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3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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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보리의 도는 헤아릴 수 없지만 한 시기[一期]의 방편에서 보면 어찌 가리켜 보임이 없겠는가. 어떤 것이 보리의 모양인가.
  [답] 만약 마지막의 보리 체성에서 보면 언제나 그윽하고 고요하며 여여(如如)하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적멸(寂滅)이 보리이니, 모든 모양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만약 모양 없는 모양이로되 방편의 [문]안에서라면 드러내 보일 것이 없지도 않으리니, 처음 보리 마음을 내는 사람에게 분명히 미혹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고요함[寂]과 비춤[照]에 둘이 없으므로 보리의 모양을 심나니, 마치 밝은 거울에 마음 없음을 체성으로 삼고 비추어 줌을 작용으로 삼아 그를 합쳐 그의 모양으로 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역시 선종(禪宗)은 체성에 즉(卽)한 작용이라 스스로 알고, 작용에 즉한 체성이라 항상 고요한 것이니, 앎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며 마음의 모양이 된다.
  또 이르기를 “도리[理]와 지혜[智]가 서로 거두나니 도리를 여의고는 지혜가 없고 지혜를 여의고는 도리가 없음은 마치 구슬의 광명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구슬은 바로 체성이요 광명은 바로 작용으로서 작용은 체성을 여의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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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체성은 작용을 여의지 아니하듯 광명은 구슬을 여의지 아니하고 구슬은 광명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생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생각이 없으면 바로 부처이거늘, 어떻게 범부와 성인이 하나 같다 하는가.
  [답] 중생이 비록 생각을 일으키기는 하나, 생각은 본래 생각이 없다는 것과 부처의 생각이 없는 것과는 같음을 깨닫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생각이 있는 그 속에 떨어진다.
  부처는 생각이 없음을 얻은지라 생각은 본래 없음을 알며, 중생이 비록 생각 속에 실제로 있다 하더라도 부처는 생각이 곧 생각 없는 것인 줄을 안다. 이것은 곧 부처의 생각 없음과 중생의 생각이 없다는 이치와 같다.
  또 중생은 생각이 공한 줄 모르고 생각에서 일을 이룩하므로 차별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진실로 생각이 공임을 분명히 알면 괴롭거나 즐거운 경계에서 받아들여 느낌을 내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경계는 생각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마음이 공하면 경계가 어떻게 있겠으며, 이미 경계가 없으면, 상박(相縛)이 저절로 제거된다. 능소가 다 함께 공하면 누가 취착을 내겠으며, 이미 취착하지 않으면 생사가 저절로 없어진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이것이 허공 꽃임을 알면 곧 유전(流轉)이 없고, 몸과 마음으로 저 생사를 받음이 없다”고 했다.
  [문] 곧 마음이 부처를 이루는 근원[宗]임은 조계(曹溪)의 바른 뜻이요, 성품을 보고 도를 통달하는 뜻[旨]은 영축(靈鷲)의 본뜻이다. 지금 믿음이 남에게 미치지 못하여 실제 증득하지는 못하였으니, 예나 지금의 깨친 이에게 지남(指南)을 청한다.
  [답] 만약 몸소 보았으면 한 사람이라도 부처 아님이 없고 만약 믿지 않으면 한 부처라도 사람 아님이 없으며, 미혹하면 언제나 부처로서의 중생이 되고 깨치면 현재에 중생으로서 부처를 증득한다. 사람과 부처도 다르지 아니하되 망령된 소견이 차이를 이루며, 미혹과 깨침은 비록 다르나 본래 성품은 언제나 하나다.
  마치 지나간 세상에 주무주불(住無住佛)이라는 부처님께서는 자기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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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은 같은 때에 부처가 되고 바로 그 날에 멸도하기 바라는 원을 세운 것과 같다.
  또 현겁(賢劫) 전에 평등불(平等佛) 또한 자기 나라와 시방의 중생들이 역시 같은 날에 성불하였다가 바로 그 날에 멸도하기를 원하였었다.
  『보적경(寶積經)』에서 이르기를 “이 때 묘혜 동녀(妙慧童女)가 거듭 목련(目連)에게 아뢰었다. ‘저는 이와 같이 진실한 말을 하기 때문에 미래 세상에서는 성불하여 역시 오늘의 석가여래와 같이 될 것입니다. 내지 만약 저의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대중들의 몸이 모두 금빛이 되게 하소서.’ 이 말이 끝나자마자 대중이 모두 금빛으로 되었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사익경(思益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익(思益)보살이 오른 손바닥에서 보배 광명을 놓자 온 4부 대중이 모두 부처와 같은 몸매로 되었고, 하방에서는 네 보살이 솟구쳐 나와 세존께 예배하려 하면서 원을 세우기를 ‘지금 이 대중 모임의 그 빛깔은 기이함이 없고 온갖 법 역시 그와 같나이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원컨대 석가여래께서는 기이한 모양을 나타내시어 저로 하여금 예배 공경하게 하여지이다’라고 하자, 바로 그 때 석가여래께서 일곱 다라수(多羅樹)만큼 위로 올라가셔서 사자 자리에 앉으셨다.”
  또 『최승왕경(最勝王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리의 행을 닦는다 함은 모든 거룩한 경계인 체성이 동일하거나 다르지 않은 데서 세속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진리를 여의지도 않으면서 법계에 의하여 보리의 행을 행한다.’
  때에 선녀천(善女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위에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보리의 바른 행을 제가 이제 배워야 하겠나이다.’
  이때에 범천왕(梵天王)이 물었다.
  ‘이 보리의 행은 수행하기가 어렵거늘 네가 이제 어떻게 보리의 행에서 자재함을 얻겠느냐.’
  선녀천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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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제 이 법에 의하여 안락한 머무름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참말이라면, 원컨대 온갖 5탁(濁)의 나쁜 세상의 한량없고 수 없고 끝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금빛의 서른두 가지 몸매를 얻고서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이로서 보배 연꽃에 앉아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게 하여지이다.’
  이 말을 하여 마치자마자 온갖 5탁의 나쁜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금빛의 거룩한 이의 몸매를 얻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로서 보배 연꽃에 앉아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음이 마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궁전과 같았다.”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거룩한 경계인 체성이 동일하거나 다르지 않은 데서라 함은, 바로 이것이 세속을 버리지 않으므로 이는 동일하지가 않고 진리를 여의지 않으므로 이는 다르지도 아니하다. 만약 동일하다면 곧 진리와 세속을 무너뜨리고 만약 다르다면 곧 단상(斷常)을 이룬다. 아주 없지도[斷]않고 항상하지도[常] 않으면 바로 이것은 법계에 의한 것이요, 진리도 아니고 세속도 아니면 이에 보리를 닦아 익힌다고 한다. 때문에 이르기를 ‘나는 이 법에 의하여 안락한 머무름을 얻었다고 했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선녀천은 5탁의 형질을 깨쳐서 순금의 빛깔을 이루었고, 염부제(閻浮提)는 거룩한 이의 몸매를 미혹해서 나쁜 업의 몸을 이루었다.
  이것으로도 만약 지혜로 그를 비추면 세간 법에 즉하면서도 부처의 법을 이루고, 만약 망정으로 그를 고집하면 불법에 즉하면서도 세간 법을 이루는 줄 알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않는데 두 소견이 스스로 차별을 이루어, 똑같은 하나의 법 안에서 따로따로 범부와 성인의 알음알이를 이룬다.
  만약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체성을 알면 현재에 서른두 가지 몸매를 갖추어 보배 연꽃에 앉을 것이요, 만약 남자와 여자라는 형상을 고집하면 언제나 25유(有)에 매이어 무명의 바다에 잠길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믿음의 힘이 미치는 바에서 진실한 말을 내면, 증험할 만하고 현재에 법의 문을 증득하면 마음과 부처가 단박에 밝아지리라.
  [문] 이것은 오히려 옛 것을 서술하면서 글을 인용한 것이다. 어떤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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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지금의 부처인가.
  [답] 지금처럼 한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처소조차 없는 이것이 과거의 부처이니 과거는 있지 아니하며, 미래 또한 공인지라 이것이 미래의 부처며, 바로 지금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이것이 현재의 부처이다.
  한 생각이 일어날 적에 집착하지도 말고 끊지도 말며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면, 삼제(三際)가 자취조차 없다. 한 생각이 뚜렷하면 10법계(法界)가 갖추어지고, 원인이 아니며 결과가 아니면서도 원인이면서 결과의 법이다. 만약 한 생각을 이렇게 하면서 통달하면 생각생각마다 상응하고 생각생각에 부처를 이루며, 범부와 성인이 모두 평등하고 이제와 예가 다 가지런하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똑똑하게 마음을 알고 또렷또렷하게 부처를 본다”고 했다.
  이 부처 이 마음이요 이 마음이 부처이며, 생각생각이 부처의 마음이요 마음마음마다 부처를 생각한다. 일찍 이루기 바라면 경계[戒]의 마음이 스스로 규율[律]이요 깨끗한 경계가 규율의 마음이니, 깨끗한 마음이 그대로 부처여서 이 심왕(心王)을 제외하고 다시는 따로 부처가 없다.
  만법을 구하고자 하면 한 물건에도 물들지 말라. 마음 성품이 비록 공하다 해도 참 체성의 진실을 머금는다. 이 법의 문에 든다면 똑바로 앉아서 부처를 이루리라. 이렇게 된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와 동일한 법신이다.
  만약 생각 밖에다 공을 들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한다면, 이내 다른 경계에 떨어져서 얻어지는 때가 없으리라. 마침내는 앞뒤의 망정에 즉하면서 범부와 성인의 연기(緣起)를 내며, 한갓 때와 겁을 지낼 뿐 억울하게 공력만 쓰게 된다.
  그런 까닭에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의 연기조차 냄이 없으면서 저 삼승 권학(勸學) 등의 소견을 뛰어남만 못하다”라고 했다.
  [문]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어서 이미 믿음의 문에 들면 어떻게 눈앞에서 똑똑하고 분명히 보게 되는가.
  [답] 눈앞에 물건이 없는 이것이 참으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마치 『문수사리순행경(文殊舍利巡行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경 안의 것을 설명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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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문수가 5백 비구들의 방을 두루 돌아다녔더니 모두가 고요히 선정을 닦고 있는 것만 보이므로, 그것을 명목으로 삼아 최후에 사리불에게 힐난하여 매우 깊은 반야를 드러냈다.
  사리불에게 물었다.
  ‘내가 때에 그대가 혼자 한 방에 있으면서 가부좌하고 앉아 그 몸을 조복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는 그것을 위하여 당연히 앉아서만 선정을 닦아야 됩니까?’
  대답하였다.
  ‘앉아서 닦아야 합니다.’
  따지며 말하였다.
  ‘아직 끊지 못한 이로 하여금 끊게 하려면 본래 좌선으로 해야 됩니까?’
  이로 인하여 성품의 공함과 얻음이 없는 이치의 뜻을 널리 드러내자, 5백의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의 앞에서 높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지금으로부터 다시는 문수의 몸을 보지 않겠으며, 다시는 그의 이름도 듣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처소에서는 빨리 버리고 떠나야 되며, 문수가 있는 데는 어디거나 가지 맙시다. 왜냐 하면 문수는 번뇌와 해탈을 하나의 모양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문수로 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결단하여 분명히 알도록 하자, 문수는 말하였다. “실로 문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실로 문수를 얻을 수 없다면 그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는 것 등으로 널리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게 되자, 4백의 비구는 샘[漏]이 다하여 과위를 얻고 1백의 비구는 다시 헐뜯다가 지옥으로 빠져들었으나 뒤에 도로 도를 얻었다(자세한 것은 거기서의 설명과 같다).”
  그런 까닭에 보는 것이 없는 이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요 듣는 것이 없는 이것이 참으로 듣는 것이며, 보지도 아니하고 듣지도 아니하는 문수가 바로 참으로 보고 참으로 듣는 문수이다.
  이 설명을 믿지 않고 비록 비방을 일으켜 지옥에 떨어졌기는 하나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종자에 훈습되어 도를 얻었거늘 하물며 듣고서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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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겠는가. 그렇다면 도를 이루는 것은 한 생각에서 동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宗鏡)으로 보고 들으면 이익을 얻지 아니함이 없다.
  그런 까닭에 『보적경(寶積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외(無畏) 여인이 말하였다.
  ‘대가섭(大迦葉)이여, 모든 법은 영원히 없고 나투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가섭이여, 온갖 법은 모두가 없습니다. 만약 법이 본래 없다면 어떻게 저 청정한 법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대가섭이여, 만약 청정한 여래를 보고자 하면, 저 선남자 선여인이 마땅히 자기 마음을 아주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때에 대가섭은 무외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제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까?’
  여인은 말하였다.
  ‘대가섭이여, 마치 자기 몸의 진여와 온갖 법의 진여와 같습니다. 만약 그것을 믿는다면, 짓지도 않고 잃지도 않아서 이렇게 제 마음의 청정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섭이 물었다.
  ‘자기 마음은 무엇으로 체성을 삼습니까?’
  여인은 말하였다.
  ‘공으로 체성을 삼습니다. 만약 저 공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 몸을 믿기 때문이며, 바로 진여의 공을 믿음으로써 온갖 법의 성품이 고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기를 “여래라 함은 곧 허공계이니, 이 때문에 허공은 바로 이것이 여래이며 이 가운데서는 한 물건도 분별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의 여(如)가 바로 여래이며, 여래가 바로 온갖 법의 여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머무르는 데가 없나니, 이것이 여래의 이치이다”라고 했다.
  또 보(報)ㆍ화(化)는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공하여 가고 옴이 없다. 마음이 깨끗하여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가 왔다고 말하나 부처 또한 오지 아니하며, 마음의 때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곧 부처가 갔다고 말하나 또한 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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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았다.
  이는 오면서도 오지 않은 것이요 가면서도 가지 않은 것이다. 부처가 이미 오고 감이 없으면 마음 또한 나거나 없어지지 않나니, 이렇게 이해하면 참 부처를 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금강경(金剛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여래가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눕는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이치를 알지 못했느니라. 여래란 어디서부터 온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사람이거나 법이거나 간에 모두 다 일여(一如)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줄 알 것이니, 이렇게 통달하면 여섯 감관으로 대(對)한 바가 제 성품의 여여한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님이 없다. 이것은 보지 않은 것으로 참 보는 것[眞見]을 삼으며, 진실을 보는 것으로 참 부처를 삼는다.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부처란 무엇이냐,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하는[窮理盡性] 것이 대각(大覺)의 칭호이다”라고 했으며, 생(生) 법사가 이르기를 “진실을 봄으로써 부처를 삼나니, 이와 같다면 역시 참으로 도를 보는 것이라 하고 역시 참된 공양이라 한다”고 했다.
  [문] 어떤 것이 참된 공양인가.
  [답] 이치에 걸맞는[如理] 마음에 계합하고 부처를 본다는 생각이 없으며 스스로의 법신을 분명히 알면, 이것을 참된 공양이라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 이르기를 “참된 공양이란 부처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부처는 볼 수가 없거늘 하물며 공양이겠는가. 만약 부처에게 공양한다면 제 몸에 공양하여야 한다”고 했다.
  [문] 자기 몸에 어떻게 공양을 하는가.
  [답] 만약 자기를 버리고 티끌을 따르면 이것을 저버림[違背]이라 하며, 빛을 돌이켜 도리어 비추고[廻光反照] 진여를 따르면서 경계와 지혜가 명합하면 이것을 참된 공양이라 한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앞이 없고 뒤가 없이 일시에 공양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버림도 없고 얻음도 없는 뜻을 운용하고 한 끝인 평등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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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방에서 두루 온갖 여래에게 공양하여 온 법계의 함령(含靈)들이 일시에 윤택을 받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공양이야말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보우경(寶雨經)』에서 이르기를 “이치대로 생각함 바로 이것이 일체 여래에게 공양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문] 어떤 것이 이치대로 생각하는 것인가.
  [답] 온갖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바로 참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한 마음을 단박에 깨치면 헤아릴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마음을 증득하여 도를 이루면 본래 이치에 걸맞는다[如理]고 일컫는다.
  만약 자기 마음을 분명히 알아 부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면 바로 이것이 온갖 여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만약 이치대로에 의지하여 마음을 깨치지 아니하면, 현상[事]을 따라하는 일이요 마음 밖에서 부처를 보는 것으로서 설령 오랜 겁(劫)을 지난다 하여도 모두가 진실한 공양을 이루지 못하리니, 모든 부처의 가리켜 주심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설령 생각생각의 가운데서/한량없는 부처에게 공양한다 하여도/아직 진실한 법 알지 못하면/공양이라고 이름하지 못하리”라고 한 것과 같다.
  무엇을 진실한 법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마음 진여의 남이 없는[無生] 뜻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익경(思益經)』에서 물었다. “누가 부처님에게 공양할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없는 끝[無生際]을 통달한 이이니라”고 하셨다.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부처에게 공양하는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요술로 된 사람이 심수(心數)가 사라지면 저는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부처에게 공양한다 함은 바로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일 뿐이니,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3관(觀)의 마음을 닦으면 바로 이것이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요, 5주(住)를 깨뜨려 해탈을 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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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바로 법에게 공양하는 것이며, 3제(諦)의 도리가 화합하면 바로 승가[僧]에게 공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뭇 행(行)의 마음이 지혜 마음을 돕고 관하면 바로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요, 지혜 마음을 관하여 경계를 열어 일으키면 바로 법에게 공양하는 것이며, 경계와 지혜의 마음이 화합하면 바로 승가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공양이요 법공양(法供養)이라고도 한다.
  『의해(義海)』에서 이르기를 “남이 없는[無生] 마음속으로 온갖 값진 보물을 보시하고,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계를 잘 거두어 곧 이 법계의 티끌로써 공양을 지으면, 이 공양은 3세의 모든 여래 앞에 두루 통하여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고 그 모든 여래는 거두어들이지 아니함이 없다. 왜냐 하면 티끌이 곧 법계라는 이 도리와 부처의 법계는 상응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온갖 것에 두루 이르러 넓고 큰 공양으로 헛되이 지나친 것이 없다고 한다”고 했다.
  어찌하여 헛되이 지나침이 없다[無空過]고 하느냐 하면, 마음이 통하면 곧 법이 통하고 법이 두루하면 곧 마음이 두루하여 온갖 처소에서 도리를 보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통달하면 이 하나하나가 일을 이어받으며 헛되이 지나친 것이 없게 되며, 또한 향과 꽃 등의 갖가지 공양을 장애하지도 않은 것이니, 안과 밖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요 집착을 깨뜨리고 종(宗)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있게 된다.
  또 만약 바른 관[正觀]의 마음속에서의 공양일 뿐 아니라 도를 행하고 예배하는 온갖 하는 일이면, 모두가 자기에게 나아가서 그 힘을 얻어야 한다.
  마치 3장(藏) 륵나(勒那)가 이르기를 “바른 관으로 정성된 예배를 닦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제 몸의 부처에게 예배하고 다른 경계인 다른 이 몸의 부처를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일체 중생은 스스로 부처의 성품인 평등한 본각(本覺)이 있어서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따르며 왕성하기 때문이다. 다만 미혹했기 때문에 다른 이 몸을 공경하면서 자기 몸의 불성을 망령되이 나쁜 것이라 인정할 뿐이다. 만약 본각을 도리어 비출 수 있으면, 해탈에 기약이 있으리라”고 한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를 관하지 아니하고 법을 관하지 아니하고 승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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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하지 아니함은, 제 몸과 다른 이의 몸이 평등하고 바른 법의 성품으로 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마치 먼 길을 가는 데는 반드시 제 몸에 의뢰하여야 하는 것처럼, 부처의 성품을 보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 부처를 관하여야 한다. 체성은 같아서 둘이 없으므로 이것을 바른 관의 예[正觀禮]라고 한다.
  [문] 만약 마음 밖에 모양이 없고 모양 밖에는 마음이 없어서 이와 같이 뚜렷이 통함을 참된 공양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교(敎) 가운데서는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면 얻는 복이 한량없다고 하는가.
  [답]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아서 진실로 한 마음을 분명히 알면 본체와 현상[理事]이 걸림 없거늘, 어떻게 굳이 고집하면서 경계를 의심하고 마음을 의심하는가.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저마다 세존께서 그의 앞에 계시는 것을 본다”고 했고, 『법화경(法華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건달바와 긴나라가/저마다 그 부처에게 공양하누나”라고 했다.
  우두초조(牛頭初祖)가 해석하기를 “마치 탐냄을 관하면 곧 탐내는 성품을 보는 것과 같다. 탐냄 바로 이것이 중생이요, 탐내는 성품의 지혜를 깨치면 바로 이것이 부처이다. 탐냄의 중생은 스스로 부처가 그의 앞에 있음을 보는 것이니, 온갖 예가 그러하다”라고 했다.
  또 저마다 그 부처에게 공양한다 함은 바로 이것이 낱낱 법의 문에서 저마다 이치대로 생각함[如理思惟]을 밝히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저마다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여도 현상의 법인 향과 꽃으로 공양하는 것은, 경에서 이르기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근기에 알맞은 느낌에서 출현한다”고 했다.
  이미 느낌을 따라 나타나거니 어찌 제 마음을 여의겠는가. 마치 영산(靈山)의 4중(衆) 8부(部)가 저마다 근(根)과 역(力)과 마음의 생각을 따라 부처님을 보되 동일하지 아니함과 같으며, 마치 용이 바로 대용왕을 보고 귀신이 바로 대귀왕을 보는 것 등과 같다.
  곧 마음 밖에 법이 없는 법칙[詮]에는 글이 있고 도리가 있거니와, 공 밖에 빛깔을 집착하는 소견에는 도리도 없고 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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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나쁜 슬기와 삿된 소견 지닌 사람으로서 의심을 품고 믿지 않는 이가 있을 때에 미친 알음알이를 자세히 펼치면서 억지로 그것을 깨뜨리려 하면, 마치 한 마리 모기의 부리를 가지고 큰 바닷물을 빨아들이려는 것과 같고, 마치 열 손가락의 손톱으로 묘고산(妙高山)을 무너뜨리려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이 원돈(圓頓)의 법칙과 진여의 도리는 마치 칼로 물을 끊는 것 같고 바람이 빛에 불리는 것과 같아서 한갓 자신의 정신만 피로할 뿐이요 도리어 깊은 허물을 초래한다.
  [문] 위에서 분석한 바와 같아서 이치는 비록 분명하다 해도, 오히려 이것은 다른 방편을 의지한 억지의 설명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 몸소 실제로 증득할 수 있으며, 제 마음의 부처를 볼 수 있겠는가.
  [답] 스스로가 자세히 물으며 살펴야 한다.
  [문] 어떻게 자세히 물으며 살펴야 하는가.
  [답] 도리어 남에게서 찾는다면 어떻게 쉴 때가 있겠는가. 털끝만 한 의심조차 끊으려면, 응당 몸소 이르러야 한다.
  [문] 어찌 다른 것의 조력 없이 스스로 지혜로 마음을 비추겠는가.
  [답] 주장도 없고 도움도 없으며 자신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만약 지혜로써 지혜를 구하면 알음알이[解]를 이루고 알음알이는 뚜렷한 종[圓宗]을 등지며, 만약 비추는 마음을 일으켜 비추면 경계가 성립되어 비춤에 따라서 뜻[旨]을 잃는 것이니, 모두가 그림자 같은 일로써 이 종(宗)에는 계합되지 아니한다.
  만약 참 마음을 분명히 알면 저절로 무심(無心)하게 도에 합할 것이요, 도에 합하면 말의 길조차 끊어지고 무심하게 되면 경계와 지혜가 다 함께 쉰다.
  마치 방(龐) 거사의 게송에서 “수미산이 쓰러지고 5악(嶽)이 무너지며/대해가 마르고 시방이 텅 비며/건곤(乾坤)도 오히려 털 끝 속에 용납하고 /해와 달도 오히려 털 몸매[毫相] 속에 잠긴다./ 이는 바로 서역국(西域國)의 나제(羅提)의 아들이/병들어 누워서는 신통을 나타내고/묘덕(妙德)이 입을 열어 둘 아님[不二]을 물으며/말을 잊고 도리에 드는[忘言入理] 진종(眞宗) 나타냄이로세”라 한 것과 같다.
  [문]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곧 마음이 부처를 이룬다는 뜻이 분명하여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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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다만 선종(禪宗)에서 위로부터의 선덕(先德)들이 이르기를 “이제 시방의 모든 부처가 몸을 낸 곳[出身處]을 알아야 하리니, 헛되이 부처가 있는 줄 알면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것이 바로 모든 부처가 몸을 낸 곳인가.
  [답] 돌소[石牛]가 코끼리 새끼를 낳고 나무로 만든 여인[木女]이 아이를 밴다. 모든 부처는 그 속으로부터 나오고 이것이 맨 처음에 도를 이룩하는 때다.
  [문] 이미 중생으로서 성불하였고 본체와 현상[理事]이 뚜렷이 갖추어 졌다면, 모든 부처는 무엇 때문에 세간에 출현하며 다시 중생들을 교화하는가.
  [답] 중생들이 이와 같은 것을 모르는 까닭에 교화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다 함께 동일한 성품이니, 이른바 성품 없음[無性]이다. 대비(大悲)가 서로 이어져서 중생을 제도하되 문(門)을 따라 같지 아니하고 갖가지로 다름이 있다”고 했다.
  성불하는 문에서 보면 모두가 이루어졌다. 동일하여 성품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허망한 성품은 본래 공허하므로 중생이 원래 부처이다.
  참 성품은 얻을 수 없는, 지금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이루어진 것이요, 물건마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종지(種智)를 이룩한다.
  이 동체(同體)를 증득하여서 대비를 일으키고, 한 번 얻으면 영원히 항상하기 때문에 서로 이어짐[相續]이라고 한다. 다만 성품이 없음을 모르기 때문에 교화가 끊이지 아니한다.
  비록 보(報)ㆍ화(化)가 나타나기는 하나 법의 체성이 옮아가지 아니함은 마치 빛깔을 따르는 마니주와 같고, 뭇 형상이 나타나면서도 본 체성이 동요하지 아니함은 마치 소리에 맞춰 울리는 빈 골짜기와 같다.
  뭇 메아리가 일어나면서도 생기는 곳에 마음 씀이 없고 자기와 남에 집착하지 않거늘 어찌 중생의 모양을 보겠는가. 본래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것이 아니어서 언제나 큰 깨달음[大覺]의 근원에 명합한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몸은 나는 것이 없으면서도 능히 출생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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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며, 법의 성품은 허공과 같지만 모든 부처는 그 속에서 머무른다”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바탕이 없고 머무는 데 없으며/또한 나서 얻을 만한 것도 없으며/모양도 없고 또한 형상조차 없는지라/나타난 바 모두는 그림자 같네”라고 했다.
  『사익경(思益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가섭(大迦葉)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제 모양[自相]을 여의어서 다름도 없고 구별도 없으며 바라고 원하는 바가 없는데, 당신도 그와 같습니까. 만약 그와 같다면 당신은 어떻게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
  망명(網明)이 말하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품이 바로 일체 중생의 성품이며, 일체 중생의 성품이 바로 이는 허깨비[幻]의 성품이며, 허깨비의 성품이 바로 이는 온갖 법의 성품이니, 이 법의 안에서 나온 이익이 있음을 보지도 아니하고 이익이 없음도 보지 않습니다.’”
  또 이르기를 “망명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공덕의 이익을 희망하면 보리 마음을 낸 것이라 하지 못하오리다. 왜 그러냐 하면 온갖 법에 공덕의 이익이 없으며 대함[對]의 처소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제도해야 하면서 공덕의 이익을 구하면, 이야말로 마음 밖에서 법을 보는 것이요 전혀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이거늘, 어찌 대승의 마음을 냈다 하겠나이까. 상대가 끊어진 마음이어서 대함[對]의 처소가 없기 때문이옵니다’”라고 했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 말씀은 외도의 말이다. 만약 있고 없음 등의 법을 분명히 통달하면, 온갖 모두가 제 마음으로 보는 바여서 분별을 내지 아니하고 바깥 경계를 취하지도 아니하며 제 처소에서 머무른다. 제 처소에서 머무른다 함은, 바로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일으키지도 아니하고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는 이것이 바로 나의 법이요 너의 소유가 아니다. 나의 법이란 곧 중생의 마음이다. 알지도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소외(疎外)되며 있는 것도 없는 것과 같아진다”고 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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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다.
  그런 까닭에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것은 다만 중생들이 스스로 있음[有]을 알게 하여 범부와 성인의 평등한 참된 근원에 단박 들어가는 것을 바로 보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마음의 미세함을 얻고서 생각하기를 ‘세간은 훨훨 타오르는 큰 불더미이니, 이른바 탐욕의 불이요 성냄의 연기이며 어리석음의 어두움이다. 어떻게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벗어날 수 있게 할까’”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모든 법의 평등함을 통달하면 벗어남[出離]이라 한다. 법을 마치 허깨비의 모양과 같은 줄 사실대로 알며 인연을 잘 관찰하면서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하열함을 버리고서 훌륭함에 나아가며 다른 것을 싫어하여 동일한 것을 좋아하려 하거나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무리요 더러움과 깨끗함이 평등하게 하려 한다면 이야말로 옳지 못하다.
  다만 종경(宗鏡)을 밝히면 만법이 저절로 가지런하게 될 뿐이니, 마침내 3계의 불난 집[火宅]을 벗어나게 되는 이치요 역시 여러 아들들이 똑같이 비밀의 창고에 머무르게 되는 이치이다.
  마치 “가지런한 것으로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히 함은 아직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요, 가지런한 것으로 가지런한 것을 가지런히 함도 아직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듣건대 천하를 잘 가지런히 한 이는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써 천하를 가지런히 한 이라 했다. 어찌하여 큰 산을 편편히 하고 못을 막아 채운 연후에야 비로소 편편하기를 바라는가. 물오리를 잇고[續鳧] 학을 끊는다[截鶴]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한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알라. 법마다 모두가 여여(如如)함을 분명히 알면 자연히 평등할 뿐이니, 곧 푸른 솔과 녹색의 혜초[蒐草]는 길고 짧음을 보지 아니하며 붕새가 날고 장구벌레가 날되 스스로 크고 작음을 잊어버린다.
  『조론(肇論)』에서 이르기를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모든 법이 다르지 않는다 함이, 어찌 물오리를 잇고 학을 끊으며 큰 산을 쓰러뜨리고 구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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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운 연후에야 다름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진실로 다르지 않음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요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다르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으며, 내지 경에서 이르기를 ‘반야(般若)와 모든 법은 모양이 동일하지도 아니하고 모양이 다르지도 않다’고 하였으니, 기쁜 일이로다”고 한 것과 같다.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에서 이르기를 “긴 것이라 하여 여유가 있게 되지 않고 짧은 것이라 하여 부족한 것 아니다. 그러므로 물오리의 정강이가 비록 짧기는 하나 그것을 이으면 근심할 것이요, 학의 정강이가 비록 길다 하더라도 그것을 끊으면 슬퍼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품이 길다 하여 끊을 바가 아니요 성품이 짧다 하여 이을 바도 아니다. 밝은 거울의 지혜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동일하고 동일함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동일하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동일함과 다름의 두 문을 분명히 통달하면, 혹은 모든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아니하거나 중생이 제도되어야 하거나 제도되지 않아야 하거나, 내지 있고 없음과 높고 낮음에 모두 의심이 끊어지리라.
  만약 동일함에 집착하면 고요함에 걸리고 만약에 다름에 집착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지리니, 이 동일함과 다름의 두 가지 문에 미혹되면 모두 지혜가 자재롭지 못하리라.
  『금강변종(金剛辯宗)』에서 이르기를 “거울이 있기 때문에 남자ㆍ여자의 형상이 그 속에서 나타나고, 법신이 있기 때문에 능히 곳곳에서 응현(應現)하며 행한다”고 했다.
  다만 거울 속에는 본래 형상이 없는 까닭에 남자ㆍ여자의 형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부처의 몸은 본래 몸이 없는 까닭에 온갖 몸을 나타낼 수 있어서 중생의 기감(機感)이 무연(無緣)의 사랑에 저절로 응(應)할 수 있다. 만약 결정코 몸이 있다면 곧 장애하게 된다.
  『조론(肇論)』에서 이르기를 “부처는 하늘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면서도 능히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될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온갖 보살은 모두가 얻을 바 없음[無所得]으로써 방편을 삼아 한량없고 끝없는 진로(塵勞)의 허깨비 그물[幻網]에 들어갈 수 있으며,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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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밖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얻을 바 없음의 지혜를 얻는다. 만약 마음 밖에 한 털만큼의 얻을 바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무연의 사랑과 동체(同體)의 교화가 이루어지겠는가.
  종경(宗鏡)은 밝기 때문에 널리 세간을 비출 수 있어서, 태어남[生]을 자세히 보건대 마치 석녀(石女)가 아이를 밴 것 같고 머무름[住]을 자세히 보건대 마치 아지랑이가 파랑을 뒤치는 것 같으며, 달라짐[異]을 자세히 보건대 마치 뜬구름이 만 가지로 변화하는 것 같고 죽음[死]을 자세히 보건대 마치 어지러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남이 없음[無生]을 깊이 통달하면 모두가 나가 없어서 헛되이 났다가 헛되이 없어지며 허깨비처럼 떨어지고 허깨비처럼 오르는 줄 알게 되어 저 어리석고 눈이 어두워 지혜 눈이 없음을 가엾이 여기게 된다.
  나아가 능히 지음이 없는 지혜의 비춤을 내고 버리는 바 없는 보시[檀]의 문을 열며 제 성품이 공한 계율의 마음을 잡아 지키고 일으킨 바 없는 정진(精進)을 갖추며, 상(傷)한 바 없는 법인(法忍)을 뚜렷이 하고 머무른 바 없는 선문(禪門)을 닦으며, 몸이 없으면서 상호가 장엄함을 분명히 알고 설명이 없으면서 종횡으로 잘 말함을 통달하며 성품이 공한 세계에 자재롭게 노닐고 수월(水月)의 도량을 이룩하며, 허깨비 같은 공양 문[供門]을 진열하고 영향(影響) 같은 선서(善逝)께 공양하며, 허공 꽃 같은 만행(萬行)을 두루 익히고 골짜기의 메아리 같은 제도 문[度門]을 베풀며, 거울의 형상 같은 악마 군사를 항복 받고 꿈 속 같은 부처 일[佛事]을 크게 지으며, 허깨비 같은 함식(含識)을 널리 제도하고 적멸의 보리를 같이 증득한다.
  [문] 상대가 끊어진 참 마음은 본래 이름과 모양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고 또 중생이 되는가. 만약 세간 법을 따르면서 이 가정의 이름을 짓는 것이라 하면, 또 무슨 법으로 인하여 성립하게 되는가.
  [답] 실제(實際)의 도리 가운데는 본래 범부와 성인이라 할 만한 것이 없지만 온갖 중생들이 성품 없음의 도리에 미혹하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허망을 깨닫지 못하며, 진공(眞空) 가운데서 망령되이 이름과 모양을 세우기 때문에 범부가 되고 이름과 모양이 공한 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다시 성인이라 일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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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와 성인이라는 칭호는 다섯 가지 법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데,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이름과 모양은 참된 것이 아니다.
  또한 요술과 같이 술수로 이루어지고 형상은 업(業)으로 인하여 존재하나 술수와 형상이 다 함께 거짓이요 형상과 요술은 똑같이 공이다. 모두가 미혹함과 깨침의 이름은 있되, 본래가 범부와 성인이라는 체성은 없다.
  다섯 가지 법이란,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첫째는 이름[名]이요, 둘째는 모양[相]이요, 셋째는 망상(妄想)이요, 넷째는 바른 지혜[正智]요, 다섯째는 진여(眞如)이다”라고 했다.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이름과 모양과 망상의 세 가지 법은 범부를 이루고, 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인을 이룬다”고 했다.
  이름과 모양과 망상이란 바로 범부의 법으로서 이름과 모양의 두 가지 법은 바로 범부의 경계요, 망상이란 한 가지 법은 바로 범부의 6식(識)이다.
  현상에서 반연한 경계에 미혹하면서 일으키기 때문에 망상이라 하는데,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음과 반연[緣]을 분명히 모르면/두 가지의 망상을 낸다”라고 했다.
  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인의 법이다. 바른 지혜는 바로 성인이 다스리는 금강의 반연[金剛緣]으로서 샘이 없음[無漏]을 닦고 미혹된 지혜[惑智]를 끊으므로 능히 깨닫는 지혜[能覺智]라고도 하며, 진여는 바로 성인이 마음속에서 증득한 바의 진리이다.
  진여는 체성이요 바른 지혜는 작용이다. 다르다 하면 일찍이 다르게 된 일이 없었고 동일하다 하면 일찍이 동일하게 된 일이 없었으며, 동일하면 바로 진여요 다르면 바로 바른 지혜이다.
  바른 지혜는 언제나 작용하기 때문에 생멸을 장애하고 진여는 항상하는 체성이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 체성과 작용은 걸림이 없고 법계는 불가사의하여 진실한 이치이다.
  또 범부의 마음이 미혹되어 이름과 모양이 공한 줄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령되이 있는 것이라 헤아리고 있음과 공하지 않음[不空]에 미혹하므로 그를 이름하여 망(妄)이라 하며, 망으로부터 마음을 일으키므로 그를 이름하여 상(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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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지혜란, 이름과 모양이 본래 비고 고요한 것인 줄 깨달아 알고 공한 줄 알기 때문에 망상이 저절로 쉬며, 망상이 쉬어지면 참됨에 돌아가서 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바른 지혜가 앞에 나타나서 이름과 모양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바른 지혜라고 한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음과 경계를 분명히 알면/망상이 다시는 생기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진여란, 곧 이 바른 지혜의 마음 성품이 참되기 때문에 바로 진여라고 한다.
  그러므로 알라. 이 하나의 법만은 중간이 없어서 있음에 집착하면 범부가 되고, 있음이 본래 공한 줄 통달하면 성인이 된다.
  다섯 가지의 법뿐만 아니라 항하 모래만큼 많은 이치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도리가 한결같이 하나의 도에서 나온다.
  이 유심(唯心)의 도가 곧 이는 여래가 가는 곳[行處]이니 걸음걸음마다 법의 공을 밟기 때문이요, 역시 마하연 처소[摩訶衍處]이니 생각생각마다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지세경(持世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선남자야, 그러므로 나는 갖 법이 바로 여래가 가는 곳이요 여래가 가는 곳이 감이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의 가는 곳의 이 안에는 갈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이 없는 곳이라 설명하느니라.’”
  『문수회과경(文殊悔過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나는 옛적에 모든 법을 희망하고 텅 빈 처소를 구하여 고요한 데에 노닐면서 적당한 한도에서 만족할 줄 알고 적은 욕심으로 흐뭇하게 여겼으니, 온갖 법이 공임을 잘 모른 탓이었다.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는 그것이라야, 고요한 데에 편안히 앉아 법계에 머무는 것이라 하겠다.’”
  그 해석에서 이르기를 “만약 인공(人空)ㆍ법공(法空)의 두 가지 공을 분명히 알면 참 유식(唯識)의 성품을 볼 것이요, 곧 언제나 삼매에 있고 참 법계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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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무엇 때문에 이 종경(宗鏡)에 들어서 한 생각과 상응하면 도를 보는 것이 빠르고 많은 겁을 벗어나게 된다고 설명하는가.
  [답] 진실로 이런 이치가 있고 세간의 형편으로도 알 수 있다. 만약 바로 이 아래서 제 마음의 공덕이 원만한 줄 단박 깨치지 못하면, 곧 마음 밖에서 망령되이 구하는 것이어서 한갓 여러 겁을 지날 뿐이다.
  만약 안으로 잘 비추면 마치 배가 순풍을 만나 것 같아서 한 생각에 뚜렷이 이루어지고 하는 일에 걸림이 없어진다.
  마치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어떤 사람이 큰 바다 가운데서 배를 타고 건너려 할 때 순풍을 잠깐 동안이라도 만나면 한량없는 유순을 지나갈 수 있지만, 만약 만나지 못하면 비록 한량없는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있다 해도 그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가지 못하며 때로는 배가 파괴되고 물에 빠져 죽게 되기도 하는 것처럼 중생도 그와 같아서 어리석은 생사의 큰 바다에 여러 운행되는 배를 타고 있으면서 만약 큰 열반의 맹렬한 바람을 만나게 되면 위없는 도의 언덕에 빨리 도달할 수 있거니와 만약 만나지 못하면 오랫동안 한량없는 생사에 헤매게 될 것이요 때로는 파괴되어 지옥ㆍ축생ㆍ아귀에 떨어지게 되느니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宗鏡)의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유위(有爲)의 운행선으로는 끝내 생사의 파랑을 빨리 건널 수 없을 것이며, 곧장 열반의 언덕에 이르자면 이런 큰 이익이 널리 쌓이어야 수고가 없고 뒤의 어진 이에게 부촉하여 차츰차츰 서로가 전하여 줄 뿐이니라.
  『법구경(法句經)』에서 이르기를 “선지식(善知識)이란 큰 공덕이 있어서 너희들로 하여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삿된 소견ㆍ5욕(欲)ㆍ5개(蓋) 등의 뭇 진로 중에서 부처의 법을 건립하여 한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고 큰 공덕을 얻게 할 수 있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굳고 단단한 배를 가지고 큰 바다를 건널 때에 몸과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면서 저 언덕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 안에 들면 범부 그대로가 성인이니, 번뇌를 끊지 않으면서 열반에 들고 5욕을 끊지 않으면서 모든 감관이 깨끗하여지리라.
  그런 까닭에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10주(住)의 첫 지위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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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삼매(無作三昧)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응진(應眞)이니, 번뇌 객진(客塵)이 본래 체성이 없고 참된 체성과 작용일 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서 저절로 곧 부처이다. 때문에 한 생각이 상응하면 한 생각이 부처요 하루가 상응하면 하루가 부처이다”라고 했다.
  이 『종경록(宗鏡錄)』 중에서는 앞뒤에서 모두 다 미세하고 간곡하게 낱낱이 곧장 지시하여 마쳤으니, 보면 그대로 이내 볼 것이요 뜻으로 생각함에 있지 아니하다.
  겨우 믿어 듣게 되기만 하여도 진리와 행이 함께 갖추어져서 끝내 다시는 나쁜 행을 일으키거나 털 끝만큼의 의심조차 있게 되지 않으리니,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찌 원돈(圓頓)이라 일컫겠는가. 마음 밖에 경계가 없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생각생각마다 종(宗)으로 돌아갈 것이거늘, 어찌하여 허환(許幻)이 있어 미혹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보장론(寶藏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갖 것은 허깨비와 같으며 그 허깨비는 진실하지 아니하고 허깨비인 줄 아는 그것도 허깨비이니, 진실을 지켜 하나에 들어가라고 했다.
  또 어떤 학인(學人)이 대매(大梅) 화상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언제나 신령한 성품은 홀로 서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학인은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지시하여 주소서.’
  대답하였다.
  ‘누가 너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고 있느냐?’
  물었다.
  ‘묻지 않음이 없는 이가 바로 그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렇게 물을 수 있겠느냐.’
  물었다.
  ‘신령한 성품은 이 소리와 빛깔이 아닌데, 스님께서 보여 묻는 것은 바로 신령한 성품이십니다. 학인은 다만 소리와 빛깔이 되는 것을 알 뿐이요 참 성품은 모릅니다. 스님께서는 지시하여 주십시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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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큰 보물 창고에 여러 가지 보물 모두가 두루 갖추고 있을 적에 으뜸가는 복덕을 지닌 사람은 보면서 바로 붙잡아도 명월보주(明月寶珠)를 얻게 되거니와 박복한 이면 구리와 쇠로 된 것들만 보게 될 뿐인 것과 같다. 이것은 창고 안에 보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창고지기가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 이제 너에게 말하리라. 성품은 소리거나 빛깔이 아닌데 네가 소리와 빛깔만을 볼 뿐이다. 나 또한 허물이 없다. 너는 알겠느냐. 이 신령한 성품은 불이 태울 수도 없고 물이 빠뜨릴 수도 없으며, 잠깐 동안에 천리만리에 도달할 수 있고 산과 하천이며 돌로 쌓은 벽도 장애할 수 없다. 네가 지금 눈썹을 치키고 눈을 움직이고 손가락을 튀기고 기침하고 입으로 날름날름 묻고 대답하는 이 모두가 이 성품이다. 큰 도[大道]라고 부르는데 언제나 눈앞에 있고 비록 눈앞에 있기는 하나 보기는 어렵다. 네가 만약 의심하여 믿어 받지 않으면 법을 깨뜨리고 나쁜 길에 떨어지리라.
  만약 상근기면 듣고 그 말끝에서 이내 깨달아 알아 다시는 모든 악행을 짓지 아니하므로 한 번 받아서 물러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다고 말하며, 중근기면 선지식을 친근하고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하면서 자주자주 설명을 듣고 오래지 않아서 깨달아 알며, 만약 하근기면 천번 만번 말하여 주어도 원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나 조그맣게나마 기억을 하게 되는데, 마치 해진 베 속의 명주(明珠)가 틈 구멍으로 뻐끔히 비쳐 나오는 것과 같다. 너는 알겠느냐, 부처의 길은 멀지 아니하며 마음을 돌이키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깨치면 찰나 동안이거니와 깨치지 않으면 항하 모래만큼 많은 겁(劫)을 지내리라.’”
  [문] 이 한마음의 종(宗)이 성불하는 도라면, 지위를 두루 겪으면서 닦아 증득하는 것인가.
  [답] 이 머무름이 없는 참 마음은 실로 닦을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결과를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득할 수 없고 법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법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닦을 수도 없는 것이니, 본래 깨끗하므로 닦아 빛내는 것이 아니요 본래 선천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만약 지위로서 논하면 바로 세속 이치[世諦]로 행하는 문에 있지만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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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를 잃지 아니하며 지위 없는 가운데서 그 지위를 논하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 하는 집착을 일으킬 수 없다.
  경에서는 10지(地)의 차별을 마치 공중에 나는 새의 발자국과 같음을 밝혔다. 만약 원융문(圓融門)에서라면 적멸이니 진여에 무슨 차례가 있겠는가만, 만약 항포문(行布門)에서라면 습기(習氣)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오르고 나아감이 없지도 않다. 또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의 계위(階位)가 모두 세속에 의한 이름으로 분별하면 계층을 나누는 것 같지만 하나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
  마치 중생의 지위는 흙그릇과 같고 보살의 지위는 은그릇과 같고 모든 부처의 지위는 금그릇과 같다. 흙ㆍ은ㆍ금 등의 세 가지 그릇의 비중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낱낱 그릇 속에 두루 찬 허공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허공은 곧 한 마음의 법신이 평등한 이치임에 비유하고, 모든 그릇은 바로 근기의 지위와 계층이 같지 아니함에 견준다. 또는 본래 차별이 없지만 행에 따라 다름이 있게 된다.
  행해(行解)의 단박[頓]과 점차[漸]가 같지 아니함을 논하면 현행(現行)하는 번뇌에 얕고 깊음이 있으며 배고 물든 습기에 두꺼움과 얇음이 있으므로 한결같을 수는 없되, 저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업(業)이 가벼우면 원만해지기 쉽고 죄장이 깊으면 끊기 어렵게 된다.
  다만 8지(地)에 오른 보살만은 몸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온갖 법이 마치 허공 성품과 같은 것으로 관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은 오히려 점차로 무심(無心)을 증득하게 된다.
  10지(地) 안에 이르면 오히려 두 가지의 어리석음이 있다. 등각(等覺)의 지위에 들면 일부분의 무명이 아직 다하지 못하여 마치 작은 티끌과 같은지라 오히려 참회하여야 한다.
  또 아직 스스로 삼마지(三摩地) 중에 머무르지 못하여 마음 밖에 법이 없음을 믿지 않으면 마치 눈병을 앓는 이가 공중에는 꽃이 없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아서 분별지(分別智)로 이해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것이니, 다만 다른 경계에 반연할 뿐 아직은 제 자리[自地]에 머무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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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시방의 여래와 대보살들이 스스로 머무르는 삼마지 중에서는 견(見)과 견의 연[見緣]과 생각하는 모양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른바 대보살이란 곧 8지(地) 이상이다. 만약 8지 보살이라면 오히려 마음 밖의 정토(淨土)를 보는 것이니, 지혜로 반연하는 도리이기 때문에 스스로 머무름[自住]이라 하지 못한다.
  만약 10지 보살이라면 비록 마음의 밖에서 경계를 보지는 아니하나 오히려 물질[色]과 마음[心]의 두 습기가 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 한 사람만이 깨끗한 계율 지닌 이요/그 밖에 모든 이들 파계한 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종경(宗鏡)에 들면 마지막의 일승의 [문]안이므로 비로소 계율을 지녔다 하고 비로소 도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알고 보는 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알면서도 보지는 못하나니 초지(初地)로부터 9지까지요, 둘째는 보면서도 알지는 못하나니 바로 10지요, 셋째는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하나니 부처뿐이요, 넷째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니 지전(地前)의 범부들이다.
  만약 바로 그 아래서 무심할 수 있으면 국량은 허공의 밖을 벗어난다. 또 어찌하여 다시 층계를 지나면서 아직은 단박 무심에 계합되지 못한 것같이 되겠는가.
  한 생각이라도 다름이 있다면, 바로 부처의 지견(知見)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그런 뒤에 5인(忍)으로 그 바른 수행을 밝히고 6즉(卽)으로 그 외람됨을 분간하면 증상만(增上慢)에 떨어짐을 면하게 되어 마침내 불승(佛乘)이 원만하여진다.
  만약 종경 안에 들면, 두루 넓은 근기를 위한 보살승이요 부사의승(不思議乘)으로서 보문(普門)의 법에 의한 한 지위가 온갖 지위임은 마치 선재(善財)가 일생 동안에 5위(位)등을 갖추는 것과 같나니, 모두가 두루 넓은 법으로 서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 보현(普賢)의 근기는 온갖 볼 것을 보고 온갖 들을 것을 들으므로, 곧 보안(普眼)의 경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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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 넓은 법으로 서로 거두어들인다 함은, 마음 밖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두루 넓음[普]이라 하며, 온갖 행과 지위는 모두가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 서로 거두어들이지 않겠는가. 항포문에서는 깊고 얕음으로 분류되는 것과 같다.
  또 『현의격(玄義格)』에서 이르기를 “원교(圓敎)의 42위(位)는 동일한 진리이나, 『지론(智論)』에서 말하면 밝고 어둠[明晦]을 나누었으나 허공은 하나이다. 해는 공중을 다니는데 자세히는 낮과 아침이 있다. 원교의 10주(住) 지위에 오르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에 뜬 것 같고 해가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다. 지혜는 모두가 지음[作]이 없고 행 또한 함[爲]이 없으며, 옮아가고 옮아가는 도의 바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간다”라고 했다.
  『지관(止觀)』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바른 종[正宗]에 들면 삿된 뒤바뀜에 떨어짐을 면하나니, 처음 뚜렷한 믿음을 낸 사람은 모름지기 열 가지 관법[十種灌法]을 밝혀야 한다.
  열 가지 관법이란, 첫째는 부사의한 경계를 관함[觀不思議境]이요, 둘째는 참되고 바른 보리심을 냄[發眞正菩提心]이요, 셋째는 지관에 교묘히 안주함[巧安止觀]이요, 넷째는 모든 법의 두루하다 함을 깨뜨림[破諸法遍]이요, 다섯째는 통달과 장애를 잘 앎[善議通塞]이요, 여섯째는 서른일곱 가지 품류에서 적당한 것을 취함[三十七品調適]이요, 일곱째는 다스리고 도와 개발함[對治助開]이요, 여덟째는 지위의 차서를 잘 앎[善知位次]이요, 아홉째는 억세거나 부드러운 두 도둑을 잘 참음[安忍强軟兩賊]이요, 열째는 순도법애를 내지 않음[順道法愛不生]이니, 이와 같은 것에 어그러지지 않아야 비로소 원승(圓乘)에 든다”고 했다.
  또 맨 처음의 한 생각이 믿고 이해[信解]하는 마음으로 5품위(品位)를 이룰 수 있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전생에 깊고 두꺼운 것을 심었거나 혹은 선지식을 만났거나 혹은 경전으로부터 미묘한 도리인, 하나의 법이 온갖 법이요 온갖 법이 하나의 법이며 하나도 아니고 온갖 것도 아닌 불가사의함을 뚜렷이 들으면, 원만하게 믿고 이해함을 일으켜 한 마음속에 10법계(法界)가 갖추어져 있음이 마치 한 작은 티끌에 대천(大千)의 경책이 있는 것과 같은 줄 믿는 것이니, 이 마음을 듣고자 하면서 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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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행을 닦는다.
  원만한 행[圓行]이라 함은 하나의 행이 온갖 행인 것이니, 간략하게 말하여 열 가지가 된다.
  즉 한 생각의 마음이 평등하고 두루 갖추고 불가사의함을 알고서 이미 흐리멍덩했었음을 불쌍히 여기어 사랑이 온갖 것에 미치며 또 이 마음은 언제나 고요하고 항상 비춤을 알아서 고요하고 비추는 마음으로 온갖 법을 깨뜨리면 곧 공(空)이요 곧 가(假)요 곧 중(中)이며, 또 하나의 마음과 모든 마음은 트이기도 하고 막히기도 했음을 알며, 이 마음에는 도의 품류[道品]를 두루 갖추어서 보리의 길을 증득하며, 또 이 마음의 주장이 되고 도움이 되는 법을 알며, 또 자기 마음이 범부와 성인의 마음에 미쳤음을 알며, 또 마음을 안정시키면 움직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며, 비록 한 마음이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아나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하는 그것이다.
  열 가지 마음이 성취한 것을 요점을 들어 말하면, 그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모두가 모든 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니, 바로 원교의 처음인 수희품(隨喜品)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열 가지 법을 골고루 닦으면 원교의 초발심주(初發心住)인 분진즉(分眞卽)의 안에 들게 되며, 처음의 아(阿)와 맨 끝의 다(茶)며 발심과 필경의 두 가지가 구별되지 않는 것이니, 행과 지위와 생각[行位念]의 세 가지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태교에서 사람을 접대하되 여기에서 머물렀고 그런 뒤에야 바로 10행ㆍ10회향ㆍ10지와 등각ㆍ묘각의 두 지위에 이르렀으며, 온갖 지단(智斷)으로 승진하되 저절로 공력 없이 생각생각마다 위없는 보리가 원만하여진다.
  또 불가사의한 경계[不可思議境]란 것을 널리 해석하면, 『화엄경』 게송에서 말한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와 같아서/갖가지의 5음(陰)을 제조하나니/온갖 세간의 안의 것이란/마음으로 만들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갖가지 5음이라 함은, 10법계(法界)의 5음이다.
  법계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으니, 10이라는 수(數)는 바로 능의(能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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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는 바로 소의(所依)이며 능소를 합하여 일컫기 때문에 10법계라 말한다.
  또 이 열 가지 법은 저마다 원인이요 저마다 결과로서 서로가 섞이거나 외람되지 않기 때문에 10법계라 한다. 또 이 열 가지 법은 하나하나의 그 체성이 모두가 법계이기 때문에 10법계라고 말한다.
  10법계의 널리 통용되는 이름은 음(陰)ㆍ입(入)ㆍ계(界)이나 그는 실로 같지 아니하다. 3도(塗)는 바로 유루의 나쁜 음ㆍ계ㆍ입이요, 3선(善)은 바로 유루의 착한 음ㆍ계ㆍ입이며, 2승(乘)은 바로 무루와 유루의 음ㆍ계ㆍ입이요, 보살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음ㆍ계ㆍ입이며, 부처는 유루도 아니고 무루도 아닌 음ㆍ계ㆍ입이다.
  『석론(釋論)』에서 이르기를 “법의 위없음[法無上]이란 열반이 그것이며, 곧 유루도 아니고 무루의 법도 아니다”라고 했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이르기를 “부처에게는 모든 큰 음ㆍ계ㆍ입이 없다 함은, 앞의 아홉 가지 음ㆍ계ㆍ입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있다[有]고 말함은 열반의 항상 머무름[常住]의 음ㆍ계ㆍ입이 있다는 것이다.
  『대경(大經)』에서 이르기를 “항상함이 없는 빛깔이 소멸됨으로 인하여 항상하는 빛깔을 얻게 되며, 수ㆍ상ㆍ행ㆍ식 또한 그와 같다”고 했다.
  항상함의 즐거움이 겹친다 함은 곧 쌓이고 모인다는 뜻이요, 사랑하고 가엾이 여김이 덮고 가린다 함은 곧 음(陰)의 뜻이며, 열 가지 음계(陰界)가 같지 않기 때문에 5음 세간(世間)이라고 한다.
  5음을 추려 말하면 공통으로 쓰이는 이름이 중생이요 중생이로되 같지는 아니하다. 3도음(塗陰)을 추리면 죄와 고통 받는 중생이요, 인천음(人天陰)을 추리면 즐거움을 받는 중생이며, 무루음(無漏陰)을 추리면 참 성인인 중생이요, 자비음(慈悲陰)을 추리면 보살[大士]중생이며, 상주음(常住陰)을 추리면 높고 지극한 중생이다.
  『대론(大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에서 보다 위없는 이는 부처가 그 분이거늘, 어찌 범부의 낮은 무리와 같겠느냐”라고 했다.
  『대경(大經)』에서 이르기를 “가라라(歌邏羅)일 때에도 이름은 다르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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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늙을 적에도 이름은 다르며, 싹일 때에도 이름은 다르고, 내지 열매일 적에도 이름은 역시 다르다”고 했다.
  이는 또 1기(期)를 요약하여도 열 개의 시기가 서로 다르거늘, 하물며 열 가지로 다른 중생이야 어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중생 세간(衆生世間)이라고 한다.
  열 가지 사는 곳을 널리 공통된 이름으로서 국토 세간(國土世間)이라 함은, 지옥은 붉은 쇠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축생은 땅과 물과 공중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수라는 바닷가와 바다 밑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사람은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하늘은 궁전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육도 보살(六度菩薩)은 똑같은 사람이라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통교(通敎) 보살로서 번뇌[惑]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똑같이 인간과 천상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번뇌를 끊어 다한 이면 방편토(方便土)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별원(別園) 보살로서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한 이면 똑같이 인간 천상의 방편토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번뇌를 끊어 다한 이면 실보토(實寶土)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여래는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의지하여 머무른다.
  『인왕경(仁王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3현(賢)과 10성(聖)은 과보에 머무르되/부처 한 사람만은 정토(淨土)에 사신다”고 했다.
  정토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국토 세간이라 하며, 이 서른 가지의 세간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조작된다.
  또 열 가지 5음은 하나하나마다 각기 열 가지 법을 갖추어 있으니, 이와 같은 모양[相]ㆍ성품[性]ㆍ체성[體]ㆍ힘[力]ㆍ지음[作]ㆍ인(因)ㆍ연(緣)ㆍ결과[果]ㆍ보과[報]ㆍ본말구경(本末究竟) 등으로서 이것이 바로 10여(如)이다.
  5음 세간과 중생 세간과 국토 세간인 바로 이것이 세가지 세간이다.
  이 한 마음은 10법계를 갖추었고 하나의 법계마다 또 10법계를 갖추어서 곧 백의 법계이며, 하나의 법계마다 서른 가지의 세간을 갖추었으므로 백의 법계는 3천 가지의 세간을 갖추었으며, 이 3천은 하나의 생각하는 마음에 있다.
  이에 생각하는 마음이 없을 뿐 우뚝이 마음이 있어서 이내 3천을 갖추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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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한 마음이 앞에 있다거나 온갖 법이 뒤에 있다고도 말하지 아니하고 온갖 법이 앞에 있다거나 한 마음이 뒤에 있다고도 말하지 아니한다.
  예를 들면 마치 여덟 가지 모양[相]이 물건[物]을 옮기는 것과 같다. 물건은 모양 앞에 있되 물건은 옮김을 당하지 아니하고 모양이 물건 앞에 있되 역시 옮김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앞이라고도 할 수 없고 뒤라고도 할 수 없으며 다만 물건이 모양의 옮김을 논할 뿐이요 모양의 옮김이 물건을 논할 뿐이다.
  지금의 마음 또한 그와 같아서, 만약 한 마음으로부터 온갖 법을 낸다 하면 이것이 바로 세로[縱]요 만약 마음이 한꺼번에 온갖 법을 포함한다 하면 이것이 곧 가로[橫]이나 세로라고도 할 수 없고 가로라고도 할 수 없으며, 다만 마음 이것이 온갖 법일 뿐이요 온갖 법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현묘하고 깊숙하고 뛰어나서 식(識)으로도 알 바가 아니요 말로써도 말할 바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가사의한 경계라고 일컫는 뜻이 여기에 있으며, 이미 스스로 한 마음의 부사의한 경계를 요달하였으므로 마침내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키고 참되고 바른 보리 마음[眞正菩提心] 등을 내는 것이니, 이하의 아홉 가지 관문(觀門)이 성숙되게 된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삼승 중에서 역시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설명한 것처럼, 지금 삼승인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고 이 금색세계(金色世界)의 부동지불(不動智佛)을 가리키어 그들로 하여금 곧장 이 자기 마음의 능히 분별하는 지혜가 본래 동요한 바 없음을 알게 한다.
  문수사리는 바로 이 자기 마음을 모양 없음의 묘한 지혜[無相妙慧]를 잘 간택하였고, 각수(覺首)와 목수(目首) 등의 보살은 바로 이 자기 마음으로 믿고 앎[信解] 가운데서 보는 바의 이지(理智)에 따랐다.
  이와 같은 삼승인으로서 아직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이는 결단코 믿지 아니함[不信]에 해당한다. 왜냐 하면 3아승기겁을 지난 뒤에야 부처가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곧장 스스로의 몸과 마음은 모두 범부로 인정하게 되어 부처에게만 부동지(不動智) 등이 있음을 믿을 뿐이요, 제 마음이 바로 근본의 부동지불로서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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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에 이 가르침의 법계의 법 안의 근본지로써 믿는 마음을 삼게 되지 아니한다.
  이 경에서의 믿는 마음은 제 마음으로 분별하는 성품이 바로 법계 성품 안의 근본의 부동지불이요, 금색세계가 바로 제 마음의 물들음이 없는 도리[理]인 줄 곧장 믿어야 한다.
  문수사리는 이 자기 마음으로 묘한 지혜를 잘 간택하고 각수와 목수 등의 보살은 바로 믿는 마음속의 이지(理智)가 앞에 나타남에 따라 믿음의 인(因) 가운데서 모든 불과(佛果)의 법에 계합되어 터럭만큼도 그릇되지 않은 것이므로, 비로소 믿는 마음이 이룩되었다.
  이 믿음으로부터 정혜(定慧)를 닦고 나아가면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와 11지를 겪어 지내는 데에 일월세겁(日月歲劫)의 때가 다시는 옮아감이 없을 것이며, 법계도 본래대로요 부동지불도 옛 그대로여서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바다를 이루어 중생을 교화하며 인과는 옮아가지 않고 시겁(時劫)도 바꿔지지 않으면서 비로소 믿음을 이룰 것이다.
  만약 아승기를 세워서 결정코 실재의 몸이 범부라 하면, 범부와 성인의 두 길이 시겁을 옮아가게 되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게 되어 믿는 마음이 이룩되지 않으리라”고 했다.
  또 『원각경(圓覺經)』에서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중생들이 본래 부처라 하면 무엇 때문에 다시 온갖 무명이 있사옵고, 만약 모든 무명이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다 하면 무슨 인연으로 여래께서는 다시 본래부터 부처를 이루었다 하나이까? 시방의 중생들이 본래 부처의 도를 이루었다가 나중에 무명을 일으킨다 하면, 모든 여래께서는 언제 다시 온갖 번뇌를 일으키오리까? 원하옵나니, 막음 없는 큰 자비를 버리지 마시고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비밀의 광을 여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온갖 세계의 시작하고 마치고 나고 없어지고 앞서고 뒤지고 있고 없고 모이고 흩어지고 일어나고 멈춤이 생각생각마다 계속되며 고리 돌 듯 오가는데, 갖가지로 취했다 버렸다 함이 모두가 윤회(輪廻)이니라. 아직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원각(圓覺)을 가리면 저 원각의 성품도 곧 똑같이 유전하거늘, 거기서 윤회를 면하려 한다면 옳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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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니라.
  마치 깜박이는 눈이 잠잠한 물을 흔드는 것 같고, 또 똑바로 떠 있는 눈이 불의 바퀴돌이를 따라 도는 것 같으며, 구름이 흘러가면 달이 달리고 배가 가면 언덕이 옮아가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야, 모든 바퀴돌이가 아직 쉬지 못했으면 저 물건의 먼저 멈춤도 알 수 없거늘, 하물며 생사에 돌고 도는 때 묻은 마음이 아직 청정해지지 못하고서 부처의 원각을 본다면 뒤바뀌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세 가지 미혹[三惑]을 일으키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허깨비인 눈어리로 망령되이 허공 꽃을 보다가 허깨비인 눈어리가 제거되면, 눈어리가 사라졌으니 언제 다시 온갖 눈어리가 일어날까>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눈어리와 허공 꽃의 두 가지 법은 서로가 기다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한 허공 꽃이 공중에서 없어졌을 때, 공에서 언제 다시 허공 꽃이 일어날까>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허공에는 본래부터 꽃이 없어서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생사와 열반도 그와 같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만 묘한 깨달음의 뚜렷한 비춤은 허공 꽃도 눈어리도 여의었느니라.
  선남자야, 알아야 하느니라. 허공은 바로 잠시도 있는 것이 아니요 잠시도 없는 것도 아니거늘,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이 따르면서 허공의 평등한 본성품이 되어 주는 것이겠느냐.
  선남자야, 마치 금광(金鑛)을 녹이는데 금광을 녹임에서 금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이미 금이 된 뒤에는 거듭 광(鑛)이 되지 않고 무궁한 세월을 지나도록 금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나니, 래부터 이룩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되느니라. 여래의 원각도 그와 같으니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원각의 미묘한 마음은 마치 허공의 성품과 같고 생사와 열반은 곧 허공 꽃의 모양과 같은 줄 알 것이다.
  눈어리는 생겼다 없어졌다 함이 없지 않거니와 참 성품이 어찌하여 있다 없다 하는 일이 있겠는가.
  마치 광석에 금을 감춘 것과 같되 금은 광석에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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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녹여서만이 얻는 것이 아니로되 반드시 녹임으로써 이루어진다.
  미혹했을 때는 마치 아직 깨끗하게 되지 못한 금과 같고, 깨쳐서 알면 마치 이미 이룩된 보물과 같다. 순금은 동요하지 않았으나 더러움과 깨끗함이 잠시 동안 나누어지고, 묘한 성품은 이지러짐이 없으나 미혹과 깨침이 스스로 얻어진다.
  그런 까닭에 『부사의불경계경(不思議佛境界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수보리(須菩提)가 또 물었다.
  ‘대사(大士)시여, 당신은 결정코 어느 자리[地]에 머무르셨습니까? 성문의 자리에 머무르셨습니까, 벽지불의 자리에 머무르셨습니까, 부처의 자리에 머무르셨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하였다.
  ‘대덕이여, 그대는 내가 결정코 온갖 모든 자리에 머무른 줄 아셔야 하십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대사시여, 당신은 역시 범부의 자리에 머무르십니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과 중생들은 그 성품이 바로 결정된 바른 자리[正位]이므로, 나는 언제나 이 바른 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코 범부의 자리에 머무른다>고 말합니다.’
  수보리가 또 물었다.
  ‘만약 온갖 법과 중생들이 바로 결정된 바른 자리라면, 어떻게 모든 자리의 차별을 세우면서 는 바로 범부의 자리요, 이는 바로 벽지불의 자리요, 이는 바로 벽지불의 자리요, 이는 바로 부처의 자리다>라고 말씀하십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하였다.
  ‘대덕이여, 마치 세간에서 언설로 짐짓 허공 중에서 시방을 세우고는 이른바 는 바로 동쪽이요, 이는 바로 남쪽이요, 내지 이는 바로 상방이며, 이는 바로 하방이다>라고 하며, 비록 허공은 차별이 없다 해도 모든 방소에 이러하고 이러한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같아서 여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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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온갖 법의 결정된 바른 자리 중에서 좋은 방편으로 모든 자리를 세워, 이른바 는 바로 범부의 자리요, 이는 바로 성문의 자리요, 이는 바로 벽지불의 자리요, 이는 바로 보살의 자리요, 이는 바로 부처의 자리다>라고 하나니, 비록 바른 자리에는 차별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자리에는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천태(天台)가 이르기를 “4교(敎)는 마치 공중에 있는 네 개의 점(點)과 같다. 네 개의 점이 비록 분명하기는 하나 허공의 성품을 무너뜨리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이 지위는 마지막 지위에 이르기까지 도리[理]이거나 행(行)이거나 간에 다 궁구되어야 한다”고 했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이르기를 “불자(佛子)야, 제42의 자리는 고요히 사라진 마음의 묘각지(妙覺地)라고 한다. 언제나 일상(一相)으로 머무르고 첫째가는 무극(無極)이어서 잔잔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으며, 일체종지로 남이 없음[無生]을 두루 비추고 진실로 처음과 마지막이 있되 부처만이 다하며, 중생의 근본도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되 부처는 역시 다 비추며, 내지 온갖 번뇌와 온갖 중생의 과보를 부처는 한 생각의 마음으로 헤아려서 그 근원을 다하며, 온갖 부처의 나라와 온갖 부처의 인(因)과 온갖 보살의 신통 변화 역시 한 생각으로 한꺼번에 알며, 불가사의한 두 진리의 밖에 머무르되 홀로 둘이 없음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러므로 먼저 종(宗)의 근본을 얻은 연후에 연마하는 것인 줄 알 것이다. 연마하는 때에, 도의 근본을 잃지 아니함은 마치 교묘하게 쇠를 단련하면 약간의 무게조차 잃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원점(圓漸)의 안에서는 계층이 어찌 없겠는가. 유위로부터 무위에 이르고 생인(生忍)으로 인하여 법인(法忍)을 이루며, 원융(圓融)은 항포(行布)를 무너뜨리지 않나니 무너뜨린다면 순수한 본체[理]의 현상[事]을 잃어버리고, 항포는 원융을 장애하지 않나니 장애한다면 순수한 현상의 본체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비록 본체와 현상은 한 끝이요 원인과 결과는 때가 같으나, 설고 익은 근기는 나누어지는 것 같고 처음과 나중의 마음은 뒤섞이지 아니하며 곧장 묘각에 이르면 마치 달이 다 찬 때와 같은 것이니, 비로소 인문(因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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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다하여야 결과 바다에 명합된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야, 마치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들어가려 할 때 아직 바다에 닿기 전에는 많은 공력을 쓰지만 만약 바다에 이르고 나면 바람을 따르면서 갈 뿐 사람의 힘을 빌지 아니하며 큰 바다에 닿으면 하루 동안의 운행을 아직 이르기 전의 것에 견주거니와 그 아직 이르지 못했을 적에 설령 백 년을 지낸다 하여도 또한 미칠 수 없는 것처럼, 불자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광대한 선근과 양식을 쌓아 모으고는 대승의 배를 타고 보살행의 바다에 이르면 한 생각 동안에 무공용지(無功用智)로써 일체지지(一切智智)의 경계에 들거니와 본래의 공용 있는 행[有功用行]으로는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의 겁(劫)을 지낸다 하여도 미칠 수 없는 바니라”고 한 것과 같다.
  문 실관(實觀)에 들면 하나조차 오히려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열 가지의 법을 널리 밝히는가.
  답 실관에 든다 함은 바로 모든 법의 실제를 관하는 것이니, 하나의 법이 이미 실제면 만 가지 법이 모두 그렇다. 곧 하나가 실제이면 온갖 것이 실제이며 만 가지 법이 모두 그렇다. 곧 하나가 실제이면 온갖 것이 실제임은 마치 꿀의 성질이 달면 온갖 꿀이 모두 단 것인 줄 아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관문(觀門)을 빌리지 않고도 불가사의한 한 법만을 알면 저절로 두루 법계가 다 이 뜻과 같아진다.
  큰 근기는 한 번만 보아도 환히 알아서 빠뜨림이 없음은 마치 으뜸가는 의사가 병환을 다스릴 때 풀 베는 아이의 춤을 보이는데도 뭇 병들이 다 나아버리는 것과 같다.
  또 그 말만을 곧장 들어도 병이 저절로 나아진다면, 무슨 진찰이며 처방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또 마치 으뜸가는 의사는 약 아닌 것으로 약을 삼고 중간의 의사는 약으로 약을 삼고, 하층의 의사는 약이 약 아닌 것으로 됨과 같다.
  약 아닌 것으로 약을 삼는다 함은 마치 한 물건도 약이 되지 않음이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니, 풀을 붙잡기만 하여도 모두가 약이 되거늘 어찌 이 약이 약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마치 그릇된 도를 행하는데도 부처의 도에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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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과 같으니, 곧 번뇌이면서 보리를 이루고 온갖 세간의 법이 순전히 부처의 법이다.
  약으로 약을 삼는다 함은 곧 병에 알맞게 약을 주고 그 수법에 따라 병이 낫는 것이니, 부자(附子)는 풍(風)을 다스리고 귤피(橘皮)는 기(氣)를 녹이는 따위이다. 마치 근기를 살피어 법을 주되 그 시기를 잃지 않는 것과 같아서, 생각이 많은 이면 수식관(數息觀)을 닦게 하고, 음욕이 많은 이면 부정관(不淨觀)을 닦게 하는 것 등이다.
  약이 약 아닌 것으로 된다 함은 곧 병의 근원을 알지 못하므로 도리어 그 질환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설법하는 이가 그 근기를 피하지 않아서 얕은 근기는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못난 선비는 듣고서 크게 웃는 것과 같다. 제호(醍醐)의 훌륭한 맛이야말로 세간에서 진기한 것이거니와 이런 사람들이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
  만약 상상(上上) 근기의 사람이면, 겨우 그 종(宗)을 깨치기만 하여도 언설조차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옛 성인이 이르기를 “으뜸가는 선비가 나의 시(詩)를 보면/그 뜻 집어내며 만면(滿面)에 웃음 짓고/양수(楊脩)는 어린 부녀[幼婦]를 보고/한 번 보자 이내 아름다움[妙] 알았네”라고 했다.
  혹은 가린 죄장이 깊고 두껍거나 근기와 생각이 예리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관문(觀門)을 빠짐없이 겪으면서 종자의 현행(現行)을 다스려야 함은 마치 약을 더하거나 다스리거나 합쳐서 먹은 뒤에야 낫게 되는 것과 같다.
  태교(台敎)에서는 중간 근기와 아래 근기에 맞추어서 10승관법(乘觀法)을 두루 겪게 한다. 그러나 열 가지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문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이르기를 “실관(實觀)에 드는 것에서 곧 10승관법을 밝혔다. 첫째는 부사의한 경계[不思議境]이니, 바로 이것은 1실(實)의 네 가지 진리로서 나고 죽는 괴로움의 진리[苦諦]가 불가사의하여 곧 공(空)이요 곧 가(假)요 곧 중(中)이다. 곧 공이기 때문에 방편이 청정하고, 곧 가이기 때문에 원만하게 청정하며, 곧 중이기 때문에 성품이 청정하다. 세 가지의 청정은 한 마음 속에서 얻어지므로 큰 열반[大涅槃]이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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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했다.
  다시는 사라질 수 없는 이것이 곧 나고 죽는 괴로움의 진리요, 이는 지음 없음[無作]이 사라짐의 진리[滅諦]이며 또한 쌓임[集]과 도[道]이다.
  번뇌인 쌓임의 진리가 불가사의하여 곧 공이요 곧 가요 곧 중이다. 곧 공이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고, 곧 가이기 때문에 도종지(道種智)라 하며, 곧 중이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세 가지 지혜는 한 마음 속에서 얻어지므로 큰 반야[大般若]라 하는 것이니, 『정명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곧 보리의 모양[菩提相]이다”라고 했다.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이것이 곧 번뇌의 쌓임이면서 지음이 없음의 도의 진리이며 또한 이는 괴로움과 사라짐이니, 때문에 불가사의한 1실의 네 가지 진리라고 한다.
  또한 이는 참됨[眞]과 착함[善]과 묘함[妙]의 빛깔이다. 왜냐 하면 나고 죽음이 곧 공이기 때문에 참됨이라 하고, 나고 죽음이 곧 나이기 때문에 착함이라 하며, 나고 죽음이 곧 중이기 때문에 묘함이라 한 것이니, 이 이름을 유문의 불가사의한 경계[有門不可思議境]라 한다.
  둘째는 참되고 바른 마음을 내는[發眞正心] 것이니, 일체 중생이 곧 큰 열반이거늘 무엇 때문에 뒤바뀌어서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가. 곧 크게 가엾이 여김을 일으키고 두 가지 서원을 세워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면 제도되게 하고 아직 끊지 못한 이면 온갖 번뇌를 끊게 한다.
  바로 이것이 보리이거늘 무엇 때문에 어리석어서 도(道)를 잘못되게 여기는가. 곧 크게 인자함을 일으키고 두 가지 서원을 세워서, 아직 모르는 이면 알게 하고 아직 얻지 못한 이면 얻게 한다. 무연(無緣)의 자비와 청정한 서원과 인자하고 착한 근력(根力)으로 저절로 일체 중생들을 거두어들인다.
  셋째는 마음을 안주하는[安心] 것이니, 이해하여 이룩하고 발심이 갖추어졌거늘, 어찌 못에 다다라 고기를 보면서도 그물을 치려 하지 않으며 양식을 싸고 다리를 개고는 편히 앉아서 행하지 않겠는가. 수행의 요점[要]은 정혜(定慧)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마치 음양(陰陽)이 알맞으면 곡식의 결실이 잘되는 것과 같다. 비와 가물음이 알맞은데 타고 문드러짐이 어찌 생기겠는가. 만약 두 수레바퀴가 똑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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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고르면 이 수레는 잘 굴러가고 두 날개가 다 완전하면 날아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생사 그대로가 열반인 줄 알면 정(定)이라 하고, 번뇌 그대로가 보리인줄 통달하면 혜(慧)라 하는 것이니, 한 마음 속에서 정혜를 교묘히 닦으면 온갖 행이 두루 갖추어진다.
  넷째는 법의 두루하다 함을 깨뜨리는[破法遍] 것이니 이 미묘한 지혜로써 마치 금강의 도끼로 생각하는 바를 모두 부수듯 하고 흐림이 없는 눈에 대는 것은 모두 환히 보이듯 한다.
  만약 생사가 곧 열반이라면 분단(分段)과 변역(變易)의 괴로움의 진리가 모두 깨뜨려지고, 만약 번뇌가 곧 보리라면 4주(住) 5주(住)의 쌓임의 진리가 다 파멸한다. 비록 또 깨뜨릴 수 있되 역시 깨뜨릴 바가 있지 아니하다. 왜냐 하면 생사가 곧 열반이기 때문에 깨뜨릴 바가 없다.
  다섯째는 트임과 막힘을 아는[識通塞] 것이니, 마치 주병보(主兵寶)가 가지고 버림을 마땅하게 하여 강한 이는 편안히 하고 약한 이는 어루만져 줌과 같다.
  생사의 우환을 막힘이라 한다면 곧 이 열반은 트임인 줄 알 것이고, 번뇌의 산란을 막힘이라 한다면 곧 이 보리는 트임인 줄 알 것이다. 처음 외도의 네 가지 소견[見]으로부터 원교(圓敎)의 네 가지 문(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트임과 막힘을 알 것이며, 마디마디마다 집착하면 바로 이것이 막힘이요 마디마디가 없어지게 되면 트임이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의 평탄함과 험함을 알지 않으면 행하는 법이 나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요한 보배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여섯째는 도의 품류를 잘 아는[善識道品] 것이니, 생사가 곧 열반인 줄 관하면 10계(界)에서 나고 죽는 색음(色陰)이 모두가 청정한 것도 아니고 청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내지 식음(識陰)이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여덟 가지 뒤바뀜[八顚倒]을 능히 깨뜨리면 곧 법다운 성품의 염처(念處)로서 그 염처 중에는 도의 품류인 3해탈(解脫)과 온갖 법이 갖추어져 있다.
  또 열반이 곧 생사인 줄 알면 네 개의 말라죽은 나무가 드러나고, 생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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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열반인 줄 알면 네 개의 흐트러진 나무가 드러나겠지만,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곧 1실(實)의 진리임을 알면 말라죽은 것도 아니고 흐트러진 것도 아니어서 큰 열반에 머무른다.
  일곱째는 다스림을 잘 닦는[善修對治] 것이니, 만약 주장되는 도[正道]에 장애가 많으면 돕는 도법[助法]을 써야 한다.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여 보장(報障)을 다스리고 번뇌가 곧 보리임을 관하여 업장(業障)과 번뇌장(煩惱障)을 다스린다.
  여덟째는 지위의 차서를 잘 아는[善知次位] 것이다. 생사의 법이 본래 그대로 열반이니 본체[理]의 열반이나 생사가 곧 열반인 줄 앎은 명자(名字)의 열반이요, 생사가 곧 열반임을 부지런히 관함은 관행(觀行)의 열반이요 선근의 공덕이 남은 곧 상사(相似)의 열반이요, 진실한 지혜가 일어남은 곧 분진(分眞)의 열반이며, 생사의 밑둥까지 다함은 곧 구경(究竟)의 열반이다. 번뇌가 곧 보리임을 관하는 것 또한 그와 같다.
  아홉째는 잘 참는[善安忍] 것이니, 안팎의 억셈과 부드러움의 가린 장애를 능히 참으면 관하는 마음이 파괴되지 않는다. 만약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면 음(陰)ㆍ입(入)의 경계와 질병ㆍ근심ㆍ업ㆍ악마ㆍ선정ㆍ2승ㆍ보살 등의 경계에 동요하거나 무너뜨림을 받지 아니하며, 만약 번뇌가 곧 보리임을 관하면 모든 소견과 뛰어난 체[增上慢] 등의 경계에 동요되지 아니한다.
  열째는 법애가 없는 것[無法愛]이다. 이미 장애와 어려움을 지났음을 지났으면 도의 뿌리가 성립되고 모든 공덕이 생긴다.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기 때문에 모든 선정의 삼매(三昧) 공덕이 생기고, 번뇌가 곧 보리임을 관하기 때문에 모든 다라니(陀羅尼)와 두려움 없음[無畏]과 특수함[不共]의 모든 반야가 생기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관하기 때문에 법신의 실상(實相)이 생긴다.
  서로 비슷한 공덕이 진리를 쫓으면서 나므로 기쁨에서 일어나는 순도법애(順道法愛)가 생기면 법애(法愛)라 이름하고, 위로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아니하면 정타(頂墮)라 한다.
  이 법애가 만약 생기면 이내 빨리 없애야 하며, 이미 법애가 소멸되면 벌써 무명이 깨뜨려져서 부처의 지견(知見)이 열리고 실상의 체성을 증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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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을 증득하고 번뇌가 곧 보리이기 때문에 반야를 증득하며 이 두 가지가 둘이 아니면 법신을 증득하여, 한 몸이 한량없는 몸이요 위없는 보배 무더기요 뜻대로 되는 둥근 구슬이요 뭇 법이 완전히 갖추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유문에서 실제에 들고 경체를 증득한다[有門入實證得經體]고 이름한다.
  세 가지 문[三門] 또한 그와 같으며, 온갖 법의 문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와 같다.
  문 만약 마음 이것이 부처라면 온갖 함생(含生)들이 다 이 마음이 있으므로 모두가 부처를 이루게 되거늘, 교(敎) 가운데서는 어찌하여 겁(劫)과 나라[國]와 명호(名號)의 수기(授記)는 보이지 아니한가.
  답 겁과 나라와 명호 이것은 세간에 출현하여 교화하는 [문]가운데서 나타나는 수기이다.
  참 수기를 알고자 하는가.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도 여(如)요, 온갖 법도 여니라”고 했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님의 자재한 힘을 드러냄은/원만한 경전에서 설명함 같고/한량이 없는 모든 중생들/모두가 보리의 수기 받았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낱낱의 생각하는 마음 속에서/온갖 법을 널리 살펴보건대/진여의 자리에 편안히 머무르고/모든 법의 바다를 환히 통달했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낱낱의 작은 티끌 속에서/온갖 법을 능히 증득했으며/이러한 거리낄 바 없는 것으로/시방의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법과 마음과 경계에 모두가 부처가 되었다는 수기이다.
  한 생각으로 두루 갖추고 하나의 티끌도 이지러지지 않으며 생각마다 진리를 증득하고 티끌마다 체성에 명합되며 똑같이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살고 모두의 이름은 비로자나(毘盧遮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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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다른 국토와 따로의 몸과 성인은 강하고 범부는 하열하다는 것이 없으며, 3세의 부처와 한꺼번에 도를 이루어 앞뒤의 정(情)이 소멸되고 열 가지 무리의 중생들과 함께 같은 날에 열반하여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견(見)이 끊어지며, 유정과 무정의 망령된 견해가 일어남을 면하고 마음속과 마음 밖의 삿된 생각이 나지 않나니, 위로도 구할 바가 없고 아래로도 교화할 것 없어서 진리에 명합하고 실제를 밟으며 근본을 얻고 종(宗)으로 돌아가 다 함께 한 끝의 해탈의 문에 오르고 모두가 평등한 보리의 수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또 고덕(古德)이 물었다.
  “이미 물질[色]과 마음이 둘이 아니고 닦는 성품이 한결같거늘, 어찌하여 목석(木石)에는 보리의 수기가 보이지 아니한가.”
  답하였다.
  “낱낱의 모든 법은 유심(唯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 밖에는 법이 없거늘, 어찌 유심이 소멸하는데 물질이 존재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유정에게만 수기하여서 무정을 포섭하였다. 비유컨대 요술하는 일은 반드시 요술하는 마음을 빌어야 되므로 마음이 요술 속에 있어야 요술하는 일을 지닐 수 있다. 만약 그 마음이 소멸되면 요술하는 일도 같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때문에 마음만이 소멸될 뿐 다시 일을 소멸시키지 아니한다.
  중생의 물질과 마음도 그와 같아서 모두가 곡두의 모양 같다. 온갖 바깥 경계가 곡두의 마음으로부터 나거늘 어찌 마음이 소멸하는데 곡두의 물질이 존재하겠는가. 이는 곧 유정이 수기를 얻으면 무정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정에게 따로 수기할 필요는 없다.”
  『현의격(玄義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 부처라는 것은 처음 발심하는 때로부터 곧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체달하여 온전히 옛 부처와 같다. 몸매는 삼제(三際)에 이르되 온전히 한 티끌에 나타나고, 성품 바다는 그지없어서 겉과 속을 얻을 수 없다. 이 법을 믿기 때문에 발심이라 하고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증득한다 하며, 증득하여 이루어지면 부처라 하나 틀림없이 방향과 처소는 없다.
  또 원교(圓敎)에서 초주(初住)에 든 사람은 마음이 법계와 같아지고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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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방소가 없는데, 어찌하여 하늘 옷을 입고 하늘 자리에 앉아 사부 대중이 에워싸게 되겠는가. 겁과 나라와 명호를 붙여서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는 것은 아직 발심하지 못한 이를 유인하여 인도하고 사모하게 함일 뿐이므로, 만약 몸과 국토에 애착하면 망정(妄情)이 아직 다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처음 발심했을 때에 바로 정각을 이루었으니, 한 찰나 동안에 모두 이 법을 얻은 것이요 찰나 동안의 이외에 따로 때가 있음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본래부터의 법이 아닌 때문인 줄 알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법 가운데서 부처가 도를 이루는 것을 보되 겁의 수량의 길고 짧음과 처소를 지으면서 보게 된다면, 믿음 또한 이룩하지 못하였고 아직 도를 닦는 이라 논하지 못하겠다. 만약 이해한 이면 본래부터 온전히 얻었거니와 미혹함에 있는 이면 스스로 윤회에 빠지리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보는 바의 경계와 여래의 명호가 있음은 모두가 제 마음 부처의 과위로써 알 바의 법일 뿐이나, 만약 제 마음에서 알지 못하면 얼굴에 마주 대주어도 보게 될 기약조차 없으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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