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2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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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2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참 마음은 형상이 없고 묘한 체성은 모양이 끊어졌거늘, 어떻게 보화(報化)와 장엄(莊嚴) 등의 일이 있는가.
  [답] 모든 부처의 법신(法身)은 순금과 같고 상호(相好)는 금으로 만든 꾸미개와 같다. 금으로 만든 기구는 체성과 작용이 온전히 같으며 마음으로부터 빛깔을 나타내나 그 성품과 모양에는 둘이 없다.
  『기신론(起信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묻는다.
  ‘만약 부처의 법신(法身)에 갖가지의 차별된 빛깔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의 모든 빛깔을 나타낼 수 있는가?’
  대답하였다.
  ‘법신은 바로 빛깔의 실체(實體)이기 때문에 갖가지의 빛깔을 나타낼 수 있다. 본래부터 빛깔과 마음은 둘이 없어서 빛깔의 본 성품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이므로 지신(智身)이라 말하고, 마음의 본 성품이 곧 빛깔의 제 성품이므로 법신이라 말한다. 법신에 의하여 일체 여래가 나타내는 바 색신(色身)은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끊임이 없고, 시방의 보살은 감당해 낼 만한 바에 따라 원하고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한량없는 수용신(受用身)을 보며, 한량없는 장엄된 국토는 각각 차별 있되 서로가 장애되지 않고 끊어짐이 없다. 이 나타낸 바 색신은 일체 중생의 마음과 뜻과 의식으로써는 헤아릴 수 없나니, 이 진여는 자재하여 매우 깊은 작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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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나타낸 바 온갖 의보와 정보며 공양 거리와 장엄 등의 끝없는 부처의 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줄 알 것이다.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라밀로부터 나는 바의 온갖 보배 일산과 온갖 부처 경계의 청정한 알음에서 나는 바의 온갖 꽃 장막과 무생법인에서 나는 바의 온갖 옷과 금강(金剛)의 법의 걸림 없는 마음에서 나는 바의 방울 그물과 온갖 법이 눈어림과 같은 줄 아는 마음에서 나는 바의 온갖 견고한 향과 온갖 부처 경계의 여래좌(如來座)에 두루 미친 마음에서 나는 바의 온갖 부처님들의 뭇 보배의 묘한 자리와 부처님에게 공양하기를 게으르지 않는 마음에서 나는 바의 온갖 보배 당기와 모든 법이 꿈과 같은 줄 아는 기쁜 마음에서 나는 바의 부처님께서 계신 온갖 보배 궁전이며, 집착이 없는 선근과 남[生]이 없는 선근에서 나는 바의 온갖 보배 연꽃 구름과 온갖 견고한 향의 구름과 온갖 끝없는 빛깔의 꽃구름과 온갖 종류의 빛깔로 된 훌륭한 옷 구름과 온갖 그지없고 청정한 전단향의 구름과 온갖 미묘한 장엄의 보배 일산 구름과 온갖 사르는 향의 구름과 온갖 묘한 다발의 구름과 온갖 청정한 꾸미개의 구름 등의 법계에 두루하고 모든 하늘의 것보다 뛰어난 모든 공양 거리로써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그 모든 보살들의 낱낱의 몸에서는 저마다 말로 할 수 없는 백천억 나유타의 보살들이 나와서 모두가 법계의 허공계에 두루 찼는데 그 마음은 3세의 부처님들에서와 같이 뒤바뀜이 없는 법으로부터 일어난 바니라.”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만수실리(曼殊室利)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등정각을 이루셨고 바른 법륜을 굴리셨으며 큰 열반에 드셨는데,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어떤 모양이라고 알아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만수실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알아야 하느니라. 이 세 가지는 모두가 두 가지의 모양조차 없나니, 등정각을 이룬 것도 아니고 등정각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며, 바른 법륜을 굴린 것도 아니고 바른 법륜을 굴리지 않은 것도 아니며, 큰 열반에 든 것도 아니고 큰 열반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여래의 법신은 마침내 깨끗하기 때문이요, 여래의 화신(化身)은 언제나 시현(示現)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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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하여 보자. 등정각을 이룬 것도 아니라 함은, 법신이 마침내 깨끗하기 때문이요, 상견(常見)을 여의기 때문이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에 들었기 때문이요, 중생으로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등정각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라 함은, 화신은 언제나 시현하기 때문이요, 단견(斷見)을 여의기 때문이요, 세속의 이치[世俗諦]에 결합하기 때문이요, 근기가 성숙된 유정의 마음을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보(法報)는 비록 나누어졌기는 하나 진(眞)ㆍ화(化)는 한 끝이다.
  또 법신은 두루 미치는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양을 따라 저마다 따로따로 두루하다. 법신이 온갖 크고 작은 모양 안에 두루 있으면서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융하여 한데 거두어져 두루하다. 법신은 모양이 없으면서 온갖 모양 있는 것을 원만히 조화시켜 한데 거두어 한 체성에 귀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색신이 곧 체성의 작용으로서 두루하여 지신(智身)으로 닦아 이루어짐은, 마치 체성의 두루함과 같아서 끌어들이면 10신(身)이 그림자를 펴고 흩어놓으면 10찰(刹)의 안에 나누어지며, 한 체성이 빛을 나누되 한 티끌의 안조차 움직이지 아니한다.
  색신은 마치 해의 그림자와 같아서 세간을 따라 나타나며, 법신은 마치 햇빛과 같아서 법계를 위에서 비친다.
  또 부처님 몸의 모든 감관의 낱낱의 몸매는 모두가 법계에 두루하나니 모든 감관의 체성이 같기 때문이며, 가령 눈이 문(門)이 되는 경우, 모든 감관의 몸매와 부처의 국토가 모두 이 한 눈 속에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몸 속에는 여래의 눈과 여래의 귀 등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부처의 법신은 같은 중생의 성품으로서 구별된 체성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가 성품 없음[無性]으로부터 일어나고 일어나되 진실을 어기지 아니하며, 법계로 인하여서 생기고 생기되 현상에 장애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세계에서 모두 보리의 처소를 얻으시며, 진신(眞身)으로는 성품에 일치하게 두루 미치고 응신(應身)으로는 근기 따라 널리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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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까닭에 천친(天親)이 이르기를 “자세함과 간략함이 상입한다[廣略相入] 함은 모든 부처님에게는 두 가지의 몸이 있으니, 첫째는 법성 법신(法性法身)이요, 둘째는 방편 법신(方便法身)이다. 법성의 법신으로 말미암아 방편의 법신을 내고, 방편의 법신으로 말미암아 법성의 법신이 드러난다. 이 두 가지 법신은 다르면서도 나누어질 수 없고 하나이면서도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세함과 간략함이 상입한다”고 했다.
  법신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이 되지 않음이 없다. 이 때문에 상호가 장엄되니 바로 이것이 법신이다. 법신은 앎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함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바로 진실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법신과 상호는 한 끝이요 차별이 없다”고 했으며, 효공(曉公)의 『기신론소(起信論疏)』 서문에서 이르기를 “대승(大乘)의 근본됨은 조용하여 고요히 사라지고 맑으면서 깊고 오묘하다. 깊으면서도 또 깊으나 어찌 만상(萬象)의 밖에 벗어나겠으며, 고요하면서도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百家)의 담론에 있다. 만상의 바깥이 아니로되 다섯 가지 눈으로는 그 형용을 볼 수 없고, 말 속에 있지만 네 가지 말로 그 모양을 말로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참 체성과 온갖 법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밝힌 것이다.
  『화엄경소(華嚴經疏)』의 서문에서는 “참 체성은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서 명합되고, 덕의 모양은 겹치고 겹친 오묘한 문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기석(記釋)』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걸림 없는 것으로서 곧 모든 법과 동일하거나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도(道)가 어찌 멀겠느냐. 일에 부딪치면서도 참되다’ 함은, 역시 체성이 곧 만 가지 변화이니, 그러므로 참 체성은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서 명합된다는 것이다.
  덕의 모양은 겹치고 겹쳐서 오묘한 문에서 드러난다고 함은, 모양은 체성에 장애되지 아니함을 밝힌 것이다. 겹치고 겹쳐서 오묘한[重玄] 바로 이것이 본체의 체성[理性]이니, 덕 모양은 체성 위에 있을 뿐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체성을 여의고 모양이 있다면 모양은 현묘(玄妙)한 것이 아니며, 훌륭한 덕[勝德]의 모양을 덕 모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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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겹치고 겹쳐서 오묘하다 함은, 노자(老子)의 말에서 빌렸다. 노자가 이르기를 ‘오묘[玄]하고 또 오묘한 것이 뭇 묘함의 문이다’라고 했으니, 그는 이름이 있거나 이름이 없는 것을 다 같이 오묘하다고 말한 것이다.
  하상공(河上公)이 이르기를 ‘오묘한 것은 하늘이니, 하늘 안에 다시 하늘이 있다’고 했다.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하늘이 곧 자연(自然)이니, 자연 또한 자연이다’라고 했다. 이것에 의하여 만물을 내기 때문에 묘함의 문>이라 한다고 했다’고 했다.”
  이제 종경(宗鏡)의 안 또한 그와 같아서 법마다 거두지 아니함이 없다. 덕마다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니, 마음의 지극히 미묘함은 그윽하고 오묘하다고 할 만하다.
  『청량기(淸凉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엄경 ‘게송의 부처는 법으로 몸을 삼나니/청정하기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것을 인용하여 물었다.
  ‘부처의 몸은 이미 허공임을 알았거늘 무엇 때문에 금색 등을 나타냈는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허공임을 알게 할 것인가.’
  대답하였다.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성이 비록 모양은 없으나 물건으로 되어 모양을 나타냄은 물건이 보기에 편의하기 때문이니, 다른 이의 뜻을 따를 뿐이다. 둘째는 만약 모양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모양 없음을 알게 하겠는가. 마치 말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말 없음의 도리를 드러내겠는가. 셋째는 허공과 같다는 말은 그것이 청정하여 모양이 없음을 취한 것이요, 모양을 여의고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모양이 곧 모양 없음이니, 허공과는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처는 매우 깊은 참 법성에 머무르되/적멸(寂滅)하고 모양 없어 허공과 같으며/그러나 첫째가는 진실 이치 가운데서/갖가지 행할 바의 일을 나투어 보인다>고 했으니 이 하나의 게송이야말로 통틀어 앞의 세 가지 뜻을 거두어들인다.’”
  『조론(肇論)』에서 이르기를 “작용[用]은 곧 고요하고 고요함이 바로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작용과 고요함의 체성은 동일하여 같은 데서 나왔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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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다른 것이며, 다시 작용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로 함은 없다. 고요함과 작용은 원래 이는 동일한 체성으로서 똑같이 본체[理]에서 나왔으면서 이름에 다름이 있는 것이요, 작용을 여읜 그 밖에 따로 한결같이 고요한 작용의 주장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반야의 체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공허(空虛)함이 비침을 잃지 않고 비침이 공허를 잃지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등각(等覺)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세움은,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추면서 공허가 비침을 잃지 않은 것 같고 마치 해가 허공에 노닐면서 비침이 공허를 잃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등각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세우면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작용하는 것이요, 인연으로 나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진실한 모양을 관찰하면 작용하면서도 언제나 고요하다. 이야말로 천 가지 차별과 만 가지 작용이 구별된 형상이면서 이름이 다른 것이나 다 똑같이 하나의 참 마음의 체성에서 나온다.
  그런 까닭에 또 이르기를 “경에서 일컫는 성인은 함[爲]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했다.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록 움직이기는 하나 고요하고, 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고요하기는 하나 움직인다. 비록 고요하기는 하나 움직이기 때문에 만물을 하나로 할 수가 없고, 비록 움직이기는 하나 고요하기 때문에 만물을 둘로 할 수가 없다. 만물이 둘일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움직이고 한층 더 고요하며, 만물이 하나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고요하고 한층 더 움직인다.
  법의 성품은 이와 같아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측량하기 어렵거늘, 어찌 그 고요함을 하나로 하고 그 움직임을 둘로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름으로 붙일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또 이르기를 “그런 까닭에 성인은 현묘한 기틀[玄機]을 아직 나타나지 않은 데[未兆]서 거두고 그윽한 운[冥通]을 이미 변화한 데[旣化]서 감추며 육합[六合]을 한데 묶어 마음을 비추고 과거ㆍ미래를 하나로 하여 체성을 이룬다. 예와 이제는 처음과 마지막에 통하고, 근본을 다하면 끝에 이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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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다. 함께하는 둘이 없으며 넓고 크고 고른지라 이에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현묘한 기틀을 미래 세상의 사실이 아직 나타나기 전에 미리 살피고, 과거에 이미 변화한 인연을 그윽이 살피나니, 마음 거울은 만 가지 일을 능히 비춘다. 시방과 3세를 남김없이 현재와 과거 미래며 처음ㆍ마지막ㆍ근본ㆍ끝이 한 마음의 둘이 아닌 체성과 동일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입불경계경(入佛境界經)』에서 이르기를 “여래는 본제(本際)와 중제(中際)와 후제(後際)를 사실대로 아나니, 마치 저 법의 본제는 나지 않았고 미래제(未來際)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제(現在際)는 머무르지 않음과 같은 것이며, 저 법의 발자취를 사실대로 안다. 마치 하나의 법에서처럼 온갖 법도 그와 같으며, 마치 온갖 법에서와 같이 하나의 법 또한 그러하다. 문수사리여, 하나와 여럿이란 얻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중생과 부처는 장엄(莊嚴)이 동일하며 인자한 마음이 동일하며 가없이 여김의 체성이 동일하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으로서 모두 대비(大悲)를 성취함을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不動相]이라 하오리다.’
  ‘문수사리여, 어찌하여 이 일을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이라 하느냐?’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은 일으킴도 없고 짓는 모양도 없어서 모두가 여래의 평등한 법 안에 들며 대비의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고뇌와 대비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일체 중생으로서 모두 대비를 성취하면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이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알라. 만법은 움직이지 않거늘 대비와 고뇌가 어찌 구분되며, 하나의 진리는 옮아감이 없거늘 더러움과 깨끗함을 누가 분별하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장엄이 나타남은 모두가 마치 해인(海印)과 같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향수의 바다는 맑고 깊고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는데 4천하(天下) 안의 색신 형상의 그림자가 모두 그 안에 있음은, 마치 도장이 물건에 찍힌 것과 같으며, 또한 고요한 물결이 한없이 넓고 맑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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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구름이 없으며 벌여 있는 별과 달이 반짝거리면서 가지런히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온 것도 없고 간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여래의 지혜 바다에는 의식의 물결이 생기지 아니하고 잔잔하고도 청정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고요하며,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도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근욕(根欲)이 단박에 나타나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근욕이 나란히 지혜 가운데에 있음은 마치 바다가 형상을 머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바다가 중생 몸을 널리 나타내는/이것을 말하여 큰 바다라 하듯/보리는 모든 심행(心行)을 두루 찍나니/이 때문에 정각(正覺)을 한량없다 하네”라고 했다.
  지혜가 만물과 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지혜에 의하여 만 가지 형상이 단박에 나타나고 널리 모든 종류에게도 응한다.
  「현수품(賢首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혹은 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거나/하늘과 용과 그리고 아수라며/마후라가 형상까지 나타내기도 하여/그의 좋아한 바대로 모두 다 보게 한다.
  중생들의 형상은 저마다 같지 않고/행한 업과 음성 또한 한량없으되/이런 온갖 모두를 능히 나타냄은/해인삼매(海印三昧)의 거룩한 신력일세”라고 했다.
  이 해인삼매의 힘으로 온갖 것을 단박에 나타내지만 중생들이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 모든 가르침의 자취를 드리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중생들이 진실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법을 말씀하여 진실을 보이셨다”고 했다.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세우면 성품은 파괴될 수 없고,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실상(實相)을 말하면 모양은 파괴될 수 없다. 이것은 곧 하늘 악마와 외도들도 모두가 법인(法印)이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 또한 5역(逆)과 4마(魔)조차도 오히려 법계의 인(印)이거늘, 하물며 샘이 없는 깨끗한 지혜요 하나의 참된 상호인데 실상의 묘한 뜻을 장애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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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청정한 자비문이 티끌 수만큼 많되/다 같이 여래의 한 묘한 몸매에서 나며/낱낱 몸매들이 그렇지 않음 없나니/그러므로 보는 이 싫증냄이 없네”라고 했다.
  『법화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죄와 복의 모양을 깊이 통달하여/시방의 세계에 두루 비추는/미묘하고 깨끗한 법신이야말로/서른두 가지의 몸매를 갖추셨네”라고 했다.
  곧 법신은 온갖 법의 도장이 되며 하나의 법도 이 인문(印文)에서 벗어남이 없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무행경(無行經)』에서 이르되 ‘5역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5역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5역과 보리는 심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두 모양의 바탕이 없다. 이미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고, 5역은 본래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괴로움이 곧 실상이어서 음마(陰魔)ㆍ사마(死魔)의 두 악마가 바로 법계의 인이요, 번뇌가 곧 실상이어서 번뇌마(煩惱魔)가 바로 법계의 인이며, 업이 곧 실상이어서 천마(天魔)가 바로 법계의 인이다. 악마가 이미 인(印)이거늘, 인이 어찌 인을 파괴하겠는가.
  『대론(大論)』에서 이르기를 “어떤 보살이 사람에게 공을 닦도록 하여 온갖 생각을 끊게 하고, 뒷날 한 생을 닦도록 하여 온갖 생각을 끊게 하였는데, 뒷날 한 생각을 일으켜 마음에 두기만 하면 이내 악마에게 동요당하지만 바로 본래 닦았던 공을 기억하면 악마는 그대로 소멸된다. 공을 닦은 것조차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곧 법계의 인인 줄 관찰함이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이 있으면 곧 속박되고 마음이 없으면 곧 해탈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분명히 요달하면 무엇이 속박하고 무엇이 해탈시키겠는가.
  [문] 마음은 제 성품이 없어서 나고 없어짐에 한결같음이 없고 체성과 작용이 다함께 공하다면, 어떻게 행(行)을 일으키겠는가.
  [답] 비록 제 체성은 언제나 공하기는 하나 인연으로 생기는 인과를 무너뜨리지 아니하며, 짓는 것이 없거늘 어찌 선악의 업의 문을 없애겠는가.
  그러므로 『심왕론(心王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공왕(空王)을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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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현묘(玄妙)하여 측량하기 어렵다.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되 큰 신력이 있어서 천 가지 재앙을 소멸하고 만 가지 덕을 성취할 수 있다. 본래 성품은 비록 공하다 해도 법칙을 베풀 수 있으며, 그를 보면 평상이 없되 그를 부르면 소리가 있으며, 큰 법의 장수가 되어 계율을 지니고 경(經)을 전한다.
  물속의 짠 맛과 빛깔 속의 교청(膠靑)은 결정코 이는 있는 것이로되 그 형상은 보이지 않듯이, 심왕(心王) 또한 그러하여 몸속에 머무르면서 얼굴에서 드나들며 물건에 응하고 뜻[情]에 따라 자재롭고 걸림이 없이 할 일을 모두 이룩한다”고 했다.
  『청량소(淸凉疏)』에서 경을 풀이하며 이르기를 “법계가 허깨비[幻]와 같다 함은, 곧 체성은 인연을 따르고 온갖 법은 실제(實際)와 같으며 현상[事]에 즉하면서 고요함을 말한다. 세간 사람들은 모두가 실제는 변하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하는데, 본체와 진실은 원융하여 세간의 모양 이것은 언제나 머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덕은 일곱 가지 비유로써 차츰차츰 의심을 풀어간다.
  첫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세간은 허깨비의 불[幻火]이지만 불에 타지도 아니하고, 부처님께서는 만물에 이익을 나타내거늘 어찌 허깨비와 같겠는가” 하였고, 그 해석에서 이르기를 “그림자에도 형질에 응하고 그늘져서 가리움 등의 이치가 있는 것과 같다. 어찌 이것이 실상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의 비유에는 저마다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인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치요, 둘째는 실제가 없다는 이치며, 셋째는 용도가 있다는 이치이니, 뜻으로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둘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만약 부처님께서 그림자와 같다면 보살은 무엇으로 행을 일으키고 가서 구할 것인가. 원인이 이미 헛되지 아니한데 결과가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그 해석에서 이르기를 “마치 꿈과 같다. 꿈에도 세 가지의 이치가 있으니, 바탕이 없되 사실로 나타나며 깨어나는 데에 인연이 되어 준다. 이를테면 꿈에서 달려가다가 놀라 깨어나는 것이다. 보살행 역시 그러하여 진리를 증득하면 본래가 공이요 무명이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인 것과 같되 부처 과위의 인연이 되어 주어서 힘써 용맹을 멈추지 않으면 탁 틔며 깨치는 것이니, 마치 꿈에서 강물을 건너는 것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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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했다.
  셋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만약 보살행이 꿈과 같다면 무엇 때문에 경에서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라고 설명하였는가. 이것은 바로 2승의 행이다” 하였고, 해석에서 이르기를 “마치 메아리가 인연으로 이루어지되 근본이 없으며 소리에 맞춰 크고 작은 것처럼, 성인의 가르침도 그러하여서 근기에 감응하되 근본이 없으며 근기에 따라 다르게 듣는다”고 했다.
  넷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결과의 행이 그럴 수 있다면 세간에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나 이것은 바로 진실이어야 한다” 하였고, 해석에서 이르기를 “마치 변화한 마음의 업은 신력으로 지니는 바요 진실은 없으나 작용은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섯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만약 모두가 변화와 같다면, 어찌하여 차별된 몸이 있는가” 하였고, 해석에서 이르기를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했다.
  여섯째의 의심에서 이르기를 “몸이 만약 허깨비와 같다면, 어찌하여 과보의 종류에 같지 않음이 있는가” 하였고, 해석에서 이르기를 “마치 마음과 같나니,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마치 허깨비와 같기 때문이다. 비록 허깨비와 같아서 일정하지 아니하고 제 성품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인연 따라 나타나면서 뭇 선행을 능히 이룬다”고 했다.
  마치 『대보적경(大寶的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것은 연기(緣起)의 법이어서 인과가 파괴되지 아니한다. 비록 또 이 마음의 법성(法性)이 제 성품이 없고 작용이 없으며 주재(主宰)가 없다 하더라도 이 모든 법은 인연에 의지하면서 생기게 되므로 나는 그 하고 싶은 바대로 선근을 쌓겠으며, 이미 쌓이고 나면 상응(相應)한 행을 닦아서 마침내 이 마음의 법성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한다.
  또 사리자(舍利子)야, 보살마하살은 무엇이 이 안에서의 쌓아 모으는 모양이냐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쌓아 모으는 모양을 이렇게 관하나니, ‘이 마음의 본래 성품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한 가지 법도 베풀 만한 것이 없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일체 중생에게 잘 보시하여 쌓아서 장엄한 부처 국토에 회향(廻向)하면 이것은 선근의 쌓음[善根積集]이라 한다’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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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본래 성품은 마치 꿈에서 본 바와 같아서 그 모양이 고요하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시라(尸羅)를 잘 쌓고 수호하여 모두 신통의 작용에 회향하게 되면 이것을 선근의 쌓음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본래 성품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서 마침내 사라져 없어지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온갖 즐길 만한 인욕(忍辱)의 힘을 잘 닦아 익히어 쌓아 익혀 장엄한 보리에 회향하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본래 성품이란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마침내 쌓아 익힘의 모양을 멀리 여의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온갖 정근(正勤)을 잘 일으켜 내어 성숙된 한량없는 불법에 회향하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본래 성품은 잡아 얻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온갖 정려(靜慮)와 해탈(解脫)과 삼마지(三摩地)와 삼마발지(三摩鉢底)를 잘 닦아 익히어 모든 부처님의 훌륭한 삼마지에 회향하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성품을 살피건대 본래 빛깔 모양이 아니어서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고 분명히 알 수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온갖 지혜 글귀와 차별되게 말하는 지혜를 잘 닦아 익히어 원만한 모든 부처의 지혜에 회향하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은 반연한 바도 없고 남도 없고 일으킴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한량없는 착한 법을 잘 세워서 빛깔 모양을 거두어들이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은 인(因)할 바가 없고 날 바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깨달음 갈래 법의 인[覺分法因]을 잘 거두어들이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성품은 여섯 가지 경계를 멀리 여의고 또한 일으키지도 않지만 이 마음의 법성이 보리 경계의 인연으로 낼 바 마음을 잘 이끌어 내면 이것을 선근의 쌓아 익힘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짐짓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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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은 마침내 남[生]이 없으며,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남이 없고 일으킴이 없고 나옴이 없다. 그러므로 연(緣)은 인(因)을 내지 아니하고 인은 연을 내지 아니하며 제 성품은 제 성품을 내지 아니하고 다른 성품은 다른 성품을 내지 아니하며 제 성품은 다른 성품을 내지 아니하고 다른 성품은 제 성품을 내지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제 성품이 남이 없다고 설명한다.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보화(普華)보살이 사리불(舍利佛)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도 법을 들을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멸진정에 들면 두 가지의 행으로서 법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그대는 모든 법이 다 이는 제 성품이 사라져 다하는 것이라 믿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모든 법은 다 제 성품이 사라져 다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믿습니다.’
  보화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사리불이여, 늘 언제나 법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언제나 제 성품이 사라져 다하는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하여 이것은 연기(緣起)일 뿐이므로 인연이 모이면 있는 듯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는 듯하여 있고 없음은 바로 인연일 뿐이다.
  만법이 본래 나고 없어짐이 없음은, 마치 순금이 장인(匠人)의 솜씨대로 그릇이 이루어지되 바로 그 금의 체성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빈 골짜기가 인연 그대로 메아리가 나되 법의 성품과는 어김이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게송에서 “마치 사람이 길의 흙을 파서/보통 사람의 상(像)을 만들었다면/어리석은 사람은 상이 생겼다 하고/지혜로운 사람은 길의 흙이라 함과 같다./ 뒷날에 관인(官人)이 길을 가려 하면서/상을 가져다 길을 도로 메웠다면/상은 본래 생겼거나 없어짐이 없었고/길 또한 새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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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도 이 하나의 흙이 생겼다가 없어졌을 뿐이요 이는 인연일 뿐임을 알 것이다. 예를 들면 마치 한 마음이 만 가지 법이라 다시는 앞과 뒤가 없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길을 파서 상을 만들었을 적에도 흙은 줄어지지 않았고 산을 부수어서 길을 메웠을 적에도 흙은 불어나지 않은 것이니, 본래의 흙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었을 때의 마음 또한 불어나지 않았고 범부가 되었을 때의 마음 역시 줄어지지 않은 것이니, 마음이 인연을 따를 때에 제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이 생긴 것은 이 인연이 생겼을 뿐이요 상이 없어진 것은 인연을 따라 없어졌을 뿐이어서, 상은 제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가 된 것은 이 깨끗한 인연이 생겼을 뿐이요 범부가 된 것 역시 물든 인연이 일어났을 뿐이니, 범부와 성인은 본래 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만법은 인연을 따르고 모두가 제 성품이 없으며 본래 생겼던 일도 없고 지금 또한 없어짐도 없는 것임을 알겠다.
  『문수사리관환송(文殊師利觀幻頌)』에서 이르기를 “이 모임의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은/본래부터 일찍이 한 일도 없었으니/온갖 법들 또한 그러하여서/모두 다 전제(前際)에서와 똑같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바로 짓는 때에 지음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해야 하는 때에 하지도 아니하고 제 성품이 없으니, 본래의 만법 그대로요 언제나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와 똑같다. 가령 중생들이 나타났다 숨었다 한다 하여도 성품 없는 종(宗)을 여의지는 아니한다.
  또 옛날 방 거사(龐居士)가 딸 영조(靈照)에게 명하였다.
  “내가 먼저 갈 터이니 너는 뒤에 오너라. 한낮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이 껍질을 벗어야겠다.”
  영조는 말하였다.
  “한낮은 한낮입니다만, 일식(日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거사는 괴이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창 아래로 다가갔는데, 영조는 갑자기 아버지의 자리로 올라가서 그대로 앉아 죽었다. 거사는 웃으면서 “아주 재빠르고 날래구나. 허공의 꽃[空華]이 그림자를 지우고 아지랑이가 물결을 뒤쳤도다. 내가 도는 먼저 깨쳤는데 뒤에 가게 되었다” 하고, 마침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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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相公)에게로 가서 상주(喪主)를 삼고서는 공에게 말하기를 “다만 있는 것 모두가 공일뿐임을 원할지언정, 부디 없는 것 모두를 실제라고 하지 말라”고 하고, 말을 마치면서 죽었다.
  이것 또한 있다 없다는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미묘하게 남이 없는 뜻을 얻는 것이다.
  [문] 보리(菩提)가 곧 제 몸과 마음이라면, 어찌하여 교(敎) 안에서는 “보리는 몸과 마음으로써 얻을 수 없다”고 말하였는가.
  [답] 보리의 도가 곧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성(自性)이 청정하고 마음이 맑고 잔잔하여 부동(不動)한 것을 말한다. 대개 이는 정각(正覺)의 모양 없는 참된 지혜로서, 그 도는 비고 깊으며 더할 나위 없이 묘하여 항상하는 경계이다.
  귀 밝은 이도 그 듣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지혜로운 이도 그 아는 것을 이용할 수도 없으며 말 잘하는 이도 말을 할 수가 없고 상(像)을 잘 그리는 이도 본뜰 수 없거늘, 미혹한 사람이 분명히 모르면서 색음(色陰)을 붙잡아서 제 몸으로 삼고 능지(能知)한다고 오인하여 제 마음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몸은 마치 초목과 같아서 지각하거나 아는 바가 없으며, 마음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허망하여 진실하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 집착하여 취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보리는 몸과 마음으로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보리는 촉진(觸塵)이 아닌지라 몸으로 얻을 수 없고, 보리는 법진(法塵)이 아닌지라 마음으로 얻을 수 없다.
  만약 분명히 아는 이로서 곧 음(陰)의 몸이 본래 공하여 허망한 마음이 모양 없음을 통달한 이라면, 본래 공이기 때문에 법신은 항상 나타나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참 마음은 이지러지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밝히면, 5음이 곧 보리요 이것을 여의면 보리가 없다. 보리로써 보리를 구할 수도 없고, 보리로써 보리를 얻을 수도 없다.
  문수(文殊)가 이르기를 “나는 보리를 구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보리 그대로가 나요 내가 바로 보리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관하지 아니함이 보리이니, 모든 반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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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읜 까닭이다”라고 했다.
  보리가 관할 바[所觀]의 경계가 아니라면 능연(能緣)의 마음이 없다. 관할 바 경계가 공한 그대로가 실상(實相)의 보리요, 능연의 마음이 고요한 그대로가 제 성품[自性]의 보리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길상(龍吉祥)이 말하였다.
  ‘어떤 이라도 보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까?’
  묘길상(妙吉祥)이 말하였다.
  ‘증득할 수 있습니다.’
  용길상이 말하였다.
  ‘누가 증득하게 됩니까?’
  묘길상이 말하였다.
  ‘만약 이름과 성과 시설(施設)과 말이 없으면, 그가 증득하게 됩니다.’
  용길상이 말하였다.
   ‘그가 이미 그렇다면,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묘길상이 말하였다.
  ‘그의 마음은 남[生]이 없어서 보리와 보리좌(菩提座)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또한 일체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지도 아니하며, 나타내는 마음이거나 소견의 마음 등이 없으므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용길상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존자여, 어떠한 마음 등으로써 보리를 증득해야 합니까?’
  묘길상이 말하였다.
  ‘나는 나아갈 바도 없고 능히 나아감도 아니며 도무지 배울 바도 없습니다. 나는 장차 보리수에 나아가서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큰 보리를 증득하고는 미묘한 법륜을 굴리어 생사를 구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으며 섭수할 수도 없고 마침내 비고 고요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와 같은 나아감이 아닌 마음 등으로 보리를 얻을 것입니다.’
  용길상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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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자께서 말씀한 바는 모두가 으뜸가는 이치[勝義]에 의하여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이 법을 믿고 알며 번뇌를 해탈하게 하심이니, 만약 유정들이 번뇌가 해탈되면 마침내는 악마의 덫과 그물을 부술 수 있겠습니다.’
  묘길상이 말하였다.
  ‘악마의 덫과 그물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악마라 함은 보리라는 군소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악마거나 악마 군사는 성품이 다 함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도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악마란 보리라는 군소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용길상이 말하였다.
  ‘보리란 무엇을 말합니까?’
  묘길상이 말하였다.
  ‘보리라고 말함은 언제 어디서나 온갖 법 안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은 도무지 장애함이 없고 때와 처소의 법에서 있지 않는 바가 없는 것처럼 보리 또한 그러하여 장애가 없기 때문에 온갖 때와 처소의 법 안에 두루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보리가 가장 위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보리를 증득하려 하십니까.’
  용길상이 말하였다.
  ‘위없는 것을 증득하려 합니다.’
  묘길상이 말하였다.
  ‘그대 지금의 응정(應正)의 위없는 보리는 증득할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대가 증득하려 한다니 쓸모 없는 의론을 하고 계십니다. 왜냐 하면 위없는 보리는 모양을 여의고 고요히 사라진 것인데 그대가 이제 취하려 하면 쓸모없는 의론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는 요술쟁이로 하여금 보리좌에 앉아서 요술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게 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극히 쓸모없는 말이 될것입니다. 여러 요술쟁이들조차도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겠거늘, 어찌 요술의 큰 보리를 증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술은 요술의 법에서 합한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니며 취한 것도 없고 버린 것도 없어서 제 성품이 다 함께 공합니다.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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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법은 분별 할 수 없고 모두가 요술과 같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이제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려 한다면, 어찌 분별하는 요술의 법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온갖 법은 모두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이루어진 것도 없고 무너진 것도 없습니다. 법이 아닌데 법에서 조작이 있고 부셔 없앰이 있을 수 있으며, 법이 없는데 법에서 어울려 섞임이 있고 따로 떨어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온갖 법은 합친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니며, 제 성품이 공하여 나와 내 것을 여의고 허공계와 같으며, 설명이 없고 보임이 없으며, 찬탄이 없고 훼방이 없으며, 높은 것이 없고 낮은 것이 없으며, 손해가 없고 이익이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고 쓸모없는 말도 할 수 없으며, 본래 성품이 비고 고요하여 모두가 마지막에는 공이기 때문이니 마치 허깨비와 같고 마치 꿈과 같으며 대할 수도 없고 견줄 수도 없거늘 어찌 그것에서 분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용길상이 말하였다.
  ‘장하십니다. 존자시여, 저는 이제 이로 말미암아 결정코 보리를 얻겠습니다. 왜냐 하면 존자께서 저를 위하여 깊은 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묘길상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하여 드러난 것이거나 은밀한 것이거나 깊거나 얕거나 간에 펴서 말한 바가 아직 없거늘, 어떻게 그대로 하여금 보리를 얻을 수 있게 하겠습니까. 무슨 까닭이냐 하면,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모두가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심히 깊은 법을 말했다고 하면 쓸모없는 말을 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로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니, 모든 법의 제 성품 역시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는 요술쟁이의 식(識)의 모양을 잘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요술쟁이의 식은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차별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 그는 이런 설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진실한 말을 해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요술쟁이란 오히려 식이 있지 않거늘, 하물며 식의 모양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이제 내가 매우 깊은 법을 말하여 그대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를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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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하게 한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온갖 법은 모두가 요술과 같은 일이라 필경에는 성품이 공하여 오히려 알 수조차 없거늘, 하물며 널리 펴 설명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체 중생들의 성품이 바로 모양이 없고 평등한 보리이거늘, 제 성품 가운데서 어떻게 능히 증득함[能證]과 증득한 바[所證]의 차별이 없겠는가.
  『반야경』에서 이르기를 “깨달음의 법의 제 성품은 모든 분별을 여의었나니, 보리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행은 모두 그것이라 함이 있고 그것이라 함이 없는 것은 바로 보리이다. 왜냐 하면 만약 그것이라 함이 있다면 곧 증득할 바의 경계가 성립되고 이내 능히 증득함의 마음이 있게 되기 때문이니, 능소(能所)가 다한 곳을 큰 깨달음[大覺]이라 한다. 큰 깨달음의 이치는 제 마음만을 깨칠 뿐이다”라고 했다.
  『대비로자나성불경(大毘盧遮那成佛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그 때 금강수(金剛手)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누가 일체지(一切智)를 찾고 구하며, 누가 보리로 정각을 이루게 된 이며, 누가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일으켜 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밀주(秘密主)야, 제 마음이 보리와 일체지를 찾고 주하느니라. 왜냐 하면 본래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바깥이거나 두 중간에도 있지 않나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내지 보리를 알고자 하면, 이렇게 제 마음을 알아야 되느니라.’”
  『장엄보리심경(莊嚴菩提心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리 마음이란 있는 것도 아니요 짓는 것도 아니어서 문자를 떠났으며, 보리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중생이니, 만약 이렇게 이해하면 이것을 보살로서 보리 마음을 닦는 것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이는 곧 마음 밖에는 보리가 없거니 구할 바가 무엇이며, 보리 밖에는 마음이 없거니 얻을 바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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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찰하고 염주(念珠)를 닦아 익힌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또 이 보살마하살은 또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짐짓 온갖 머무름[住]에서 마음을 따라 관하되, 훌륭한 신통을 증득하기 위하여 그 마음을 얽매고 통지(通智)를 닦아 익히다가 신통을 얻고 나면 한 마음만으로도 온갖 마음 모양을 잘 알 수 있으며, 이미 분명히 안 뒤에는 마음의 제 체성에 의하여 모든 법을 널리 펴 말하느니라.”
  또 이르기를 “화락천왕(化樂天王)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실제(實際)란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하나의 법도 실제 아님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보리란 이것 또한 실제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이 보리는 온갖 법이요 이 보리는 제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옵니다. 내지 5무간업(無間業) 또한 보리이옵니다. 왜냐 하면 보리는 제 성품이 없고 5무간업 또한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무간업 또한 이는 보리이옵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래 성품의 제 체성이 남[生]이 없고 남이 없는 가운데서 모든 법을 세웠음을 분명히 알아 성품이 없는 마음을 관하고 성품이 없는 가르침을 말하면, 깨끗한 인연을 따르면서 성품 없이 부처를 이루고 물드는 인연을 따르면서 성품이 없이 범부가 되지만, 가는 티끌만큼도 성품의 공한 도리에서 벗어남을 보지 않으며 한 생각도 평등의 문을 어기는 일이 없으리라.
  그런 까닭에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있음의 법은 있음의 법을 이루지 않고/없음의 법은 없음의 법을 이루지 않으며/있음의 법은 없음의 법을 이루지 않고/없음의 법은 있음의 법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기를 “있음은 있음을 이루지 않고[有不成有] 없음은 없음을 이루지 않는다[無不成無]라고 함은, 하나의 체성이기 때문에 능성(能成)과 소성(所成)이 없다는 것이다. 있음을 이루지 않고[有不成無] 없음은 있음을 이루지 않는다[無不成有]고 함은, 스스로가 이미 이루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저마다 제 체성이 없으므로 서로가 성취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의 모양 없음이 바로 모양이요 모양이 바로 모양 없음이며, 분별없음이 바로 분별이요 분별이 바로 분별 아님이며, 있음 아닌 것이 바로 있음이요 있음이 바로 있음 아니며, 지음 없는 것이 바로 지음이요 지음이 바로 지음 없는 것이며, 설명 아님이 바로 설명이요 설명이 바로 설명이 아닌 불가사의함을 알면, 마음과 보리 등을 알고 보리와 마음 등이며 마음ㆍ보리ㆍ중생 등을 아느니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비록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모든 부처 세계를 두루 노닌다 하더라도/이 미묘한 법을 구하지 아니하면/마침내 보리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이 법은 미묘하기 때문이요, 그 체성 바로 그것이다. 만약 밖을 향해 멀리서 구하며 참된 도를 잃으리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선재(善財)가 모든 선우(善友)를 두루 순방하였으나 사라(婆羅)의 숲을 벗어나지 않았고, 자씨(慈氏)가 1생에 성불하는 공(功)을 느꼈으나 한 생각의 남[生]이 없는 성품 바다를 여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미륵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온갖 중생들도 모두 얻어야 하리니, 왜냐 하면 온갖 중생이 바로 보리의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미륵이 멸도(滅度)하였다면 일체 중생 역시 멸도해야 하리니,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마침내는 고요히 사라져서 그대로가 열반의 모양이요 다시는 사라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미 이루어졌으면 다시는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이미 소멸하였으면 다시는 소멸하지 아니하나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방편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방편으로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니, 만약 방편을 고집하면 본종(本宗)을 잃게 된다.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문수사리가 금색녀(金色女)에게 말하였다.
  ‘이와 같은 5음의 체성은 바로 이것이 보리의 체성이며, 보리의 체성이 바로 온갖 부처님들의 체성이다. 마치 네 몸 안의 5음의 체성이 바로 이는 온갖 부처님들의 체성인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체성이 바로 일체 중생들의 5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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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성이니라. 그러므로 나는 너의 몸이 바로 보리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5음을 깨달으면 보리를 깨달았다고 하나니, 왜냐 하면 5음을 여의고서 부처가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요 보리를 여의고서 부처가 5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 방편으로 일체 중생들은 모두가 똑같은 보리요 보리 또한 또 같은 일체 중생임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몸 그대로가 바로 보리>라고 하느니라.’”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이르기를 “보리란 마음의 평등이라 하나니 일어나는 바가 없기 때문이요, 보리란 중생의 평등이라 하나니 본래 남이 없기 때문이다. 내지 보리라 함은 성품과 모양이 이와 같다. 만약 이 법에서 원하거나 구하는 바가 있으면 한갓 자신만 피로할 뿐이다. 왜냐 하면 마치 보리의 성품을 보살이 행해야 함과 같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행을 바른 행[正行]이라고 한다”고 했다.
  『사익경(思益經)』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보살은 빛깔을 무너뜨리지 않고/보리의 마음을 내어 행하며/빛깔을 아는 것이 곧 보리이니/이것을 보리를 행함[行菩提]이라 한다./ 마치 빛깔처럼 보리도 그러하여/여여한 모양[如相]에 평등하게 들어서 /모든 법의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나니/이것을 보리를 행함이라 한다./ 모든 법의 성품 무너뜨리지 않으면/보리라는 이치가 되는 것이니/이 보리의 이치 가운데는/또한 보리가 없는 것이며/바른 행의 첫째가는 이치야말로/이것을 보리를 행함이라 한다”고 했다.
  『영락경(瓔珞經)』에서 이르기를 “발심주(發心住)라 함은, 이 사람이 구박(具縛)으로부터 아직 3보를 모르다가 부처와 보살을 만나서는 비로소 그 교법 중에서 한 생각을 일으켜 문득 믿고 보리 마음을 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미 처음 범부로부터의 맨 처음의 발심이라 했지만 이 안에서의 발심은 처음과 마지막을 다 갖춘 것임을 분명히 알 것이다.
  [문] 이것이 이미 처음이라면, 어떻게 얻어야 나중의 모든 행의 지위와 보현(普賢)의 덕을 갖출 것인가.
  [답] 고덕(古德)이 이를 해석하였는데 간략하게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첫째는 항포차제문(行布次第門)이니, 미세한 데로부터 드러난 데에 이르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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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서로 이어받으면서 저 언덕[彼岸]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다.
  둘째는 원융통섭문(圓融通攝門)이니, 하나의 지위가 온갖 지위 등을 갖추는 것이다. 마치 『화엄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또한 「대품(大品)」 등 안의 하나의 행이 온갖 행을 갖춘다는 것과 같다.
  이 안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첫째는 연기상유문(緣起相由門)이요, 둘째는 법계융섭문(法界融攝門)이다. 앞의 것 가운데서 온갖 처음과 마지막의 모든 지위의 끝없는 행(行)의 바다와 동일한 연기를 널리 거두어들였으므로 보현행의 덕이 된다.
  진실로 모든 인연들을 서로 바라보면 요약하여 두 가지의 이치가 있다.
  첫째는 작용[用]에서 보아 상대(相待)하기 때문이니, 힘이 있고 힘이 있는 이치가 있으며 이 때문에 상수(相收)와 상입(相入)이 있게 된다.
  둘째는 체성[體]에서 보아 상작(相作)하기 때문이니, 체성이 있고 체성이 없는 이치가 있으며 이 때문에 상즉(相卽)과 상시(相是)가 있게 된다.
  또 두 가지 보리가 있다. 첫째는 성정(性淨)이요, 둘째는 원정(圓淨)이다. 연기를 따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 원정이다.
  원정에는 다시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연기를 밝힌 것이니, 만 가지 행은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기(性起)를 밝힌 것이다, 전혀 이는 진여 성품의 청정한 공덕에서 나타나는 바다.
  또 연기에는 성품이 없는데 바로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마치 『법화경』의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 양족존(兩足尊)께서/법이 언제나 성품 없음을 아시니/부처의 종자는 인연에서 생기기에 그러므로 일승(一乘)의 이치를 설명하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항포(行布)에서 보는 차츰차츰 펴나가는 이치요, 둘째는 원융(圓融)에서 보는 펴고 오므림에 걸림이 없는 이치이다.
  마치 선재(善財)가 선인이 손을 잡는 것을 보고서는 낱낱 부처님께서 처소에서 한량없는 겁 동안을 지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길고 짧아서 생각하기 어려움이 특히 이에서 말미암는 줄 알 것이다. 현수(賢首)보살이 이르기를 “대승을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쉽거니와 이 법을 능히 믿는 것은 갑절 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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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렵다”고 한 것과 같다. 처음의 마음이 곧 온갖 덕을 갖추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또 만일 꿈속에서 놀라 두려워하다가 보리 마음을 내게 되는 것조차도 오히려 대보살마하살이다 일컫게 되거늘, 하물며 바로 믿음을 내며, 열어 펴냄의 냄[開發之發]이겠는가.
  『대열반경(大涅槃經)』의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가섭(迦葉)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리 마음을 아직 내지 못한 이가 보리의 인(因)을 얻으오리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 『대열반경』을 듣고 말하기를 는 보리 마음을 낼 필요가 없다>고 하면 바른 법을 비방한 것이니, 이 사람이 꿈 속에서 나찰의 형상을 보고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는데, 나찰이 말하기를 끼, 선남자야, 네가 이제 만약 보리 마음을 내지 않으면 당장에 너의 목숨을 끊으리라>고 하면, 이 사람은 두려워하다가 깨난 뒤에 이내 보리 마음을 내었으며, 이 사람이 죽어서 세 가지 나쁜 갈래에 있거나 인간ㆍ천상에 있거나 간에 이어 다시 보리 마음을 기억하여 생각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대보살마하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문]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의 법을 배우는 이는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안다’”고 하셨다. 이제 보리란 몸과 마음으로써 얻을 수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이 없다고 한다면 처음 보리 마음을 낸 사람은 어떻게 향해 나아갈 것인가.
  [답] 만약 보리는 모양이 없어서 취할 수도 없고 성품이 없어서 닦을 수도 없음을 잘 믿어서 이렇게 분명히 통달하면 바로 이것이 참된 증득이다.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살이면 다시 이렇게 ‘이 안에서 어느 것이 바로 나이며, 무엇이 내 것[我所]의 법이며, 누가 모든 부처의 보리를 이룰 수 있는가. 몸으로 얻게 되는가. 마음으로 얻게 되는가’라고 생각해야 하리니 이렇게 관할 적에,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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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똑똑하게 이 몸의 모양이 보리를 얻지 못함을 보며, 역시 이 마음이 보리를 얻지 못함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빛깔로써 빛깔을 증득하거나 마음으로써 마음은 증득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 가운데서 온갖 법은 비록 빛깔이 없고 행상이 없고 모양이 없고 샘[漏]이 없고 볼 수도 없고 증득하여 앎이 없다 해도 역시 증득함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 왜냐 하면 모든 여래의 몸은 유루(有漏)가 없기 때문이다.”
  또 여래의 몸은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마음 역시 무루이며, 또 모든 여래의 마음은 무루이기 때문에 빛깔 또한 무루이다.
  만약 이렇게 낼 바[所發]와 능히 냄[能發]이 없는 이 마음을 알아서 종경(宗鏡) 안에 들면, 이것을 참된 냄[眞發]이라고 한다.
  이미 잘 마음을 내어서 또 다른 이를 위하여 깨우쳐 보이면, 모든 성인들이 똑같이 공덕을 찬탄하되 그지없으리라.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발심(發心)과 마지막[畢竟]은 둘이 다르지 않되/이와 같은 두 마음에 처음 마음[先心]이 어렵다/자신은 제도 못했으나 남을 먼저 제도하므로/이 때문에 나는 초발심에 예경한다”고 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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