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1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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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1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온갖 진리와 세속 등의 법에는 각각 본체[理]ㆍ현상[事]과 통(通)ㆍ별(別)의 행상(行相)이 있고 과보도 뚜렷하거늘 어떻게 한결같이 자기에게서만 녹아 없어지는가. 아직 이 종(宗)에 들지 못하면 ‘공’의 소견을 이룰까 두렵다.
  [답] 근본을 얻어야 끝이 분명하여지며 끝을 붙잡으면 종(宗)에 어긋난다. 만약 마음을 관하지 아니하면 법에 오는 처소가 없고, 유위의 일과 행을 닦기만 하여 제 마음의 무위에 통달하지 않으면 현상[事]에 미혹하고 종을 잃어서 결과는 생멸에 돌아가며, 본체[理]를 친히 하고 현상을 행하면서 쌍으로 비추며 어김이 없으면 한결같이 치우치게 닦아서 본체와 현상이 다 같이 상실될까 두렵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이르기를 “가령 보배 탑을 만든 수가 항하 모래만큼 많다 하여도, 찰나 동안에 이 경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한 마음이 바로 만행(萬行)의 원인이어서 이것으로 동체대비를 일으켜 무연(無緣)의 교화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신초(起信鈔)』에서 이르기를 “만약 한 맛의 공의 도리를 믿으면 기쁨과 싫음이 온통 끊어지고, 만약 한결같이 법의 모양을 믿기만 하면 성인과 범인이 매우 차이가 나나니, 이 모두는 행을 일으켜 닦아 나아갈 수 없다. 이제 한 마음이 바로 범부와 성인의 근원이로되 다만 미혹과 깨침의 탓으로 다름이 있게 된다 함을 믿게 하고자 하니, 이는 곧 반드시 행을 일으켜 닦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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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서 부처의 과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므로 참 마음은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과보가 뚜렷함을 알게 된다.
  또 인연을 따르면서 제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며, 인연은 거짓이라 진실이 없고 경계와 지혜는 그윽하고 고요하다.
  그런 까닭에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이른바 비록 모든 법의 제 성품이 나지 않음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시 이내 인연이 화합한 선악의 업과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 등이 상실되지도 아니하고 파괴되지도 아니함을 생각하며, 비록 인연의 선악 업보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역시 생각하는 성품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과보가 상실되지 않는다 하면 이내 만행을 골고루 닦아야 하고, 만약 성품을 얻을 수 없다 하면 이것은 한 마음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또 만행의 최초는 5계(戒)보다 우선한 것이 없다. 만약 사상(事相)에 의하면 과보는 인간과 천상에 있다. 장교(藏敎)는 무상함만을 증득하고, 통교(通敎)는 공하여 제 성품이 없으며, 별교(別敎)는 구별을 매겼으나 인과가 원융하지 아니하고, 원교(圓敎)의 관심(觀心)만이 곧 법계를 갖춘다.
  그런 까닭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비록 별상(別相)을 믿는다 하더라도 한 체성으로서 차별이 없는 모양을 믿지 않으므로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금계(禁戒)가 역시 구족하지 아니하며, 때문에 온갖 다문(多聞) 역시 완전히 갖추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무엇을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의 법이 곧 온갖 법임을 분명히 모르거늘 믿음인들 어찌 원만하겠는가. 무엇을 금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냐 하면, 계의 성품이 허공과 같음을 아직 모르거늘 금계인들 어찌 갖추었겠는가. 무엇을 들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냐 하면, 여래가 언제나 설법하지 않음을 듣지 못하면서 바로 다문을 두루 갖추었다 여기거늘 들음인들 어찌 갖추었겠는가.
  만일 종경(宗鏡)에 들어가면 어찌 계율과 착함뿐 이리요. 내지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보살의 만행으로서 하나의 법도 영향 받지 않은 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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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생각마다 분명히 알고 법마다 원만해진다.
  또 5계와 같은 것의 계율은 마음으로부터 생기고 마음은 계율로 인하여 성립된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4덕(德)과 만행의 기초가 되고, 만약 마음이 허망하게 나면 6취(趣)와 3도(塗)의 근본이 되므로, 착함마다 거두지 아니함이 없고 악함마다 거두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이 5계는 역시 대승의 법문으로서 이 5계를 묶어 삼승(三乘)으로 삼는다. 곧 3무실(無失)ㆍ3불호(不護)ㆍ3륜부사의화(輪不思議化)ㆍ3밀(密)ㆍ3궤(軌)ㆍ3신(身)ㆍ3불성(佛性)ㆍ3반야(般若)ㆍ3열반(涅槃)ㆍ3지(智)ㆍ3덕(德) 등의 한량없는 세 가지 법문에 상대되며, 가로나 세로나 끝이 없고 허공과 법계와도 평등하여 역시 무진장법문(無盡藏法門)이요, 역시 무량의삼매(無量義三昧)이다”라고 했다. 요점을 들어 말하면 바로 이는 온갖 불법이다.
  『천태금광명경소(天台金光明經疏)』에서 이르기를 “5계란 천지에서 매우 꺼리는 것으로서, 위로는 5성(星)에 상대하고 아래로는 5악(嶽)에 짝지우며 중간으로는 5장(藏)을 이루나니, 그를 범하면 하늘을 업신여기고 땅에 덤벼듦이라 스스로 그의 몸을 치는 것이다.”
  첫째 살생하지 않음[不殺]이니, 생명을 살해하면 현상의 살생[事殺]이라 하고 생명을 살해하지 아니하면 현상의 불살생[事不殺]이라 한다. 법의 문[法門]으로 풀이하면, 법을 가르면 본체의 살생[理殺]이라 하고 법을 체달하면 본체의 불살생[理不殺]이라 한다.
  만약 뜻을 지어 지키면서 마치 말에 굴레를 씌우듯 소를 치며 채찍을 잡듯 하면 그 과보는 인도(人道)에 있으면서 1백 20년 동안 육안(肉眼)을 얻을 뿐이며, 만약 저절로 성품을 이루어 마치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 듯하면 과보는 6천(天)에 있으면서 극히 오래 사는 이는 9백 26억 7천만 살을 살면서 천안(天眼)을 얻을 뿐이며, 만약 선정과 계율과 무상ㆍ고ㆍ공ㆍ무아 등의 지혜를 더욱 닦으면 과보는 변역(變易)에 있으면서 수명이 7백 아승기요 혜안(慧眼)을 얻을 뿐이며, 만약 항상함과 무상함 등의 지혜를 더욱 닦으면 과보는 연화장해(蓮華藏海)에 있으면서 법성신(法性身)을 받아 일부는 다섯 가지 눈[五眼]을 얻고 일부는 항상하는 수명[常壽]을 얻거니와 부처님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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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면 오히려 이 모든 감관은 온전하지 못하고 수명도 모자란다.
  만약 원교인(圓敎人)이 현상의 불살생 계율을 지니거나 또 본체의 불살생 계율을 지니거나 하면, 무너지지 않는 몸의 인연은 언제나 한 모양[一相]을 따르고 끊이지 않는 어리석음과 욕망은 명(明)ㆍ탈(脫)을 일으키며 음(陰)ㆍ계(界)ㆍ입(入)을 체달하여 훼상한 바가 업고 종자거나 열매거나 간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지혜를 성취하고 적광토(寂光土)에 살며 항상하는 수명은 잠연하고 다섯 가지 눈을 두루 갖추며 감관의 자재함을 얻고 수명의 자재함을 얻어서 길고 짧음에 마음대로 하나니, 이것을 마지막의 계율을 지니고 모든 감관이 구족하며 수명이 줄어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원교의 사람[圓人]이 어찌 이의 계율만을 지닐 뿐이겠는가. 살생이며 자비일 뿐이어서 역시 현상의 살생도 짓고 본체의 살생도 짓는 것이니, 마치 선예 대왕(仙預大王)이 5백의 바라문을 죽이고 그들과 함께 부처님의 눈을 보고 그들과 더불어 10겁(劫)의 수명을 누린 것과 같다.
  또 법의 문으로서 살생을 짓는다 함은 세속의 너저분한 일을 꺾어 없애고 모든 번뇌를 깨끗이 함은, 마치 수신(樹神)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어 원망스런 씨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같고 마치 겁화(劫火)가 나무를 불태워서 재와 숯이 모두 없어져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무명의 아비를 죽이고 탐애의 어미를 해치며 수면(隨眠)의 원수를 끊고 음(陰)의 화합을 파괴하며 7식(識)의 몸을 끊는다”고 했다.
  이렇듯 짓는 이는 현재에 법신을 증득하리니, 이 역(逆)은 바로 순(順)이다.
  앙굴(鴦崛)이 이르기를 ‘나는 맹세코 음ㆍ계ㆍ입을 끊되, 불살생의 계율은 지닐 수 없다’고 했다.
  온갖 진로(塵勞)는 바로 여래의 종자요 이 종자를 다 끊어야 비로소 부처라 하며, 금강의 미묘한 법신을 성취하여 맑고 고요히 온갖 것에 응하면서 형상을 아홉 갈래[九道]에 드리워 그 마땅한 바에 따라 길거나 짧은 수명을 보이고 그의 보는 바에 맡겨 모자라거나 온전한 감관을 이용하면서 그들을 교화하고 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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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도둑질하지 않음[不盜]이니, 주지 않은 것을 가지면 현상의 투도[事盜]라 하고, 준 것을 가지면 현상의 불투도[事不盜]라 한다.
  법의 문으로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한 ‘다른 이 물건을 가지지 않으면 법의 문의 불투도라 하느니라’고 하심과 같다.
  만약 계율을 지니어 업을 짓되 뜻에 맞는 결과를 구하면, 무상은 빠르게 썩히는 것이라 모두가 이는 다른 이 물건으로서 악취는 마치 똥덩이와 같고 해독은 마치 독 섞인 밥과 같다.
  지혜 있는 사람이면 구하지 않아야 할 바거늘 어떻게 은근히 구린 것을 마시고 독을 먹으면서 스스로가 훼상하겠는가.
  돌아 흐르는 여울에서 고생하는 것이 어찌 허물이 물의 흐름에 있으랴. 세 가지 장애[三障]가 부처를 장애함은 제일의천(第一義天)으로 버리고 여읠 바이니, 이것이 투도요 불투도가 아니다.
  또 2승은 네 가지 진리의 지혜로써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을 관하며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바라나, 열반의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다른 물건을 취하는 것이어서 곧 때 아닐 적의 증득이요 곧 말할 바 원인을 상대하지 않나니, 불에 볶은 종자는 나지 아니한다. 괴로움을 보고 쌓임[集]을 끊으며 도를 닦아서 지어 없앰이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 있다 하면서 열반의 소견을 이루거나 만약 공에 집착함이 있으면 모든 부처님도 제도하지 못한다.
  키는 3백 유순이면서 두 날개도 없이 세 가지 무위의 구덩이[無爲坑]에 떨어져서 굶주리고 야위고 몸에는 부스럼과 옴이 났거늘, 어찌 가난하며 괴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또 부처님도 뵙지 못하고 법도 듣지 못하며 대중의 수에도 들지 못하거늘, 어찌 제1의천을 멀리 여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투도요 불투가 아니다.
  만약 별교의 사람[別人]이면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이르며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며 온 뒤에는 다시 또 오고 간 뒤에는 다시 또 가므로 모두가 이는 가고 오는 모양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역시 주지 않은 것인데도 가지며 가진 뒤에는 버리므로 역시 가난하며, 버린 뒤에는 다시 가지고 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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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버리고 가지고 하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곤란 받고 괴로워하는 것이며, 제1의천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바로 이것이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투도요 불투도가 아니다.
  원교의 사람은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지라 받을 것도 받지 아니하고 받지 않을 것도 받지 아니하며 받지 않을 것 또한 받지 아니하고 받을 것이거나 받지 않을 것 또한 받지 아니하며 받을 것도 아니고 받지 않을 것도 아닌 것 역시 받지 아니하여 이 보리도 가지지 아니한다.
  모든 집착[取]을 막기 때문에 이 법은 평등하여 높낮이가 없으며, 높지 않기 때문에 가지지 아니하고 낮지 않기 때문에 버리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관하는 이는 여래장을 관하되 두루 갖추고 모자람이 없는지라 여의주가 뜻대로 보물을 내고 곧 아수라의 거문고가 마음대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큰 부자요 큰 부자이기 때문에 가짐이 없으며, 곧 제1의천이기 때문에 멀리 여의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마지막의 불투도 계율을 지님이라 한다.
  원교의 사람에게는 또한 투도의 법의 문이 있다. 보리는 주는 이가 없는데도 보리를 가짐은 마치 바다가 흐르는 물을 삼키되 여러 갈래의 물을 막지 않는 것과 같고 마치 땅이 짐을 지되 네 겹의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나니, 중생은 모두가 제도되고 번뇌는 죄다 끊으며 법문은 모두 알고 불도는 죄다 이룬다.
  셋째 음행하지 않음[不婬]이니, 남자와 여자의 몸이 모임을 현상의 음행[事婬]이라 한다.
  법의 문으로 풀이하면, 만약 마음이 법에 물들면 이것이 음행이며, 만약 금(禁)한 7지(支)에 들어가면 마치 원숭이가 수갑을 차고서 하나의 기름 담긴 발우를 들고 여러 대중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다.
  즐거운 접촉을 끊어 버리고 미래 세상의 깨끗한 5욕을 구함은 마치 저자에서 교역하는 법과 같고 마치 구리쇠의 돈을 순금의 돈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욕심의 일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요, 욕심 아닌 것이 아니다.
  만약 욕계의 거칠고 못된 욕심을 끊으면서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의 즐거움에 물들어 집착함은, 마치 얼음 속의 고기요 움츠린 벌레와 같아서 장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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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長壽天)에 떨어지나니, 이것은 하나의 재난으로서 선정의 맛을 탐착하는 것이라 큰 속박[大縛]이라 한다. 이것은 물들음의 욕심의 법이요 욕심의 법이 아닌 것이 아니다.
  만약 생사를 미워하고 열반을 좋아하여 그를 버리고 곧장 가면서 길을 건너되 돌지 아니하며 모든 빛깔과 소리가 물들이거나 꺾을 수 없음이 마치 8풍(風)에 동요하지 않은 수미산과 같거나, 보살의 훌륭한 공덕과 견가라 거문고[甄迦羅琴] 소리를 듣고 가섭이 일어나 춤을 추며 자제할 수 없으며 비람풍(毘嵐風)이 닥쳐와 부수기를 마치 썩은 풀같이 한다 하여도 이것은 물들음의 욕심이요 물들음의 욕심이 아닌 것이 아니다.
  만약 보살이 생사 미워하기를 마치 더러운 쓰레기처럼 여기고 열반 싫어하기를 원망스런 새처럼 여기어 두 쪽의 치우침을 버리고 뜻을 중도에 둔다면, 순도법애(順道法愛)를 일으켜 나는 것이므로 정타(頂墮)라 하며, 이는 보살 전타라(旃陀羅)이다.
  벌써 방편이 없고 이 지혜는 속박을 당한지라 원수를 이길 수 없으며 이미 닦고 다스렸던 바도 지혜의 날카로움이 없게 되므로, 이것도 물들음의 욕심의 법이요 욕심 아닌 것이 아니다.
  원교의 사람은 한 마음의 세 가지 진리[三諦]를 관하여 공(空)에 즉(卽)하거늘 물들 바가 무엇이고, 가(假)에 즉하거늘 깨끗이 할 바가 무엇이며, 중(中)에 즉하거늘 치우칠 바가 무엇이고, 공에 즉하고 가에 즉하거늘 무엇이 중이겠는가. 공에 즉하기 때문에 아(我)와 인(人)과 열여섯 가지 지견[十六知見]과 의보(依報)ㆍ정보(正報) 등의 욕망[愛]이 없고, 가에 즉하기 때문에 공(空) 무상(無相)ㆍ무원(無願) 등의 욕망이 없으며, 중에 즉하기 때문에 부처와 보리와 법륜을 굴림과 중생을 제도한다는 등의 욕망이 없나니, 세 가지 진리가 청정함을 마지막의 청정[畢竟淨]이라 한다. 부처님 한 사람만이 청정한 계율을 갖출 뿐이며, 그 밖의 사람은 모두 계율을 더럽히는 이[汚戒者]라고 한다.
  원교의 사람에게는, 또 염애(染愛) 법의 문이 있나니 마치 수밀다(須密多) 여인과 같아서 사람으로서 사람 여인을 보고 하늘로서 하늘 여인을 보되 보면 이내 견불삼매(見佛三昧)를 얻고 손으로 잡으면 도불(到佛)삼매를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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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며 말을 하면 극애(極愛)삼매를 얻고 안으면 명여(冥如)삼매를 얻는 것과 같다.
  또한 악마의 세계에서 더럽히지 않는 보살이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하여 한량없는 천녀(天女)들과 함께 종사하면서 모두에게 보리 마음을 내게 함과 같다.
  또 먼저는 욕심으로써 끌어당기고 뒤에는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 이야말로 욕심이 아닌 욕심이어서 욕심으로써 욕심을 그치게 하나니, 마치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고 소리를 가지고 소리를 그치게 함과 같다.
  넷째 망어를 하지 않음[不妄語]이다. 법의 문으로서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범부인 어리석은 사람은 보잘것없는 괴로움[下苦] 가운데서 멋대로 즐겁다는 생각을 내어 난 체하는 당기를 세우고 스스로 뽐내는 북을 치면서 있음에 집착하여 없는 것과 다투고 없음에 집착하여 있는 것과 싸우며 62견(見)을 일으켜 혜안(慧眼)을 파괴하여 진실을 보지 못한다. 입의 네 가지 허물을 갖추면서 33천의 노랑 잎인 생사를 이는 순금이라 하고 비상(非想)의 그 자리를 열반이라 잘못 헤아리는데 이것이 망어가 아니고 어느 것이 망어겠는가.
  2승은 기와 부스러기와 조약돌을 다투어 붙잡아 기뻐하면서 가지고 나와 멸도(滅度)라는 생각을 낸다. 진실을 내어도 아직 다하지 못하거니 어찌 멸도를 얻겠으며, 안락한 생각을 내어 할 일을 아직 마치지 못했거늘 어찌 안온을 얻겠는가. 그는 실로 아직 온갖 해탈을 얻지 못하였고 아직 얻지 못하였으면서 얻었다 하거늘, 어찌 망어가 아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별교의 사람을 위하여 네 가지 문으로 실상(實相)을 말씀하셨는데 하나의 있음[有]에 집착하여 세 가지 문을 막아버리고 내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에 집착하여 있고 없음에 융화하지 아니한다.
  실상이란,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까지 사라졌다. 어떻게 문자로 글자 없는 것을 쓰며 어떻게 수로 수가 없는 것을 헤아리는데, 어찌 망어가 아니겠는가.
  원교의 사람은 사실대로 관찰하고 사실대로 설명한다. 사실대로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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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은 안의 관[內觀]도 아니고 안팎의 관[內外觀]을 여읜 것도 아니며 역시 없음의 관[無觀]으로써 이 지혜를 얻지도 아니한다. 사실대로 말한다 함은, 온갖 진실로부터 진실도 아니고 진실 아님도 아닌 것 등까지이니, 이와 같은 것을 모두 모든 법의 진실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진실한 말씀을 한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불도의 소리로써 모두에게 듣게 하는 것이다.
  원교의 사람에게도 망어의 법의 문이 있다. 수레가 없는데 수레를 말하여 장난하는 어린아이들을 꾀고 즐거움이 없는데 즐거움을 말하여 저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나니, 만약 어떤 중생이라도 허망한 말로 인하여 이익을 얻게 된다면 부처님도 허망한 말씀을 하리라.
  또 말씀하기를 ‘나는 바로 시리(尸利) 등을 탐낸다. 나는 바로 하늘이요 바로 사람이다’라고 하셨으니, 실은 하늘과 사람이 아니면서 허망한 것을 가지고 허망한 것을 내어 허망하지 않음을 얻게 할 뿐이다.
  다섯째 음주하지 않음[不飮酒]이다.
  법의 문으로 풀이하면 미혹해서 소견이 뒤바뀌는 것을 술이라 한다. 술이란, 선하지 않은 모든 악의 근본이 된다. 술을 마시고 광기(狂氣)를 초래하며, 외도들은 바로 세간에서 술에 취한 이들이다.
  『대경(大經)』에서 이르기를 “예로부터 언제나 소리와 빛깔에 취(醉)하게 되어 생사에 헤맨다”고 했다. 3계의 사람과 하늘들은 온통 여기에 취하여 있다.
  2승이 무명의 술을 아직 토(吐)하지 못했음은 마치 반쯤 학질에 걸린 사람이다. 『대경(大經)』에서는 술에 취함을 인용하여 그를 돌아가게 하였다. 세간에는 상(常)ㆍ락(樂)이 없는데도 아(我)ㆍ정(淨)을 말하거니와 여래는 실로 아ㆍ정인데 상ㆍ락이 없음을 말씀하시나니, 마치 저 취한 사람은 해와 달이 빙빙 도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이 2승의 취함이다.
  보살은 무명이 아직 다하지 못한지라 똑똑하게 보이지 않는 밤에 그림의 상[畵像]을 보되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흐리멍덩하게 길을 보는 것과 같다. 가섭이 이르기를 ‘이로부터 이전의 저희들은 모두가 삿된 소견 지닌 사람이라 하오리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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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교의 사람은 여래의 행을 행하고 번뇌의 성품을 갖추어서 능히 여래의 비밀장(秘密藏)을 알므로 비록 육안이 있다 하더라도 불안이라 하며 볼 만한 바의 것도 다시는 보지 않나니, 이것이 곧 5주(住)의 정습(正習)이 일시에 남음 없이 되는 것이다. 술의 법이 이미 제거되었거니 취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원교의 사람에게는 역시 음주의 법의 문이 있다. 앙굴(鴦崛)이 이르기를 ‘진공(眞空)의 병을 가지고 실상의 술을 담아 다섯 갈래[五道]를 변화시켜 널리 떨치게 하고 으르렁거리다’라고 했으며 바사닉(波斯匿)이 취하자 더욱 더 은혜가 많았고 말리(末利) 왕후도 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계율을 지님은 술 가게에 들어가서 스스로 그의 뜻을 세우고 또한 다른 이의 뜻도 세운다’고 하셨다. 그의 문(門)을 얻은 이는 역순(逆順)이 다 함께 마땅하고, 그 자루[柄]를 잃은 이는 칼을 잡고 손을 상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진로의 번뇌로써 부처의 일을 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법이 모두 실상임을 보는 것이다. 한 마음의 실상 가운데서 세간의 허물인 장애되는 법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면 버릴 바가 무엇이며, 또한 출세간의 훌륭하고 미묘한 법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면 가질 바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아직도 실상의 [문]안에 들지 못하여 범부와 성인이란 갖가지 차별이 있음을 보고서 기쁨과 싫증을 내는 이를 위하여 마침내 그 근기의 마땅함에 따르고 그의 하는 일에 따라 교묘한 방편으로 교화하고 인도하면서, 모두가 이 하나의 끝이요 평등하여 다툼이 없고 잃음이 없는 자증법문(自證法門)에 들게 할 뿐이면, 마지막의 상ㆍ락이다. 이렇게 열어 보여서 앞의 근기에 저버리지 아니하면, 마치 팔꿈치 뒤의 굽어진 모를 아는 것 같고 주머니 속의 보물을 찾는 것과 같아서 실로 첫째가는 설명이 되며 처음과 마지막을 다 묶어서 크게 베풂[大施]의 문을 여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이 앞과 뒤이겠는가. 자기 법신(法身)의 골수를 얻고 한 마음인 지혜 바다의 근원에 이르러서 첫째의 아(阿)자에서 이미 그지없음을 껴잡았으므로 다(茶)자를 지나도 말할 만한 글자가 없다.
  [문] 계율이란 바로 궤지(軌持)요 온전히 사상(事相)에 의하여 대강령으로 세우는 것이어서 사분율(四分律) 등의 글로부터 나오거늘 지금 종경(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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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鏡) 안에서는 어떻게 온갖 행 가운데서 모두 첫째간다고 일컫는가.
  [답] 온갖 행의 기점[由]은 모두가 진리에 계합되어 근본을 드러낸다. 만약 진리를 어기고 마지막을 따르면 가르침의 종(宗)을 알지 못한다.
  일체 중생들은 모두가 본래 제 성품의 율(律)을 갖추었다. 만약 근기가 무디면 점차로 모양으로써 보이고, 만약 상근기면 바로 성품을 따라서 밝힌다.
  부 대사(傳大士)가 이르기를 “계율을 지님은 본래 마음이 남을 규제하기 위해서이나, 나는 지금 무심(無心)하므로 계율에서 벗어났다”고 한 것과 같으며,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지님과 범함은 다만 몸을 단속함일 뿐이니, 몸이 아니면 단속할 바가 무엇이냐”고 하셨다.
  이와 같은 근기와 이러한 가르침이거늘 어찌 계율이 필요하겠는가. 왜냐 하면 이미 스스로가 저마다 불성의 계율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마음 내는 범부와 거짓을 벗어나는[出假] 보살은 역시 현상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고 차계(遮戒)와 성계(性戒)의 두 가지를 모두 다 평등하게 지닌다.
  처음 마음을 낸 이는 스스로의 행과 근기가 하열하기 때문에 본체[理]와 현상[事]이 서로 도와야 되고 오랫동안 수행한 이는 남을 교화함이 원만하기 때문에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를 다 구비해야 한다.
  또 범부와 2승ㆍ보살ㆍ부처님으로서 계율을 지닌 이면,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지 아니함이 없다.
  범부는 스스로가 더럽거나 깨끗한 계율의 원인이 제 마음으로부터 생긴다는 것과 죄나 복을 받는 계율의 과보가 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전혀 모른다.
  2승은 비록 알기는 하나 마음의 변화로 말미암아 앞의 대경[塵]이 있다고 집착하며, 권소(權小) 보살은 앞의 대경이 실로 존재한다고 집착하지는 않으나 제 성품이 없어 공함에 주착하여 도무지 그 밖에는 본래 공이 없고 모두가 제 마음이 변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며, 모든 큰 보살은 바로 마음뿐임을 알고 공과 존재가 둘 다 없어졌으나 무명이 아직 다하지 못하고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며 진리의 행이 아직도 어지러지고 오히려 인위(因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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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처님께서는 참 유식(唯識)의 성품을 원만하게 증득하고 생각을 여의어 청정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님 한 사람만이 깨끗한 계율을 지닐 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가 파계한 이라 한다”고 했다.
  『육행법(六行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음에는 계율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이 따로따로 여섯 가지가 있어서 같지 아니함을 밝히겠다. 먼저 거친 범부가 계율에 의하여 죄를 일으킨 것을 밝히리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몸으로는 계율을 지녔다 하더라도 마음을 살필 줄 모르고 또 입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능(能)하다 하고 다른 이의 파계를 헐뜯나니, 이로 말미암아 나쁘게 말하고 남의 공경과 믿음을 무너뜨리면서 죄업을 이루어 장차는 나쁜 길에 가 난다.
  다음에는 범부로서, 몸과 입으로는 계율을 지니면서 아직은 관혜(觀慧)를 배우지 못하고 복 짓는 행을 이룰 뿐이다. 다음에는 2승으로서 출세간 도의 계율이니, 2승인이 생공(生空)을 관할 적에 ‘나’라는 뒤바뀜을 여의면 도의 계율을 이룬다.
  다음에는 대승의 작은 보살로서, 상공(相空)의 지혜를 관하여 마음이 깨끗하고 밝을 적에 모양 취함[取相]의 죄를 여의면 바로 계율이라 한다. 다음에는 대승의 큰 보살의 계율이니, 마음뿐임을 관하여 본래 그 밖에는 빛깔이 없고 부술 만한 빛깔도 없으며 상공 또한 없고 모양 취함의 허물조차 여의기 때문에 계율이라 한다. 이것은 작은 보살의 계율과는 같지 아니하고 비록 존재[有]의 집착을 여의기는 하였으나 그대로 ‘공’의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큰 보살이 공도 공이요 집착할 만한 공이 없음을 알면 대공(大空)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지론(智論)』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을 깨뜨려 모두가 공하면 공만이 남아 있으면서 모양을 취하여 그에 집착한다’고 했다.
  대공이라 함은 온갖 법을 깨뜨려 공하고 그 공 또한 공인 것이니, 이 글로써 증명하건대 공에 집착하는 이것도 허물인데 큰 근기는 그것조차 여의기 때문에 계율이라 한다.
  다음에는 부처님의 계율이니, 마음뿐임을 증득하여 생각을 여의고 언제나 청정하며 무명의 때가 다하면 곧 부처님의 계율을 이룬다. 다만 부처의 마음속에는 모든 공덕을 갖추어서 허물되는 뜻의 치우침을 여의면 계율이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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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이다. 모든 큰 보살이 비록 공덕을 갖추었다 해도 무명이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부처와는 같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끗한 계율은 원인에 있어서 다름이 있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여섯 가지 계율은 비록 우열은 같지 아니하나 모두가 이는 한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범소(凡小)한 이는 마음뿐임을 분명히 모르고 공을 증득[證空]하고 모양을 취한다[取相]. 모양을 취한 이는 죄와 복의 때[垢]를 이루며, 공을 증득한 이는 원만하고 항상한 문을 저버린다.
  만약 종경의 안에 들면 저절로 계덕(戒德)을 이루어서 공과 존재의 모든 인연에 동요하게 되지 않거늘, 어찌 첫째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율 법이 이미 그러하므로 만행(萬行)의 예도 그렇다. 그런 까닭에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소승계(小乘戒)는 망정[情] 때문에 종(宗)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래는 비로소 범부가 업을 짓게 되는 곳에서 ‘이것은 지어야 하고 이것은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착함과 착하지 아니함을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와 같이 가르침을 세웠으나 아직 실제로 있게 되지 못하면 이와 같은 가르침을 두었고 또한 범부의 망정에 묶인 허망한 곳에서는 모든 악을 매어 놓고 가르침으로 제지하여 인간과 천상에 가서 태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계서(戒序)에 이르기를 “만약 천상과 인간 안에 나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계족(戒足)을 수호하여 훼손함이 없게 해야 한다”고 했다.
  중생은 유위(有爲)로 업을 지으므로 허망하여 진실한 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천상에 나며, 무상과 허망은 진실이 아니요 아직 법신(法身)과 지신(智身)을 얻지 못한 것이어서 진실로 있는 종(宗)이 아니고 망정으로 있는 종이므로 소승 중에서의 궤지의 가르침이라 한다.
  『화엄경』의 계율 같은 데서는 그렇지가 아니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몸 이것이 범행(梵行)인가. 몸의 업(業)과 네 가지의 위의로부터 불ㆍ법ㆍ승의 10중(衆)과 7차(遮)며 화상 갈마(和尙羯磨)와 단장(壇場)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범행인가”라고 했다. 이와 같이 자세히 살피면서 범행이란 것을 구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범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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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행품(梵行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청정하게 행하는 이를 불성계(佛性戒)를 지닌다고 하는데 부처의 법신을 얻기 때문이다. 내지 처음 발심할 적에 바로 정각을 이루며, 불성계를 지니기 때문에 부처의 체성과 같으며, 본체와 현상이 부처의 체성과 같으며, 본체와 현상이 평등하여 참된 법계에 섞인다.
  이렇게 계율을 지니면 제 몸이 계율을 잘 지닌다는 것도 보지 아니하고 다른 이가 파계한다는 것도 보지 아니하며,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현의 행도 아니므로 자신이 보리 마음을 내었음도 보지 아니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등정각을 이루었음도 보지 아니하며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이 있다면 깨끗한 행이라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관하여야 이와 같은 것이 성계(性戒)이며, 바로 법신이다.
  법신이란 곧 여래의 지혜이며, 여래의 지혜란 바로 정각이다. 소승의 취사(取捨)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사가 없다 해도 진리와 행[理行]의 두 문에서는 역시 그만두지 않고 골고루 닦는다.
  한산자(寒山子)의 시에 이르기를 “5악(嶽)을 모두 함께 가루를 만들고/수미산을 한 치[寸]의 산으로 만들며/큰 바다를 한 방울의 물로 만들어서 /나의 마을 밭에다 빨아들여 둔다./ 그리하여 보리(菩提) 씨를 생장시키어/하늘 안의 하늘을 두루 덮음은/도(道)를 그리는 이에게 보답하기 위함이니/부디 10전(纏)에 감기지 말라”고 한 것과 같다.
  9결(結)과 10전의 성품이 공하고 고요하다 하더라도, 처음 마음을 내어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여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한 깊은 경전은 먼저 새로 뜻을 낸 보살 앞에서 설명하지 말라고 경계하는데, 종자와 습기의 중함과 일으킴과 현행(現行)이며 또 관(觀)의 얕음과 근기의 가벼움과 신해(信解)의 미치지 못함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정명경(淨名經)』에서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성품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이르기를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끊지 아니하되 역시 그와는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얻으면 숨고 그를 가까이하면 나타난다’고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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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뜻에 맛과 집착을 내어 그 일을 얻는 이면 도가 숨게 되고, 만약 곁에서 잘 관찰하여 그 성품을 분명히 아는 이면 도가 숨게 되고, 만약 곁에서 잘 관찰하여 그 성품을 분명히 아는 이면 도가 나타난다. 비록 분명히 안다 해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그와는 함께 하지 아니한다’라고 한다.
  오랫동안 행하지 않은 근기가 성숙한 보살이라야 본체와 현상이 걸림 없을 수 있다. 선덕(先德)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오랜 동안 선근 깊이 심었기에 /티끌을 만나도 티끌 침범 아니하며/이는 티끌 침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본래 내가 무심(無心)하기 때문이네”라고 한 것과 같다.
  [문]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고 참 땅[眞土]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두 한 마음이요 따로 의보(依報)ㆍ정보(正報)가 없거늘 어떻게 교(敎) 중에서 몸과 흙을 널리 말하는가.
  [답] 다만 제 마음의 성품과 모양[性相]에서 몸과 땅이 라는 이름을 분류할 뿐이다. 제 마음의 모양이란 이치로는 몸이라 하고, 제 마음의 성품이란 이치로는 땅이라 한다.
  [문] 『청량소(淸凉疏)』에서 “‘법성의 몸과 땅은 따로따로인가, 따로따로가 아닌가. 따로따로라면 법성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니 성품은 둘이 없기 때문이요, 따로따로가 아니라면 능의와 소의가 없다.’
  [답] ‘경과 논에서 달리 설명한 것을 통틀어 거두면, 법신에는 요약하여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지론(佛地論)』에서 의하여서이니, 청정한 법계(法界)만으로 법신을 삼고 역시 법성만으로 그 토지를 삼는다. 성품은 비록 한 맛이라 하더라도 몸과 땅의 모양을 따르면서 두 가지로 분별한다. 『지론(智論)』에서 이르기를 정(有情) 수 안에 있으면 불성이라 하고, 무정(無情) 수 안에 있으면 법성이라 한다>고 했는데, 가정으로 능소(能所)를 설명한 것이나 실제로는 차별이 없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록 이 몸과 땅의 체성에 차별이 없다 하더라도 불과 법에 속한다. 성품과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법성이 불에 속하면 법성신(法性身)이 되고 법성이 법에 속하면 법성토(法性土)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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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했다. 성품은 모양을 따르며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이제는 허공과 같다 함을 말하겠다. 『유식론』에서 이르기를 몸과 땅은 다 함께 빛깔의 포섭되지 않으며, 비록 형상 분량의 크고 작음은 말할 수 없다 해도 사상(事相)을 따르면 그 분량은 한량없나니, 마치 허공이 온갖 처소에 두루함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허공과 같다는 말은 통틀어 몸과 땅에 비유된다.
  둘째는 혹은 큰 지혜만으로 법신을 삼고 증득한 바 진여로 법성토를 삼는다. 때문에 『무성섭론(無性攝論)』에서 이르기를 [垢] 없고 걸림이 없는 지혜가 법신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몸 모양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말하며, 지혜의 체성은 걸림이 없어서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겠는가.
  셋째는 지혜와 진여로 법신을 삼았다. 『양섭론(梁攝論)』과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모두 이르기를 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가 홀로 존재하는 것만이 법신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여기서의 몸은 진여와 지혜를 포함시켰고 땅은 진여뿐이다.
  넷째는 경계와 지혜가 둘 다 없어지는 것으로 법신을 삼는다. 경에서 이르기를 래의 법신은 마음이 아니고 경계가 아니다. 땅 역시 따라서 그렇다>고 했다. 이 이치에 의하여 모든 경 안에서는 모두가 여래의 몸과 땅이 둘이 아님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참된 말씀에 의거하여 능소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며, 견주어 말하면 진리에 의거하여 허공과 같다는 이치를 이룬다.
  다섯째는 이 위의 넷 구절은 합하면 하나의 걸림 없는 법신이 된다. 따라서 설명하면 모두가 가능하며, 땅 역시 그와 같다.
  여섯째는 이 위의 총별(總別)의 다섯 구절은 서로가 융합되면서 형색을 탈취하는 것이니, 이 다섯의 설명을 없애면 멀리 붙일 데가 없는데 그것으로 법신을 삼으며 땅 역시 그와 같다.
  이 위에서는 단순히 경계와 지혜에 대하여서만 말하였다.
  일곱째는 5분(分)과 비원(悲願) 등으로 행한 바 항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을 온통 포섭하되 모두가 이 법신에 거두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닦아서 생긴 공덕은 반드시 진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어울리고 포섭되어 걸림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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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증득한 바인 진여의 바탕의 큰 것이 법성토가 된다. 이 이치에 의거하면, 몸과 땅은 아주 다르다.
  이제 말한 몸의 모양은 바로 모든 공덕이요, 허공과 같음을 말하면 바로 몸의 성품이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래의 몸을 풀이하면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니, 온갖 공덕과 한량없는 묘한 법으로 원만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여덟째는 보화(報化)의 색상(色相)의 공덕을 온통 거두되 모두 이 법신으로 거두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섭론(攝論)』 중의 32상(相) 등이 모두 법신의 거둠이다.
  또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묘하고 깨끗한 법신이야말로/서른두 가지의 몸매를 갖추었네>라고 했다. 그러나 세 가지의 이치가 있다. 첫째, 모양이 곧 진여이기 때문에 이법신(理法身)에 돌아간다. 둘째, 지혜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지법신(智法身)에 속한다. 셋째, 모양은 아울러 이 공덕의 법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한다.
  그 의지한 바 땅은 성품과 모양에 다 통하여 깨끗함과 더러움에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의 이 땅은 깨끗한데도 너는 보지 않는구나. 중생은 불탄 것으로 보지만 정토는 훼상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빛깔은 바로 진여요 모양은 곧 모양이 아니다. 몸과 땅의 현상과 본체는 서로서로 의지하여 보존된다. 통틀어 네 글귀가 있다. 첫째가 색신(色身)이니, 색상토(色相土)에 의지한다. 둘째가 색신이니, 법성토에 의지한다. 셋째가 법신이니, 법성토에 의지한다. 넷째가 법신이니, 색상토에 의지한다. 이 위의 것은 오히려 대승교에서 통한다.
  아홉째는 세 가지 세간을 한데 거두면 모두가 하나의 큰 법신이 되나니, 10불(佛)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그 3신(身) 등은 다 같이 이 안의 지혜와 정각에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땅 역시 그와 같다. 곧 허공과 같은 몸이면서 두루 몸을 보이거늘, 어떻게 갖추어지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화엄(華嚴)에서뿐이다.
  열째는 위에서는 권실(權實)로 나누었는데 아홉째만이 이 경에 속한다. 만약 녹여 포섭함과 동교(同敎)를 포섭함에 의거하면 통틀어 앞의 아홉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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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이치는 하나의 총구(總句)가 되는 것이니, 이는 여래의 걸림 없는 몸과 땅임을 말한다.
  또 모든 땅의 걸림 없음[諸土無礙]에는 통틀어 열 가지가 있다. 여러 교(敎)에서 땅을 설명할 적에, 혹은 는 무상함일 뿐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음의 변화이다>라고 하기도 하여, 본체와 현상이 동떨어지고 하나와 여럿이 융화하지 아니한다. 때문에 이제는 걸림 없음을 말해야겠다.
  첫째는 본체와 현상[理事]의 걸림 없음이니, 온전히 참 성품과 같으면서도 세계의 모양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장세계(華藏世界)의 바다와/법계는 차별이 없네>라고 했다. 장엄이 모두 청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루어짐과 무너짐[成壞]이 걸림 없기 때문이니, 이루어짐이 곧 무너짐이요, 무너짐이 바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셋째는 넓고 좁음[廣狹]이 걸림 없나니,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상(體相)은 본래대로요 차별이 없고/한량없는 국토는 모두 다 두루하네>라고 했다.
  넷째는 상입(相入)이 걸림 없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세계가 시방세계를 받아들이고/시방도 하나를 받아들여 남음이 없네>라고 했다. 또한 이것은 하나와 여럿[一多]의 걸림 없음이다.
  다섯째는 상즉(相卽)이 걸림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량없는 세계가 바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여섯째는 미세함[微細]이 걸림 없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정한 구슬이 구름처럼 깔리어/부처님들 그림자를 빛나게 나타낸다>고 했다.
  일곱째는 숨고 드러남[隱顯]이 걸림 없나니, 더러움과 깨끗함이 종류가 다르고 숨고 드러남이 무리가 달라서 같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겹쳐 나타남[重現]이 걸림 없다. 티끌 속에서 온갖 세계를 보고 세계가 티끌 속에서 본 세계를 받아들인 것 또한 그러하나니,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음이 마치 제석의 보망[帝網]과 같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주반(主伴)이 걸림이 없다. 한 세계에는 반드시 온갖 것이 있어서 권속이 된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로자나(毘盧遮那)가 옛날에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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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했던 바로서/갖가지의 세계 바다 모두가 청정하네>라고 했다. 갖가지의 세계가 바로 권속들이다.
  열째는 3세(世)가 걸림 없나니, 한 생각이 원융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걸림 없음은 모두가 이는 하나의 마음이다. 경에서 약 다른 법이 있어서 서로가 가지런하지 않다면 녹여 포섭될 수 없다>고 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어떻게 보살은 스스로 그 국토를 깨끗이 하기를 마치 모든 부처의 국토와 같이 하느냐. 만약 보살이라면, 온갖 법에는 나라가 없고 나라 아님이 없음을 알며, 온갖 곳에 이르되 이름이 없고 이르지 아니함도 없느니라. 또 보살이라면, 법을 보되 6정(情)에 배대하여 모두가 바로 부처의 법임을 알며, 또한 범부의 법과 부처의 법에 다름이 있음을 보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온갖 법은 모두 이는 부처의 법이니, 부처의 법은 온갖 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온갖 법과 부처의 법이란 가정으로 이름을 붙였을 뿐이므로 역시 이는 법이 아니고 또한 법 아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취착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국토가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의 국토가 깨끗한 줄 알겠으며, 이것은 법의 평등함과 코ㆍ혀ㆍ몸ㆍ뜻ㆍ법의 계가 바로 부처의 계이므로, 나는 높음이 있고 낮음이 있음을 분별하지 않아야겠다>고 하느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이렇게 온갖 법의 평등한 곳에 이르게 되면 이것이 보살로서 자신의 그 국토를 깨끗하기가 마치 모든 부처의 국토처럼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주(主)ㆍ반(伴)과 의보ㆍ정보는 다섯 가지 쌓임[五蘊]을 여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니, 다섯 가지 쌓임의 성품이 공한 바로 이것이 평등이다.
  또 법은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 보면 국토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줄 알 것이며, 국토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때문에 존재하면서 그대로가 공이며, 공은 법성이 된다. 만법은 그로 말미암아 나며 법성의 근원이 바로 참 지혜임을 보리라.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 수용하는 국토는 근기에 따라 같지 않나니, 보는 데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의 깨끗한 국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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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훼상되지 않았거늘, 중생들은 모두 타 없어지는 것으로 보는구나>고 하셨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치 사람은 아귀가 불로 보는 것을 물로 보고 아귀는 인간이 물로 보는 것을 불로 보는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나찰의 궁전과 사람의 궁전이 한 군데에 같이 있으면 서로가 상대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이가 수용하는 국토 역시 그와 같다. 만약 자기가 수용하는 국토라면 본래 이는 두루 미쳐서 3계(界)에 즉하지도 않고 3계를 여의지도 않았기 때문이나, 만약 법성토라면 곧 생김과 사라짐이 언제나 그대로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의 국토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존재와 소멸과 더러움과 깨끗함의 소견을 지을 수 없는 줄 알 것이다.”
  또 고덕(古德)의 해석에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제 성품의 몸과 땅은 이미 똑같이 증득한 바라 분명하여 이 체성은 같아서 마치 한 방 안의 허공과 같다. 둘째는 자신이 수용한 국토는 마치 천 개의 등불빛이 방안에 똑같이 두루한 것과 같다. 셋째는 다른 이가 수용한 국토와 변화한 국토의 두 가지는 앞에서 바로 증명하였거니와 역시 서로 비슷하여 이름이 같은데도 근기 따라 보는 것이 다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업(業)을 따라 나타난다 함은 중생의 업의 과보에 따라 모두 잘 나타남이니, 마치 석가가 세간에 출현하면 국토가 협소해지면서 바닷물은 불어나고 미륵이 내려와 나면 세계가 넓어지면서 넷의 큰 바다는 줄어지며 보살이 모임에 있으면 모든 언덕과 구덩이가 없게 되고 성문이 있는 곳에는 나쁜 쓰레기가 가득 차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유정들은 따르면서 맞추어 나타나는 넓고 좁고 깨끗하고 더러움은 모두가 중생들의 마음의 헤아림에서 이루어지되, 부처의 과위에는 지음[作]이 없다.
  유공(裕公)이 이르기를 “마음은 모든 부처가 증득하면 법신이 되고, 경계는 모든 부처가 증득하면 정토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는 다 소증(所證)이요 지혜는 능증(能證)이다.
  『자은소(慈恩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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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었다.
  ‘정토는 무엇으로 체성을 삼는가?’
  답했다.
  ‘『섭론(攝論)』에서 준하건대 유식의 지혜[唯識智]로써 체성을 삼는다.’”
  부처와 보살은 유식의 지혜로 체성을 삼게 된다. 곧 『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에서 이르기를 “지혜로 유식을 익혀 이와 같이 정토를 취하는 것을 통달한다”고 했으며, 『불지론(佛地論)』 같은 데서도 “부처의 자재한 샘[漏]이 없는 마음으로써 체성을 삼으며, 부처의 깨끗한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밖에 따로 실(實) 등의 깨끗한 마음과 빛깔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빛깔[色] 등은 바로 부처의 깨끗한 마음의 소감(所感)이니, 부처인 제 마음을 여의고 그밖에 따로의 능감(能感)은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가실(假實)의 빛깔은 모두가 부처의 깨끗한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나니, 바로 이 깨끗한 마음이 가실의 빛깔을 능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 “푸른 빛과 노랑 빛깔 노랑 빛”이라 한 것들이 이것이다.
  『천태무량수소(天台無量壽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즐거운 나라와 고통의 지역ㆍ순금 보석과 진흙 모래ㆍ태옥(胎獄)과 연꽃 못ㆍ가시덤불과 옥나무[瓊樹] 등은 진실로 마음으로 말미암아 더럽다 깨끗하다는 소견으로 양쪽 땅의 오르고 내림을 보며, 행은 선악으로 펼쳐져서 두 방소의 거칠음과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이니 형상이 단정하면 그림자가 곧고 근원이 혼탁하면 흐린 물이 흐림에 비유된다. 내지 은미한 행[微行]과 묘한 관은 도에 이르는 요긴한 길[要術]이라 하겠다. 이 경은 마음의 관(觀)을 종(宗)으로 삼고 실상으로 체성을 삼는다.”
  그 『기(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묘한 관[妙觀]으로 도(道)에 이르는 것은 업행이 비록 많기는 하나 마음의 관으로 요긴한 길을 삼아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정토(淨土)가 분명히 나타난다. 지음이 없는 체성은 여여(如如)하기 때문에 은미한 행이라 하며, 일심삼관(一心三觀)은 모두가 공(空)ㆍ가(假)ㆍ중(中)이요, 능소가 비록 나누어져서 서로서로 부사의(不思議)를 비추기는 하나 경계는 반드시 마음의 근원에 있는 것이니, 곧 관의 공(功)이다. 가로로 두루하고 세로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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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평등하고 둘이 없으며 3관의 원인이 뚜렷하고 3덕(德)의 결과가 가득 차며,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요긴한 이치가 이룩되기 때문에 도에 이르는 요긴한 길이라고 말한다.”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마음을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마음의 높낮이가 있기 때문에 언덕이 생긴다”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부처의 국토는 언제나 깨끗하거늘 어찌 변화를 기다린 뒤에 장식하겠는가. 대개 이는 뭇 사람들의 보는 바가 변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보면 흙과 돌ㆍ산ㆍ하천이 되나니 모두가 제 업의 영상이 일어나는 것이며, 보살은 순전히 미묘한 지혜가 되나니 바로 이 참 지혜가 행하는 바로서 범부ㆍ성인의 마음을 여의고 진리와 세속의 경계가 없다”라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화엄경』에서 밝힌 연기법계문(緣起法界門)과 이사무이(理事無二)는 인연마다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마다 참되지 아니함이 없다. 시방세계는 한 참된 성품 바다[性海]로서 큰 지혜가 원만하고 두루하여 국토의 경계는 온통 성품 바다가 되나니, 하나의 참 법계는 유정과 무정의 업을 따라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화엄 속의 순수하고 참된 경계는 온통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10주(住) 보살은 슬기[慧]로 나라를 삼고 10행(行) 보살은 지혜[智]로 나라를 삼으며 10회향(廻向)과 10지(地)는 미묘함[妙]으로 나라를 삼거니와 유정과 무정의 두 소견의 차별은 설명하지 않았나니, 『화엄경』이 나타내는 본래 법이 삼승의 권학교(權學敎)와는 다르기 때문이며, 이 무정과 이 유정은 남이 있고 없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문] 일체의 몸과 땅은 8미(微)로써 이루어지거늘 어떻게 마음뿐이면서 질애(質礙)가 없는가.
  [답] 물질[色]의 극미(極微)에 집착하면 질애의 성품이 있나니, 이것은 소승종이요 대지(大旨)에 공통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물과 아귀의 물이 어찌 다른 방소에 있겠으며 털의 바다와 겨자씨의 산을 누가 크다 작다 논하겠는가. 하나의 티끌이 하나의 식(識)이요 만 개의 경계가 만 개의 마음이다. 만약 마음을 미혹해서 물질을 보면 통합과 막힘이 분명히 나타나고, 만약 물질을 알면서 마음을 밝히면 이것은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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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고덕이 이르기를 “만약 물질이 곧 공임을 알면서 물질을 관하면 잘못인가. 만약 물질이 공하지 않은 줄 미혹하면서 물질을 관하면 옳은 것인가. 만약 공이 곧 물질임을 알면서 공을 관하면 잘못인가. 만약 공이 물질과 다르다 함을 관하면서 공을 관하면 옳은 것인가”라고 했다.
  이야말로 아는 것과 미혹이 딴 길이어서 스스로 곱고 추함을 분별하거니, 어찌 물질과 ‘공’의 두 가지 경계에 관계하여 삿됨과 바름을 가리겠는가.
  만약 이 종(宗)의 길을 환히 알면 항상한 물질[常色]이라 관하여도 언제나 바르고, 만약 이 뜻에 미혹하면 비록 공으로 관한다 해도 항상 삿되다.
  이는 또 중생이 두 가지 공을 분명히 모름은 모두가 마음과 물질을 실유(實有)로 집착하기 때문이니, 관하는 마음도 미묘하지 아니하고 비추는 경계도 공덕이 없어서 이미 물질에 즉(卽)하여 공을 밝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미세하게 쪼갤 수도 없고 거칠거나 가는 물질 무더기[色聚]를 알지 못하거늘, 어찌 진실함과 허망한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겠는가.
  이제 깊고 얕은 근기에 대(對)하여 간략하게 성품[性]과 모양[相]의 이치를 드러내어 원돈(圓頓)의 근기로 하여금 넘치지 않게 하고 중하(中下)의 지혜로 하여금 빠뜨림이 없게 하겠다.
  선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함은 본래 중생제도를 위해서인데, 유정들이 미혹한 집착의 뿌리가 깊어서 망령되이 아(我)ㆍ법(法)이 실로 있다고 헤아리므로 부처님께서는 곧 교묘한 방편으로 뒤바뀐 마음을 제거하여 물질 무더기 가운데서는 그 분석을 버리고 저 두 가지 집착인 아ㆍ법이 모두 공임을 드러나게 하신다.
  마음을 관하면서 분석할 적에는 칼 같은 것을 사용함이 있듯 분석할 대상을 드러내며, 물질이 비록 한량없다 해도 두 가지를 초월하지 않나니, 첫째는 구애(俱礙)요, 둘째는 소애(所礙)이다.
  구애인 물질은, 다섯 가지 감관과 다섯 가지 대경으로서 만드는 네 가지 요소[四大]이니, 이것이야말로 총체(總體)이다. 이 중에서 구별하면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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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ㆍ황ㆍ적ㆍ백의 이 네 가지는 바로 실(實)이요,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거칠고 가늘고 높고 낮고 바르고 바르지 않은 이 열 가지는 바로 가(假)이다. 실제의 존재에 의지하기 때문에 형색(形色)이라 하며, 다른 것을 장애할 수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장애받기도 하기 때문에 구애라고 한다. 이 분석에 의하여 극략색(極略色)을 이루며 극략색은 곧 법처(法處)에 속한다.
  다시 빛ㆍ그림자ㆍ밝음ㆍ어두움ㆍ연기ㆍ구름ㆍ티끌ㆍ안개ㆍ형색(逈色)ㆍ표색(表色)ㆍ공일현색(空一顯色) 등의 이 모두는 가유(假有)로서 다른 것의 장애를 받되 다른 것을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소애인 물질이라 한다. 이 가상(假想)에 의하여 분석할 때에 극형색(極逈色)이라 하고, 극형색은 곧 법처(法處)에 속한다.
  셋째는 행상(行相)과 의지할 바[所依] 선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유가사(瑜伽師)가 관행을 지을 적에는 4정려(靜慮)의 근본정(根本定)의 마음에 의지하고, 지혜와 함께 할 때에는 저 감관ㆍ경계와 바깥의 물질에 의지하여 형질이 된다.
  자기의 식(識) 위에서 영상이 변하면서 되는 반연이 하나의 물질 무더기 안에서 처음에 갈라져 두 가지가 되거니와, 이 두 갈래를 관하여도 물질 위에는 아ㆍ법은 도무지 없으며 똑똑하고 분명하여 잠기지도 아니하고 들뜨지도 아니한다.
  다시 이 두 갈래의 물질 속에서 아와 법이 아직도 존재할까 하여 다시 지혜의 마음으로 분석하여 네 가지로 나누며, 이렇게 하여 인허(隣虛)의 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하면서 다시는 분석할 수 없으면 이름을 색후변(色後邊)이라 하며, 만약 다시 분석된다면 곧 물질 아닌 것[非色]이 된다.
  이 가정으로 세운 극략색과 극형색의 두 가지 극미(極微)에 의하여 추구하고 찾아도 아와 법의 실체는 도무지 없으며, 변계(遍計)의 공을 통달하고 의타(依他)의 가(假)를 깨치면 이내 이끌어 일으킬 수 있어서 2공(空)의 무루 근본지(無漏根本智)가 생기고 곧 2공에서 나타날 바의 진리를 증득한다.또 부처의 국토라 함은 마치 지금의 한 나라 안은 모두가 천자(天子)에게 장악되고 영솔을 받아 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지금 이것도 또한 그러하여서 마음의 한 생각과 한 인연에 따라 유정ㆍ무정이 물질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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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거나 간에 모두가 실체의 지혜로 비출 바 경계로서 그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알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부처의 국토라 한다.”
  『천태정명소(天台淨名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생을 성취(成就)함에 따라 부처의 국토가 깨끗하고 부처의 국토가 깨끗함에 따라 설법이 깨끗하며 설법이 깨끗함에 따라 지혜가 깨끗하고 지혜가 깨끗함에 따라 그 마음이 깨끗하며 그 마음이 깨끗함에 따라 온갖 공덕이 깨끗하나니, 그러므로 보적(寶積)보살이 정토를 얻으려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했다.
  그 마음이 깨끗함에 따라 부처의 국토가 깨끗하다 함은, 마음 성품이 본래 깨끗하여 마치 허공과 같은 것으로 관하면 바로 이것이 성품의 깨끗한 경계요 경계가 곧 국토이다. 지혜를 관하여 깨치면 이 마음을 부처라 하는데, 처음의 관을 원인이라 하고 관이 이루어지면 결과라 한다.
  만약 스스로의 행을 논한다면 바로 이것은 심왕(心王)으로서 물들음이 없고, 만약 다른 이를 교화함에서 논하면 바로 이는 심수(心數)로서 해탈이며, 지혜의 수(數)는 대신이 되어서 모든 수 위의 미혹을 배제할 수 있어서 마음 근원의 청정한 국토로 환원하는 것이니,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부처 국토가 깨끗하다’고 한다.
  또 네 가지 가르침[四敎]에서 밝힌 바 네 가지 마음에 따라 이 네 가지 마음이 깨끗하면 곧 네 가지의 부처 국토가 모두 깨끗하여지며, 이 네 가지 마음이 바로 하나의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일 뿐이어서 이 마음이 깨끗해지면 온갖 부처 국토가 모두 다 깨끗하여진다.
  마치 거울이 밝으면 비침이 멀고 방울이 울리면 소리가 높은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면 지혜와 행이 다 같이 맑고, 끝이 비어지면 경계가 모두 고요하다. 더럽다 깨끗하다 말함은 마음으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으면, 이에 하나가 깨끗해지면 온갖 것이 깨끗하여진다. 혹은 이루어지고[成] 머무르고[往] 무너지고[壞] 없어짐[空]을 보기도 하나 모두가 중생의 선악의 업으로 나타난다.”
  『수능엄경』에서 말하기를 “사보(思報)는 나쁜 과보를 부르고 이끄는 것이라, 이 사업이 엇갈리면 죽으려 할 적에 먼저 나쁜 바람이 불면서 국토를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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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하는 것을 보며, 죽는 이의 신식(神識)은 공중 위로 불리었다가 바람에 거두어져 떨어지면서 무간 지옥으로 빠지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사(思)란 뜻[意]이다. 국토는 파괴되지 않는데 마음의 분별로 말미암아 국토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뜻이 생각하는 영상인 법진(法塵)으로 말미암아 생멸의 과보가 있는 처소로 돌아가 생멸의 변천을 받게 된다”고 했다.
  또 사는 사람은 국토로 보거니와 죽은 사람이면 파괴됨으로 보는 것이니, 모두가 뜻이 남으로 말미암아 법이 나는 것이므로 마음이 소멸하면 경계도 소멸한다.
  『십사과정토의(十四科淨土義)』에서 이르기를 “경전에 항하 모래만큼 많은 부처의 국토가 있음은 모두 성인들이 중생들을 이끄는 친밀한 자취이며, 부처에게는 실로 국토가 없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그를 밝혔느냐 하면, 아직 더러운 형색을 면하지 못한 이는 본래 국토에 의탁하여 살아가야 하되, 8주(住) 이상이면 영원히 더러운 형색을 벗어난지라 비추는 체성은 홀로 서고 정신은 방소가 없는데 국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있다고 말함은 중생의 아는 것이 작고 미혹이 중하여 아직은 참된 교화를 감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과 천상의 복락으로 그를 인도하여 계율과 선행을 하게 하며, 혹은 삼승 4과(果)로 그를 꾀어 도품(道品)을 닦도록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행에 접한 공은 저절로 보리에 가만히 귀착되는 것이며, 탐내고 앙갚음하는 미혹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생사에 유전하게 된다.
  실로 국토는 중생에 속하기 때문에 나라마다 더럽지 아니함이 없고, 깨끗함은 부처에 속하기 때문에 나라마다 깨끗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나의 정토는 훼상되지 않는다”고 하심이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문] 밝히신 정토는 삼가 높은 뜻을 훈습하면서 현종(玄宗)을 찾을 뿐이겠으나 현상의 일로써 깨끗하게 되지는 아니하며, 깨끗함은 더러움 없음에서 취하여진다. 이것은 곧 행한 업이 같지 아니하고 과보의 이름이 뒤섞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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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이다. 그러므로 돌과 모래 밟는 사람은 하늘과 같이 7보(寶)의 땅을 밟을 수가 없다. 이제 의심되는 것은, 축생의 업과 사람은 다른데도 똑같이 돌과 모래 있는 땅을 밟고 있으니 세우신 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답] 축생이 사람과 똑같이 돌과 모래를 밟을 수 있는 까닭은 진실로 한 터럭만큼의 조그마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같이 다 함께 불타고 밟히는 고통을 면한 것이며, 선행이 미미하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못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로ㆍ가마솥과 돌ㆍ모래는 선행을 한 경중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사실은 서로가 이웃이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사람이 돌과 모래와 같이 땅을 밟는 것이요, 선행이 훌륭하고 현상계가 정묘한 것은 뛰어난 경지이기 때문에 돌과 모래를 밟는 사람은 7보 땅을 오르지 못한다.
  [문] 깨끗하거나 더러움은 일정한 형질이 없어서 마치 석마남(釋摩男)이 질그릇을 잡아도 순금이 되고 아귀는 물을 보아도 불이 되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깨끗하고 더러운 지역이 동떨어지는 것인가.
  [답] 인연의 법은 진실로 이런 이치가 있다. 경에서 이르기를 “석마남과 같은 이것은 바로 뜻을 보인 것 아님이 없으니, 법에 일정한 모양이 없음을 밝히면서 중생이 한계 짓고 막힘이 심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아귀는 미혹 때문에 물이 불로 되는 것을 보나 이것은 아니며, 지역이 동떨어지는 까닭은 돌과 모래 밟는 사람이 똑같이 안양국(安養國)에 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해석에 이르기를 “깨끗함은 더러움이 없음에서 취하여진다 함은, 형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고 형상이 없는 것을 취하여 깨끗함을 삼는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7보는 돌과 모래의 더러움이 없어서 깨끗하게 된 것이요, 7보로 깨끗하게 되었음을 취하지는 아니한다”고 했다.
  축생과 사람은 선행의 업이 서로 이웃이다. 그 까닭에 똑같이 돌과 모래를 밟는 것이요, 현상계가 정묘하다 함은 사람과 하늘들의 업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은 7보의 땅을 밟지 못하는 것이다.
  축생은 사람보다는 못하여 고통을 당한다 함은, 그의 인연으로 매를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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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의 요리가 되며 서로서로 상대에게 잡아먹히는 등의 고통을 당하지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못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말한다.
  화로와 가마솥[鑪鑊]이라 함은 죄가 경하면 사람과 같은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작은 지옥들은 철위산(鐵圍山) 사이거나 해변이거나 너른 들판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비(阿鼻)지옥 등은 큰 사람과는 딴 데 있으며, 하늘은 선행이 뛰어날수록 7보의 사정(事情)이 아름다워지므로 사람과는 한정된 지역이 동떨어진다.
  질[문]가운데서 석마남은 인간 안에서 바로 하늘의 과보를 받거늘 무엇 때문에 사람은 7보 땅의 섬돌을 밟지 못한다 하느냐고 따졌으며, 또 아귀를 들어 사람은 아귀의 지역과는 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히려 하면서 사람의 과보로 아귀의 과보를 이룰 수도 있다고 하는 것에 대답하기를 뜻[旨]을 보이는 것이라 하였으니, 나투어 보인다[示現]는 뜻이다. 막혀 미혹함을 제거한다는 뜻이니, 언제나 극도(極度)까지 간 것이다.
  이것은 불이 아니다 함은 아귀는 비록 제 업에 미혹당하여 물이 불로 되는 것을 보기는 하나 물이 미혹을 훈습해서 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遂)란 쫓음[從]이다.
  인연의 법은 진실로 이런 이치가 있다 함은, 여래의 설법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으니, 첫째는 인연의 문[因緣門]이요, 둘째는 인과(因果)이다.
  인연의 문에는 곧 일정한 형질이 없지만 인과의 문에는 곧 일정한 이치가 있다.
  또 경에서 밝힌 온갖 세간의 깨끗하거나 더러운 국토는 모두가 보살의 행으로 이루어지는 바요, 중생의 업이 함께 느낀다[共感]. 만약 사바(娑婆)의 인연이 성숙하면 곧 사바요, 만약 화장의 인연이 성숙하면 곧 사바가 바로 화장 세계이다. 만약 행이 없고 느낌이 없으면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나니 마음을 여읜 그 밖에 다시는 하나의 법도 없다.
  화장 세계의 바다와 같다 함에도 요약하여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 중생의 여래장식(如來藏識)에서 보면 바로 이것은 향수의 바다[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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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요, 또한 법성의 바다[法性海]이다. 머무름의 근본이 없는 데에 의지하는데, 바로 풍륜(風輪)을 말하며 또한 망상의 바람을 말한다. 이 바다 안에는 인과 모양의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성덕(性德)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 정인(正因)의 꽃[華]이요, 세간과 출세간의 미래 세상과 결과 법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감추어짐[藏]이라 한다.
  만약 법성으로 바다를 삼는다면 마음이 바로 꽃이요, 포함되어 감추어짐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장식(藏識)의 상분(相分) 안에는 반은 바깥의 그릇[器]이 되나니 잡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요, 반은 안의 몸이 되나니 붙잡아 제 성품으로 만들어 감각을 내기 때문이다. 여래장식이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느냐 하면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요, 행한 업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부처님에서 보면 대원(大願)의 바람으로 대비(大悲)의 바다를 유지하여 끝없는 행(行)의 꽃과 간직함의 두 가지 이익을 내며, 더러움과 깨끗함의 결과의 법이 겹치고 중복되는 데 걸림 없기 때문에 느낀 바의 세계 모양이 그와 같다. 그런 까닭에, 겹치고 겹쳐 그지없으며 모두가 범부와 성인 마음의 진여 성품이기 때문이다. 위의 큰 바다는 이미 이것이 장식이거니와 이제는 마음의 꽃 안에 포섭된 모든 종자를 밝히겠다. 낱낱 종자는 장식의 바다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향수의 바다가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에는 성덕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모두 장엄(莊嚴)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법은 인연 따라 허환하게 생기는지라 체성과 작용은 다 같이 없고 숨거나 나타남이 서로가 일어나며, 혹은 여럿 안에서 하나가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하나 가운데서 여럿이 나타나기도 한다.
  만약 일어남과 다함의 근본 연유를 모르면 저절로 경계 안을 따라 구르게 되면, 혹은 좋은 경계를 따르면서 기쁨이 쌓이기도 하고, 혹은 나쁜 인연을 쫓으면서 두려움이 나기도 하다.
  만약 온갖 범부ㆍ성인 등의 법을 분명히 알면 모두가 이는 제 마음의 경계이므로, 이 하나의 도장[印]으로써 뭇 두려움은 가라앉고 소멸한다.
  그런 까닭에 『지지경(持地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일다(阿逸多)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에서나 온갖 보살의 법에서 두려움을 내지 말고 온갖 벽지불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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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며 온갖 성문의 법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온갖 범부의 법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며, 내지 고요함에서나 어지러움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거짓에서나 진실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며 믿음에서나 믿지 않음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착한 생각에서나 착하지 않은 생각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며 머무름에서나 머무르지 않음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와 같이 보살은 온갖 법에서 두려움을 내지 말지니라.
  아일다여, 나는 옛날에 이러한 등의 두려움이 없는 법을 닦았기 때문에 정각을 이루게 되었으며, 모두 다 온갖 중생들의 마음의 경계를 분명히 알면서도 아는 바에서 안다는 상(相)을 일으키지 않았고 나의 증득한 바로써 근기 따라 연설하여 법을 듣는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광명다라니(光明陀羅尼)의 도장[印]을 획득하게 하였으며, 법의 도장을 얻었기 때문에 영원히 물러나지 않았느니라.’”
  그 해석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두려움이 없는 법을 요달하면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畏]을 제거할 수 있으며, 이 한 마음의 문에 들면 장차 기쁨의 땅에 가 날 것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마음이 깨끗해지면 부처국토의 공덕이 깨끗해짐을 얻는다”고 했다. 때문에 “정토의 결과를 얻고자 하면,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결과를 들어서 원인을 권한 것이니, 마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깨끗함이라 일컫느냐 하면, 만약 수행한 이가 마음의 처소를 얻지 않으면 마음에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으며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깨끗한 마음이라 한다.
  또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를 “공하기 때문이요 여의기 때문이요 내지 않기 때문이요 고요히 사라지기 때문에, 깨끗함이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마음이 깨끗하면 부처 국토가 깨끗하다 함은, 원인은 바로 마음임을 밝히며 이것은 마음 밖에는 경계가 없고 마음을 따르면서 생김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이미 청정해지면 그 밖의 과보 모양 또한 깨끗해지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마음을 따르는 것이므로 스스로 체성과 형질이 없거늘 어찌 서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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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하면서 다른 곳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행한 업이 같지 않으면 저마다 소견이 다르며, 행한 업이 같기 때문에 소견이 다르지 않게 된 까닭은 마치 소리가 온화하면 메아리가 순(順)하고 형상이 곧으면 그림자가 단정한 것과 같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다름은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어진다. 만약 마음에 분별이 없다면 더러움과 깨끗함이 어찌 생기겠는가. 때[垢]의 실성(實性)을 보면 곧 깨끗한 모양이 없거늘, 어찌 두 가지 법의 상대가 있으면서 차별을 논하겠는가.
  그러므로 『화엄경』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세계는 분별이 없어서/미움도 없고 사랑도 없거니와/다만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이렇게 보는 데에 다름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근기에 대하여 가르침을 세웠고 분별의 [문]가운데서 중생의 깨끗한 마음을 논한 것이니, 한 가지 뿐만이 아니므로 뇌동(雷同)해서는 안 된다.
  옛 해석에서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한 깨끗함[眞實淨]이니, 무루의 착한 마음을 말한다. 둘째는 비슷한 깨끗함[相似淨]이니, 부처님ㆍ세존을 말한다. 넷째는 마지막이 아닌 깨끗함[不究竟淨]이니, 10지(地) 이하로부터 범부까지를 말한다.
  또 네 구절로 체성[體]과 모양[相]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해석하였다.
  첫째는 체성은 깨끗하고 모양은 더러운 것이다. 부처가 나타내는 더러운 국토의 모양이니 부처의 마음은 청정하여 샘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 하열한 사람을 제도하려고 이 뭇 나쁘고 깨끗하지 않은 국토를 보일 뿐이다”라고 했다.
  둘째는 체성은 더럽고 모양은 깨끗한 것이다. 마치 10지 이후의 본식(本識)과 유루의 6ㆍ7식과 아울러 지전(地前) 범부의 온갖 유루의 마음에서 나타나게 되는 정토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유루이기 때문에 체성이 더럽다고 하며, 여래의 청정한 부처 국토에 의하여 자기 식(識)이 변하면서 정토의 모양이 나타난 듯하므로 모양이 깨끗하다고 한다.
  셋째는 체성과 모양이 다 함께 깨끗한 것이다. 마치 부처와 10지 이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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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루의 마음 가운데서 나타나는 바 정토와 같은 것이다.
  넷째는 체성과 모양이 다 함께 더러운 것이다. 마치 유루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바 더러운 국토와 같은 것이다.
  만약 깨끗한 국토와 깨끗한 마음을 분별하면, 다시 여러 가지가 있다. 또 마지막의 깨끗한 마음과 아직 마지막이 아닌 깨끗한 마음이 있고, 유루의 깨끗한 마음과 무루의 깨끗한 마음이 있으며, 모양 있음의 깨끗한 마음과 모양 없음의 깨끗한 마음이 있고, 현행(現行)을 누르는 깨끗한 마음과 종자를 끊는 깨끗한 마음이 있으며, 제 힘의 깨끗한 마음과 남의 힘의 깨끗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근기에 따라 일정함이 없는 법을 말씀하셨다.
  만약 대지(大旨)를 논한다면 오히려 하나의 깨끗함도 있을 수 없거늘, 하물며 여러 가지 문이겠는가. 이야말로 한 마음의 진여로서, 제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 따라 대처하면서 얕음이 있고 깊음이 있으며 혹은 더럽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기도 한 것이니, 진리를 막고 일을 방해하여 하나만을 지키면서 모든 미혹의 숨기거나 나타내는[卷舒] 문을 의심하고 너르거나 좁은[通局] 소견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비록 뜻[旨]은 동일하다 해도 모양에서 보면 차별이 없지 않으며, 비록 다름이 있다 말하나 체성의 한결같음을 따라 동요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그가 동일하다 하면 안양국의 보배 방소가 사바세계의 언덕일 것이요, 만약 그가 다르다 하면 시방의 부처 국토가 한 가닥으로 맑고 텅 빌 것이며, 만약 그가 있다고 말하면 끝없는 깨끗한 세계가 마치 허공과 같을 것이요, 만약 그가 없다고 말하면 묘한 국토가 교차해서 늘어섬이 마치 하늘 제석의 보망(寶網)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미롭게 네 구절을 벗어났고 미묘하게 백비(百非)를 벗어났다. 도는 한 마디의 말로써 할 수 없고 진리는 하나의 이치로 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과 땅은 마음일 뿐이니, 세간에서 보는 바와 듣는 바의 법만을 가지고 증험하면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또 마치 하천과 산악이 신령하지 아니하되 사람에게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흙과 나무와 기와와 돌이 어찌 아는 바가 있겠는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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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정밀한 뜻은 사람에게 있어서 식으로 쫓아 변하는 바요, 혹은 사람 아닌 것에 붙게 되기도 하나 모두가 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당(唐)나라 국사(國史)에 나오는 것과 같다.
  “덕종 황제(德宗皇帝) 정원(貞元) 7년에 표국(驃國)의 어떤 사신이 거듭 통역과 함께 찾아 왔으므로 임금은 몸소 사신을 초빙하여 말하였다.
  ‘진(秦)ㆍ한(漢) 이래로 아직 중국(中國)에 통한 일이 없었도다.’
  임금은 또 물었다.
  ‘무엇으로 짐(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알았던가?’
  그러자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 3년 동안 소와 말의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눕혔더니, 강물에는 큰 물결이 없었고 바다에도 파랑이 일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중하(中夏)에는 화려한 풍속이 있음과 폐하의 거룩한 덕을 알았습니다.’”
  구슬은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칼은 오도(吳都)로 떠났으며 범은 새끼를 업고서 강물을 건넜고 봉씨[鳳]는 상서를 바치면서 지경 안에 들어왔다.
  소와 범은 헤아리거나 분별함이 없고 구슬과 칼은 본래 무정(無情)에 속하거늘, 어찌 덕을 느끼고 은혜를 알며 힘센 것을 껴안고 약한 것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온전히 이것은 사람의 마음의 변한 바요 참 유식(唯識)의 이치로 이룩된 바이니, 마치 선행이 두터우면 천당이 앞에 나타나고 악행을 익히면 불 수레가 영에 가득 차며 생활[命]이 부유하면 구슬과 보물이 광에 넘치고 업(業)이 가난하면 띠와 흙이 몸에 모이는 것과 같다.
  종경(宗鏡)으로 그를 비추기만 하면 만 가지 일이 그림자와 메아리에서 도피하기 어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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