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0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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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0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정인(正因)의 불성은 중생과 공동 소유이며, 경에서 “관지(觀智)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바가 아니니라”고 말한 대로라면 도는 언제나 드러나 있을 터인데 어떻게 범부는 미혹되어서 깨치지 못하는가.
  [답] 『지론(智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심성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진흙 베는 데 쓰기만 하면 진흙은 이루어지는 바도 없고 칼은 날마다 손상만 되어 간다”고 했으니, 본체의 체성은 언제나 미묘한데 중생 스스로가 거칠게 할 뿐이다. 잘 이용하기만 하면 이내 본래의 미묘함에 합치한다.
  또 마치 하나의 그릇 속의 물은 언제나 싱거운 맛 그대로인데 만약 감초(甘草)를 넣어 두면 달고 황련(黃蓮)을 담가 두면 쓰게 되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의 물도 그와 같아서 허망한 물들음을 일으키면 범부요 진공(眞空)에 합하면 성인인 것이니, 그 마음의 성품은 일찍이 변했거나 달라진 일이 없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비유하면 깨끗한 해와 달이/따뜻한 거울인양 허공에 있으면/그림자가 모든 물에 나타나지만/물에게 뒤섞이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깨끗한 법의 바퀴도/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리니/세간 마음의 물에 나타나되/세간에 뒤섞이게 되지 않느니라”고 함과 같다.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로 미혹할 바[所迷]니, 인연이 생기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허깨비와 같고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품이 없다. 둘째는 바로 능히 미혹함[能迷]이니, 두루 헤아림이라 물건이 없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고 허망한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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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림이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라고 함과 같다.
  또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있음을 모르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해 내지 못하면서 무명만을 일으켜 공연히 뒤바뀐 생각을 이룰 뿐이니, 마치 밤에 새끼가 움직이지도 않는데 뱀이라고 의심하며 어두운 방이 본래 비었는데 귀신이 있다고 두려워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본래는 미혹과 깨침이 없는데 망령되이 오르락내리락함이 있고, 옛날에는 깨침을 미혹했는데도 미혹된 것 같았고 지금에는 미혹함을 깨쳤는데도 깨쳤음이 아니다. 다만 안에서 스스로 막혔음만을 보는 것은 객진(客塵)이 막은 바인데 체성 위에서 멀고 가깝다는 뜻을 나누고 성품 안에서 범부와 성인이라는 헤아림을 세우도다.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범천이 문수사리에서 물었다.
  ‘비구가 어떻게 하면 부처에 친근하게 되었다 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범천이여, 만약 비구가 모든 법 안에서 법이 가깝거나 멀음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이러하면 부처에 친근하게 되었다 하느니라.’”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조그마한 모양의 한 법의 것도 깨닫지 않아야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나니, 출현함이 없는 출현이 바로 부처님의 출현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약 언제나 부처를 본다는 한 법도 보지 않으면 천 리의 바람과 같고, 만약 부처를 보지 않는다는 한 법이라도 보면 호(胡)나라 월(越)나라 처럼 떨어져 있어도 마주보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알라. 마음을 저버려 경계에 합하면 단박에 진무(塵務)가 일어나고 경계를 저버려 마음에 합하면 법계를 뚜렷이 비춘다. 왜냐 하면 마음은 바로 의지할 바[所依]요, 법은 바로 능히 의지함[能依]이기 때문이다. 능히 의지함은 의지할 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마치 물은 의지할 바요 파랑은 능히 의지함이므로 물을 여의고 파랑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여의면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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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마음은 바로 능히 냄[能生]이요 법은 바로 낼 바[所生]이니, 마치 나무는 불을 능히 내는지라 나무는 능히 냄이요 불은 낼 바이므로 나무를 여의고 불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여의면 법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에 즉하지 않고 도를 닦는 이는 마치 천 사람이 문에서 밀치므로 한 사람도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마음을 알아서 단박에 든 이는 마치 한 사람이 빗장을 뽑아서 만 사람을 통하게 함과 같다. 종경(宗經)의 요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로다.
  그러므로 묘한 성품은 이지러짐이 없는데 미혹과 헷갈림이 스스로 얻어지고, 한 법도 움직이지 아니하는데 향함과 저버림이 갑자기 나누어진다. 마치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부루나(富樓那)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가 ㆍ물ㆍ불ㆍ바람의 본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하였다면,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은 서로 업신여겨 깔보지 아니할까>라고 의심하며, 또 공과 대지가 다 법계에 두루하였으면, 서로 용납하지 못하리라>고 물었는데, 부루나야, 마치 허공의 체성은 여러 가지 모양은 아니로되 여러 가지 모양이 나서 설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음과 같으니라.
  왜냐 하면 부루나야, 저 큰 허공에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면 맑고, 기운이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비치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여러 방면의 종류의 모양들이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느냐, 허공에 있는 것이냐.
  만약 저것들로 인하여 생긴다면, 부루나야, 해가 비출 때에는 그것은 해의 밝음이라 시방의 세계가 똑같은 햇빛일 터인데, 어찌하여 공중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게 되느냐. 만약 그것이 허공의 밝음이라면 허공 스스로가 비출 것인데, 어찌하여 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적에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알라. 이 밝은 것은 해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허공이거나 해와도 다르지 않느니라. 모양으로 보면 원래 허망이라 따질 수 없나니,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림과 같거늘 어떻게 서로 업신여긴다는 듯하다고 힐난하겠느냐.
  성품으로 보면 원래 진실이거늘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니, 묘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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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밝은 마음이 우선 물도 불도 아니거늘 어찌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 묻는냐. 참으로 묘한 깨달음의 밝음 역시 그와 같아서, 네가 허공으로 밝히면 허공이 나타나고, 땅ㆍ물ㆍ불ㆍ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저마다 나타나고, 만약 한꺼번에 밝히면 함께 나타나느니라.
  어떤 것이 함께 나타남이냐 하면, 부루나야, 한 물 속에서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적에 두 사람이 같이 물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ㆍ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물 속의 해도 두 사람을 각각 따라가되 하나는 동으로 하나는 서로 가서 본래 표준이 없게 되나니, 해가 하나인데 어찌 하여 각각 가느냐> 하거나 마다 가는 해는 둘인데 어찌하여 하나로 나타났더냐>고 따지지 말지니, 완연히 허망하여 의거할 수 없느니라.
  부루나야, 네가 물질[色]과 공(空)으로써 여래장에서 서로 기울이고 서로 빼앗으므로 여래장도 따라서 물질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고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둡나니, 중생이 미혹해서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합하므로 진로(塵勞)를 내어 세간의 모양이 있느니라.
  나는 미묘하게 밝아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으로써 여래장에 합하므로 여래장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일 뿐이어서 법계를 두루 비추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되 업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따라서 물질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하며, 중생은 그 본각을 등지고 망령되이 정진(情塵)을 집착하여 도리어 평등한 한 참된 깨달음 가운데서 나타나는 차별된 경계를 오인하여 밝혀지는 곳에 따라 억지로 시비를 말하는 것이 마치 허공의 체성 안에서 그 차별을 정하는 것과 같나니, 실로 허망한 뒤바뀜이어서 의거할 만한 도리가 없다. 거룩한 지혜와 참된 교리에 매어서 모두가 그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니, 만약 뒤바뀜이 진실하지 않음을 알면 저절로 논할 만한 법이 없으리라.
  마치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지혜로 온갖 불법에 들어가 중생들을 위해 설명하여 뒤바뀜이 제거되게 한다. 그러나 중생을 여의고서 뒤바뀜이 있지 아니하고 뒤바뀜을 여의고서 중생이 있지 아니하며, 뒤바뀜 안에서 중생이 있지 아니하고 중생 안에서 뒤바뀜이 있지 아니하며, 뒤바뀜이 바로 중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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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고 중생이 바로 뒤바뀜도 아니며, 뒤바뀜은 안의 법이 아니고 뒤바뀜은 밖의 법이 아니며, 중생은 안의 법이 아니고 중생은 밖의 법이 아닌 줄 알 것이니, 온갖 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아니하여 빨리 생겼다가 빨리 없어지면서 견고함이 없음은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곡두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되게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경의 글에는 네 짝[對]이 있다. 앞의 세 짝은 두 가지가 서로서로 대비되고 뒤의 한 짝은 제 자체에서 밝힌다.
  앞의 세 짝 중의 앞의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음[不離]이요, 뒤의 한 가지는 즉하지 않음[不卽]이니, 곧 중생과 뒤바뀜이 즉함도 갈라짐도 아님을 드러낸다. 중생은 능히 일으킴[能起]의 뒤바뀐 사람이어서 물들음 갈래[染分]의 의타(依他)요, 뒤바뀜은 일으킬 바[所起]의 허망이라 변계소집(遍計所執)이다.
  첫째 짝에서 밝힌 분리되지 아니함이란, 의지함[依]이 진실을 집착함과 같기 때문에 중생을 여의고서 뒤바뀜이 없고 의지하여 집착함이 생김[起]과 같기 때문에 뒤바뀜을 여의고서 중생이 없다.
  둘째 짝에서는 서로 존재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어서 거듭 앞의 이치를 풀이한다. 분리되지 않음이라 함은, 인과가 상대의 인연으로 이루어지면서도 본래부터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두 물건이 서로 존재하되 원인 안에는 결과가 없기 때문에 뒤바뀜 안에는 중생이 없고 만약 반드시 있다면 변계소집이 바로 의타기이어야 하며, 결과 안에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중생 안에는 뒤바뀜이 없고 만약 반드시 있게 해야 한다면 뒤바뀌지 않음이 없는 중생이어야 한다.
  셋째의 짝에서는 즉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인과와 능소를 무너뜨리지 않은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앞의 세 짝으로 말미암아 중생과 뒤바뀜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즉함도 아니고 갈라짐도 아님을 알게 된다.
  넷째의 짝은 제 자체에서 밝힌다. 뒤바뀐 마음이 경계에 의탁하여 비로소 생기기 때문에 안의 법도 아니다. 만약 이것이 안이라면 경계 없는 데서 경계가 있어야 하며, 뜻[情]으로 말미암아 헤아리기 때문에 밖의 법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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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것이 밖이라면 지혜로운 이도 경계에서 물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안팎이 아니거늘 어찌 중간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제 자체가 스스로 비었거늘 무엇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하겠는가, 때문에 즉함과 분리됨으로써 밝힌다.
  중생도 그러하여 쌓임[蘊]에 즉하여 구하여도 없기 때문에 안의 법이 아니고 쌓임을 갈라도 역시 없기 때문에 밖의 법이 아니다. 이미 안팎이 아니므로 중간도 끊어져서 본래 성품이 스스로 공(空)이거늘, 어찌하여 뒤바뀜을 일으킬 수 있겠으며 무엇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하겠는가, 즉함도 달라짐도 아님을 밝힌다.
  이미 이렇게 알면 스스로도 뒤바뀜이 없고 타물을 위하여 이 뒤바뀜을 해설하면 저절로 제거되거니와, 원인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견고하지 않음을 요달하지 못한 연유로 망령되이 제 나름으로 분별하게 되나니, 때문에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되게 한다’고 한다. 사실은 어리석은 범부 스스로가 속고 있는 것이니, 마치 원숭이가 달을 붙잡는 것이요 달이 원숭이를 붙잡음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했다.
  또 『중관론(中觀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뒤바뀜이 있어도 뒤바뀜을 내지 않고/뒤바뀜이 없어도 뒤바뀜을 아니 내며/뒤바뀐 이라도 뒤바뀜을 내지 않고/뒤바뀌지 않은 이도 뒤바뀌지 않네./ 만약 뒤바뀌게 되는 때라도/역시 뒤바뀜을 내지 않나니/너는 스스로 자세히 살펴보라/그 뉘가 뒤바뀜을 내는 것인가”라고 했다.
  이미 뒤바뀌었다면 다시는 뒤바뀜을 내지 아니하고, 이미 뒤바뀌었기 때문에 뒤바뀌지 않은 이 또한 뒤바뀌지도 않고 뒤바뀜조차 없다. 때문에 뒤바뀌었을 때에 또한 뒤바뀜도 없다는 두 가지 허물이 있으므로 너는 이제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누가 뒤바뀌게 된 이인가’라고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다음에 모든 뒤바뀜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겠으며, 뒤바뀜이 없는데 짐짓 어찌하여 뒤바뀐 이가 있겠는가.
  뒤바뀜의 갖가지 인연이 부서지기 때문에 내지 않음에 있게 되거니와 그가 내지 않음을 탐탁하면 내지 않는다는 이것도 뒤바뀜의 진실한 모양이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지 않음을 뒤바뀜이라 하는가’라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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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내지 무루의 법도 오히려 내지 않은 모양이라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뒤바뀜의 이것이 내지 않는 모양이겠는가. 뒤바뀜이 없는데 어찌하여 뒤바뀐 이가 있느냐 하면, 뒤바뀐 이로 인하여 뒤바뀜이 있기 때문이다.
  [문] 어떻게 온갖 뒤바뀜이 허망을 이루지 아니하는가.
  [답] 다만 뜻이 집착한 바로 인하여 마침내 허망이 이어질 뿐이나 본래 공[本空]을 집착하는 것이므로 허망은 곧 허망이 아니다.
  『기신초(起信鈔)』에서 이르기를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함과 진심의 움직이지 않음[眞心不動]은 서로 번갈아 가며 성립한다”라고 했다.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하게만 되면 그 까닭에 진심은 움직이지 아니한다. 진심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하게 될 뿐이다. 만 가지 형상이 본래가 공한데 밝은 거울이 동요하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찌하여 진실과 허망이 서로 번갈아 가며 성립되느냐 하면 진실을 미혹해서 허망을 일으키고 허망은 진실을 깨치면 곧 진실이요 진심은 허망으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 어떻게 하면 뒤바뀜을 여읠 수 있고 스스로 속지 않으며 허물이 없겠는가.
  [답]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제오대(第五大)와 같고 제칠정(第七情)과 같으며, 19계(界)가 나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조작도 없고 마음ㆍ뜻ㆍ의식조차 없음을 허물이 없다고 함과 같다”고 함과 같다.
  [문] 만약 심성(心性)이 본래 깨끗하다면, 어떻게 객진이 물든다고 말하는가.
  [답]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자취 또한 청정하며 체성도 청정하고 작용도 청정하다. 한 마음을 여의고서 따로 청정이 있지 아니하므로, 허망한 객진이 물들일 수도 없고 참된 법이라 깨끗이 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마음을 여의면 다른 법이 없거늘 어찌 물들음과 능히 물들임이 있겠으며, 또한 마음을 여의면 참된 법이 없거늘 어찌 깨끗함과 능히 깨끗이 함이 있겠는가. 칼은 자신을 베지 못하고 손가락은 제 몸을 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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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이미 심성이 청정하면서도/객진에 더럽힘을 설명하느니라”고 했다.
  마음의 진여를 여의고서 따로 심성의 깨끗함이 있지 아니하고, 마음의 진여를 여의고서 따로 다른 마음이 있지 아니한 것이니, 다른 모양에 의거하여 제 성품이 청정하다 함을 설명한다.
  이 가운데서 마음의 진여를 말하여 마음이라 이름하며 곧 이 마음을 말하여 제 성품의 청정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 마음이 바로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
  또 일체 중생으로서 아직 견성하지 못한 이는 비록 객진에 의해 숨겨지고 5음에 가려져서 멋대로 생사를 겪으며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어두워지지 않았으므로, 혹 착한 벗의 깨우침을 만나게 되면 끝내는 저절로 환히 밝아진다.
  이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항상 머무름의 마음의 보배거늘, 어찌 세간의 무상함이 부수는 생멸의 법으로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마치 가난한 여인의 방 안에 금의 광을 아직 파내지는 못했으나 옮겨지지는 않았음과 같고, 마치 역사(力士)의 이마 위의 보주가 싸우다가 묻혀졌으나 언제나 남아 있음과 같으며, 마치 설산(雪山)의 대통 속에 약이 잠시 흘러나왔으나 항상 존재해 있음과 같고, 마치 대지(大地)의 밑에 있는 금강을 뚫고 깎고 하였으나 부서지지 아니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섭(迦葉)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 소견을 얻었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로부터 그 전에는 저희들 모두가 소견이 삿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25유(有)에 나[我]가 있사옵니다. 그렇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나란 바로 여래장의 뜻이나,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불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나라는 뜻이니라. 이와 같은 나의 뜻은 본래부터 오면서 언제나 한량없는 번뇌에 가려졌나니, 이 때문에 중생들은 얻어 볼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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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남자야, 마치 가난한 여인의 집 안에는 진금의 광이 있었으나 집안사람들 모두 아는 이가 없었느니라. 이때에 어떤 비범한 사람이 방편을 잘 알았으므로 가난한 여인에게 말하되, 이제 삯을 받고 일을 하겠으니, 당신은 나에게 풀을 베고 쓰레기를 치게 하십시오> 하자, 여인은 대답하였다. 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만약 나의 금의 광을 보여줄 수 있다면 고용할 수 있겠습니다만.> 는 방편을 알고 있으므로 당신께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리 집 아무도 아직 모르고 있거늘, 하물며 당신이 알 수 있으리요.> 이 사람은 다시 말하였다. 는 지금 참으로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대답하였다. 도 보고 싶으니, 나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사람은 이내 그 집에서 진금의 광을 파내 놓자 여인이 보고는 기뻐하면서 기특한 생각을 내며 이 사람을 숭앙하였느니라.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이 얻어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저 보배 광을 가난한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나 이제 일체 중생들이 소유한 불성이 모든 번뇌에 가려졌음을 널리 보임은 마치 저 가난한 사람이 순금의 광이 있었는데도 얻어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으며, 여래가 오늘 중생들의 모든 깨달음의 보배 광인 이른바 불성을 널리 보이면 중생들은 보고 나서 마음에 기뻐하면서 여래에게 귀의할 것이니라.
  좋은 방편이란 바로 여래요, 가난한 여인이란 바로 온갖 한량없는 중생들이며, 순금의 광이란 바로 불성이니라.
  마치 왕가(王家)에 큰 역사(力士)가 있었고 그 사람 눈썹 사이에는 금강주(金剛珠)가 있었는데, 다른 역사와 씨름을 하면서 그 역사가 머리를 들이받자 그 이마 위의 구슬이 살 속으로 들어가 버렸느니라. 도무지 그 구슬이 있는 데조차 모르고 있던 차에 그 곳에 상처가 있었으므로, 이내 유명한 의사에게 치료하려고 했었다. 그는 총명한 의사여서 의술을 잘 알았으므로 이내 그 상처에는 구슬이 들어갔고 구슬이 살 속에 박혀 있음을 알았는지라, 이 의사는 역사에게 물었다. 신의 이마 위의 구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역사는 놀라면서 사 선생님, 나의 이마 위의 구슬이 없어져버렸습니까? 이 구슬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요?> 하면서 근심하며 슬피 울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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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의사는 역사를 위로하면서 신은 크게 근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때에 보주가 몸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지금 살 속에 있어서 밖으로 환히 나타나 보입니다. 당신이 싸울 적에 너무나 성을 냈었기에 구슬이 살 속으로 들어갔었는데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때에 역사는 의사를 믿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약 살갗 속에 있다면 피고름이 나고 부정할 터인데 어찌하여 나오지 않습니까. 힘줄 속에 있다면야 볼 수 없을 것인데, 당신은 지금 왜 나를 속이십니까?> 하므로, 때에 의사가 거울을 가져다 그의 얼굴을 비쳐 보이자 구슬이 거울 속에 분명하게 드러났으므로, 역사는 보고서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며 기특하다는 생각을 내었느니라.
  선남자야, 일체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선지식을 친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불성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볼 수 없으며, 그리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가려졌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와 전타라ㆍ찰리ㆍ바라문ㆍ비사며 수타에 떨어지고, 이러한 갖가지의 집 안에 태어나되 마음으로 일으킨 바 여러 가지 업의 인연으로 인하여 사람 몸을 받는다 하더라도 귀머거리ㆍ소경ㆍ벙어리ㆍ곱사등이ㆍ절뚝발이ㆍ앉은뱅이가 되며, 25유(有)에서 여러 가지 과보를 받느니라.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마음이 가려져서 불성을 모르는 것은 마치 저 역사의 보주가 몸속에 있는데도 잃어 버렸다고 울부짖는 것과 같다.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선지식을 친근할 줄 몰랐기 때문에 여래의 비밀한 보배 광을 모르느니라. 닦고 배우되 나가 없음은 마치 성인이 아닌 이가 비록 나가 있다고 말하나 역시 나의 참 성품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선지식을 친근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닦고 배우되 나가 없고 역시 나 없음[無我]의 곳도 모르느니라. 아직 나 없음의 참된 성품도 모르거늘 하물며 다시 나 있음의 참된 성품을 알 수 있겠느냐.
  선남자야, 여래는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에게 모두가 불성이 있음을 말함은 마치 훌륭한 의사가 저 역사에게 금강보주를 보이는 것과 같으며, 이 모든 중생들이 한량없는 억 가지의 번뇌에 가려져서 불성을 모르다가 번뇌가 다하면 그 때에야 증득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마치 저 역사가 밝은 거울 속에서 그 보주를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여래의 비밀한 광은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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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아서 한량없고 불가사의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설산에 있는 낙미(樂味)라는 하나의 약과 같으니라. 그 맛은 아주 달고 깊은 떨기 아래 있어서 사람들은 보지 못하되, 어느 사람이나 향기를 맡으면 이내 그 땅에 그 약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지나간 세상에 어느 전륜왕이 이 설산에서 이 약을 얻기 위하여 있는 데마다 나무통을 만들어서 이 약에다 대놓았으며, 이 약에 약기가 다 오르면 땅으로부터 흘러나와 나무통 속으로 들어갔었으니 그 맛이야말로 진정한 것이었느니라. 이 왕이 죽게 되자, 그 후에 이 약은 시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맵기도 하고 싱겁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맛은 그가 흐르는 곳에 따라 갖가지로 달랐고 이 약의 참 맛은 산에 묻혀 있었으니 마치 만월(滿月)과 같았느니라. 범인은 박복한지라 괭이로 파며 공들여 수고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는 없으며, 다시 성왕이 세간에 출현하여야 그의 복으로 이내 이 약의 진정한 맛을 얻게 되느니라.
  선남자야, 여래의 비밀 광의 그 맛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의 떨기에 가려져서 무명의 중생은 얻어 볼 수 없느니라. 한 맛의 약은 마치 불성과 같은데 번뇌 때문에 갖가지의 맛을 내나니, 이른바 지옥ㆍ축생ㆍ아귀ㆍ하늘ㆍ사람ㆍ남자ㆍ여자ㆍ남녀추니ㆍ찰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이니라.
  불성은 굳세고 사나워서 부수거나 무너뜨리기 어렵나니, 이 때문에 살해할 수 없느니라. 만약 살해할 수 있다면 불성을 끊는 것이나 이러한 불성은 끝내 끊을 수 없나니, 성품을 끊을 수 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라.
  나의 성품 같은 것은 바로 여래의 비밀한 광이어서 이와 같은 비밀한 광은 모두가 다 같이 부수거나 무너뜨리거나 태우거나 없앨 수가 없으며, 비록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 볼 수도 없되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그제야 증득하여 아나니, 이런 인연으로 살해할 수 없느니라.’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살해할 수 없다면 으레 착하지 않은 업이 없어야 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실은 살해되느니라. 왜냐 하면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은 5음 안에 머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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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있는데, 만약 5음이 무너지면 살해라 하기 때문이니라. 만약 살해되면 이내 나쁜 갈래에 떨어지고, 업의 인연으로 찰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며 남자거나 여자거나 남녀추니 등의 25유의 차별된 모양을 지니면서 나고 죽음에 헤매느니라.
  성인 아닌 사람이 멋대로 나[我]의 크고 작고하는 모든 모양을 헤아리되 마치 작은 새와 같다 하면서 혹은 콩만큼 하다 하기도 하고, 내지 엄지손가락만큼 하다 하기도 하며 이렇게 갖가지로 망령되이 억측을 하나니, 허망하게 생각하는 모양은 진실 됨이 없느니라. 세간을 벗어난 나의 모양이라야 불성이라 하나니, 이렇게 나를 헤아리면 바로 가장 좋다고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묻힌 광을 잘 알므로 이내 날카로운 괭이로 땅을 파는데 반석이며 모래ㆍ조약돌들을 곧장 파 내려갔으나 금강(金剛)에 닿게 되자 더 뚫을 수가 없게 된 것과 같으니라. 금강이란 온갖 칼과 도끼로도 부술 수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온갖 논자(論者)거나 하늘 악마 파순(波旬)이거나 모든 사람과 하늘들로서는 파괴할 수 없는 바니라. 5음이 모양은 바로 생기고 만드는 것이니 생기고 만드는 모양은 마치 돌과 모래로서 뚫을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것에 비유되고, 불성은 마치 금강의 무너뜨릴 수 없는 데에 비유되느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5음을 무너뜨리면 살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반드시 불법은 이렇게 불가사의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비록 불성이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가려졌음을 알았으므로 모름지기 지관(止觀)으로써 훈습하고 닦아야 밝고 깨끗하게 됨은 마치 가난한 여인이 광 안의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마치 역사가 거울 속의 구슬을 본 것과 같으리니, 그제야 제 마음을 친히 깨쳐서 묘한 깨달음이 원만해지리라.
  또 어떻게 지관을 행하면 참 수행에 계합될 수 있는가. 다만 능히 관하는 마음[能觀之心]과 관할 바의 경계[所觀之境]가 각각 성품이 떨어졌음을 알기만 하면 이내 허망한 마음이 스스로 쉬리니 이것을 지(止)라 하며, 언제나 이런 관을 지으면서 그 비춤을 잃지 않기 때문에 관(觀)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 그대로가 관이요 관 그대로가 지이니, 능소(能所)가 없는 관을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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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관이라 한다.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법 성품이 고요하여짐을 지라 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춤을 관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능소가 아닌 관으로서 그것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그런 까닭에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그 뜻을 깨끗하기 허공처럼 해야 하고/망상과 모든 집착[取] 멀리 여의어/마음의 향할 바에 걸림 없게 하라”고 했다.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첫째는 허망한 집착을 여의면 마치 저 깨끗한 허공에 구름의 가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침된 지(止)다. 둘째는 경계에 접촉하되 걸림이 없으면 마치 저 깨끗한 허공에 장애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참된 관(觀)이다. 이 관은 작의(作意)하지 않으면서 경계를 비추면 비추는 바가 끝이 없고, 이 지는 체성과 성품이 떨어지면서 허망이 쉬기 때문에 모든 잡음이 다 고요하다. 이렇다면 털지도 않고 닦지 않는데도 스스로 깨끗하여진다. 깨끗함이 없음으로 깨끗해야 법의 근원에 은밀하게 계합되고 닦지 않음으로 닦으면 부처의 지경을 가만히 밟는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한 마음의 참 지혜만이 바로 나의 본래 몸이어서 맑고 고요하여 언제나 존재하고 앞에 나타나 밝으면서 깨끗하다. 저절로 지혜의 부리로써 무명의 알을 쪼아 깨뜨리고 3계를 날아 벗어나서 자재하여 걸림 없으면 이때에야 견성하게 되어 분명하여지리니, 다시 무슨 법이 있어서 이를 대할 만하겠는가.
  단하(丹霞)의 고적음(孤寂吟)에 “미혹되지 않음이 잠시 있을 적의 미혹되지 않은 마음을/볼 때에는 얕고 얕되 쓸 적에는 깊구나/이 진주는 이와 같이 캐야하는 일이거늘/나무꾼이 황금을 짐과 어찌 같으랴./ 황금은 불리면 더욱 새로워지고/이 구슬은 빛 품고서 사람에겐 안 보이나/깨달으면 털끝에도 큰 바다를 머금나니/대지가 한 티끌임을 비로소 알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모든 부처의 마음이 온갖 중생들의 마음에 두루하여 범부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중생들의 몸이 모든 부처의 몸에 두루하여 성인 몸이 될 수 있다면, 바뀌어 옮겨가고 서로가 두루 미치면서 이루어지는가. 그 한 자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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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이 되는가.
  [답] 만약 바뀌어 옮아가서 이루어진다거나 서로가 두루 미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머무는 한 마음은 마치 허공의 체와 같고 범부ㆍ성인이란 두 이름은 도리어 허공 속의 꽃과 같다. 청색ㆍ황색과 생김ㆍ소멸은 비록 다르나 하늘의 성품을 벗어나지 않았고, 미혹ㆍ깨침과 오름ㆍ잠김은 다름이 있으나 진각(眞覺)의 근원을 여의지 않았다.
  또 한 방안에 있는 천 개의 등불 빛이 한 거울에 비쳐 들면서 만 개의 영상이 뒤섞여 나열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과 같다. 이 뜻을 통달한 사람인 부처님만이 환히 안다. 그러므로 만유(萬有)는 진실에 즉하여 바뀌거나 변하는 모양이 없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환술과 같아서 온갖 법의 경계를 내되 두루하고 그지없어서 다하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음을 안다”라고 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한 마음 속에 머물면서 일체 중생들의 모든 마음들을 알 수 있나니, 중생들의 마음은 모두 다 평등하여 마치 허깨비의 모양과 같되 본래 성품은 청정한 것으로 관하고, 모든 중생의 몸의 업은 평등하여 모두가 물속의 달과 같은 것으로 관하며,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자기의 몸에 있고 자기 몸도 중생의 몸속에 있어서 마치 영상이 나타남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부처 몸이 되게 하고 또한 자기 몸도 중생의 몸이 되게 하므로 모두가 바뀌어 옮길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또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님들 한결같아 크고 둥근 거울이며/내 몸은 마치 마니주와 같으므로/부처님들 법신이 나의 몸에 와서 들어오고 /내 몸은 언제나 부처님들의 몸에 들어가네”라고 했다. 그러나 서로서로 들어가면서도 들어가는 바가 없나니, 만약 드는 바가 있다면 곧 두 가지의 법을 이루리라.
  [문] 만약 실로 마음의 밖에 법이 없고 홀로 종(宗)을 드러낸다 할 적에 모든 부처님이 없으면 능히 교화하는 사람이 없고 중생이 없다면 교화할 바의 무리가 없으리니, 전혀 의뢰할 데 없는 데로 돌아가거늘 무엇으로 계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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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유심임을 알기 때문에 평등함의 부처를 이루고, 유식임을 요달하기 때문에 동체(同體)의 대비를 행한다 할 뿐이다. 만약 바로 이 종(宗)을 단박 깨치지 않으면 자기와 남의 두 일이 함께 상실된다. 왜냐 하면 한 마음의 평등에 들지 않으면 성불하는 바른 종(宗)을 어기고 동체대비를 요달하지 않으면 애견(愛見)의 망상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마경(維摩經)』의 「관중생품(觀重生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그 때 문수사리가 유마힐(維摩詰)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중생을 관(觀)합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관합니다. 마치 지혜로운 이가 물속의 달을 보는 것처럼, 마치 거울 안의 그 얼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치 더울 때의 아지랑이처럼, 마치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처럼, 마치 공중의 구름처럼, 마치 물더미의 큰 거품처럼, 마치 물 위의 작은 거품처럼, 마치 파초의 속처럼, 마치 번개가 오래가는 것처럼, 마치 제5대(大)처럼, 마치 제6음(陰)처럼, 마치 제7정(情)처럼, 마치 13입(入)처럼, 마치19계(界)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관합니다. 마치 무색계의 빛깔처럼, 마치 볶은 곡식의 싹처럼, 마치 수다원의 몸에 대한 소견처럼, 마치 아나함이 태 안에 든 것처럼, 마치 아라한의 3독(毒)처럼, 마치 법인(法忍) 얻은 보살의 탐냄과 성냄과 파계(破戒)처럼, 부처님의 번뇌의 습기처럼, 마치 소경이 빛깔을 보는 것처럼, 마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 숨쉬는 것처럼, 마치 공중의 새의 자국처럼, 석녀가 낳은 아이처럼, 마치 변화로 된 사람의 번뇌처럼, 마치 꿈에서 보다가 깨어난 것처럼, 마치 멸도한 이가 몸을 받는 것처럼, 마치 연기가 없는 불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그렇게 관한다면 어떻게 자비를 행합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보살은 이렇게 관하고서 생각하기를 는 장차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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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법을 말해야겠다>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자비입니다.’”
  『정명사기(淨名私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제 관중생품의 대정(大精)을 밝힌다면 다만 그 중의 한 구절에 의지하여 행하면 족하며 한 구절을 얻어 마음을 거두고 언제나 행(行)의 온갖 만행을 비추면 족하다. 지금 그대 스스로가 관하되 ‘너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필경엔 공(空)하다’라고 관하면 바로 이것이 보살로서 중생을 관하는 것이다. 보살은 도(道)라 하는데 도는 통할 수 있으므로 너의 물질과 마음의 본래 성품을 통하여 허망을 여의게 하면 바로 이가 보살이다. 보살은 너의 몸속에 있을 뿐이니, 너의 몸과 마음 관하기를 마치 세 번째의 손처럼 여기면 마침내 몸과 마음은 없게 된다. 이 안의 것으로 사람들에게 좌선에서 마음 쓰는 법으로 보인다면 대단히 좋으리라.
  몸과 마음이 이와 같다고만 관하면 안정과 산란과 옳음과 그름과 같음과 다름을 지을 만한 것이 없어서 온갖 것이 평등하여 곧 좌선하는 법으로서 지금 마음에 얻을 만한 것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내 마음이 어지러우므로 산란을 제거하고 안정을 취하고 싶다’고 말하면 크게 뒤바뀐 것이니, 모름지기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지금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 밤낮 너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 성품을 관하여야 하리니, 바로 이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이 번뇌를 관하는 지혜를 부처라 할 뿐이다.
  석가가 이미 번뇌를 관한 뒤에 부처가 되었고 가르침을 말씀하느라 머무르시면서 함께 하셨으므로, 이제 범부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한다.
  만약 ‘따로 부처가 있고 따로 수두룩하게 세계의 중생이 있다’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차례대로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셨으리라. 그렇다면 석가는 이미 성불하였거늘, 지금 어찌하여 아직도 중생이 세계에 가득 차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줄 알아야 한다. 마쳤다 함은 끝났다는 말이다.”
  위에서는 중생 관하는 것을 마쳤으니, 다음에는 여래 관하는 것을 보자.
  「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여래를 보고 싶으냐? 무엇들로 여래를 관(觀)하게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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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마힐은 말하였다.
  ‘스스로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처럼 부처님을 관하는 것 또한 그러하나이다. 저는 여래께서 과거에서도 오지도 않았고 미래에도 가지 않을 것이며 지금도 머무르지 않는 것으로 관하오며, 색(色)으로 관하지 아니하고 색의 여(如)로 관하지 아니하고 색깔의 성품으로 관하지 아니하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으로 관하지 아니하고, 식의 여[識如]로 관하지 아니하고 식의 성품으로 관하지 아니하며, 4대(大)로 생기는 것이 아니어서 허공과 같고, 6입(入)의 쌓임이 없으므로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마음이 이미 지나갔으며, 3계에 있지 않고 3구(垢)가 이미 떠났고 3탈문(脫門)을 따르고 3명(明)과 무명이 같으며, 동일한 모양이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며 자기 모양도 아니고 남의 모양도 아니며 모양 없음도 아니고 모양을 취함도 아니며 이 언덕도 아니고 저 언덕도 아니고 중류(中流)도 아니면서 중생을 교화하며, 적멸을 관하면서도 영원히 소멸하지도 아니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으로써도 하지 아니하고 저것으로써도 하지 아니하며 지혜로써도 알 수 없고 식(識)으로써도 알 수 없으며,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고,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니며, 방소에도 있지 않고 방소를 떠나지도 않으며,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보임도 없고 말함도 없으며, 베풀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으며,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으며, 참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으며, 나아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안정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않으며,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정성스럽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여 온갖 말의 길조차 끊어졌으며, 복밭도 아니고 복밭 아님도 아니며, 공양 받을 만하지도 않고 공양 받지 않을 만하지도 않으며, 취함도 아니고 버림도 아니며, 모양도 아니고 모양 없음도 아니며, 진제(眞際)와 같고 법성과 같으며, 일컬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일컫거나 헤아림을 뛰어났으며, 큼도 아니고 작음도 아니며, 봄도 아니고 들음도 아니며, 깨달음도 아니고 앎도 아니어서 모든 결박을 여의었으며, 모든 지혜와 같고 중생과 같으며 모든 법에서 분별이 없고 온갖 것에 앎이 없으며, 닿임도 없고 고뇌고 없으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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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없고 일으킴도 없으며,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고 싫음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이미 있었던 것도 없고 장차 있을 것도 없고 지금 있는 것도 없으며, 온갖 말로써 분별하거나 나타내 보일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은 이와 같사오며 이렇게 관하옵니다. 이것으로 관하면 바른 관이라 하겠거니와, 만약 다른 것으로 관하면 삿된 관이라 하겠나이다.”
  천태(天台)의 『정명소(淨名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색으로 관하지 아니하고[不觀色], 색의 여로 관하지 아니하며[不觀色如], 색의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不觀色性] 하였는데 색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마음은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갖가지 물질[色]을 만드는 것과 같으므로 만약 요술쟁이의 거짓임을 알면 요술로 만들어진 갖가지 물질은 얻지 못하리니, 이제 물질은 마음의 요술로부터 요술로 내는 것이라 오히려 이 마음조차 얻지 못하겠거늘 어디에 이 물질이 있음을 보겠는가. 때문에 물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여(如)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만약 물질과 여가 다르다고 보면 이것은 물질을 없애고 여에 드는 것이며, 지금은 물질을 여읜 딴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여로 관하지 아니한다.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곧 불성으로 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으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세속[空俗]이요, 여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진리[空眞]이며, 불성으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중도[空中道]이다. 그 중도로 불성이 있다고 헤아리면서 순도애(順道愛)를 일으키면, 바로 정타(頂墮)가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나[我]와 열반의 이 두 가지는 모두가 공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의 병(病)이 있을 뿐이나 공의 병 또한 공하다. 지금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이 순도애가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차별된 과보를 받음은, 모두가 한 생각의 마음이 달라지면 분별하고 망정이 생기면서 중생의 모양을 취하여 범부로 삼고 모든 부처의 경계를 집착하여 성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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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중생은 마치 요술쟁이의 요술을 보는 것같이 관하며, 여래는 3제(際)의 체성이 공한 것으로 관할 것이다.
  두 가지 소견이 여기에서 다 소멸되고 생각과 헤아림이 그 때문에 함께 없어지면 모든 부처의 기쁨을 이루고 보살의 근심을 제거할 수 있으리니, 이 한 마음을 믿으면 종경(宗鏡)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법화의 「신력품(神力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이 경을 능히 지니는 이는/나와 그리고 분신(分身)이며/멸도하신 다보불(多寶佛)까지도/모두를 다 기쁘게 하느니라”고 했으며, 옛 성인이 이르기를 “도속(道俗)이 평등하지 않고 2제(際)가 없어지지 않음이 보살의 근심거리다”라고 했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서 이르기를 “불법이란 온갖 법을 말하며, 온갖 법이란 불법을 말한다. 불법의 성품이 곧 온갖 법의 성품이어서 온갖 법의 성품도 곧 불법의 성품과 같나니, 불법의 성품과 온갖 법의 성품은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성품은 다름이 없되 소견에 따라 차별이 이루어지며, 그 체성은 언제나 원융한데 거짓 이름으로 차별이 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과 모든 불법은 거짓 이름뿐이며, 또한 옳은 법도 아니고 그른 법도 아니다”라고 했다.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에서 이르기를 “부처와 보리는 소리가 있을 뿐 진실이 없고 방소도 없나니, 모든 법 또한 그러하다”라고 했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모든 세간 모두가 평등하여서/마음과 말과 온갖 것이 업 아님이 없음 알라/중생은 허깨비라 진실이 없지만/모든 과보가 이로부터 생기느니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의 적멸과 적멸이 아님의/이 두 가지 분별심을 멀리 여의며/분별들이 바로 세간 소견임을 알면/바른 지위에 들어서 분별도 다하리라”고 했다.
  『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이 말하였다. ‘온갖 법은 공(空)하여 마치 실상(實相)은 뒤바뀌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이전하지 않아서 허공과 같이 아무 성품도 없으며 온갖 말의 길조차 끊어져서 나지도 않고 내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으며 이름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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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양도 없고 실로 아무 것도 없어서 한량없고 그지없고 거리낌이 없고 막힘이 없는 것과 같되 다만 인연으로 있게 되고 뒤바뀜으로부터 생길 뿐이라고 관하기 때문에 상락(常樂)을 말하면서 이와 같은 법 모양을 관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두 번째의 친근할 곳이라 하느니라’”고 했다.
  또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이르기를 “여러 선남자야, 여래가 연설한 경전은 모두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몸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기도 하며, 혹은 자기 일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기도 하되, 모든 말한 바가 다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여래는 3계의 모양에 나고 죽음이 없고 물러나거나 나옴도 없으며 역시 세간에 있음과 멸도함이 없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님을 사실대로 알며, 3계와 같지 않게 3계를 보는 이와 같은 일을 여래는 분명히 보면서 그릇됨이 없다. 모든 중생들이 갖가지의 성품과 갖가지의 욕심과 갖가지의 행과 갖가지의 생각으로 분별함이 있기 때문에 모든 선근이 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와 언사로써 갖가지로 설법하며 부처일을 하는 데에 잠시도 그만둔 일이 없었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정종문(正宗門)으로써 보면 오히려 세간에 있는 사람이 없고 멸도하는 이도 없거늘, 하물며 능히 교화함과 교화할 바의 다름이 있겠는가. 만약 불사문(佛事門)으로써 보면 가르침의 바다가 넓고 깊으며 지혜 등불이 널리 비추면서 근기를 따라 교묘하게 하거늘, 어찌 잠시라도 폐지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5음이 공(空)하여 부처가 없다 하면 바로 이것이 삿된 소견이거늘 어떻게 보살은 발심하여 부처가 되려 하는가.’
  대답하였다.
  ‘이 안에서는 부처가 없다 하여 부처에 집착하는 생각을 깨뜨린다는 말이요. 부처가 없다는 모양을 취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만약 부처가 있다면 오히려 취하게 하지 않거늘, 하물며 부처 없음을 취하는 삿된 소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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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부처는 항상 적멸하여 쓸모없는 의론의 모양이 없다. 만약 사람이 항상 적멸하는 일을 분별하고 쓸데없이 의론한다면, 이 사람 또한 삿된 소견에 떨어진 것이다. 이 있다 없다는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고 중도에 처하면 바로 이것이 모든 법의 실상이며 모든 법의 실상이 그대로 부처이다. 왜냐 하면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면 부처가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보살들은 오히려 법조차 얻지 않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으며, 오히려 도조차 얻지 않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는가”라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생사의 법에서 일으키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아니하며, 모든 성인의 도를 여의지도 않고 닦지도 아니한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생사의 법에서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제 성품이 항상 공이기 때문에 여읨[離] 쪽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떨어지지 않는다’ 함은 미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즉함[卽] 쪽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성인의 도를 여의지 않는다’ 함은 성품과 언제나 상응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斷]는 쪽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닦지 않는다’ 함은 천진(天眞)이라 완전히 갖추어졌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쪽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량소(淸凉疏)』에서 이르기를 “하나와 여럿에 집착하지 않으면 온갖 것을 능히 세운다”고 했다. 존재[有]에 집착하지 않은지라 벌여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진리와 세속이 융화됨이니, 세속의 환유(幻有)의 모양은 모양이 본래 스스로 공이요, 참된 이치[勝義]의 진공(眞空)의 본체는 본체가 언제나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 이것은 공유(空有)요 상유(常有)가 아니어서 이 존재는 일찍이 공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공 이것은 유공(有空)이요 단공(斷空)이 아니어서 이 공이 어찌하여 존재하지 않은 일이 있었겠는가.
  유공과 공유는 체성은 하나로되 이름만이 다르다.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진리와 세속이 서로 어긋나서 아득하여 뒤섞이지 아니하며, 체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공(空)과 존재가 서로 따르면서 그윽하여 둘이 아니다. 동일함과 동일하지 아니하면 즉하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아니하며 원융하여 걸림이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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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므로, 보살의 지혜는 그 근원에 계합한다. 그런 까닭에 “멀리 끊어지고 의뢰할 데 없으면서 잘 닦아 안립(安立)한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진실로 현상[事]의 공허로써 본체[理]를 잡으면 본체의 현상이 되지 않음이 없고, 본체의 실상으로써 반연에 응하면 현상의 물체에 걸림이 없다. 그런 까닭에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추고 비추면서도 언제나 고요하며, 그러므로 종일토록 알고 보면서도 알고 보는 것이 없다. 내지 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이루어져서 나타났다 숨었다 하되 걸림이 없으며, 자비 때문에 언제나 세간을 다니고 지혜 때문에 세간 법에 물들지 아니한다.
  그 융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비가 지혜 아님이 없기 때문에 세간에서 여의지 않음이 없나니, 그러므로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벗어나지 않은 일이 없다. 둘째, 지혜가 자비 아님이 없기 때문에 여의면서도 세간에 있지 않음이 없나니, 그러므로 언제나 세간의 모습을 뛰어나면서도 세간에 노닐지 않음이 없다. 셋째, 두 가지 다 원융하기 때문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둘이 없고 이 한 생각일 뿐이니, 이른바 생각과 생각 없음이 같기 때문이요 세간과 출세간이 장애가 없다”라고 했다.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교묘함을 알아 설법하고 열반을 나투어 보임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모든 방편의 온갖 것이 다 이 마음의 생각으로 세우되 이는 뒤바뀜이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온갖 법과 3세가 평등하고 여여(如如)하여 동요하지 않으며, 실제(實際)가 머무름이 없음을 분명히 알며, 한 중생도 이미 교화를 받았거나 지금 교화를 받거나 장차 교화 받을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며, 수행할 바가 없고 조그마한 법도 나거나 없어지면서 얻을 만한 것이 없음을 스스로 분명히 알면서도 온갖 법에 의하여 소원을 헛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아홉째의 여실주(如實住)라고 한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능히 한 생각 동안에/중생과 부처님이 평등하다 관하며/또 다시 하나의 털 끝 속에서/모든 법을 다 거두어 모두를 밝게 본다”고 했으니, 이 참된 소견 때문에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일으켜 널리 법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보고 듣고 하여 이익을 얻게 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해와 달이 오고 가고 하면서 비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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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히겠다는 마음을 짓지 않되 중생들의 복덕의 힘 때문에 스스로 오가면서 모든 어두움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만약 이 종경(宗鏡) 안에 들면 하나의 법도 취할 만한 것이 없음은 모두가 성품이 같기 때문이요 하나의 법도 버릴 만한 것이 없음은 다른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들을 잘 구제하면서 버리는 사람이 없고, 항상 만물을 잘 구호하기 때문에 버리는 물건이 없다.
  잘함[善]이라 함은 종(宗)을 알지 아니함이 없어야 비로소 구경의 으뜸가는 잘함[上善]이니, 사람을 구제한다 하면 동체의 대비를 이루고 만물을 구제한다 하면 모양 없음의 도리에 귀착한다. 그렇다면 잘함 이외에는 법이 없거늘 어찌하여 버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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