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9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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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9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위에서 말한 바로는 조사의 교[祖敎]와 설명이 같으므로 마음이 있으면 모두가 성불하게 될 터인데 지금 현재 보이는 중생들은 어찌하여 성불하지 않았는가.
  [답] 만약 중생의 눈으로 보면 다만 중생 세계가 남아 있는 것만 보일 뿐이거니와, 만약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부처의 경계를 아는지라 바깥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의 망령된 바람이 마음 바다에 치는지라 동요하기 쉽고, 본각(本覺)의 참된 성품이 오랜 꿈에 잠자는지라 깨어나기 어려운 줄 알 것이다.
  이 때문에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너의 심령(心靈)은 모두가 명료하다고 하였으니, 잠시라도 어려운 일이 없되 미혹된 이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모름은, 마치 아름다운 옥이 진흙에 빠져서 스스로 비싼 값을 감추는 것과 같고 마치 순금이 조약돌과 섞여서 쓸쓸하게 빛을 숨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 너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5욕(欲)을 얻어서 마음대로 하게 하려고 아무 해 아무 날에 값을 칠 수가 없는 귀중한 보주를 너의 옷 속에다 매어두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데도 너는 모르고 애쓰고 근심하며 고통하고 살아가니 매우 어리석구나. 너는 이제 이 보주로 필요한 것을 바꾸어라. 언제나 뜻대로 모자라는 바가 없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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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과 같다.
  그러므로 본각은 언제나 성취되어 있고 옷 속의 구슬은 잃지 않은 것임을 알지니, 만약 원돈(圓頓)의 교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곧장 제 마음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각(覺)은 이룩되어 있기 때문에, 보살은 법박(法縛)과도 함께하지 않고 법탈(法脫)도 구하지 아니하며 생사도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사랑하지 아니하며 계율 지님도 공경하지 않고 무너뜨림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오래 익힌 이도 존중하지 않고 배우지 못한 이도 업신여기지 않는 줄 알지니, 왜냐 하면 모두가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온갖 중생은 모두가 본각이 성취되었음을 알겠다.
  불각(不覺)이기 때문에 물들음을 따르는 각[隨染之覺]으로 오인하여 훌륭하고 하열함의 경계를 보고 기쁘고 싫어함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허망한 윤회를 따라 단박에 참된 각을 미혹했을 뿐이다. 그러나 각으로 인하여 불각이 있으니 만약 진실이 없으면 허망이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연기가 없으면 불이 피지 않는 것과 같다.
  또 각은 불각을 의지하는데 마치 그릇을 따르는 금이 그릇을 기다려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현상은 능히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진실 하나만도 성립되지 않고 허망 하나만도 이룩되지 않는다. 단독의 진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함은 부처의 과위는 남[生]이 없기 때문이요, 단독의 허망만으로는 이룩되지 않는다 함은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선덕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온갖 중생의 금빛 세계의/때 없이 깨끗한 지혜는 파괴 없다/보배 구슬이 본래 이 옷 속에 있는데도/오랜 가난으로 [문]밖에만 있으려 하네./ 청정한 보배 수레 네 거리에 서 있자/문수는 인도하고 보현이 붙들며/씩씩한 하얀 소 아주 힘이 세어서/한 생각에 두루 유람하여 진퇴가 없네./ 이와 같은 보배 수레에 들려 하지 아니하고/애씀만을 즐기면서 [문]앞에 서 있으며/제 몸 속에 언제나 있음을 모르고서/위로 돌려보내며 못 미친다고만 하네”라고 함과 같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일체지(一切智)를 구하고자 하면/속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룰지니/깨끗하고 미묘한 마음으로써/보리의 행을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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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혀야 한다”라고 했으며,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좋고 기름진 밭에/심게 되면 반드시 무성하게 자라듯/이와 같아서 깨끗한 마음자리 /모든 부처의 법 출생시킨다”고 했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중에서 한 부처님도 이 마음을 믿지 않고 성불한 이 없고, 스물여덟의 조사 안에서 한 조사도 이 성품을 보지 않고 조사가 된 이 없는 줄 알 것이다.
  지금 들으면서도 조사와 부처가 되지 못한 이는 모두가 믿음이 미치지 못하고 소견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만을 배우면서 그 마음을 비추지 아니할 뿐이요 그 이해만을 고집하면서 그 법에 깊이 들지 아니할 뿐이다. 왜냐 하면 믿음이 바로 도(道)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믿음은 바로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했으니 보는 그대로요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괴로움을 보고는 진리의 익힘도 없애거늘, 하물며 현행(現行)하는 마음 밖의 경계이겠느냐”라고 했으니, 종경(宗鏡)에 들어야만 비로소 앞의 잘못을 깨치고 마음 빛이 꿰뚫릴 때 남은 흠도 저절로 다한다.
  화엄의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생각마다 언제나 부처가 있어서 정각을 이루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 정각을 이루셨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에서처럼 온갖 중생들의 마음 역시 그러하여 모두가 여래가 있고 등정각을 이루며, 넓고 크고 두루하여 곳마다 있지 아니함이 없고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면서 쉼이 없느니라”고 했다.
  부사의 방편법문에 들어가는 데에 옛 해석에 이르기를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서 성불한 것에 둘이 있다. 첫째는 중생의 몸과 마음이 바로 부처가 증득할 바이기 때문이니, 부처는 중생의 체성을 증득하고 중생의 작용을 쓴다. 둘째는 전체가 그대로 부처의 보리 성품이기 때문에 한 성품이어서 다름이 없고, 이는 곧 다른 결과가 나에게 있는 원인이니 나의 원인으로 다른 결과를 이룩한다. 그러므로 부사의 방편법문에 드는 것이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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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뜻을 얻지 못한 이는 중생의 생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것 또한 불가하며 설령 부처의 생각을 지었다 하여도 역시 불가하며 즉함[卽] 또한 불가하고 즉하지 않음 역시 불가한 것이니, 깨끗한 지혜 눈으로 모든 망정을 취함이 없어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이 앎에 의지하여 깊숙한 데마다 다하지 아니함이 없게 한다”고 했으며,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25유(有)에 나[我]가 있다면 스스로 진실한 이름의 나[我]이니, 이른바 온갖 법의 체성의 진실이다”라고 했다.
  일체 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어서 부처의 원인이 되므로 ‘불성이 있다’고 이름하는데, 마치 온갖 빛깔 속에는 공(空)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정에게만 여래의 바른 성품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법 가운데도 모두가 안락함의 성품이 있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육안으로 보면 진실마다 범속되지 아니함이 없고, 법눈으로 보면 범속마다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법신이 다섯 갈래를 헤매므로 중생이라 한다”고 했다. 법신이 바로 진여일 뿐이나 다섯 갈래를 헤매면 곧 이것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므로 중생이라 한다. 이것은 차별되는 이치이다.
  또 수연(隨緣)이 곧 불변(不變)이기 때문에 차별을 빼앗아 체성이 공(空)하게 하면 끝[末]이 숨으며, 체성이 공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불변을 빼앗아 수연하게 하므로 근본이 고요하다. 온전한 근본의 끝이 되기 때문에 근본이 이내 숨고, 온전한 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끝이 이내 없어진다.
  이것은 진여가 인연을 따라 중생이 되는 것이나 일찍이 참된 체성을 잃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중생이 아니게 하며, 중생의 체성은 공하여 곧 법신일 때에도 일찍이 중생이 없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쌍으로 끊어졌고 두 가지가 벌써 서로 끊어졌다면 진실과 허망이 평등하여 다를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인연을 따르나 있게 되는 법신이 아니어서 언제나 현상을 달리하면서 성립되지 아니하고, 고요히 사라지나 없게 되는 중생이 아니어서 언제나 진실을 달리하면서 드러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알라. 번뇌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번뇌이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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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까닭에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승천왕(勝天王)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값으로 칠 수 없는 여의보주가 장식으로 갈고 닦아서 산뜻하여 사랑할 만하고 바탕이 뚜렷하며 아주 깨끗하여 흐림이 없는 것을 흙탕에 떨어뜨려 오랜 세월이 지났었는데 어떤 사람이 주워서 수호하며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법의 성품도 그러하여 비록 번뇌에 있다 하더라도 물들게 되지 않다가 뒷날에 다시 드러나느니라.
  천왕아,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중생의 제 성품이 청정하나 객진번뇌에 가리워져서 제 성품에 들지 못하는 것을 모두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는 용맹스레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여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이 그 번뇌를 없앤다 함을 말하고, 온갖 중생들은 모두 성품의 깨끗함이 있으므로 그들을 못났다고 여기지도 않고 존중해야 하며 그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 법대로 공경해야겠다>고 하고, 보살마하살은 이내 반야를 내느니라.’”
  『사나대비처태경(闍那大悲處胎經)』에서 이르기를 “악마와 범왕과 제석궁의 여인들이 모두 몸을 버리지도 않고 몸을 받지도 아니함은 모두가 현재의 몸에서 성불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법 성품은 마치 큰 바다가/잘잘못이 있음을 말하지 아니하듯/범부거나 성현이거나/평등하여 높거나 낮음이 없나니/마음에 있는 때가 소멸되기만 하면/증득하기 손바닥을 뒤치는 것 같네”라고 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견의(堅意)야, 걸림 없는 끝[無礙際]이라 함은 곧 끝없는 끝[無邊際]이며, 끝없는 끝이라 함은 바로 온갖 중생들의 성품이니, 이것을 끝의 문[際門]이라 하느니라. 이 끝의 문에 들면 천억의 법장(法藏)을 연설할 수 있으며, 이 법장이란 바로 장(藏)이 아니니라. 견의야, 여래의 뭇 법장 중에는 연설한 바 법이 있지만 모두가 이 끝을 말하느니라. 또 색장(色藏)과 수장(受藏)ㆍ상장(想藏)ㆍ행장(行藏)ㆍ식장(識藏)이 있지만 이 장은 장이 아니며, 스스로 장에 있지 않으면 이것을 모든 장이라 하는데 아자(阿字)의 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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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아자(阿字)라 함은, 곧 남이 없음[無生]의 뜻이다. 만약 마음에 남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 얻을 만한 법이 없는 것이니, 이 유식(唯識)을 깨쳐야 비로소 도의 첫 문에 든다.
  그런 까닭에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를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으면 중생이라 하느니라. 중생이란 곧 법신의 뜻이니, 마치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서의 말과 같으니라. 사리불아, 곧 이 법신은 항하 모래보다 더한 한량없는 번뇌가 얽혀서 끝없는 때로부터 세간의 생사 파도를 따르면서 가고 오고 나고 없어졌으므로, 중생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이러므로 만약 ‘중생이 곧 법신’이라 하면 심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라.
  그러므로 선덕이 『대열반경』의 말씀을 인용하기를 “‘어떤 사람이 연뿌리의 오라기로 수미산을 매단다면, 생각하거나 말로 할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은 한 생각 동안에 나고 죽음을 헤아리는 것도 불가사의하니라’”고 했다.
  지금 밝힌 원만한 도리는 환히 알기 어려우므로, 우러러 믿을 따름이다. 만일 생사에 불가사의의 도리가 있음을 듣고서 우러러 믿을 수가 없다면, 한 마음이 곧 여래장이기 때문에 원만한 뜻이 아니다.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몇의 중생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문수가 말하였다.
  ‘중생계의 수는 여래계와 같나이다.’
  ‘중생계는 넓은가, 좁은가.’
  ‘불계의 넓고 좁음과 같나이다.’
  ‘온갖 중생들은 어느 계(界)에 매어 있는가.’
  ‘여래의 매임과 같아서 중생 또한 그러하나이다.’
  ‘중생계는 어디에 머무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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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계에 머무르나이다.’
  또한 문수는 말하였다.
  ‘마치 허공이 수없는 것처럼 중생 또한 수없으며, 허공은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중생 또한 얻을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 세간의 말을 따라 세우는 바가 있듯이 범부거나 성인의 경계와 방편으로 말한다면 이는 불가사의요 광대한 신통 변화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하였다.
  ‘다음에 법은 벗어남의 모양이 없되 벗어남의 법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神變)이라 하며, 법은 차별이 없되 문자로 분별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법은 행할 바가 없되 수행이 있음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법은 오고 감이 없되 오고 감이 있음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한 도의 증득에서 모든 과위를 이룩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한 맛의 법에서 삼승을 분별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온갖 부처님께서는 바로 한 부처님일 뿐이나 한량없는 부처님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온갖 부처님 국토는 한 부처님 국토일 뿐이나 한량없는 국토를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한량없는 중생은 한 중생일 뿐이나 한량없는 중생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온갖 불법은 하나의 불법일 뿐이나 한량없는 법을 말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법은 나투어 보일 수 없되 모든 법을 보이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며, 법은 얻을 바가 없되 닦아 익히어 증득하나니 이것을 신변이라 하느니라.’
  그때 장로 사리불이 상주 천자(商主天子)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 신변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천자는 대답하였다.
  ‘제가 바로 신변이거늘, 어떻게 놀라거나 두려워합니까’
  ‘천자여, 무슨 비밀한 뜻이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온갖 법은 착한데도 착하지 아니하고 움직임이 없는데도 움직임을 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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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착한 업을 지으면 천상에 나고 큰 위덕이 있으므로 이러한 착한 업은 불가사의며, 온갖 중생들이 생사에 왕래하는 것도 불가사의입니다. 불가사의란 큰 신변을 이름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네 가지 경계가 불가사의입니다. 첫째는 업(業)의 경계가 불가사의며, 둘째는 용(龍)의 경계가 불가사의며, 셋째는 선(禪)의 경계가 불가사의며, 넷째는 부처[佛]의 경계가 불가사의입니다. 이런 이치 때문에 온갖 법을 큰 신변이라 하게 되므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만약 여래가 이 신변을 말씀하면, 허공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허공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대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까?’
  ‘그대가 어찌 허공과 같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공(內空)과 외공(外空)이 바로 허공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중생들은 바로 허공의 성품입니다.’”
  이러므로 만약 온갖 유정과 무정이 모두가 똑같이 허공의 성품임을 알면, 어디에 범부와 성인의 다름과 안팎의 다름이 있겠는가. 또한 허공의 성품이 생기거나 다함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성불한다 성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묻는가.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법계를 아는가?’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법계를 아오며, 바로 이것이 저의 경계이옵니다.’
  ‘그대는 어찌 법계를 좋아하지 아니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하나의 법도 법계가 아님을 보지 않거늘, 다시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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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겠나이까.’”
  『지세경(持世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다르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셨으리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의 평등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중생계와 법계가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고 관할 수 있다면 하나 둘의 수에 분별을 내지 않으리니, 이것을 보살의 불퇴인(不退印)이라 한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만약 어떤 보살이 범부를 여의지 않으면, 성인의 법을 능히 안다”고 했다. 범부의 마음으로써 성인의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밀엄경(密嚴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법신은 온갖 중생들의 몸 속에서 머무르되 빛이 밖으로 나타남은 마치 깨끗한 비단 속의 마니주와 같으며, 막거나 가려짐이 없는 것 또한 그와 같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래의 법신은 모든 중생들 속에 두루하게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마른 나무거나 불탄 나무까지라도 모두 다 들어가 있으므로,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종류이겠는가. 이 때문에 모든 여래가 알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중생심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의 법신은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 법신이란 바로 자기의 마음이다. 이것은 법 집[法家]의 몸이요 중생의 성품이며 예와 이제를 통하고 지경과 허공에 가득 차 있다. 시방의 하늘도 제 마음 속에서는 오히려 한 점의 구름이 생기는 것 같고, 백천의 큰 바다도 본각 안에서 보면 마치 한 방울의 거품이 이는 것과 같거늘 하물며 거짓 이름인 범부와 성인이란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태교(臺敎)에서 이르기를 “부처라 함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보협경(寶篋經)』에서 이르기를 “불계(佛界)와 중생계는 하나의 계요, 따로의 계가 없다. 이것은 바로 원만한 지혜로 뚜렷하게 모든 법을 깨닫는 것이어서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명료하지 아니함이 없다. 비록 5무간(無間)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해탈하려는 생각을 내고 비록 흐려 미혹해서 거꾸러진다 하더라도 그 본체는 엄존한다. 이 도리는 밝고도 환하여 세간에서 언제나 머무는 것이라 부처가 있다 한들 늘어날 수 없고 부처가 없다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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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어들 수 없으며 그것을 얻어도 높게 되지 않고 그것을 잃어도 낮게 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중생이 곧 부처요 이 본체가 부처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온갖 처소가 문수사리요 온갖 처소가 금빛 세계며, 온갖 처소가 부동지불(不動智佛)이다. 지금의 믿는 이가 당연히 제 마음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고 성품이 미묘하고 혜해탈(慧解脫)임을 믿어야 이것이 스스로 문수요 마음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속에서 성품이 없는 미묘한 이치에 자재로이 분별함이 있되 움직일 만한 성품이 없음을 부동지불이라 한다.
  본체와 지혜가 둘이 없고 묘한 작용이 자재한지라 이 때문에 이름을 묘덕(妙德)보살이라 하고, 이 때문에 온갖 부처님께서 이 믿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름을 문수라 하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므로 역시 문수를 이름하여 동자(童子)보살이라 한다.
  모두가 믿음으로써 처음 생기게 하기 때문에 신심이 성취되면, 곧 정혜(定慧)의 관과 지혜 힘이 나타나게 되고 한 생각에 계합되어 상응하여 10주(住)의 첫 마음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
  능행(能行)의 행할 곳을 취하여 이름을 보현(普賢)이라 하고, 묘한 지혜의 의지함이 없는 곳을 취하여 이름을 묘덕이라 하며, 잘 분별하여 근(根)을 아는 지혜를 취하여 이름을 부동지불이라 한다.
  스스로 계합하여 상응함을 정각이라 하고, 또한 능히 믿음[能信]의 곳을 부동지불이라 하며, 스스로 계합하여 상응함을 머무름의 마음[住心]이라 하나니, 부처로서 머무를 바 미묘한 혜해탈의 모양이 다하여 남[生]이 없는 법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면, 믿는 마음이라 하지 못하며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이라 한다.
  온갖 부처는 모두가 같은 자기 마음이요, 모든 중생은 다 똑같은 제 성품이다. 성품은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요 체성은 차별이 없으며, 지혜는 동일한 성품이니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체성이 같은 미묘한 지혜로 모든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을 알며, 이렇게 믿고 이해하여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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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이 경의 종취(宗趣)로 대심 중생(大心衆生)을 위하여 이러한 법이 모든 부처님의 스스로 탈 바의 문[所乘門]이요 일승의 묘한 경전이며 법계의 도리임을 설명하여 대심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근본에 들게 하나니, 큰 지혜인 부처의 결과이기 때문이고 한 생각이 진리에 계합하여 지혜가 동시에 나타나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며, 법계의 도리로 본다면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 사람들이 모든 부처의 경계인 불가사의만을 믿고, 중생의 경계 또한 불가사의임을 모른다. 중생계가 곧 불계이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온갖 처소가 부동지불이다” 함은, 온갖 맡은 처소마다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거늘 어찌 중생계뿐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화엄사기(華嚴私記)』에서 이르기를 “이제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데 모두가 석존과 똑같이 되고 문수와도 똑같이 될 것이니, 한 생각이 곧 똑같이 됨을 만약 믿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조금씩 노력하면서 고요히 생각하여 보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한 생각이 평등하여 본체와 현상[理事]이 차별 없으므로 다만 고요히 생각하여 정신을 집중시켜 빛을 돌이켜 안으로 비추기만 하면 무슨 다른 법이 있어서 동떨어지게 되겠는가. 제 마음의 생각만으로 허망을 일으키고 높고 낮음이 나누어질 따름이다.
  『청량소(淸凉疏)』에서 이르기를 “부처와 중생을 만약 성품의 깨끗함으로써 말하면, 현재에도 평등하되 미혹과 깨침의 다름은 방해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삼승 또한 차별이 있기도 하고 차별이 없기도 하다. 이것은 곧 더럽거나 깨끗한 3세의 모든 법이 평등하지 아니함이 없거늘, 하물며 일치한 성품으로 서로가 거두어들임이겠는가. 이렇게 이해하면 일체지(一切智) 자리에 잘 머문다고 한다. 마치 땅이 능히 내되 마침내는 땅으로 돌아가고 만법이 부처의 지혜에 의지하되 마지막에는 도로 일체지에 이르는 것과 같다.
  『보성론(寶性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치 가난한 사람의 집 땅에/값진 보물의 광이 있는데/그 사람은 알 수 없었고/보물도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네./ 중생도 또한 그와 같아서/제 마음의 집 가운데/헤아리거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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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수 없는/끝없는 법의 보배 창고가 있네./ 비록 이러한 보배 차고 있으나/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었고/깨달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생사의 가난한 고통을 받고 있네./ 비유하면 값진 보물 창고가/그 가난한 사람 집에 있을 적에/남들은 나에게 가난하다 말을 않고/보물도 여기 있다 말하지 않음 같네./ 이와 같은 법의 보물 창고가/중생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중생은 마치 가난한 사람 같고/불성은 마치 보물 창고와 같네./ 중생들로 하여금/이 값진 보물을 얻게 하려고/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이 세간에 출현하셨네’라고 했다.
  『무생의(無生義)』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대사(大師)께서 항상 『여래장경(如來藏經)』의 말씀을 인용하셨으니 ‘중생의 몸 속에 부처님의 32상 80종호가 있고 보배 연꽃에 앉아 있으므로 부처님과는 다름이 없되 다만 번뇌에 가려졌기 때문에 아직 작용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부처 지견(知見)의 근성(根性)이 갖추어 있으면서도 아직은 지견의 작용이 있지 못할 뿐이니, 즉 망설이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게 되었다. 내지 비유하면 어린아이에게도 큰 사람의 여섯 감관이 갖추어져 있어서 큰 사람과 다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몸 속에 있으면서도 아직은 큰 사람으로서의 작용이 있지 못하다가 점점 자라고 커서 다시 학문을 닦아야 비로소 큰 사람으로서의 지견과 힘과 작용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근성 이것으로 작용이 있다 하면, 어찌 종자가 본래 단 것이 없는데 맺힌 열매가 쓰지 않겠느냐. 다만 있음을 모르고 스스로가 범부로 자인할까 두려울 뿐이다. 참 성품은 언제나 분명하여 잠시라도 숨거나 가려진 일이 없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여래는 실로 비장(秘藏)이 없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마치 가을의 찬 달이 허공에 드러나게 깨끗이 떠 있으면 가리운 사람도 없어서 모두가 보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조사(祖師)가 이르기를 “5음이 본래 공(空)이거니 사자가 어찌하여 굴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다만 이는 중생이 모르면서 자칭 신비하다고 한다. 그러나 비장은 없다 하더라도 비밀한 말씀은 있으며, 비밀한 말씀은 알기 어렵고 지혜만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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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장(百丈)화상이 이르기를 “다만 지금의 말로 비추어 보아도 분명하나 그 형상을 찾으면 얻을 수 없나니, 이것이 비밀한 말씀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종경(宗鏡)의 빛이 때마다 비추지 않음이 없고 언제나 관여하며 날로 쓰면서도 몽매한 이는 모르고 있으니, 바라는 바가 없는 까닭이 그것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중생계는 모두가 평등하여/마치 허공계와 같은 것이니/그가 이것들을 알 수 있다면/부처의 도 이루기 어렵지 않으리”라고 했으며,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그것은 상(相)을 낼 바 없는 것이라/모두가 생각할 바 없는 것이니/마음이 없고 내는 바가 없다면/부처의 도를 얻기 어렵지 않네”라고 했다.
  『월장경(月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법의 평등을 생각하고 자세히 살피면 중생을 여의지 않으면서 법이 있고 법을 여의지 않으면서 중생이 있느니라. 마치 중생의 체성이 바로 나의 체성과 같고 나의 체성이 바로 온갖 법의 체성과 같으며 온갖 법의 체성이 바로 불법의 체성과 같나니, 이렇게 모든 법이 평등함을 관찰할 때에 중생을 음(陰)에 즉하여도 얻을 수 없고 음을 여의어도 얻을 수 없으며 화합하여도 얻을 수 없고 화합을 여의어도 얻을 수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닌지라, 이 사람이 이렇게 모양 없음[無相]에 머무르게 됨을 바로 법의 평등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온갖 법은 언제나 정각을 이루었고 정각을 이루지 않은 때가 없는 줄 알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진실한 법은 제 모양을 버리고서 다른 모양을 취하지 아니한다. 만약 정각이 아님을 버리고서 등정각을 이룬다면 진실한 정각의 것이 아니니, 일찍이 어느 때라도 정각을 이루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각의 자리에 머무르며 이 불각을 버리고서 정각을 취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각이 모두의 각이어서 언제나 정각을 이루었고 불각일 때가 없다. 마치 허공이 맑고 고요하여 이루어지거나 무너짐이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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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룸과 이루지 않음에 집착하면 이는 망정의 소견에 속한 것이니, 만약 지혜로 비춘다면 어디를 간들 진실하지 않겠는가. 생각마다 언제나 법신을 보고 티끌마다 모두 부처의 국토를 이루리라. 다만 자기 눈에 눈병이 있으면 묘하게 보는 것이 통하지 않을 뿐이니, 자기 심령을 저버리고 가보(家寶)를 물에 빠뜨린다.
  비록 동일한 성품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혜로 밝히는 것이니, 마치 악기는 기묘한 음을 쌓은지라 지위가 묘하면 궁(宮)과 상(商)이 음절에 맞고 사람은 깨달음의 성품을 품은지라 지혜가 교묘하면 거동과 작용이 진실에 명합함과 같다. 얻음과 잃음은 남에게 있고 정세함과 거친 자기를 따른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善逝]은 손가락을 눌러서 해인(海印)의 빛을 내시고, 중생[含識]은 마음을 들어서 진로(塵勞)의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중생과 불성에 관한 옛 해석에서 공후(箜篌)가 갖추고 있는 다섯 가지의 이치에 비유하였다. 첫째는 공후 자체가 있고, 둘째는 중간의 소리가 있고, 셋째는 줄이 있고, 넷째는 공후를 탄주(彈奏)하는 사람이 있고, 다섯째는 탄주하게 될 곡(曲)이 있다.
  이 다섯 가지 비유로, 우리들 5음은 공후와 같고, 몸 안이 진여 불성은 소리와 같으며, 6도(度) 만행은 줄과 같고, 교묘한 방편의 지혜는 공후를 탄주하는 사람과 같으며, 우리들이 교묘한 방편의 지혜로 6도를 수행하여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고 하나의 티끌 하나의 털마다 모두 법계가 두루함은 탄주되는 곡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휴문(沈休文)이 부처의 앎은 중생의 앎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이치를 말하면서 이르기를 ‘그러므로 범부의 앎[知]과 부처의 앎과는 다르지 않은 줄 알 것이니, 아는 바의 일이 다름에 연유되는 것이라 다르지 않음을 안다’고 했으며, 심(沈)의 6도(道)가 계속 부처가 된다는 이치에서 이르기를 ‘서로 이어지며 소멸되지 아니함은 느껴 알 수 있는 까닭에서이니, 만약 금생에 단련한 공이 점차로 쌓이면 내생의 과보로서 알 바의 본체가 차츰차츰 정세하여진 앎[知]은 내세의 응보인 부처에 이르면서 끊어지지도 않고 단련하지도 아니한다. 만약 금생에 밝힘이 없으면 내생의 과보로서 알 바가 차츰차츰 어두워지고 차츰차츰 어두워진 앎 또한 내세의 응보인 여섯 갈래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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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중생의 식(識)이 서로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아니하며, 다만 정세함과 거�으로 말미암아 그 오르락내리락함이 나누어질 뿐이라고 하였다.
  또 고사계(古師計)에서 이르기를 “온갖 여래께서는 인지(因地)에서 중생을 모두 제도하되 중생계가 다하지 않으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우셨으나, 현재까지도 중생은 9유(有)에 빠져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부처로서 아직 이룩하지 않았음이 당연한 것이요, 이룩했다면 서원을 어겼으며 그의 대답도 바르지가 않으리라.
  『화엄기(華嚴記)』 중의 여실의(如實義)를 요약한 해석에서 “모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비지(悲智)의 두 가지 문이 있다. 대비(大悲) 때문에 미래의 끝이 다하도록 성불하는 때가 없다는 것이니, 때문에 보살과 천제(闡提)는 성불하지 아니한다. 대지(大智) 때문에 생각마다 속히 이루고, 또 모든 중생계를 다 교화하려 하여 자신이 속히 이루어야 널리 교화할 수 있으므로 옛날에 다 제도하여 마치겠다는 지성스런 말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또 중생의 근본 진여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교화하면서도 교화함이 없나니, 이것이 곧 언제나 이룩하고 또한 언제나 이룩하지도 아니하며 언제나 교화하면서도 언제나 교화함이 없는 것이다. 자비와 지혜가 자재하거늘 어찌 좁은 소견으로 고집하겠는가”라고 했다.
  위와 같은 해석은 오히려 본체와 현상의 둘 다 통함[理事雙通]에서 본 것이니, 만약 곧바로 종(宗)에 나아가서 밝히려면 『화엄경』에서 말한 바 “여래가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적에, 자기 몸속에서 일체 중생들이 이미 성불하여 마쳤고 벌써 열반하여 끝났음을 보았다”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그 때 세존께서는 다시 온갖 머물러 지니는[住持] 장법(藏法)인 여래의 모양에 의하여 보살들을 위해 반야를 말씀하셨으니, 온갖 유정이 머물러 지니고 두루 차며 심히 깊은 이치의 뛰어난 장법의 문이었다. 즉 온갖 유정들은 모두가 여래장(如來藏)이니 보현보살의 제 체성이 두루하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은 모두가 금강장(金剛藏)이니 금강의 장으로써 붓고 뿌릴 바이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은 모두가 정법장(正法藏)이니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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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바른 말에 의하여 굴리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은 모두가 묘업장(妙業藏)이니 온갖 일의 가행(加行)의 의(依)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사리불아,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나와 같아서 다름이 없게 하려 함인 줄 알지니, 내가 옛날에 서원했던 바와 같이 이제는 이미 만족하게 중생들을 교화하여 모두가 불도에 들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큰 서원으로 크게 교화하여 모두가 원만하여진 것이리라. 만일 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자신조차도 오히려 이룩하지 못하거늘 어찌 저들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문]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 한 마음의 문에 들어감에도 인과가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미륵이 보리를 얻으면, 일체 중생 모두가 역시 얻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다 함께 성불하여 보리를 얻는다는 이치이니, 바로 본체[理]에서 이루는 것인가. 현상[事]에서 이루는 것인가.
  [답] 삼승의 대부분이 본체에서 이루는 것으로 본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법신은 곧 평등하나 보신ㆍ화신은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이르기를 “한 생각에 성불한다 함은, 모두가 본체로부터 설명된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의 일승종(一乘宗)은 본체와 현상에서 다 똑같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이것은 화엄의 대의(大意)로부터 나온 것이라 취하여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든 중생으로서 만약 사람과 하늘의 위치에서 보면 인아ㆍ법아의 두 가지가 두루 갖추어져 있고, 소승에서는 이 5온만이 진실한 법이며, 대승에서는 혹은 ‘마음에서 나타난 바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환유(幻有) 그대로가 공(空)이다’라고 하여 인아ㆍ법아를 다 같이 보내버리기도 하며, 혹은 ‘여래장이다’고 말하기도 하나니, 항하 모래만큼의 많은 성품의 덕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생은 곧 법신에 얽혀 있다. 법신과 중생은 뜻은 하나로되 이름만 다르므로 오히려 본체에 의거한 설명이다. 다시 할 말이 있다면, “모양의 근본이 저절로 다하면 성품의 근본이 스스로 나타나나니, 부처에 즉(卽)한다, 부처가 즉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는 할 수 없다”고 하리라.
  만약 화엄종에 의하면 예로부터 이루어서 마쳤고 또한 열반하여 마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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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성이 같다는 데서 보아 여기서 이루어짐이 저기서 이루어짐은 아니니,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현재 중생이 있고 부처에 즉하지 않았는가.
  만약 중생의 보고 아는 위치에서 본다면, 오히려 유심(唯心)이 곧 공(空)인 것조차 보이지 않거늘 어찌 원교(圓敎)중의 일을 보겠는가. 마치 동쪽을 서쪽으로 잘못 여기는 것과 같나니 서쪽임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망정을 단박에 깨뜨리면 법계가 뚜렷이 나타나서 벌써 이루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마치 저 알고 있는 사람의 서쪽은 순전히 동쪽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재(善財)와 용녀(龍女)는 모두가 이는 범부로되 한생[一生]에 친히 증득하였고, 삼승의 권교(權敎)는 믿음이 미치지 못한 사람의 시현(示現)이라 일컫는다. 『현의격(玄義格)』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선재와 용녀는 바로 법신 보살로서 변화로 환술의 재주를 부리어 일시에 범인들을 기쁘게 한 것’이라 하니,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않게 할 뿐이로다”라고 했다.
  논의하여 보자. 만약 그렇다면 성인은 범부를 속이는 허물이 있고 범부는 성인에 즉하는 신분이 없으리니, 교문(敎門)도 헛된 시설이니, 배운들 무엇 하겠는가. 때문에 그렇지 않다.
  [문] 만약 실로 범부로부터 단박에 성불한다 하면, 무엇 때문에 경 안에 이 두 사람만 있고 다시는 딴 이가 없는가.
  [답] 해와 달이 하늘에 있건만 소경이어서 보지 못하는 구나. 경전에서 한 생에 성불함을 설명한 것의 수는 마치 작은 티끌 수와 같다. 5천 권의 경전의 권마다 그 생(生)에 도를 얻는다 한 것이 있다. 달마 선사(達磨禪師)가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면서 “말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성품을 보고 이내 도를 얻는다”고 함과 같을 뿐인데, 모양을 취하는 무리는 손가락질하며 외도라 한다.
  논(論)에 이르기를 “금빛 세계의 부동지불과 온갖 처소의 문수가 이제 마음의 법성을 갖추고 있으니 바깥에서 온 물건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는 화엄이 되고, 제 마음의 대방광(大方廣)을 깨달아 알면 이는 부처며, 먼저 스스로가 성품을 보면 부처의 몸과 마음이 되고, 나란히 5위(位)를 닦으면 장식(莊飾)함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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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천태(天台)의 처음 발심할 때에 바로 열반을 관하며 도를 수행한다는 것과 같고, 연꽃의 꽃과 열매가 동시라는 이치로써 똑같이 곧 마음이 부처가 된다 함을 표시하는 것에 비유했다.
  『앙굴마라경(鴦崛魔羅經)』에서 이르기를 “앙굴마라와 문수사리가 시방의 각각 열 세계의 모든 여래의 처소로 두루 가서 이러한 뜻을 묻되 ‘어떻게 하면 석가모니불께서 사바세계에 머무시며 열반하시지 않겠나이까?’ 하자, 그 모든 여래께서는 모두 우리에게 대답하시기를 ‘석가모니불이 곧 우리들의 몸이니, 그 부처님이 스스로 너희들의 의심을 결단해 주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라. 세계에 두루한 몸이 바로 한 몸일 뿐이며, 나눈다 해도 여럿이 아니고 모였다 해도 하나가 아니다.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불도를 구하는 이가 수능엄삼매의 이치를 듣고서 믿고 이해하여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불도에서 다시는 물러나지 않은 줄 알아야 하리니, 하물며 믿은 뒤에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해설하며 말씀대로 수행함이겠느냐.’
  때에 여러 제석ㆍ범왕ㆍ호세 천왕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여래를 위하여 사자좌인 정법의 자리요 대인(大人)의 자리요 큰 장엄의 자리요 큰 법륜 굴리는 자리를 펴서 여래로 하여금 나의 이 자리에서 수능엄삼매를 말씀하시게 해야겠다’고 하고, ‘이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말씀하시게 해야겠다’고 하고, 이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말씀하기를 ‘나만이 부처님을 위하여 사자좌를 펼 것이요, 딴 사람들은 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잠깐 만에 여래의 앞에는 8만 4천억 나유타의 보배 사자좌가 있게 되었으나 모두가 뭇 모임에서 방해되거나 거치적거림이 없었다. 낱낱 천자들은 다른 자리는 보이지 않는지라 생각하기를 ‘나 혼자 부처님을 위하여 사자좌를 폈으니, 부처님께서는 내가 편 자리 위에서 수능엄삼매를 말씀하시겠구나’라고 했다.
  때에 제석ㆍ범왕ㆍ호세 천왕들은 자리를 펴놓은 뒤에 저마다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하옵노니, 여래시여, 저의 자리 위에 앉으셔서 수능엄삼매를 말씀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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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즉시 세존께서는 큰 신력을 나타내어 8만 4천억 나유타의 사자좌 위에 두루 앉으셨다. 여러 하늘들은 저마다 부처님께서 그가 펴놓은 자리 위에 앉으심이 보였고 다른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한 제석이 다른 제석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여래께서 나의 자리 위에 앉으셨음을 보는가.’
  이 제석ㆍ범왕ㆍ호세 천왕 들은 저마다 서로가 말하였다.
  ‘그대는 여래께서 나의 자리 위에 앉으셨음을 보는가.’
  어느 한 제석이 말하였다.
  ‘여래는 지금 나의 자리에 계시기만 하고, 그대의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다.’
  때에 범천들 중에 등행(等行)이라는 한 범왕이 있다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느 여래께서 진실하시옵니까? 저의 자리 위 분이옵니까, 다른 자리 위의 분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등행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가 공(空)하여 마치 허깨비와 같은데 화합으로부터 존재한다. 짓는 이도 없고 모두가 생각하고 분별함으로부터 생기며, 주(主)가 없기 때문에 뜻을 따라 나오므로 이 모든 여래는 모두가 진실이니라. 어찌하여 진실이냐 하면 이 모든 여래는 본래 스스로 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이요, 이 모든 여래는 이 뒤에는 역시 없게 되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이며, 이 모든 여래는 4대(大)에 속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이며, 모든 음(陰)ㆍ계(界)ㆍ입(入)의 모두에 속하지 않는 바라 이 때문에 진실이며, 이 모든 여래는 먼저와 중간과 나중이 다 같아서 차별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이니라. 범왕아, 이 모든 여래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 모든 여래는 색 그대로여서 평등하고 수ㆍ상ㆍ행ㆍ식 그대로여서 평등하나니, 이 때문에 평등하느니라. 이 모든 여래는 과거 세상 그대로여서 평등하고 미래 세상 그대로여서 평등하며 현재 세상 그대로여서 평등하느니라. 허깨비와 같은 법이기 때문에 평등하고 그림자와 같은 법이기 때문에 평등하며 아무 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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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법이기 때문에 평등하고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기 때문에 평등하나니, 이 때문에 여래를 평등함이라 하느니라. 온갖 법이 평등한 것처럼, 이 모든 여래 또한 그와 같으니라.’”
  해석하여 보자. 수능엄삼매라 함은, 곧 온갖 일의 마지막까지 견고함[一切事究竟堅固]이라 한다. 왜냐 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므로 이름을 으뜸가는 정[上定]이라 하고, 이것에 믿어 들어가므로 역시 이름을 왕삼매(王三昧)라 하기 때문이다. 이 삼매로 온갖 것을 겪는데 어찌 마지막까지 견고하지 않겠는가. 제석ㆍ범왕ㆍ호세의 모든 하늘들이 저마다 부처님께서 자기 자리에 앉으셨음을 본 이것은 제 마음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모두가 생각하고 분별함에서부터 생기며, 주가 없기 때문에 뜻을 따라 나오므로 이 모든 여래는 모두가 진실이니라”고 하셨으며, “어찌하여 진실이냐 하면, 이 모든 여래는 본래 스스로 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이다” 함은, 모든 여래는 본래 스스로 나지 않고 바로 자기 마음에서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기 마음도 마치 허깨비와 꿈과 같아서 모두가 평등한 진여의 성품을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진금을 단련한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상실되지 않는 것처럼 이 모든 대사(大士) 역시 그와 같아서 시험할 바 처소에 따라 모두 부사의한 법의 성품을 나투어 보일 수 있다”라고 했다.
  『보성론(寶性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치 저 비유리(毘瑠璃)가/맑고 깨끗한 대지(大地) 가운데서/하늘의 주인인 제석의 몸을/거울 속의 형상같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와 같아서 중생의 마음이/맑고 깨끗한 대지 안에서/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몸을/거울 속의 형상처럼 나타내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에 즉하면서 부처를 보면, 가히 현재 몸에서 도를 이루리라.
  『선요경(禪要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수겁 동안을 지난다 하더라도 끝내 얻을 수 없거니와, 안의 깨달음을 관하면 한 생각 동안에 이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행함과 자리를 가지런히 이루어서는 속히 묘한 과위에 오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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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범부와 성인이 체성은 같되 미혹과 깨침은 나누어진 것 같고, 만약 믿고 들을 적에는 바깥으로부터 얻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마치 생사와 도가 합쳐지는 것이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합쳐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물속의 짠 맛이요, 빛깔 속의 아교다”라고 했다.
  이장자의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이 화엄경은 10주는 견도(見道)가 되고 10행ㆍ10향ㆍ10지와 11지(地)는 가행(加行)이 되어 수행이 익숙하게 하기 때문이요, 부처의 과위는 처음에 보현(普賢)의 비원(悲願)으로 나타내어 지혜의 큰 작용이 익숙하고 자재하게 하기 때문이며, 스스로 여래의 근본의 넓고 빛나는 밝은 지혜가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요, 처음과 나중이 통틀어 길고 짧은 시일의 분한이 없기 때문이며, 법신의 근본 지혜로써 사실대로 말하면 삼승의 권교(權敎)와 같거나 식정으로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 모두가 근본에 의거해서 관찰하여야 한다.
  마침내 부처의 과위가 익숙한 뒤에 보현의 행을 이루어 원만하여지면, 오로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것만을 늘 하는 일로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비롯함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며 이룸도 없고 무너뜨림도 없이 두루 시방의 온갖 여섯 갈래에서 지혜로써 대(對)하고 나타내며 중생 이롭게 함을 영원한 사업으로 삼는다.
  처음 발심하여 믿음을 내며 수행할 적부터 이렇게 믿고 즐기며 이렇게 뜻하고 원하며 이렇게 바라고 구하며 이렇게 도(道)를 본다면, 처음 발심하여 머무를 적부터 정(定)으로 관한 힘이 법신에 계합되어 근본의 넓고 빛나는 밝은 지혜가 나타나서 온갖 나와 남의 생사 바다를 비추어 알며 성품이 스스로 해탈하리니,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의 집착을 깨뜨리고 망상의 괴로움을 여의게 하기 때문이요 자기 몸의 성불과 성불하지 않음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내어 성불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불도와는 멀리 떨어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법신의 성품 없는 힘으로 자기와 남의 성품이 떠나고 이루거나 무너짐의 마음이 없이 방편의 힘을 일으키고 큰 원력을 내며 대비의 문을 일으켜 지음 없으면서도 짓고 한없는 지원(志願)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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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온갖 법계 중의 성품 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미혹을 풀게 하고 도리어 제 마음의 성품 없는 도리를 살펴 얻게 하나니, 망상의 얽매임이 스스로 없어서 성불이란 말도 하지 않고 성불하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다.
  이 화엄경이 오위 교문(五位敎門)을 나열하여 세움은, 다만 얻지 못했으면서 얻었다 하고 이르지 못했으면서 이르렀다 하고 원만하지 못했으면서 원만하다 하면서 더럽거나 깨끗한 장애에 걸려 있으면서 보리의 도와 보살의 행에서 그쳐 만족한 마음이 있고 쉬어버리는 생각이 있는 이를 이끌기 위하여, 50가지의 인과와 110가지의 법문을 나열하여 세워서 중지하거나 그만두는 마음에 걸려 있지 아니하고 보현의 원행을 만족하며 끝없는 극지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이 화엄경은 곧바로 본 몸의 본 법[本身本法]이 정견(情見)을 뛰어나고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어서 3세의 모양이 끊어지며 하나의 진보신(眞報身)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으며 성품과 모양이 걸림 없고 자재한 과위 바다의 법문을 보이어, 곧바로 상상(上上) 근기 사람에게 수여한다.
  교문의 행상(行相)과 형세의 분포가 이와 같은지라 권교의 학이 차례에 의하여 점점 이루어지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나, 다만 9인(仞)의 봉우리를 오름에는 그 발자취가 끊어질 수 없고 10층의 층계를 밟음에도 그 발자국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을 뿐이다. 벼슬의 계위 1품(品)에 신하라고 함만을 언제나 보았고, 옛날에 선비의 몸이 갑자기 천자[九五]에 올랐음을 들었다.
  명주(明珠)로 단박에 비추어 널리 방소 없음을 나타내고 기름진 장마비가 큰 바다에 방울방울 떨어져서 다 채우며 한 티끌의 공(空)한 성품이 법계에 차별이 없는 것이로되, 여러 가지 유정들이 억지로 붙잡아 매어 놓았으므로 근기는 같지 아니하고 권실(權實)은 동일하지 아니하다.
  이 교문은 천차만별이므로 모름지기 권실을 알고 거짓임을 알아 진실을 닦아야 하리니, 오랫동안 권종(權宗)에 머물러서 그 실교(實敎)를 미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엄(智儼) 법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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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자리[地]가 온갖 자리의 공덕에 포섭된다면 하나의 법이 그대로 진실이거늘, 어찌하여 다른 문을 이용하는가.”
  대답하였다.
  “만약 다른 문이 없다면 하나의 문조차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한 되[升]가 한 말[斗]에 포섭되는 것과 같다. 만약 되가 없을 때에는 이 말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물었다.
  “만약 되가 없는지라 곧 말이 없다면, 이제 한 되라 할 적에 바도 한 말이 되리라. 한 되일 수도 없고 말이 될 수도 없다면, 하나의 행이 온갖 것을 갖추지는 않으리라.”
  대답하였다.
  “열 되가 합하면 한 말이 된다. 이미 그 되가 없다면 무엇으로 말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되가 없으면 곧 말도 없고 되가 있어야 곧 말이 있는 줄 알 것이다. 이제 되를 들면 그대로가 말이라 말과 되 밖에 따로 되와 말이 없다. 마치 거북 털과 토끼의 뿔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처음 마음으로 곧 부처를 이루는지라 그 이루는 그 밖에 따로 닦는 것이 없나니, 그 모양은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마음에 부처를 이룬다 함은 모든 공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니, 마치 경에서 말한 “보장엄 동자(普莊嚴童子)는 1생에는 얻어 들어서 잘 훈습하였고, 2생에는 그 해행(解行)을 이루었으며, 3생에는 과위의 바다에 들게 되었다”고 함과 같다.
  동일한 연기이면서 이 3생은 한 생각에 있을 뿐이다. 마치 멀리 가서 도달함이 첫 걸음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첫걸음의 도달에는 나중의 걸음이 없었다 함을 밝히는 것은 아니듯 이 동자가 과위의 바다에 들게 되었음은 오랫동안 선근을 심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문] 이미 오랫동안 닦아서야 비로소 얻었다면, 어떻게 한 생각으로 얻었다고 말하는가.
  [답] 오랫동안 선근을 닦았다고 말하면, 곧 삼승의 교에 속한다. 삼승으로부터 일승에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이 한 생각으로 닦기 시작해야 완전히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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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게 되기 때문이니, 마치 경에서 말한 “처음 발심할 적에 문득 정각을 이루었다”고 함과 같다.
  마치 뭇 하천 물이 바다에 들 적에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이내 큰 바다에 두루했다 말하면서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것과 같다. 또 그 밖에 백 개의 하천이 매우 깊다 하여도 큰 바다로 들어간 한 방울의 물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곧 삼승을 이용하여 그 안에서 여러 겁을 닦는다 하여도 일승의 한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이 때의 겁(劫)은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한 생각 동안이 바로 한량없는 겁이기도 하고 한량없는 겁이 바로 한 생각 동안이기도 하며, 한 생(生) 동안이 곧 한량없는 생이기도 하고 한량없는 생이 곧 한 생 동안이기도 한 것이니, 마치 10현문(玄門)의 때와 처소가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대승에서 밝힌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룬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인 인연이 진실한 성품에 들되 많고 적음이 없기 때문에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룬다고 밝힌 것이다. 둘째는 수행의 행이 차게 되면 맨 뒤의 생각을 취하므로 한 생각에 성불한다고 한 것이다. 마치 사람이 멀리 갈 적에 맨 뒤의 걸음으로 도착되는 것과 같다.
  만약 일승에서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룬다고 밝힌 것이면, 마치 대승에서 맨 뒤의 한 생각을 취하여 성불한다고 함과 같다. 곧 일승에 들면 맨 뒤가 바로 처음이요 처음의 생각 그것이 이룬 것이다. 왜냐 하면 인과가 상즉(相卽)하고 동시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 이루어짐을 논하고자 하면 이루고 다시 이루고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는 것이요, 중생이 뒤에 있으면서 이루어지려 하면 뒤에 있으면서 다시 뒤에 있고 뒤에 있게 되면서 다시 뒤에 있게 된다.
  이제 한 생각에 이루어짐을 든다면, 바로 모든 부처와 같은 지위로되 아직은 구경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다시 얕고 깊음의 다름이 있다. 마치 사람이 문을 나오기 시작했을 때와 오랫동안 다른 지방을 유람하고 다닐 때와는 비록 같은 허공 안에 있되 멀고 가까움에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10신과 10주 등의 5위에서 저마다 성불했다고 말하나 다시 그 얕고 깊음은 가려지는 것이니, 이 안의 것으로 잘 생각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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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요전(心要牋)』에서 이르기를 “마음마음마다 부처가 되는지라 하나의 마음마다 부처의 마음이 없고, 곳곳마다 도가 이루어지는지라 한 티끌마다 부처의 국토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진실과 허망ㆍ만물과 내가 하나를 들면 전부가 거두어지는 것이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혼연 일치가 된다.
  그러므로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따르는지라 법이 만 가지로 달라지면서 사람도 같지 아니하며, 깨치면 법이 사람을 따르는지라 사람이 일치하면서 만 가지 경계를 융합한 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지관(止觀)』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모양은 마치 모든 부처의 모양과 같고 중생계의 분량은 마치 모든 불계의 분량과 같고 중생계의 머무름은 마치 허공의 머무름과 같은 줄 관찰하라. 머무르지 않는 법과 모양이 없는 법으로 반야 안에 머무르면 범부의 법을 보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버리겠으며, 성인의 법도 보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취하겠는가”라고 했으니, 다만 실제(實際)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중생이 참 부처의 법계임을 관할 뿐이다.
  신자(身子)가 이르기를 “진실로 이 뜻을 알면 바로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했고, 미륵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부처의 자리에 가까워졌으니, 부처는 이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문수가 이르기를 “이 법을 듣고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것이 부처를 본 것이다”라고 했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로 불퇴지(不退地)에 머무르면 여섯 바라밀을 갖춘 것이요, 온갖 불법을 갖춘 것이니라”고 하셨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교리는 이지러짐이 없거늘 다만 바른 이해가 생기기 어려움은 믿음의 힘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만약 믿으면서도 이해하지 않으면 밤낮으로 무명만이 자라고 만약 이해하면서도 믿지 않으면 밤낮으로 삿된 소견만 더한다.
  믿으면서 또한 이해하여야 이 종(宗)에 계합되며 이 종에 계합된 사람은 아주 있기 드[문]이여서, 시방의 모든 부처와 내가 상응할 뿐만 아니라 대지와 산천이 일시에 같이 증득하리라.
  진각(眞覺) 대사가 노래하기를 “법 중의 왕은 가장 높고 훌륭하니/항하의 부처님들 다 함께 증득했네/나 이제 이 여의주 알아냈으니/믿어 받는 이들은 모두 상응하리라”고 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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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장(百丈) 화상이 이르기를 “이 온갖 비춤의 작용으로 들음에 맡겨 자재하라. 울고 웃고 말하는 것이 모두가 부처의 지혜를 이룰 뿐이니, 이렇게 알면 한 시라도 부처를 이루지 아니함이 없고 한 사람도 도를 얻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천진(天眞)이요 자연이거늘 조작에 무슨 상관하랴”고 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또 모든 여래가 저절로 불도 이룩함을 본다”고 했고, 법계인(法界印)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했을 적에 곧 바르게 깨달으니, 괴로움과 즐거움이 평등하여 한 맛의 부처니라”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고요한 법이 분별됨을 중생이라 하고, 예로부터 동요하지 않았음을 부처라 한다”고 했다.
  융(融) 대사의 게송에 이르기를 “법인(法忍)은 먼저 3독(毒)과 같이하고/불성은 언제나 6정(情)과 함께한다/믿고 마음 연구하면 묘한 보배 나오나니/어찌하여 번거로이 옷 속 명주(明珠) 찾으랴”고 했고, 부 대사(傳大士)는 게송으로 “부처 또한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고/마음 또한 부처를 여의지 않나니/마음이 고요하면 이내 열반이요/마음으로 능히 하면 만물이 있게 된다./ 만물은 변하여 악마를 이루고/만물이 없으면 부처를 보나니/만약 능히 이렇게 작용할 수 있으면/열여덟[十八]이 어디서 나오겠는가”라고 했다.
  방(龐) 거사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수고롭게 많이 들음 쓸데없나니/저 상인(上人)을 자세히 보라/백 개 억 개와 해와 달이/한 개의 털과 비늘에 모여 있도다./ 마음이 고요하여 모양 없기만 하면/무명의 나루에서 이내 벗어나리니/만약 이렇게 배울 수 있다면/얼마든지 정신을 깨닫게 되리라”고 했다.
  한산자(寒山子) 시에 이르기를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여 두노니/다시 무엇 하러 생각하는가/도를 통달하면 절로 성품을 보며/성품 보면 이내 여래이니라./ 천진(天眞)이라 원래 구족하거늘/닦고 증득하면 더욱 더 어긋나서/근본을 버리고 끝을 쫓는 것이니/한 바탕 어리석음만 지킬 뿐이니라”고 했다.
  지공(志空) 화상이 노래하기를 “부처 몸은 본시 마음으로 지은 것인데/어찌 문자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부처자리에서 부처를 애쓰면서 구하니/제 자리서 스스로 노역(勞役)을 하는구나”라고 했다.
  일발(一鉢) 화상이 노래하기를 “몸을 가지고 물거품을 만들지 말라/온 털에서 피 흘림을 누가 가르쳤는고/진여의 자리에 고요히 앉아/정수리에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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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짓게 함이 낫느니라./ 만대(萬代)의 금륜 성왕 태자란 분은/진여의 신령한 각[靈覺] 그것일 뿐이니/보리나무 아래서 중생을 제도하고/중생 제도 다하고 생사를 벗어나네./ 나고 죽지 않은 참된 장부시여/형상 없는 대 비로자나로다/진로(塵勞)가 모두 소멸되면 진여만이 남아/원명하고 값칠 수 없는 보주 한 알이로세”라고 했다.
  포대(布袋)화상이 노래하되 “이 마음마음 마음이 부처라/시방의 세계에서 가장 영물(靈物)이며/자재하고 묘한 작용 가련하구나/모두가 마음의 진실보다 못하리./ 훨훨 날며 자재하여 하는 바 없고/한가로이 마침내는 출가한 분이여/눈앞에서 참된 큰 도 본다 하여도/털만큼도 보지 않음 또한 크게 기이하네./ 만법 어찌 다르고 마음 어찌 다르관대/어찌하여 수고로이 경의 이치 찾는고/마음 왕은 본래 절로 많이 알음 끊어졌으니/지자(智者)는 무학(無學) 자리 밝힐 뿐일세”라고 했다.
  [문] 범부와 성인이 모두 동일한 마음의 참된 성품으로 성불한다면, 어떻게 앞과 뒤가 있음을 보게 되는가.
  [답] 앞뒤가 있음을 보다손 치더라도 성품 또한 이지러지지 않으며, 자취는 승침(昇沈)에 맡기되 본체 또한 어그러짐이 없다. 마치 잠잘 적의 마음속에도 깨달아 아는 성품이 있되 깊은 잠에서 아직 깨지는 못했으나 깨어나면 이내 나타나는 것과 같고, 젖먹이의 몸속에서 큰 사람의 몸매가 갖추어져 있되 힘과 작용이 아직 충실하지는 못하나 장성하면 이내 갖추어지는 것과 같다.
  온갖 중생들이 무명의 꿈을 아직 깨지 못하여 도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한지라 불성은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법신이 아직 원만하지는 못하나 어찌 이 일체 중생으로서 여래장 성품이야 갖추지 않았겠는가.
  [문] 고덕이 묻기를 “불성은 다 같이 소유한지라 모든 부처가 성불할 적에 중생들도 다 성불했어야 했고, 만약 저마다 다르게 소유했다 하면 이는 덧없는 것이어야 하리라”라고 했다.
  [답] 불성과 일체 중생은 다 같이 소유하되, 증득할 바[所證]는 하나요 능히 증득함[能證]은 앞과 뒤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성도했으나 우리들은 윤회한다. 앞뒤의 시간에서 보면 그 성품에는 본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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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옛 사람이 이르기를 “법신은 한 모양이로되 쳐다보면 용모가 다르고, 바른 가르침은 치우침이 없되 말하고 들음에는 뜻이 다르다”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섭론(攝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중생 죄로 법신이 나타나지 아니함은/마치 깨진 그릇에서의 달과 같다/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 차는/법의 광명은 마치 해와 같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마치 깨진 그릇 속에는 물이 담길 수 없고 물이 담기지 않기 때문에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유정들 몸속에는 사마타(奢摩他)의 물이 없는지라 부처의 달은 나타나지 아니한다. 부처는 비록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갖 곳에 두루하여 부처 일을 베풀며 짓는다. 마치 햇빛이 세간에 가득히 차서 모든 부처 일을 짓고 유정들을 성숙시키는 것과 같다.
  또 지금 자기 눈이 밝지 않은 이라면 모두가 범부와 성인에 집착하여 매임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만회(萬廻) 화상이 노래하기를 “흑백(黑白) 둘 다 없어지면 부처 눈이 열리고/한 법에도 안 매이면 연(蓮) 무더기가 나온다/진공(眞空)은 무너지지 않아 신령한 지혜의 성품이요/묘용(妙用)은 언제나 공을 지음이 없다/거룩한 지혜는 본래 불도를 이루고 적광(寂光)은 비춘 것 아니로되 스스로 원통(圓通)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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