치 불에 탄 나무와 같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갖가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마음 업의 화가가 시새움의 마음에 붙잡히고 어리석음에 덮여서 그러한 것이다.
  또 다시 그와 같아서 마음 업의 화가가 검은 채색을 취하면 지옥 중에서 흑색을 그리게 되나니, 무슨 뜻으로 검다 하느냐 하면 흑업(黑業) 때문에 지옥 안에 나서 검은 철벽에 타고 속박을 당하였기 때문에 흑색의 몸이 되고 갖가지 병에 걸리며 배고픔과 목마름이 몸을 저미고 한량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모두가 자기가 지은 업이요 다른 이가 짓는 것이 아니다.
  또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세 가지 세계와 다섯 갈래의 다섯 가지 채색이며 나고 죽는 그림 옷을 자세히 살핀다.
  세 가지 땅에 머무름은 욕계지와 색계지와 무색계지를 말한다. 마음 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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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가 음욕을 가까이 익히면 욕계의 갖가지 색의 그림을 반연하게 되며, 색을 반연하는 의지(依止)는 스무 가지가 있다. 욕심을 여읜 4선(禪)을 화필(畵筆)로 삼아 열여섯의 자리를 의지하는 것이니, 이는 그릴 바의 처소로서 색계가 된다. 색계를 반연한 삼마발제(三摩跋提)를 여의고 무색계를 반연하여 4처(處)를 그리게 된다. 마음의 화가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세계의 큰 옷을 널리 그린다.
  또 그 비구는 이와 같은 마음 업의 화가의 몸은 채색의 그릇과 같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은 단단한 것으로 삼으며 반연하는 마음은 사다리의 층계와 같고 감관은 화필과 같으며 바깥 모든 경계의 소리ㆍ감촉ㆍ맛ㆍ빛깔과 모든 냄새 등은 마치 갖가지의 채색과 같고 생사는 땅과 같으며, 지혜는 광명과 같고 부지런히 정진함은 손과 같으며 중생은 그림과 같고 신통은 저 한량없는 모양의 옷과 같으며 한량없는 업이 있어서 과보가 생김은 마치 그림이 완성된 것과 같은 줄 관찰한다.
  또 그 비구의 선정에 의하여 마음 업의 화가에게는 다른 종류의 법이 있다. 마치 저 화가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채색을 잘 쓰면 저마다 밝고 깨끗하여지며 좋은 붓을 잘 알아서 쓰면 좋은 색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마음업의 화가도 역시 그러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선정을 닦으면 선정의 채색이 잘 써져서 밝고 깨끗하여지기가 마치 채색의 빛과 같고 도를 닦는 스승은 마치 좋은 붓과 같으며 선정의 위아래를 앎은 마치 선지식과 같고, 취하거나 버림이 있음은 마치 게으르지 않은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선정을 닦는 마음 업의 화가는 저 선정의 땅을 그리되 저 좋은 색과 같이 되는 것으로 관찰한다.
  또 저 마음 업의 화가가 게으름을 피우면 그림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지옥ㆍ아귀ㆍ축생의 길에 동업(同業)의 인연으로 있으면서 쇠공이로 붓을 삼아 채색을 잘하지 않은 그림은 그릇과 사람에게서가 아니니, 이른바 지옥ㆍ아귀ㆍ축생에서의 이와 같은 빛깔들은 좋은 빛깔의 그림이 아니다.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화가는 교묘함과 서투른 뜻을 운용하여 5채(彩)의 붓을 잡고는 편편하고 바른 곳에서 온갖 정세하거나 거친 형상을 묘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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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냄은, 마치 중생이 어리석음과 슬기로운 마음을 받아 3업(業)의 붓을 일으켜 선과 악의 땅에서 온갖 괴롭거나 즐거운 일을 그려내는 것과 같다.
  또 세간의 화가는 색음(色陰)을 그리게 될 뿐이나 마음의 화가는 5음(陰)을 그릴 수 있으며, 또 세간의 그림은 견고하지 않아서 퇴색되면 형상이 이내 소멸되지만 마음의 그림은 오랜 겁을 지나면서 몸이 사라져도 업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또 세간의 그림은 매우 알기가 쉬어서 곱거나 밉거나 간에 모두 볼 수 있지만 마음의 그림은 극히 살피기 어려워서 과보는 알지 못한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모든 업으로 지어지는 바는/교묘한 화가보다 더 뛰어나며/업의 화가는 천상 안에서/갖가지의 즐거운 과보를 짓는다./ 여러 가지의 고운 빛깔은/실제로 보면 헤아릴 수 있지만/마음 업으로 편 뭇 채색은/그 수를 알 수 없도다./ 벽이 헐리면 그림도 없어져서/두 가지 다 함께 동시에 소멸되나/몸은 없어져 사라질 때에도/업의 그림은 상실되지 않네./ 비유하면 어느 한 그림 그리는 이가/여러 가지 무늬로 꾸미는 것처럼/한 마음 또한 그와 같아서/갖가지 업을 조작하느니라.
  다섯 가지 채색의 빛깔이 나타나면/보는 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듯/다섯 가지 감관의 그림 또한 그러하여/업대로 나고 죽음 있는 것일세./ 만약 세간의 솜씨 좋은 화가가/눈앞에 나타나면 볼 수가 있거니와/마음의 화가는 가늘고 작아서/모두가 다 볼 수가 없느니라./ 그림으로 곱거나 추한 형상 그려서/벽에다 뭇 형상 나타나게 되거니와 /마음의 업 또한 그와 같아서/선악의 과보를 능히 짓는다./ 이 마음은 밤과 낮으로/생각하며 언제나 머무르지 않나니/이와 같은 업은 마음을 따라서/차츰차츰 언제나 여의지 아니하네./ 바람과 티끌이며 연기ㆍ구름ㆍ열이/그림의 빛깔을 헐어 없애듯/착함과 착하지 않음의 지님[持]을 버리면/모든 업도 그렇게 상실되느니라”고 했다.
  또 『반주경(般舟經)』에서 의하면 부처를 보는 데에 간략하게 네 가지의 비유가 있다. 첫째는 꿈의 비유이니, 마치 꿈으로 보는 바가 분별로부터 생기는 것처럼 온갖 부처를 보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둘째는 물 그림자의 비유이니, 물을 심성에다 비유하면 부처인 달그림자는 모두가 중생의 진심 속의 물건이어서 마음과 부처가 서로 통하여 참 마음일 뿐이다.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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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는 환술의 비유이니, 제 마음은 마치 환술과 같아서 온갖 부처가 마치 환술로 되는 바와 같다. 이를테면 환술하는 법이 있어야 환술의 일이 이루어지듯이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보게 되는 부처가 없다. 넷째는 메아리의 비유이니, 마치 빈 골짜기에서 소리를 따라 메아리가 발생하는 것처럼 제 마음을 깨쳐 알면 생각을 따라 부처를 본다.
  위의 네 가지 비유의, 첫째는 바로 유심(唯心)에 비유하며, 둘째는 유심이기 때문에 공(空)이며, 셋째는 유심이기 때문에 가(假)며, 넷째는 유심이기 때문에 중(中)이다.
  또 꿈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은 것에 비유하고, 그림자는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은 것에 비유하고, 환술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에 비유하며, 메아리는 모인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님에 비유하였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마음이란 마음을 모르고/마음이란 마음을 보지 않나니/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어리석고/생각이 없으면 열반이니라./ 이 법은 굳거나 단단하지 아니하여/언제나 성립됨은 생각에 있으며/공(空)임을 이해하고 보게 된 이면/온갖 것에 생각함이 없게 되리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만약 마음 스스로가 마음을 본다 하면 먼저의 마음은 능견(能見)이 되고 부처는 소견(所見)이 되지만, 칼은 스스로를 베지 못하고 손가락은 스스로를 만지지 못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제 마음이 도리어 제 마음을 보겠는가. 능소가 분리되지 아니하고 견분(見分) 상분(相分)이 여기서는 끊어진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어리석고,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마음이 성불(性佛)에 명합하여 영원히 생각하여 구하는 것이 끊어진다”고 했다.
  위와 같아서 이것은 중생의 제 마음에서 느껴 나타나는 것이요, 다음에는 부처와 보살의 인지(因地)의 원력이라 나투어 보이면서 교화하는 문은 끊어짐이 없다.
  그런 까닭에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비록 정각 이룸을 보인다 하더라도 보살의 길을 버리지 아니하며, 비록 마음이 바로 부처라 단박에 보리를 이룬다 하더라도 중생이므로 아직은 널리 복업 닦기에 도달하지 못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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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아직 듣지 못한 것으로 교도하여 모두가 깨우쳐서 똑같이 이 자리에 돌아가게 한다”고 했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비록 한 생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행하며 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신과 같은 증상심(增上心)이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이르기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또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마음으로 근본을 삼으므로 마음이 청정하면 온갖 선근에 원만할 수 있어서 부처의 보리에 반드시 자재할 수 있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자 하면 뜻대로 이내 이루고, 온갖 잡음[取]을 끊어 없애고 한결같은 도에 따라 머무르려면 나 또한 얻을 수 있되, 내가 끊지 아니함은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부처의 보리 때문이나 또한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도 않으리라. 왜냐 하면 본래의 서원이 원만하여 온갖 세계에 다하고 보살행을 향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니라’고 하나니, 이것이 아홉 번째의 금강과 같은 대승의 서원하는 마음이다“라고 했다.
  위와 같은 비유는, 증득하고 믿어서 의심이 없으면 부처의 길이 성립되는 것이요 딴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으며 끝내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스스로가 한 마음을 깨끗이 할 뿐이니, 부처님의 본래 생각을 따르고 가르침의 바른 뜻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은 도리어 부처를 제도하는가.
  [답] 만약 안의 관[內觀]에서 보면 망념의 여러 가지 식(識)을 앎으로 인하여 중생은 체성이 없되 그 깨달음의 지혜를 내어 제마음의 부처를 이루거늘, 이 어찌 중생으로 인하여 제도된다 하지 않겠는가. 만약 바깥의 교화[外化]에서 논하면 모두가 중생으로 인하여 느껴 나오는 것이라, 만약 기연(機緣)이 없다면 이미 교화할 바도 없으므로 역시 성불하지 아니한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교화할 바 중생에 따르면서 불국토를 취한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정토삼매경(淨土三昧經)』에서 이르기를 “중생도 부처를 제도한다. 만약 느낌이 없으면 부처는 세간에 출현하지 아니하며 삼보리를 이룰 수도 없나니, 세간에 출현함과 보리는 모두가 중생의 근기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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