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4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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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부처를 이루는 본래의 도리는 이 한 마음뿐이거늘, 무엇 때문에 어떻게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의 행위(行位)의 원인과 석가(釋迦)와 미륵(彌勒)의 명호(名號)의 결과와, 시방의 모든 부처 국토의 신통 변현과 내지 갖가지 법문을 다시 세우는가.
  답 이것이 바로 명호와 행위 없는 명호와 행위이며, 원인과 결과 없는 원인과 결과이다. 이 마음이 원인을 짓고 이 마음이 결과를 이루며 이 마음이 명호를 드러내고 이 마음이 행위를 세운다.
  『보현관경(普賢觀經)』에서 이르기를 “대승(大乘)의 원인이란 바로 실상(實相)이요, 대승의 결과 역시 실상이다”라고 했으며, 그 『석론(釋論)』에서 이르기를 “처음에 관(觀)하는 실상을 원인이라 하고, 관하는 마지막을 결과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처음과 나중이 모두가 마음이요 원인과 결과는 함께 증득한다. 다만 근기가 평등하지 않은지라 보는 바가 같지 않을 뿐이다. 만일 하나의 법으로써 근기에 맞춘다면 끝내 다 같이 해탈하게 되지 못하리니, 저마다 나투어 보이고 물건을 이끌어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갖가지 이름을 연다 하더라도 모두 이는 한 마음의 이치이다. 만일 자기 마음을 어기고 바깥 부처의 몸매와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계를 취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뒤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만일 거룩한 덕과 빛깔과 종족(種族)으로써/인간 안의 조어사(調御師)를 본다고 하면/이는 병든 눈으로 뒤바뀌게 본 것이라/다시는 훌륭한 법 알 수 없으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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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가령 백 겁(劫)이며 천 겁 동안을/언제나 여래를 뵈온다 하여도/진실한 이치에 의거하지 않으면서/세간을 구제한 이 살펴본다면/이 사람은 모든 상(相)을 취하는 것이라/어리석은 그물만이 더욱 자라고/나고 죽는 감옥에 얽매이게 되어/눈먼 장님으로서 부처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어찌하여 부처를 보지 못하느냐 하면, 첫째는 자기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요, 둘째는 숨음과 드러남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중생의 원인은 본각(本覺)에 숨어 있고 모든 부처의 결과는 법신(法身)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원인이 숨은 곳은 본각이고 이 결과가 드러난 곳은 법신이므로, 결과가 원인을 능히 이루면 부처로서의 중생이다. 결과가 드러난 곳은 법신이고 이 원인이 숨은 곳은 본각이므로 원인이 결과를 능히 이룩하면 중생으로서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범부와 성인이 서로 통하고 본체[理]와 현상[事]이 같이 겹쳐 포함한다”고 했다.
  이른바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함의 석가는 여기 말로 능인(能仁)이며, 모니는 여기 말로 적묵(寂黙)이다. 능인이란 곧 마음 성품이 그지없어서 온갖 것을 함용(含容)한다는 것이요, 적묵이란 바로 마음의 체성이 본래 고요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석가모니라고 이름한다. 깨침을 여기에서는 부처[佛]라 한다.
  미륵(彌勒)이란 여기 말로 자씨(慈氏)이다. 바로 한 마음의 진실된 사랑[慈]이니, 마음이 제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여 물건 따라 말고 펴고 하며 응현(應現)하되 방소가 없어서 무연(無緣)의 교화를 이루기 때문에 자씨라고 일컫는다. 아미타(阿彌陀)란 여기 말로 무량수(無量壽)이다. 곧 이치대로 수명을 지니는 것이니, 한 마음의 진여(眞如) 성품이 그지없으므로 한량없는 수명이라고 한다. 아촉(阿閦)이란 여기 말로 부동(不動)이다. 곧 한 마음의 묘한 성품은 잠잠하며 동요하지 않아서 묘각(妙覺)의 지위도 더 늘어나지 않고 무명(無明)의 자리도 더 줄어지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음이라 일컫는다.
  삼장 륵나(勒那)가 “법계에 두루 들어가 예배한다[遍入法界禮] 함은, 진실로 수행하는 이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몸과 마음의 평등한 법을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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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본래부터 법계의 모든 부처의 몸 밖을 여의지 않았고 모든 부처의 몸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나의 안에도 있지 아니하며, 제 성품은 평등하여 본래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이제 한 부처에게 예배함은 모든 부처와 온갖 삼승(三乘)지위의 샘 없음[無漏]에 두루 통하는 것이며, 나의 몸에 이미 두루하다. 따라서 부처 또한 두루하다. 내지 법계의 공(空)과 존재[有]의 두 경계와 의보(依報)ㆍ정보(正報)의 두 가지며 꾸밈과 공양거리가 인연 따라 두루 찬다.
  법계를 여의지 않으면서 마음 따라 걸림이 없고 아울러 공양을 드리되 따라 기뻐하면서 조아리며 예배함이, 마치 한 방 안에 걸린 백 개 천 개의 거울에 어떤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거울에는 모두가 형상이 나타남과 같다. 부처 몸은 청정하여 밝기가 그 거울보다 뛰어나며, 서로서로 교차하여 들어가지만 거울은 비추지 아니함이 없고 그림자는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것을 거두어 총체[總]가 되고 다른 것에 들어가 별개[別]가 된다.
  하나의 몸이 이미 그러하므로 온갖 법계의 범부와 성인의 몸까지도 그러하며, 공양 거리도 모두 따라 기뻐하면서 다 같이 공양을 돕는다. 이미 내 몸이 부처의 몸 안에 있음을 알았거늘, 어떻게 뒤바뀌어 망령되이 삿된 업을 지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또 모든 부처의 공덕과 작용이 이미 같으므로 명호 또한 같다. 어느 명호이거나 간에 일컬음에 따라 명호가 다하지 아니함이 없음은, 마치 한 분의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컬으면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부르는 것과 같아서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서천(西天)에서는 아미타불이라 일컫고 여기서는 무량수불이라 부르거늘, 어찌 한 부처라도 오래 살지 아니함이 있겠는가. 설령 모든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한 부처만이 중생을 교화한다 하여도 그 공(功)은 법계로 돌아가는 것이니, 법계의 공덕과 작용이 두루함을 바로 법계에 두루 들어가 예배한다고 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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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였다.
  ‘네 가지가 평등하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대중 가운데서 이렇게 는 그 때에 구류손불(拘留孫佛)이 되고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이 되고 가섭불(迦葉佛)이 되었느니라>고 부르짖는다.
  무엇이 네 가지의 평등이냐 하면, 이름의 평등[字等]이요, 말의 평등[語等]이요, 법의 평등[法等]이요, 몸의 평등[身等]이니, 이것을 네 가지의 평등이라 한다. 평등의 이치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명자(名字)가 동일하고 범성(梵聲)이 동일하고 법의 문[乘門]이 동일하고 참된 몸[眞體]이 동일하며, 내지 마음이 동일하고 지혜가 동일하고 깨달음[覺]이 동일하고 도(道)가 동일하다. 마치 앙굴마라(鴦崛摩羅)와 문수사리가 시방을 함께 노닐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뵈었는데 그 부처님마다 모두가 가불이라 일컫는 이가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니라.>’”
  또 『법화경(法華經)』에서 밝히기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가 석가의 분신(分身)이며, 아촉불(阿촉閦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다 본사는 곧 나의 마음이다”고 하였다.
  그 해석에서 이르기를 “미타와 아촉뿐만이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부처가 다 나의 본사요, 해인(海印)이 단박에 나타난 것이다”라고 했다.
  법화의 분신에는 많은 정토(淨土)가 있거늘, 어찌하여 자기의 정토는 지시하지 않으면서 따로 아미타의 묘희(妙喜)에 가게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알라. 현수(賢首)와 미타 등이 모두가 본사이다. 다시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현수라 함은 곧 「수량품(壽量品)」 중에서 “백만 아승기 세계를 지나 최후의 훌륭한 연화(蓮華) 세계의 여래이다”라고 했다. 경 중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혹은 훌륭한 연화 세계에서/현수 여래께서 살고 계심 보게 되리”라고 했다. 만일 이것이 본사를 찬탄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여래가 딴 세계에 계심을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총지교(總持敎) 가운데서 역시 37존(尊)이 모두 비로자나(毘盧遮那)인 한 부처가 나투는 바라고 설명함과 같은 것이니, 비로자나여래는 속의 마음을 증득하여 스스로 수용(受用)하며 다섯 가지 지혜[五智]를 이룩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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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가지 지혜로부터는 네 분의 여래가 흘러나온다. 대원경지(大圓鏡智)에서는 동방의 아촉여래가 흘러나오고, 평등성지(平等性智)에서는 남방의 보생(寶生)여래가 흘러나오고, 묘관찰지(妙觀察智)에서는 서방의 무량수(無量壽)여래가 흘러나오고, 성소작지(成所作智)에서는 북방의 불공성취(不空成就)여래가 흘러나온다. 법계청정지(法界淸淨智)는 곧 비로자나여래 자신에 해당한다.
  37이라 함에서 다섯 방소의 여래에 각각 네 분의 대보살이 좌우에 있으므로 20이 된다. 중방(中方)의 비로자나 여래에 네 분의 대보살이란, 첫째가 금강바라밀(金剛波羅密)보살이요, 둘째가 보바라밀(寶波羅密)보살이요, 셋째가 법바라밀(法波羅密)보살이요, 넷째가 갈마바라밀(羯磨波羅密)보살이다.
  동방 아촉여래의 네 분 보살이란, 첫째가 금강살타(金剛薩埵)보살이요, 둘째가 금강왕(金剛王)보살이요, 셋째가 금강애(金剛愛)보살이요, 넷째가 금강선재(金剛善哉)보살이다.
  남방의 보생여래의 네 분 보살이란, 첫째 분이 금강보(金剛寶)요, 둘째 분이 금강위광(金剛威光)이요, 셋째분이 금강당(金剛幢)이요, 넷째분이 금강소(金剛笑)이다.
  서방의 무량수 여래는 관자재왕(觀自在王)여래라고도 하는데 그 곳의 네 분 보살이란, 첫째가 금강법(金剛法)이요, 둘째가 금강검(金剛劒)이요, 셋째가 금강인(金剛因)이요, 넷째가 금강리(金剛利)이다.
  북방의 불공성취여래의 네 분 보살이란, 첫째 분이 금강업(金剛業)이요, 둘째 분이 금강법(金剛法)이요, 셋째 분이 금강약차(金剛藥叉)요, 넷째 분이 금강권(金剛拳)이다.
  이 스물다섯 분에 4섭(攝) 보살과 8공양(供養)보살을 합쳐 37존이다. 4섭 보살이란 구(鉤)ㆍ색(索)ㆍ쇄(鎖)ㆍ영(鈴)이요, 8공양 보살이란 소(燒)ㆍ산(散)ㆍ등(燈)ㆍ도(塗)ㆍ화(華)ㆍ만(鬘)ㆍ가(歌)ㆍ무(舞)이다.
  모두가 위에는 금강이 있고 아래에는 보살이 있다. 그러나 이 37존에는 각기 종자(種子)가 있어서 모두가 이는 본사의 지혜 작용에서 흘러나오는데, 지금 『화엄경』 안의 해인이 단박에 나타남[海印頓現]과 대의(大意)가 같다.
  [문] 만일 이 이치에 의하면 어찌 평등의 의취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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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취(平等意趣)』에서 이르기를 “바로 나[我]라고 말함은 평등의 의취에 의거한 설명이거늘, 곧 나의 몸이 아니라면 어떻게 모두를 본사(本師)가 된다고 설명하겠는가”라고 했다.
  대답 중의 평등이라는 말은 동일한 뜻이다. 유식(唯識)에서도 “오히려 일체 중생 안에는 많은 부처가 속해 있어서 많은 부처가 함께 변화하여 하나의 부처로 된다”고 말했다. 만일 하나에 속한 부처가 부처로서 나투어 보여서 많은 몸으로 된다면, 시방의 여래도 낱낱 모두가 그렇다. 지금 이 한 부처가 많은 몸으로 될 수 있다면 이것에 의하면서 본사를 찬탄할 따름이니, 마치 제자가 부(傳) 대사에게 묻되 “종래로 부처의 문소(文疏)를 아뢰는 데는 어찌하여 석가의 것만 아뢸 뿐 미륵의 것은 일컫지 않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다.
  [답] 시방의 모든 부처는 하나의 법신(法身)이거늘, 어찌하여 꼭 둘일 필요가 있겠는가. 또 3신(身)과 10신(身)은 작용에 따라서의 설명이요 그 본래 성품에서 보면 하나의 몸일 따름이니, 마치 어두운 방에 희미한 빛이 구멍에 따라 비출 때 그 빛이 비록 만 가지로 다르나 본래의 것은 하나임과 같다. 이른바 참된 법신이다.
  역시 근기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형상은 같지 않은 것이니, 마치 「출현품(出現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범왕(梵王)이 제 궁전에 있으면서/3천의 범천의 곳 널리 나타낼 때/온갖 사람ㆍ하늘들이 모두가 보는데/분신(分身)하지 않으면서 그 곳을 본 것 같다/부처님들 나타내는 몸 또한 그러하여/온갖 시방에 모두 다 두루하여/그 몸은 수가 없고 칭량할 수 없지만/분신하지도 않고 따로 나누지도 않네”라고 한 것과 같다.
  비로소 다른 부처의 지혜가 자기에 두루하지 아니함을 알면 자신의 부처의 지혜가 다른 이에게 두루할 것이요, 역시 자신의 원인이 다른 이의 결과가 나의 원인을 이어받는다.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의 때가 같고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끝이다. 그러므로 두 모양이 없는 줄 알면 악마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고 한 법조차도 부처의 법[佛乘]에 편안히 머무를 수 없다.
  만일 모양을 취하면 6입(入)의 바다에 침몰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5음(陰)의 성(城)에 떨어지리니 모두가 이는 중생이 서로가 다른 정(情)에 따라 나와 남이라는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림자가 나누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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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많아지고 자취가 제멋대로 형상을 달리하되, 하나의 참된 것을 여의고서 각기 마음의 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융(融) 대사가 이르기를 “5음을 여의고서 부처가 있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과 부처가 같은 것 또한 그렇고, 부처와 중생이 같은 것도 그러하다”라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마음을 여의고서 보리(菩提)를 구한다면, 마치 하늘과 땅과 같다”라고 했다. 어찌하여 한 자 여섯 자의 몸이 있으면 그 몸에 한 자 여섯 자가 없겠는가. 「대품(大品)」에서 이르기를 “몸으로써 부처를 삼지 아니하고 종지(種智)로써 부처를 삼나니, 만일 상호(相好) 이것이 부처라면 전륜왕이 부처이다”라고 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몸 안에서 부처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느냐 하면, 번뇌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를 갖춘 중생은 비록 가깝다 하더라도 보이지 아니한다”고 했다. 몸 안에 있을 뿐이요, 매우 가까운데도 보이지 아니한다.
  또 우리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속옷 속에 값으로 칠 수 없는 보주가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내지 마음이란 믿음이니, 앞의 식[前識]의 법(法)이 모양에 따라 지어감이 있으면 번뇌를 식이라 하고 마음이라 하지 아니한다. 뜻[意]이란 기억[憶]이다. 기억으로 앞의 경계를 생각하여 허망을 일으키는 것이니, 다 같이 이는 망식(妄識)이요 마음의 일에는 간여하지 아니한다.
  마음은 있음과 없음이 아니므로 있음과 없음에 물들지 아니하며, 마음은 때 묻음과 깨끗함이 아니므로 때 묻음과 깨끗함에 더럽혀지지 아니한다. 내지 미혹과 깨침과 범부와 성인이며 가고 오고 떠나고 머무름이 다 같이 망식이요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본래 생기지도 않았고 지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일 자기 마음이 이러한 줄 알면 부처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바로 마음이 도량(道場)이다”라고 했으니,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세간에는 이와 같은 몸이나 모든 부처의 몸 또한 그러하다”라고 했다. 그 제 성품을 분명히 알면 이것을 부처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몸이 한량없는 몸이요 모두가 부처의 몸과 동일한 것이니, 성품이 없음[無性]의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공(志公)이 이르기를 “밥 때가 진시(辰時)이며/무명이 본래 석가의 몸이다/앉고 눕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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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道)인 줄을 모르고/어찌 그리 빠르게 모진 고통 받는가’라고 했다.
  『화엄사기(華嚴私記)』에서 이르기를 “이렇게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로부터 온갖 경 안의 보살 대중과 성[문]대중이며 장신구인 꽃ㆍ법기ㆍ당기ㆍ일산과 일곱 가지 값진 보배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래의 깨끗한 업[淨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혹은 법이라는 이름과 구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는 하되 다 같이 이는 깨끗한 마음속의 일이다.
  문수(文殊)는 바로 중생에게 현행(現行)하는 분별의 마음이요, 보현(普賢)은 바로 중생의 진로(塵勞)인 업행의 마음이며, 관음(觀音)은 바로 중생의 대비(大悲)의 마음이요, 세지(勢至)는 바로 중생의 대지(大智)의 마음이다. 마치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어디나 문수가 있다 함은 문수가 비록 동쪽에서 왔다 해도 이내 어디에나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법계의 몸과 부동(不動)의 지혜로써 경계에 닿으면 바로 끝난다. 여섯 가지 감관과 세 가지 업(業)이 모두 문수요, 실상(實相)의 체성이 두루하고 만상(萬像)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반야(般若) 아님이 없거늘, 어찌 한 군데라도 문수가 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정명소(淨名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자재왕(定自在王)보살이란 1심(心), 3관(觀)으로써 마음 성품을 잘 관하면 으뜸가는 정[上定]이라 하는데 이 으뜸가는 정을 얻으면 온갖 진리와 범속의 선정에서 이내 자재(自在)함을 얻게 됨이 마치 국왕과 같다는 것이다. 보적(寶積)보살이란, 1심 3관으로 바르게 마음 성품을 관하면 비록 공이기는 하나 만행(萬行)의 법 보배 더미를 두루 갖추기 때문에 보적이라고 한다. 묘생(妙生)보살이란 마음으로 생기지 않음을 관하면 온갖 법이 생기지 아니하고 반야가 미묘하게 생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물질이 생기지 아니하고 반야가 생긴다’고 했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이란, 『청관음경(請觀音經)』에서 이르기를 ‘심맥(心脈)을 관하되 생각을 한 곳에다 두게 되면, 이내 관세음을 본다’고 했다. 이러한 보살들은 어느 한 관문(觀門)을 들어 따로따로 보살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물건을 이끌어 마음으로 돌아간다. 만일 한 사람이 저마다 하나의 관문을 갖추면 바로 이름이 서로서로 통하여 곧 이것이 이름의 평등이요 말의 평등이요 몸의 평등이요 법의 평등이다.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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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법은 스스로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데도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일으키기 때문이니, 마음이 곧 이름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면 바로 바르게 마음을 관하는 가운데서 온갖 보살과 모든 부처님을 뵙는다. 내지 성문(聲聞)의 10대(大) 제자는 모두가 이는 제 마음의 열 가지 착한 법의 심수(心數)이다.
  또 이르기를 “열 가지 심수란, 삼장교비담(三藏敎毘曇)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생각[想]ㆍ하려함[欲]과 이어 즐거워함[更樂]과/지혜[慧]ㆍ기억[念]과 생각함[思]과 해탈(解脫)이며/뜻을 경계에서 지음[作意於境界]과 삼마제(三摩提)와 통(痛)이니, 이 마음은 대지(大地)에 통하고/심수법은 심왕(心王)을 부축하여 주어/온갖 마음들을 일으키느니라”고 했다.
  심수는 마치 나라에 열의 대신이 있으면서 함께 한 임금을 보좌하는 것과 같다. 만일 임금과 대신이 함께 그릇된 도를 행하면 국내의 인민들이 모두 다 악행을 지으며, 임금과 대신이 서로 보좌하여 함께 바른 정치를 하면 나라 안의 백성들은 모두 다 도가 있게 된다. 지금 중생에게는 심왕과 공통되는 열 가지 심수가 있다. 만일 착하지 못함을 생각하면 곧 한량없는 착하지 못한 번뇌 심수의 법이 일어나고, 만일 심왕과 열 가지 심수가 서로 부축하면서 착한 일을 생각하면 곧 한량없는 착한 공덕과 지혜의 심수가 일어난다.
  또 심왕은 바로 스승이고 열의 심수는 바로 열의 제자이다. 마치 스승과 제자가 함께 악행을 하면 온갖 사람들이 모두가 악한 이로 화(化)함과 같고, 마치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선행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행을 닦게 됨과 같다. 그러므로 이 경에 이르기를 “제자와 뭇 진로(塵勞)는 뜻이 구르는 바에 따른다”고 했다.
  이제 일체 중생들은 모두가 심왕과 열 가지 공통하는 심수의 법이 있으므로 만일 하늘 악마와 외도의 애론(愛論)과 견론(見論)을 만나면 이내 모든 번뇌를 일으키어 생사에 헤매는 것이니, 마치 나쁜 임금과 나쁜 신하와 악한 스승과 악한 제자에게 교화되는 바와 같다.
  지금 부처는 법왕(法王)이요, 열의 제자는 법의 신하이다. 이는 바로 법의 스승이요 바른 법의 제자이니 지혜로운 행으로써 행하고 바른 법을 행하여 함께 중생을 교화한다. 만일 중생이 믿어 받고 지혜로운 행을 수행하면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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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론의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온갖 견도(見道)의 한량없는 모든 착한 심수의 법을 이루며, 만일 중생이 믿어 받고 닦아 익히어 지혜로운 행으로써 행하면 바로 온갖 하늘 악마와 생사의 착하지 못한 모든 심수의 법을 깨뜨려 수도(修道)의 한량없는 착한 심수의 법을 이룩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심왕이 바르면 여섯의 신하가 삿되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또 이 열 가지 심수는 바로 열 가지 법의 문이어서 모두가 능히 통달하여 열반에 든다. 처음에 열의 심수로써 종자를 삼아 이로부터 닦고 익히어 마침내 도를 이루게 됨은, 마치 한 아름의 나무도 터럭 끝만한 데서부터 생기는 것과 같다.
  이제 법왕은 반자(半子) 만자(滿字)의 교로써 모든 중생을 교화하려 하심이니, 먼저 그가 원하고 구하는 것[樂欲]에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 경에 이르기를 “먼저 하려 함[欲]으로써 끌어당기고 뒤에 부처의 지혜에 들게 한다”고 했다.
  지금의 열의 제자는 저마다 하나의 법을 넓힌 이이니 사람은 무리로써 모이고 물건은 떼로써 나누어진 것이므로 그의 원함과 구하는 데에 따라 각각 한 가지 행의 법의 문으로써 거두어 권속을 삼았다. 비록 저마다 하나의 법의 문을 관장하기는 하였으나 어찌 일찍이 열 가지 덕(德)을 갖추지 않았겠는가. 마치 열 가지 심수에서 어느 하나가 일어나면 열 가지 심수가 이내 따라 일어남과 같다. 비록 하나의 심수에 해당하는 이름이라 해도 실로 열 가지의 심수가 있다.
  따로따로 10대 제자의 것에 대(對)하여 보자. 처음 생각[想]의 심수는 부루나(富樓那)에 대하는데, 생각의 심수가 치우치게 강하여 생각으로부터 도(道)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성[문]제자 중에서 설법(說法)이 첫째이다. 『성론(成論)』에서 이르기를 “식(識)은 진실한 법을 얻고 생각은 붙인 이름[假名]을 얻는데, 부루나는 생각의 심수가 분명하기 때문에 명상(名相)을 잘 분별하여 걸림이 없고 말재주에 막힘이 없어서 설법하는 사람 가운데서 맨 첫째였다”라고 했다.
  하려 함[欲]의 심수는 대가섭(大迦葉)에 대하는데, 착한 하려 함의 심수로써 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제자 중에서 두타(頭陀)가 첫째이다.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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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법은 하려 함이 그 근본이 된다. 가섭이 세상의 영화를 끊고 뜻을 벗어남에 두어서 산 숲에 있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착한 욕심으로 세상의 나쁜 욕심을 버리려고 한 것이다.
  이어 즐거워함[更樂]은 가전연(迦旃延)에 대하는데, 곧 이 심수를 일으켜 이치를 깊이 궁구하여 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성[문]중에서 논의(論議)가 첫째이다.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다시금 서로가 관계하여 들면서 논의가 궁함이 없고 걸림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 그는 치우치게 이어 즐거워함의 심수를 닦았기 때문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지혜[慧]의 심수는 신자(身子)에 대하는데, 지혜의 심수로 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성[문]중에서 지혜가 첫째이며 법륜(法輪)의 장수이다.
  기억[念]의 심수는 우바리(優波離)에 대하는데, 기억으로 계율을 지니어 도에 들어갔으므로 모든 성[문]중에서 계율 지님[持律]이 첫째이다. 생각하여 지니면서 잊지 않은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우바리는 몸과 입으로 반연에 대하되 경중을 헤아리면서 잊음이 없었으므로 계율 지님에서 으뜸이었다.
  생각함[思]의 심수는 라후라[羅云]에 대하는데, 비밀한 생으로 인하여 도에 들어갔는지라 모든 성[문]중에서 밀행(密行)이 첫째이다. 행음(行陰)이 바로 생각함의 심수이다. 생각함의 심수가 날카로우면 모든 계행을 닦으면서 공덕을 숨겨 감추므로 비밀한 행이 으뜸이다.
  해탈(解脫)은 선길(善吉)에 대하는데, 이 심수의 법으로 공해탈(空解脫)을 닦아 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성[문]중에서 공을 이해함[解空]이 첫째이다. 무쟁삼매(無諍三昧)는 쓸쓸하고 홀로 벗어나서 만물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한다.
  뜻을 경계에서 짓는[作意境界] 기억의 심수는 아나율(阿那律)에 대하는데, 그가 눈을 잃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심수를 일으켜 천안(天眼)을 닦아 도에 들게 하였기 때문에 성[문]중에서 천안이 첫째이다. 천안을 닦음에는 반드시 마음을 머물러 경계에 반연하되 해와 달과 별의 빛 모양을 취하면서 천안통을 닦아 나게 하여야 한다.
  삼마제(三摩提)의 심수는 목련(目連)을 대하는데, 이 정(定)의 심수가 치우치게 날카로우므로 이 정을 닦아서 도에 나아갔기 때문에 모든 성[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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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선정이 첫째이다.
  통(痛)의 심수는 아난(阿難)에 대하는데, 느낌[受]에 해당한 심수가 억세고 날카로워서 들어 받고 들어서 지니어 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성[문]중에서 많이 들어 모두 지님[多聞總持]이 첫째이다. 통(痛)은 말과 느낌에 통(通)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임을 이치로 삼기 때문이니 이 심수가 분명하면 불법을 받아들여 지님은 마치 완전한 그릇에 물을 담는 것과 같다.
  이 열의 심수를 지닌 제자가 함께 여래를 보필하면서 반만(半滿)의 사고사영(四枯四榮)의 교를 장엄하여 중생들을 이끌어서 중도(中道)에 들며 불성(佛性)을 보고 큰 열반에 머무르는 바로 이것이 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것이다. 이것으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실리(實理)의 행과 남을 이롭게 하는 권가(權假)의 문을 알 것이다.
  스승이거나 제자거나 교(敎)거나 관(觀)이거나 간에 끝내 중생의 심수 법의 문을 벗어나지 아니하여 하나하나가 같이 종경(宗鏡)으로 돌아가며, 온갖 언설과 이치와 행(行)의 자리와 닦아 나아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이 마음이므로 거두어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 온갖 말[語言]은 각관(覺觀)의 마음에 연유하고 온갖 행(行)은 생각함[思]의 마음에 연유하며, 온갖 이치[義理]는 지혜의 마음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또 심왕은 곧 불보(佛寶)의 심수요 곧 승보(僧寶)의 반연할 바 실제(實際)며, 심왕이 없고 심수도 없음은 곧 법보(法寶)로서 실제에 잘 드는 것이니, 심왕과 심수의 공력과 작용이 만족하다.
  심왕과 심수의 법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婆羅密)을 행한다고 한다. 『보현관(普賢觀)』에서 이르기를 “마음으로 마음 없음[無心]을 관하면 법이 법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나의 마음이 스스로 공하므로 죄와 복의 주인이 없나니, 바로 이것이 마음이 없고 심수가 없는 것이어서 바른 관[正觀]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심수의 진로(塵勞)가 만일 다하지 아니하면 관한다 해도 끝이 나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이 제도되지 아니하면 나는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만일 이렇게 알 수 있는 이면 한 부처와 보살의 명호나 하나의 법문조차도 바른 관의 마음속에서 나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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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너의 말한 바를 믿으면 나를 보는 것이 되며, 또한 너와 비구승이며 모든 보살들을 보는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경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서 의심이 없으면 이를 깨달아 믿는 마음이 밝고 깨끗하여지리니 바로 이것이 부처를 본 것이요, 지혜의 심수가 분명하여지리니 이것이 신자(身子)를 본 것이요, 모든 심수가 분명하여지리니 이것이 뭇 비구들을 본 것이요, 자비심이 깨끗하여지리니 이것이 보살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황벽(黃蘗) 화상이 이르기를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은 이 한 마음일 뿐이요, 다시는 따로의 법이 없어서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다. 이 한 마음이 바로 부처일 뿐이라 이 마음을 보면 바로 이것이 본 것이니, 부처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중생이며, 중생이 곧 부처이다.
  부처 그것이 바로 마음인지라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은 또한 줄어지지 아니하고, 부처가 된 때에도 이 마음은 또한 더해지지도 아니한다. 한 마음만 깨치면 다시는 조그마한 법조차도 얻을 만한 것이 없어서 이것이 바로 참 부처이다.
  문수는 진공(眞空)의 걸림이 없는 도리에 해당하고 보현은 모양을 여읨[離相]의 끝없는 행에 해당한다. 모든 대보살이 나타내는 바도 사람마다 모두가 지니고 있다. 하나의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서 그를 깨치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마음에 없을 수 있으면 바로 마지막의 도를 배우는 사람이니, 곧장 마음이 없지 아니하면 오랜 겁(劫) 동안 수행한다 하여도 끝내 도를 이루지 못하리라. 이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스로 본래의 법을 알아 취함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법이 없다. 모든 헤아림이 끊어졌기 때문에 “말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 가는 곳도 멸하였다’고 말한다.
  이 마음이 바로 본래 청정한 부처여서, 꿈틀거리는 축생과 부처며 보살이 하나의 몸이다. 다만 망상과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 과보를 지었을 뿐이다. 본래 부처 위에는 실로 하나의 물건도 없어서 휑하고 고요하며 밝고 미묘하여 편안하고 즐거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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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見聞覺知]에서 본래의 마음을 알아 취할 뿐이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에 속하지 아니하고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을 여의지도 않았다.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의 위에서 알음알이[解]를 일으키지 말며,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을 여의고서 마음을 찾지도 말라. 즉(卽)하지도 아니하고 여의지도 아니하며, 머물지도 아니하고 살지도 아니한다.
  세간 사람이 듣는 도(道)를 들으면 모든 부처가 다 마음의 법을 전하는 것이다. 장차 “마음 위에 따로 하나의 법으로서 증득할 만하고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마침내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는 것이니, 마음이 곧 법이요 법 그대로가 마음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는 마음을 구하지 말라. 천 겁(劫)을 지난다 하여도 끝내 얻는 날이 없으리라.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없음만 같지 못하리니, 이것이 본래의 법이다.
  내지 출가(出家)도 모두가 한 생각의 마음자리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향엄(香嚴) 화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이전부터 지금까지 출가를 구하지만/출가라는 명칭을 아직도 모르는 구나/일어나고 앉고 하는 평소 하는 일일 뿐/다시는 조금도 수승한 것 없네”라고 했다. 마음 밖에 다시는 따로의 출가하는 법이 없거늘, 무슨 수승한 경계로서 구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음을 바로 출가라 한다”고 했다. 아난(阿難)이 이 종(宗)을 아직 깨치지 못하고서 여래의 훌륭한 상호만을 보고서 몸의 출가를 구하였다가 드디어 참회하며 말하기를 “내 몸은 비록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들지 못했구나”라고 했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 마음의 깨끗함이 허공과 같은 줄로 관하면 두 치우침[二邊]의 차꼬와 수갑에 장애 받지 아니한다. 평등한 큰 지혜의 머무름도 없고 붙음도 없음을 바로 출가라 하고, 중관(中觀)으로써 법신의 지혜 목숨[慧命]을 스스로 도와 살아감을 바로 걸사(乞士)라 하며, 5주지(住地) 번뇌 그대로 보리(菩提)인 줄 관함을 바로 악을 깨뜨림[破惡]이라 하고, 온갖 모든 치우침의 뒤바뀜이 중도(中道) 아님이 없음의 바로 그것이 악마가 두려워 함[怖魔]이다”고 했다. 천태 습득(天台拾得)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성냄이 없음이 바로 지계(持戒)요/마음의 깨끗함이 이는 출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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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의 성품과 너와 합하면/온갖 법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는 사람의 마음은 물건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출가하여 마음대로 살아감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했고, 지공(志公)이 노래하기를 “말 끝에서 구하지 않으면 처소가 없고/잠시 동안 출가한 사람이라 부리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네가 만일 이 일을 깨치면, 때때로 옷 입고 밥 먹으면서 자유롭게 오락가락할 뿐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 일은 자기만이 알고 따로 방편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한 모금 마시고 한 숟갈 먹음이 각자에게는 분수가 있거늘 어찌 마음을 깨친 것이 아니며 출가가 이 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하나하나의 마음속을 관하면 모두가 심왕과 심수가 갖추어져 있다”라고 했으니, 관(觀)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수는 서로가 부축하면서 깨침을 가져오되, 혹은 생각[想]의 심수에서 도에 들기도 하고 혹은 하려 함[欲]의 심수에서 도에 들기도 한다. 마땅한 바의 것에 따라 심왕과 심수는 함께 다스리고 진로(塵勞)의 모든 마음을 변화시켜 취하면서 부처 일[佛事]을 짓는다.
  이 관을 짓되 아직 깨치지 못한 관행(觀行)은 마치 우유와 같고, 샘 없음을 일으킨 관행이면 마치 타락과 같으며, 티끌과 모래 같은 번뇌를 깨뜨리면 마치 생소(生酥)나 숙소(熟酥)와 같고, 무명을 깨뜨린 관행이면 마치 제호(醍醐)와 같은 것이니, 제호가 되었을 때에야 심왕과 심수의 공력을 마친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여래가 중생을 자세히 살피건대/법을 이룩하여 세우는 이는/마음으로 마음을 능히 아는 이이니/그는 바로 진실한 부처의 제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부처의 입으로부터 나고 법의 교화로부터 난다”고 했다.
  마음을 알기 때문에 온갖 법의 문은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거니와 아직 모른 이를 위하여 방편으로 해석한다. 모두가 이 종경(宗鏡) 안에 믿어 들게 되면, 한 법도 부처 일이 아님이 없다.
  음식이 부처 일이 된다 함은 『정명소(淨名疏)』에서 이르기를 “법에서 평등하면 음식에서도 평등하다”라고 했다. 마치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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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온갖 법의 취미(趣味)에서 이 풍치[趣]를 벗어나지 않으면 멋[味]조차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장차 풍치거나 풍치 아님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지금 말하는 “온갖 법의 취미’에서의 멋이 바로 음식이다. 그러므로 음식이 바로 부사의한 법계요 음식 안에는 온갖 법을 포함하여 들이며 온갖 법은 음식의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음식이 만일 있다면 온갖 법이 있고 음식이 없다면 온갖 법도 모두 없다. 지금의 음식이 불가사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있음조차 못 보거늘 어떻게 풍치가 있겠으며, 오히려 이것이 없음조차 못 보거늘 어떻게 풍치 아님이 있겠는가.
  만일 음식을 관하되 풍치거나 풍치 아님을 보지 않으면 바로 이것이 중도삼매(中道三昧)이며 참 법희(法喜)와 선열식(禪悅食)이라고 한다. 그러나 풍치와 풍치 아닌 법을 통달하면 이내 두 가지 진리[二諦]를 쌍으로 비추며 두 가지 진리와 삼매를 얻은 법희와 선열의 식을 바로 음식의 평등이라 한다.
  모든 법 또한 평등하다 함은 온갖 모든 법의 풍치인 음(陰)ㆍ입(入)ㆍ계(界)로부터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이니 음ㆍ입ㆍ계의 일체종지는 얻을 수 없는 일이거늘 어떻게 풍치와 풍치 아님이 있겠는가. 그러나 풍치와 풍치 아님을 분명히 갖추면 온갖 모든 법에 모두 세 가지 진리[三諦]의 도리가 있음은, 마치 『지도론(智度論)』에서 밝힌 “한 찰나 동안에 나고 머무르고 사라짐이 있다”는 세 모양의 비유와 같다.
  또 향적불(香積佛) 나라의 향반(香飯)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끝없는 계ㆍ정ㆍ혜ㆍ해탈지견의 공덕이 구족하다 함은 먹고 남은 밥이 끝내 다하지 아니함이니 한 마음 진여의 끝없는 이치와 오분법신(五分法身)이 돕고 훈습한 공(功) 때문에 제 체성이 공하고 지음 없는[無作] 묘한 작용이거늘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아직 대승(大乘)이 뜻을 내지 못한 이가 이 밥을 먹으면 뜻을 낸 뒤에야 소화되며 이미 뜻을 낸 이가 이 밥을 먹으면 무생인(無生忍)을 낸 연후에야 소화되며, 이미 무생인을 얻은 이가 이 밥을 먹으면 일생보처(一生補處)가 된 연후에야 소화하나니, 마치 상미(上味)라는 약을 먹은 이는 그 몸의 모든 독이 없어진 연후에야 소화되는 것과 같다. 이 밥도 그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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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온갖 번뇌의 독이 없어진 연후에야 비로소 소화되나니, 마치 여러 대보살이 비록 다시 생을 버리고 생을 받는다 하더라도 후생 몸 안의 식(識) 중에는 종자가 있고 종자는 연(緣)을 만나 도로 나서 향반(香飯)이 계속 끊어지지 아니하며 지내다가 초지(初地)에 이르면 샘 없는 마음을 내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소화라 이름하고 이 밥이 없어져야 소화라고 함이 아닌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 밥을 먹으면 무슨 법인들 소화 되지 않겠는가.
  또 이르기를 “그 나라 보살은 항내를 맡고 계율에 들며 이내 온갖 덕장삼매(德藏三昧)를 얻게 된다. 이 삼매를 얻으면 보살로서의 모든 공덕이 다 두루 갖추어진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일 향내로부터 법계에 들면 제 몸이 바로 중향세계(衆香世界)요 자기 마음이 곧 향적여래(香積如來)이니, 공덕이 한량없고 한 마음이 원만하여진다. 이것에 깨쳐 들면 어찌 바깥에 있는 것을 빌리며 구하겠는가. 냄새의 계[香界]가 이미 그러한지라 18계(界)도 그러하다. 온통 신령[神]이 깃드는 자리요 모두가 도를 얻는 마당이다.
  경에서 말하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전에 없던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향반(香飯)은 불사(佛事)를 잘 짓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러하니라. 아난아, 혹은 어느 불국토에서는 부처의 광명으로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모든 보살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며, 또는 부처가 만든 변화한 사람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보리수(菩提樹)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며, 또는 부처의 의복과 침구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밥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며, 또는 동산ㆍ숲ㆍ대관(臺觀)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32상(相)과 80수형호(隨刑好)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며, 또는 부처의 몸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허공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나니, 중생은 이 인연으로써 율행(律行)을 얻어 들어야 하느니라.
  또는 꿈과 눈어림ㆍ그림자ㆍ메아리ㆍ거울 속의 현상ㆍ물속의 달ㆍ더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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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아지랑이 등의 이러한 비유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고, 또는 음성과 언어와 문자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며, 혹은 청정한 불국토가 고요하여 말이 없고 설명이 없고 보임이 없고 알음이 없고 지음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느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모든 부처의 점잖은 거동과 여러 하시는 이들이 불사 아님이 없느니라. 아난아, 또는 이 4마(魔)와 8만 4천의 모든 번뇌의 문은 모든 중생들을 고달프게 하는지라 모든 부처는 바로 이 법으로써 불사를 짓기도 하나니, 이것을 온갖 부처의 법의 문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이 문에 들면 온갖 깨끗하고 좋은 불토를 보아도 기뻐하지 않으면서 탐내지도 않고 높은 체도 아니하며, 설령 온갖 깨끗하지 못한 불토를 본다 하여도 근심하지 않으면서 구애받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나니, 모든 부처에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 기뻐하고 공경하는 것만이 전에 없던 일이니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공덕은 평등하거니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불토를 나투되 같지가 않느니라. 아난아, 너는 모든 불국토의 땅이 약간이라도 있되 허공은 약간 조차도 없음을 보느니라. 그와 같아서 모든 부처의 육신은 약간만이라도 있되 그 걸림이 없는 지혜는 약간조차도 없음을 보느니라.’”
  또 『화엄경』 중에서 “구족(具足) 우바이가 보살의 끝없는 복덕 갈무리인 해탈문을 얻고서 이러한 작은 그릇 속에다 모든 중생들이 원하고 구하는 대로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내어서 모두를 배부르게 하였으며, 내지 동방의 한 세계의 말로 할 수 없이 말로 할 수 없는 부처 세계의 작은 티끌 수 같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일생소계(一生所繫)의 보살들이 나의 밥을 먹고 나서 모두가 보리수 아래의 도량에 앉아 악마 경계를 항복 받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동방에서처럼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였음과 같다.
  또 명지 거사(明智居士)가 뜻대로 내는 복덕의 갈무리인 해탈문을 얻고서, 그 때에 거사는 대중들이 널리 모임을 알고 잠깐 동안 생각을 내어 허공을 쳐다보면서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를 모두 공중으로부터 내렸으므로 온 대중들은 모두가 만족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그들을 위하여 갖가지 법을 말하였다. 이른바 맛있는 음식을 얻어서 배부른 이에게는 갖가지의 복덕을 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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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과 가난을 여의는 행과 모든 법을 아는 행과 법희 및 선열식을 성취하는 행과 모든 몸매[相好]를 닦아 익혀 갖추는 행과 굴복하기 어려움을 뛰어나게 성취하는 행과 위없는 밥[無上食]을 잘 깨달아 아는 행과 끝없는 큰 위덕의 힘을 성취하여 악마를 항복 받는 행을 해설하였으며, 좋은 마실 거리를 얻어서 배부른 이들에게는 설법으로 생사에 애착을 여의고 불법의 맛에 들게 한 등과 같다.
  또 우바이의 그릇 안에다 명지 거사는 공중에서 뜻에 따라 한없는 좋은 음식을 내겠다는 생각을 내면서 여러 가지 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비내려서 구하는 이는 모두가 소망을 이루었다.
  그것을 얻은 이는 모두가 법의 문을 증득하고 그것을 먹은 이는 다 함께 묘한 도를 이룩하였으니, 하나의 티끌도 불사를 구족하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의 법도 바른 종[正宗]을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 알 바의 분량에 맞추고 업에 따라 나타났으므로 보이는 바가 같지 않을 뿐이다. 외도가 보면 자연(自然)이 되고 범부가 보면 생사가 되며, 성문이 보면 네 가지 진리가 되고 연각이 보면 인연(因緣)이 되며, 작은 보살이 보면 단공(但空)이 되고 큰 보살이 보면 중도(中道)가 되며, 모든 부처가 보면 실상(實相)이 된다. 만일 종경에 들면 여러 가지 보는 것이 한꺼번에 녹는다.
  빛의 대경[色塵]이 불사가 된다 함은 마치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이 부처님의 입에서 내쏟은 5색 광명이 정수리를 비추자 뒤에 아나함(阿那含)의 과위를 증득한 것과 같다. 또 보적(寶積) 등의 5백 장자가 부처의 깨끗한 국토를 보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함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빛깔을 본 것이다.
  냄새의 대경[香塵]이 불사가 된다 함은, 곧 향반이 삼천대천세계와 욕심 세계ㆍ현상 세계에 자오록한지라 여러 하늘들이 향내를 맡고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또 향을 사른다 함은 지혜의 불로 만행(萬行)을 발휘하여 두루 미치기 때문이며, 향을 바른다 함은 성품의 깨끗한 물로 이기어 법신을 장식하기 때문이며, 가루향이라 함은 금강의 지혜로 깨뜨려서 진실이 없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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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자비관(慈悲觀)과 부정관(不淨觀) 따위로 모든 악을 끊는 것이 마치 안식향(安息香)으로 나쁘고 삿된 것을 피하며 바른 소견과 지혜로 악마다 끊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열 가지 착한 행 등으로 기쁨의 향을 풍기는 것이 마치 침단향(沈檀香) 등으로 모든 근기(根器)를 거두고 보시를 행하여 자신과 남을 기쁘게 하는 따위와 같다.
  맛의 대경[味塵]이 불사가 된다 함은, 이 밥을 먹은 이면 몸이 안락하고 상쾌함은 마치 장엄국(莊嚴國)을 즐기는 것과 같다.
  닿임의 대경[觸塵]이 불사가 된다 함은, 손으로 나를 더듬어 찾으면 한결같이 유쾌한 것이다.
  광명(光明)이 불사가 된다 함은,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이 광명을 만나면 온갖 번뇌가 다 녹아 없어진다”고 했다. 광명이란 바로 한 마음의 지혜 광명이어서 만법의 성품을 잘 비추기 때문이니, 곧 대경에 따라 그 어두움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마치 『의해(義海)』에서 이르기를 “환한 광명이라 함은 대경과 법계와 진여의 현상[事]과 본체[理]를 보는 때에 환히 알아서 분명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혜 광명의 비춤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지혜 광명이 없으면 본체와 현상이 드러나지 아니한다.
  법만을 보는 때에 바로 이것이 광명이니, 지혜를 쌓은 공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광명을 놓으면 법계는 드러내 보이지 아니함이 없으며, 항상 온갖 법계를 관찰하는 이것이 광명을 놓아 온갖 것을 비추는 것이 된다.
  이 종경(宗鏡)의 빛이 바로 모든 부처의 백호(白毫)의 광명이며, 법계를 널리 비춘다. 마치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눈썹 사이에 거룩한 이로서의 몸매가 있으니 이름이 법계에 두루한 광명의 구름[遍法界光明雲]이다. 마니보(摩尼寶)의 꽃으로 장엄되고 큰 광명을 내쏘아 뭇 보배 빛을 구비한 것이 마치 해와 달이 환하고 깨끗하여 그 광명이 시방의 국토를 널리 비춤과 같다. 그 중에서는 온갖 부처의 몸이 나타나고, 다시 미묘한 음성이 나와서 모든 법을 널리 편다”라고 한 것과 같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한 터럭 광명을 놓아 만 8천의 불국토를 비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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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광명 안에서는 보살이 6도(度)의 장엄함과 중생들이 과보를 받는 좋고 추한 따위의 일을 본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깨끗한 광명을 내쏘아 한량없는 나라를 비춘다”고 했다.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 모임 안에 사자후(師子吼)라는 한 보살이 여래께서 내뿜는 금빛 광명을 보고서 사방으로 바다처럼 모인 대중을 향하여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 인연으로 여래께서는 오래지 않아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우리들을 위하여 마음자리 관문[心地觀門]인 대승의 묘한 법을 연설하시리라.’
  여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한량없는 온갖 인간ㆍ천상의 복락으로 세간을 벗어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구하십시오. 왜냐 하면 오늘 세존께서 가슴으로부터 금빛 광명을 내시어 비친 데마다 모두가 금빛처럼 되었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뜻은 심히 깊어서 온갖 세간의 성문과 연각으로서는 모두 헤아린다 하여도 알지 못할 바입니다. 그대들 범부는 자기 마음을 관하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바다 속에 떠내려가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마음을 잘 관하기 때문에 생사의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이르시나니, 3세 여래의 법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 광명을 놓으심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 해석에서 말하기를 “금빛의 광명이란 말할 바 종(宗)을 표시함이니, 마치 문수가 수미산 남쪽에 머물러 있되 모두가 동일한 빛이어서 다시는 딴 무늬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보협경(寶篋經)』에서 이르기를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대덕 수보리(須菩提)여, 마치 수미산 광명이 비친 데마다 모두 동일한 빛이어서 이른바 금빛인 것처럼, 수보리여, 반야의 광명이 온갖 번뇌를 비추되 모두가 동일한 빛이어서 불법의 빛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마음의 빛은 가히 밝음은 해와 달보다 뛰어나고 분량은 허공보다 더하며, 비치는 촛불이 속에 들어 있어서 어두운 데마다 비추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어두운 세계거나 낱낱 세계의 중간에 햇빛 달빛 등이 비추지 않는 곳이면 광명이 되어 주나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보적경(寶積經)』에서 이르기를 “나에게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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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이 있어서 이름은 무생(無生)이다. 그 이름을 지닌 이는 얻을 바 없음[無所得]을 얻게 된다”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광명각품(光明覺品)이라 함은 제 마음을 믿는 제 마음의 광명으로써 온갖 세간의 끝없는 대천(大千) 세계를 깨우쳐 비추게 하는 것이니 온 부처의 경계도 저절로 역시 동등하다. 마음으로 광명에 따라 낱낱이 그를 비추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합하면 안팎의 소견이 없어진다. 처음 삼천대천세계를 비춘 뒤에 다음에는 다시 동쪽을 첫째로 삼되 광명이 동쪽의 열의 삼천 세계에 이르러서 백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며, 이렇게 시방을 열 번 겹치고 갑절 더하여 시방을 두루 돌며 몸과 마음을 뚜렷이 비추면 한 성품이 걸림 없고 두루하여 부처의 경계와 같아진다. 하나하나 뜻을 지으며 이렇게 관찰한 연후에 지음 없는 방편의 정[無作方便定]으로 그를 인가(印可)하여 10주(住)의 첫 마음에 들면서 여래의 지혜 집에 태어나 여래 지혜의 법왕의 참 태자가 된다”고 했다.
  한결같은 광명으로 비추는 바는 경에서 자세히 밝힌 바와 같다.
  부처가 광명을 지음에는 스스로 그 분한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제 마음의 광명으로 마치 부처의 광명이 그 마음을 열어 깨치고 법계를 뚜렷이 비추듯 하여야 한다.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기를 “원인 중에서 법 모양을 분별하여 진리를 결단코 알면 이지러짐이 없는 본체와 현상이 부처의 법을 손감시키지 않나니 때문에 한 생각으로 모두 아는 많은 문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의 광명을 놓아 복과 지혜를 모두 뚜렷이 한다.
  『열반소(涅槃疏)』에서 이르기를 “광명을 놓아 문수를 비춘다 함은 빛깔을 보고 마음을 아는 것이니, 문수가 광명을 보고 드디어 부처의 뜻을 알았다”고 했다.
  『정명사기(淨名私記)』에서 이르기를 “혹은 광명으로 불사를 짓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면, 체성은 허공에 두루하여 법계와 함께 하고 축생과 개미의 유정(有情) 무정(無情)까지도 모두가 부처의 아들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해탈하는 법이요 곧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해석하여야 부처가 말씀한 경전을 환히 알며 바로 정명(淨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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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소견과 동일하고 2승(乘)이 공해탈(空解脫)만을 보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허망만을 여의면 해탈이라 한다”고 했다. 그는 실로 아직은 온갖 해탈을 얻지 못하였지만, 만일 온갖 해탈을 얻는다면 어찌 하나의 법도 불사 아님이 있겠는가.
  보리수(菩提樹)가 불사가 된다 함은, 이 나무의 빛과 향기가 미묘하고 다시 법음(法音)을 내므로 보고 듣고 맡고 닿으면서 모두가 거룩한 도를 깨치는 것이다.
  의복과 침구가 불사가 된다 함은, 옛날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부처님의 가사를 얻어서 높은 당기에다 걸어 놓고 국민들에게 보였는데 병이 있는 이가 와서 보며 귀명(歸命)하면 병이 모두 나으면서 보리 마음을 냈으니, 이로 인하여 도를 깨친 것이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그 때 5백의 대성문들이 저마다 제 몸에 입었던 울다라승(鬱多羅僧)을 허공장(虛空藏)에게 바치고, 옷을 바친 뒤에 한꺼번에 소리를 같이 하며 말하기를 ‘그 어떤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깊이 내면, 이러한 큰 지혜 법장(法藏) 안에서 좋은 이익을 쾌히 얻으며 그 바깥에는 떨어지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자, 바쳤던 옷이 이내 보이지 않았다. 때에 여러 성문들은 허공장에게 물었다. ‘옷은 어디로 갔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나의 법장 안에 들어갔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신통의 힘을 나타내어 모든 보살로 하여금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알고 발심하여 도를 수행하며 부처의 국토를 깨끗이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성불했을 때에는 그 세계가 장엄하고 깨끗하며 성문과 보살들이 이렇게 바른 법을 연설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게 하겠으며, 이와 같은 수명의 길고 짧음의 부처의 법과 이와 같은 형색과 상호의 바른 행과 이와 같은 멸도한 뒤에 법의 머무름이 오래고 짧음을 모든 보살들에게 저마다 옷 속에서 이런 일을 보고서 의심하는 바를 끊을 수 있게 하겠느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들으셨기 때문에/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눈과/모든 총지의 문[總持門]을 얻어서/온갖 법에 두루 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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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셨네”라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고 중생을 제도함은 제 몸과 마음 속이며 수용하던 법에 이르기까지의 그 안을 여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대승천발대교왕경(大乘千鉢大敎王經)』에서 이르기를 “문수사리보살의 손 안에 가질 폐유리(吠瑠璃)의 발우 안에 어떤 모양이 있는가를 곁에서 보다가, 대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 앞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나서 다시 문수사리 앞으로 가서 머리 조아려 예배한 뒤에 발우 안을 살펴보니, 그 발우 안에는 백억의 삼천대천세계와 백억의 무행 세계와 백억의 형상 세계와 백억의 여섯 욕심 세계와 백억의 수미산과 백억의 사천하와 백억의 남염부제와 백억의 사바세계와 백억의 석가여래와 백억의 천비천발(千臂千鉢) 문수사리보살과 백억의 가섭이 있었다. 그 백억 세계의 세계 안에는 백억의 대가섭이 저마다 문수의 앞에서 대승법의 이치를 묻고 있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허공(虛空)이 불사가 된다 함은 마치 문수가 몸의 형상을 없애고 허공 모양을 나타내어 사왕(闍王)을 교화함으로써 그로 인하여 도를 깨치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큰 모임 안에 허공장(虛空藏)이 왔을 때에 순전히 허공의 모양을 나타낸 것과 같다.
  허공장보살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여, 나는 나의 몸으로 증득하여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증득하여 안 바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나의 몸이 바로 허공이며 허공으로써 온갖 법을 증득하여 알고 허공의 도장으로 인가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또 허공장보살은 허공을 창고로 삼아서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阿僧祇) 세계에서 비내릴 보물과 음식과 의복을 비내렸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르기를 “허공은 높음이 없기 때문에/낮음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니/모든 법 또한 그와 같아서/그 성품은 높거나 낮음이 없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허공장보살은/허공을 창고로 삼아서/모든 유정을 다 충족시켰으나/그 창고는 다함이 없네”라고 했다.
  모든 번뇌의 문[煩惱門]이 불사가 된다 함은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가 바로 도량(道場)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왜냐 하면 사실대로 알기 때문이다. 『인왕경(仁王經)』에서 이르기를 “중생으로서 아직 부처되지 못하면 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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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뇌가 되고 중생으로서 만일 부처가 되면 번뇌는 보리가 된다. 마치 서투른 의사는 약을 써도 약 아닌 것으로 되거니와 훌륭한 의사는 약 아닌 것을 써도 약으로 됨과 같다”고 했다.
  중생이 모든 부처의 마음을 가져도 진로의 문[塵勞門]이 되고, 모든 부처가 중생의 마음을 써도 보리의 도[菩提道]가 이룩된다. 또한 복덕이 있는 이는 돌을 집어도 금이 되거니와 업으로 가난한 이는 금도 변하여 돌이 되는 것과 같다. 법은 정해진 모양이 없어서 돌고 돌되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도(道)는 이름과 말이 끊어지고 진리[理]는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다.
  마치 눈과 빛깔 따위가 낱낱에 모두 10법계(法界)를 갖추고 있음과 같다. 눈 깜박이지 않는 세계에서 똑바로 보면서 무생법인을 얻으면 곧 눈이 법계가 되고, 꽃이 짐을 보고 무상함을 깨치면서 벽지불의 과위를 증득하면 곧 빛깔이 법계가 되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에게 한 개의 법 성품을 비추는 관이 있는데, 이 관을 쓸 때에는 온갖 모든 법이 다 마음에 나타나 있다”고 했다. 모든 일 역시 그렇다. 또 전륜성왕에게 있는 하나의 평상과 같다. 성왕이 그 위에 올라 있으면 이내 욕심을 여의면서 4선(禪)을 체득하게 되며, 옥녀(玉女)도 비록 보기는 하나 불상과 같이 보이는지라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질은 소조(所造)가 되고 마음은 능조(能照)가 된다. 아직 한 가지 법도 나의 마음 아닌 것이 없다. 만일 능조를 깨치면 미묘한 뜻[妙旨]이 된다.
  또 해골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과거의 선행과 악행이며 나고 죽은 처소를 아는 것이니, 바로 소리[聲]가 법계가 된다. 이것으로도 본래의 도리를 곧바로 관하면 도리는 모든 법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겠다. 만일 묘한 관행이 없으면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며, 만일 분명하게 알면 온갖 만법이 모두 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음을 보리니, 불가사의하고 원만하고 단박에 되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성스러움[聖]이 어찌 멀겠는가. 체달하면 그대로가 거룩함[神]이며, 도(道)가 어찌 멀겠는가. 부딪치는 일마다 진리[眞]이다”라고 했다. 이는 마음과 경계가 종(宗)을 함께 한다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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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만일 종경(宗鏡)의 밝음을 얻으면 마음대로 능히 비추리니, 물질이거나 마음이거나 간에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이 모든 공양거리는 이 모두가 위없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바요 지음 없는 법이 인가하는 바이니, 마치 화장(華藏) 세계의 산과 강과 풀과 나무가 다 불사를 이루고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見聞覺知]이 모두 법계에 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곧 온갖 법이 다 부처의 법이요 다 같이 종경(宗鏡)의 빛이며 한 티끌의 자국도 남지 않는 줄 알겠다.
  『석론(釋論)』에서 이르기를 “이지러진 빛깔로써는 평등한 도에 나아가지 못하고, 빛깔과 다르지 않은 줄로 보아야 대승에 평등할 수 있나니, 마치 밝음이 어둠과 함께 합하여짐과 같다. 그런데 그대는 보지도 않고 밝음과 어둠은 다르다고 한다. 그 이치를 알고 싶은가. 저 햇빛과 같다. 또 해가 돋을 적에는 어둠이 시방으로 흩어지지도 않고 어둠은 언제나 존재하며 돌아가는 데도 없다. 밝음도 그와 같아서 어둠과 함께 합하여진다. 생사는 도와 합하여짐이라 도가 바로 생사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생사는 어둠과 같고 큰 도는 밝음과 같다. 어둠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대로가 밝음이요, 생사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변화로 된 사람[化人]이 불사가 된다 함은, 마치 수선다불(須扇多佛)과 유화불(留化佛)이 중생을 제도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변화로 된 비구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여, 당신은 내가 지금 당신과는 다르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사리불은 말하였다.
  ‘아닙니다. 비구여, 왜냐 하면 여래께서는 늘 갖 법은 모두 다 변화로 됨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래의 말씀대로 나 역시 변화로 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대덕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에게 공양하면, 바로 이 공양도 변화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때에 사리불이 불가설(不可設)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무엇이 이 변화한 것에 들었기에 지금 이런 말을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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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이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습니다. 무엇이 그 속에 있기에 형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선남자여, 속에 있는 것은 없지만 바로 청정한 네 가지 요소[四大] 인연 때문에 형상이 나타납니다.’
  ‘대덕이여, 변화로 된 것 또한 그와 같아서 법성이 깨끗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만일 그렇다면 온갖 중생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널리 말할 수 없습니까?’
  ‘대덕이여, 거울의 후면은 거울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 형상이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습니까.’
  ‘선남자여, 거울의 뒤쪽은 네 가지 요소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덕이여, 중생도 그와 같아서 청정한 법계의 성품일 수 없기 때문에 널리 말할 수 없습니다.’”
  고요하고 말이 없음[寂寞無言]이 불사가 된다 함은, 곧 마음 바퀴[心輪]를 보인 것이다. 비록 말이 없다 해도 고요함의 즐거움이 있음은 방해하지 아니한다. 만일 즐거운 것이 아니면 어떻게 불사를 짓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부처가 마음을 보이지 아니하면 10지(地)라도 알지 못하며, 마음을 보인다면 곤충까지라도 능히 안다. 그러므로 이 마음 보이는 이치는 여기서의 말함이 없고[無說] 보임이 없음[無示]이 불사가 된다 함에도 적용되는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정명(淨名)이 입을 틀어막음이 문수(文殊)가 의견을 진술한 것과 같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청정함[淸淨]과 고요함[寂靜]과 광명(光明)과 다툼이 없음[無靜]의 이 네 가지 법은 평등하여 한 경계[界]와 한 법(法)과 한 구절[句]에 든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은 바로 그것이 열반이다. 번뇌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고, 마지막에 깨끗하여지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하고, 어두움이 없기 때문에 광명이라고 하고,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가여래는 잠자코 있었으며 말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불사 아님이 없다. 그러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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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구름 받침[雲臺]과 보배 그물[寶網]이 모두 미묘한 음성을 연출하고, 털구멍[毛孔]과 광명(光明)이 모두 잘 설법한다”고 했다.
  향적(香積) 세계에서는 향기로운 밥을 먹는데도 삼매가 나타나고 극락(極樂) 불국에서는 나뭇가지에 스친 바람소리를 듣는데도 바른 생각이 이루어진다. 거문고와 퉁소[絲竹]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고, 눈으로 직접 보는 데도 도(道)가 있다. 이미 말하고 잠잠하고 보고 깜짝거림이 모두가 언설이며, 보고 듣고 깨닫고 앎이 다 듣는 것이다. 진실로 법을 얻으면 신령[神]에 계합되거늘, 하필 말로써 해야 하겠는가. 마치 거문고 속에서 뜻을 진왕(秦王)에게 전하여 형가(荊軻)의 손을 벗어나고 상여(相如)가 문군(文君)이란 여인을 도와서 마침내 수레를 따르게 하며, 제석(帝釋)에겐 법락(法樂)의 신하가 있고 마명(馬鳴)에겐 화라(和羅)의 기교가 있는 것과 같다. 이들은 모두가 음악으로 마음을 전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도가 있다[目擊存道]고 함은, 장자(莊子)에서 이르기를 “부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 보려 했으나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하다가 마침 만나게 되었는데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그가 나가자, 자로(子路)는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부자께서는 온백설자를 만나려 하신 지가 오래였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 한 마디도 없으십니까?’ 부자는 말하였다. ‘이 사람이라면 눈으로 보기만 해도 도가 있다. 역시 말소리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이다’”라고 했다.
  구름 받침[雲臺]이 설법한다 함은,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허공 중에서 큰 광명으로 된 구름 그물 받침이 만들어졌다. 때에 광명 받침 안에서 부처님의 거룩한 힘 때문에 게송이 흘러 나왔으니, ‘부처는 무등등(無等等)하여 허공과 같고/10력(力)은 한량없어서 훌륭한 공덕일세/인간에서 최승(最勝)이요 세간에서 으뜸인데/석가 사자의 법은 그보다도 더하네’”라고 했다.
  보배 그물[寶網]이 설법한다 함은.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그 사자자리는 마니(摩尼)로 받침이 되고 연꽃으로 그물이 되었으며, 그리고 다시 모든 부처의 위엄과 신력으로 유지되는 바라 여래의 광대한 경계를 연설하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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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구멍[毛孔]이 설법한다 함은,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세계 바다의 작은 티끌 수의 보살이 함께 부처님에게로 오려 하면서 온갖 털구멍 속에서 나와 온갖 중생들의 말의 바다[語言海]와 음성 구름[音聲雲]을 말하였다”고 했다.
  광명(光明)이 설법한다 함은, 「현상품(現相品)」에서 이르기를 “그 때 모든 보살이 광명 속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며 게송으로 말하기를 ‘모든 광명 속에서 미묘한 소리내어/시방의 온갖 국토에 두루 미치도록/불자의 모든 공덕 널리 말하매/보기의 묘한 도에 잘도 드누나’”고 했다.
  그리고 역행과 순행과 선행과 악행에 이르기까지 불사 아님이 없으니, 마치 이승(二乘)으로부터 부처까지 가서 그치면 바로 순행이요, 지옥으로부터 마왕(魔王)까지 가서 그치면 이는 역행인 것과 같다. 또 마치 석가는 순전히 선행만을 행하였고 조달(調達)은 순전히 악행만을 행한 것과 같다. 신자(身子)는 뜻이 진실되게 믿고 선성(善星)은 굳이 믿지 않은 것 따위이니, 곱고 추함이 한데로 돌아가서 불사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평등한 참 법계[平等眞法界]는 모든 부처도 갈 수가 없고 도달할 수도 없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실제의 도리의 땅[實際理地]은 대마왕도 갈 수가 없고 도달할 수도 없다”고 했다. 부처와 악마가 다 같이 법계의 문과 실제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의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가는 것이 있고 도달함이 있다면 사람[人]이 있고 법(法)이 있으며, 법계의 바깥에 있다는 두 가지의 소견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악마 여인[魔女]에게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하시자 뒤에 악마가 여러 여인들이 부처가 될 수기 받았음을 듣고 부처님에게로 와서 아뢰었다.
  ‘저는 이제 제 권속들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때에 천녀(天女)들은 겁쟁이 모습을 보이면서 미묘한 도리를 펴 말하고, 다시 악마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근심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은 지금 당신의 지경을 벗어나지 않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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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다. 왜냐 하면 악마의 경계도 일여(一如)요 부처의 경계도 일여라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악마 세계를 여의지 아니함은 악마의 세계가 곧 부처의 세계이기 때문이니, 악마의 세계도 일정한 법으로 보일 만한 것이 없고 부처의 세계 역시 일정한 법으로 보일만 한 것이 없습니다. 온갖 법은 다 정해진 성품이 없고 정해진 성품이 없기 때문에 권속이라거나 권속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 한 끝[一際]의 법문을 환히 알 수 있으면, 이른바 악마의 자취에 당해서도 부처의 자취를 밟고 세속의 흐름에 있으면서 법의 흐름에 떠 있으리니, 자기 마음을 알기만 하면 뭇 미묘함의 널리 모인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미묘한 법 또한 연꽃에 비유된다”고 했다. 꽃이 필적에는 곧 꽃술ㆍ꽃받침ㆍ씨 등의 갖가지 모두가 나타나는데, 중생의 마음이 열리면 비지(悲智)와 행원(行願) 또한 열림에 비유한다. 이 묘한 법은 항상 머물러서 곧 한 마음의 부처가 되는 열매의 씨가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한 법을 얻었으므로 곧 온갖 법을 두루 갖추었다.
  이 때문에 하나의 작은 티끌과 한 털구멍 속은 한량없는 작은 티끌 및 털구멍과 모두가 평등하다. 여래는 그 속에서 온갖 법을 연설하며 법의 이치는 겹치고 겹쳐서 다할 수가 없다. 겹겹으로 미묘하기 때문에, 중생이 마음의 미묘함을 모르고서 거칠고 들뜨기만 하는 것을 가엾이 여긴다. 만일 열어 깨칠 때에는 찰나(刹那)도 움직이지 않고 이내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손가락을 튀기는 동안에 무학(無學)으로 오름은 마치 어두운 방안의 보배 난초가 촛불 켜는 순간에 단박 나타남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마음이 열리고 뜻이 이해되어 법눈[法眼]의 깨끗함을 얻는다”고 했으며, 또한 이르기를 “마음의 눈이 열리어 밝아진다”고 했다. 만일 있다 없다고 보면 모두가 흐려진다. 이것으로도 마음은 불사의 문이 될 뿐만 아니라 항하 모래만큼 많은 만행(萬行)이요 만 가지의 덕의 근본인 줄 알 것이다.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물었다. ‘보살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를 결정해야 하는가.’ 대답하였다. ‘대비(大悲)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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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무엇이 바로 온갖 선행의 근본인가’라고 물으면 ‘인자함[慈] 그것이다’고 대답해야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실로 허망이 아니다. 선남자여, 선행을 능히 하는 것을 진실한 생각[實思惟]이라 하나니, 진실한 생각을 곧 인자함이라 하며 인자함이 곧 여래요, 인자함 그대로가 대승이다”라고 했다.
  진실한 생각이라 함은 진실한 마음 그것이 아님이 없다. 만일 종경(宗鏡) 안에 들면 전단의 방[栴檀室]에 있을 때는 순일하여 뒤섞임이 없고 고요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생각생각마다 모두 법의 문을 증득하고 걸음걸음마다 모두 아는 이[知識]를 친견한다.
  『화엄경』 중에서 “혹은 음성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기이한 향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훌륭한 맛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미묘한 닿임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법의 거울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안의 여섯 감관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네 가지 위의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제자의 인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온갖 할 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순탄한 행의 바른 법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거슬러 베푸는 삿된 도로써 하기도 하나니, 보고 들음이 있으면 모두가 만물을 포섭하여 낸다”고 했다.
  그러므로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털구멍에서 온갖 부처의 미묘한 법음이 나온다”고 했다. 또 게송으로 이르기를 “모든 보배 그물이 서로 닿고 비비면서/부처님의 음성이 언제나 그치지 않네”라고 했다. 또 「보현행품(普賢行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가 설법하고 보살이 설법하며/세계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3세의 온갖 것이 다 설법한다”고 했다. 내지 『밀엄경(密嚴經)』 중에서는 “금강장(金剛藏)보살은 온 몸의 털구멍에서 소리를 내며 설법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가로로는 시방의 온갖 곳을 겸하고, 세로로는 3세의 온갖 때를 통하여 언제나 법바퀴를 굴리되 끊어짐도 없고 다함도 없다. 그 까닭에 「아승기품(阿僧祇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저 한 분 한 분의 모든 여래에서/말로 할 수 없는 범음성(梵音聲)이 나오며/저 하나하나의 범음 소리 안에서/불가설(不可說)의 깨끗한 법바퀴를 굴리네/저 하나하나의 법바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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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말로 할 수 없는 수다라(修多羅)를 비내리며/저 하나하나의 수다라에서/모든 법을 분별함이 말로 알 수 없네”라고 했다. 저 하나하나의 모든 법 안에서 또 모든 법을 말로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만일 뜻[旨]에 수순하면 종(宗)에 명합한다. 비록 말하는 법이 경계에 접촉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나 미묘한 음성을 듣는다. 혹은 저버림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깊어서 설령 부처님의 설법한 모임에 있다 하여도 한 문자도 들리지 않기도 함은, 마치 비밀한 교법을 연설하는 데에 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다르게 듣는 것과 같고 화엄종(華嚴宗)을 강설하는데 이승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른바 깊고 그윽하여 측량하지 못하나 여래의 몸매와 선근을 심은 이만은 제외되며, 지극히 미묘하고 생각하기 어려워서 온갖 그 밖의 중생의 손을 들이지를 않는다.
  또 『잡화엄식론(雜華嚴飾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이 생사에 유전하며 참된 도를 못 얻는 까닭은 진실로 마음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 근원을 알면 삿된 집착을 버리고 바른 도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르기를 “온갖 중생들의 심식(心識)은 한 찰나 동안에 시방에 두루 이르면서 빠르게 어리석음이 없이 곧장 석벽(石壁)을 뚫으며, 닿는 데마다 두려워함 없음이 마치 사자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에서 이르기를 “사자의 가슴 속에서 머무르면 한 마음의 법계를 안다. 법계의 한 마음은 시방을 넣어 덮어서 실 터럭만큼도 드러내지 않거늘, 어찌 마음만 갖추고 있겠는가. 몸 또한 두루 싸 넣는다. 또한 10신(身) 중에는 국토신(國土身)과 허공신(虛空身)이 있거늘 어떻게 갖추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선바라밀(禪波羅密)에서 말한 것과 같다. 중생의 몸 안의 세간[身內世間)과 바깥 국토와의 이치는 서로가 관련된다. 수행하는 이는 삼매의 지혜와 원지(願智)의 힘으로 몸을 자세히 관찰할 때에는, 곧 이 몸이 하늘과 땅의 온갖 법속(法俗)의 일을 골고루 모방하였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이 몸의 모양이 머리는 둥글어서 하늘을 본뜨고, 발은 모나서 땅을 본받고, 안[內]은 공의 요소[空種]가 있어서 이것은 허공이며, 배는 따뜻하여 봄과 여름을 본받고, 등은 억세서 가을과 겨울을 본받고, 4체(體)는 네 철을 본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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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큰 마디의 열둘은 12월을 본받고, 작은 마디의 360개는 360일을 본받고, 코와 입으로 숨을 쉼은 산과 못과 시내와 골짜기의 바람 기운을 본받고, 눈은 해와 달을 본받고, 눈을 뜨고 감음은 밤과 낮을 본받고, 머리카락은 별을 본받고, 눈썹은 북두(北斗)를 본받고, 맥(脈)은 강과 시내를 본받았다.
  뼈는 옥과 돌이고, 가죽과 살은 땅과 흙이며, 터럭은 우거진 숲을 본받고, 5장(藏)은 속에 있으며, 하늘[天]에 있는 것은 다섯의 별[五星]을 본받고, 땅[地]에 있는 것은 5행(行)을 본받고, 세간[世]에 있는 것은 5상(常)을 본받았다.
  안[內]은 다섯의 신[五神]이 되고, 수행[修]은 다섯의 덕[五德]이 되고, 사자(使者)는 여덟의 괘[八卦]가 되고, 치죄(治罪)는 다섯 가지 형벌[五刑]이 되고, 주령(主領)은 5관(官)이 되고, 오르면 다섯 가지 구름이 되며 변화하며 다섯 마리의 용이 된다.
  염통은 주작(朱雀)이 되고, 콩팥은 현무(玄武)가 되고, 간(肝)은 청룡(靑龍)이 되고, 허파는 백호(白虎)가 되며, 비장(脾臟)은 구진(句陳)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중생이면 온 세간의 날짐승ㆍ길짐승을 다 거두는 것이니, 모두가 그 안에 있다. 또한 5성(姓)도 되는데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며, 온갖 만 가지 성(姓)이 다 같이 그 안에 있다.
  서적에 배대(配對)하면 5경(經)이 되는데 온갖 서책과 역사가 이로부터 나온다. 또 공교한 재주에 배대하면 바로 이것이 5명(明)인데 여섯 가지 기예[六藝]의 온갖 기술이 그 사이에서 모두 나온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사람 몸이 비록 작기는 하나 이치는 천지와 서로 관련이 있다. 이렇게 몸을 설명하면 바로 이것은 다섯 가지 쌓임[陰]의 세간뿐만이 아니요 역시 국토의 세간이기도 하다.
  또 몸 안에는 왕(王)의 법으로 정의를 다스린다. 수행하는 이가 삼매 속에서 원지(願智)의 힘으로 곧 몸 속을 깨달아 알면 마음은 대왕이어서 위는 의(義)요 아래는 인(仁)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백 겹의 속에 싸여 있되 나오면 전후 좌우에 관속들이 시위(侍衛)하는 것이니, 허파는 사마(司馬)가 되고 갓은 사도(司徒)가 되며 비장은 사공(司空)이 되고 콩팥은 큰 바다가 되며 가운데는 신령한 거북이 있으면서 기세와 정기를 떨치면서 바람이 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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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비를 내린다.
  기운은 사지(支)에 통하는데, 4지는 백성이 된다. 왼쪽은 사명(司命)이 되고 오른쪽은 사록(司錄)이 되어서 주로 사람의 수명을 기록한다. 배꼽 속은 태일군(太一君)인데 역시 사람의 주인이다. 주천대장군(柱天大將軍)이 특진하여 군왕이 되었는데 몸속의 1만 2천의 대신(大神)을 주재한다. 태일군에는 여덟의 사자(使者)가 있는데 8괘(卦)가 그것이니, 합하여 아홉의 큰 벼슬아치가 있다.
  3초(焦)와 근원을 열어서 왼쪽은 사(社)가 되고 오른쪽은 직(稷)이 되며, 간사한 도덕을 주관한다. 삼초는 기(氣)가 통하여 머리에 들며 중간은 종묘(宗廟)가 되는데 왕은 여기에서 다스리고 교화한다.
  만일 마음이 바른 법을 행하면 아래의 무리들은 모두가 따르는지라 정치가 바르고 공평하기 때문에 5장이 조화되고 6부(腑)가 알맞아서 네 가지 요소[四大]가 안락하며 모든 질병이 없이 마지막까지 제 수명을 보존한다.
  만일 마음이 그릇된 법을 행하면 뭇 벼슬아치들이 난(亂)을 일으켜서 서로 서로가 죽이고 해치기 때문에 네 가지 요소가 조화되지 않고 모든 갑판이 꽉 막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질병에 싸여 죽게 되는 것이니, 모두가 마음에서 나쁜 법을 행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혼(魂)을 잃으면 곧 어지러워지고, 백(魄)을 잃으면 미치광이가 되며, 뜻[意]을 잃으면 미혹하고, 뜻[志]을 잃으면 잊어버리게 되며, 정신[神]을 잃으면 죽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제왕이 어진 덕(德)으로 인민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것이 몸 안의 법에서 세워지는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등등의 이치의 자세한 것은 『제위경(提謂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속세간의 이치가 서로 관련된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자명해졌거니와 아울러 바깥의 이치와도 서로 관련된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아직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셨을 적에는 여러 신선(神仙)들이 세간의 지혜 등을 역시 통달하여 이 법의 이름과 이치가 상대되기 때문이니, 앞에서 설명한 바깥 세간으로서의 이치가 된다.
  이 여러 신선이 비록 세간의 지혜와 변재와 총명으로 세간을 잘 통달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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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해도, 만일 이런 분별에 머무르면 마침내 이것은 마음으로 행하는 도리 밖이어서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므로 불법에서는 성인이라 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이것은 범부로서 3계(界)와 25유(有)를 바퀴 돌 듯하면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중생을 교화한다면 오래된 의사[舊醫]라고 하며, 또한 세간의 의사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세간 의사가 치료하여 나은 뒤에는 도로 재발을 하거니와 이 여래께서 고치시면 나은 뒤에 다시는 재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아래의 설명과 같다. 지금 말하는 안 이치의 세간이라 함은 바로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니, 온갖 교의 문과 명의(名義)의 모양을 널리 말씀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수행하는 이는 선정의 마음속에서 뜻으로 불법 교문의 주(主)와 상대[對]의 모양을 얻어 알려고 하면 삼매와 지혜와 선근의 힘 때문에 이내 깨달아 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부처님의 말씀한 바대로다.
  다섯 가지 계율의 이치는 5장에 배대된다. 가령 4대(大)와 5음(陰)과 12입(入)ㆍ18계(界)며 4제(諦)와 12인연(因緣)은 모두가 사람의 몸속이다. 곧 4대라는 이 이치는 5장에 배대된 줄 알 것이니, 바람은 간에 배대하고, 불은 염통에 배대하며, 물은 콩팥에 배대하며, 땅은 허파와 비장에 배대된다.
  5음의 이름을 들면 곧 몸의 5장에 배대된 줄 깨달아 아는 것이니, 빛깔[色]은 간에 배대되고, 의식[識]은 비장에 배대되며, 생각[想]은 염통에 배대되고, 느낌[受]은 콩팥에 배대되며, 지어감[行]은 허파에 배대된다. 이름은 비록 차례대로가 아니기는 하나 이치는 서로 연관된다.
  만일 12입과 18계를 들면 역시 안의 5음에 배대된 줄 알 것이다. 하나의 입과 셋의 계[一入三界]의 이치는 저절로 볼 수 있으나, 둘의 입과 셋의 계[二入三界]는 이제 분별하여야겠다. 다섯 가지 식[五識]은 모두가 의입계(意入界)가 되지만 바깥의 다섯 가지 대경[外五塵]과 안의 법진[內法塵]은 법입계(法入界)가 된 것이니, 이는 곧 둘의 입과 셋의 계가 서로 관련된다. 의식계(意識界)라 함은 처음 내는 다섯 가지 식을 감관으로 삼아 바깥의 법진에 배대시키고 이내 의식을 내므로 의식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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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5근(根)을 들면 역시 안의 5장에 배대된 줄 알 것이니, 우근(憂根)은 간에 배대되고, 고근(苦根)은 염통에 배대되고, 희근(喜根)은 허파에 배대되고, 낙근(樂根)은 콩팥에 배대되고, 사근(捨根)은 비장에 배대된다.
  5근의 인연은 세 가지 세계가 갖추어져 있다. 왜냐 하면 우근은 욕심 세계에 배대되고, 고근은 초선(初禪)에 배대되고, 희근은 2선(禪)에 배대되고, 낙근은 3선에 배대되고, 사근은 4선에 배대되며, 내지 4공정(空定)은 모두가 사와 함께 하는 선정[捨俱禪]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세계는 역시 5장과 그 이치가 서로 연관된 줄 알아야 한다.
  4생(生)에 대한 설명을 들면 역시 이 이치는 5장과 연관되었음을 깨달아 안다. 왜냐 하면 욕심 세계에는 5근이 갖추어져 있는데 5장과 관계되며 5장은 4대와 관계되어서 4생에 배대되기 때문이다. 온갖 알로 나는 것[卵生]은 거의가 바람 요소[風大]의 성품이어서 몸을 가벼이 들 수 있기 때문이며, 온갖 습기로 나는 것[濕生]은 대부분이 물 요소[水大]의 성품이니 습기로 인하면서 생기기 때문이며, 온갖 태로 나는 것[胎生]은 대부분이 땅 요소[地大]의 성품에 속하니 그 몸이 무겁고 무디기 때문이며, 온갖 화하여 나는 것[化生]은 대부분이 불 요소[火大]의 성품에 속하니 불의 바탕은 없는데도 홀연함[忽然]이 있기 때문이요 또한 광명도 있기 때문이다.
  여래는 3계와 4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네 가지 진리와 열두 가지 인연과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법약(法藥)의 신단(神丹)은 모두가 중생의 5장과 5근과 5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말씀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한 마음과 네 가지 진리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쌓임의 진리[集諦]는 간의 원인[因]에 배대하였으니 처음 생김에 속해 있기 때문이며,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염통의 결과[果]에 배대하였으니 이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도의 진리[道諦]는 허파의 금[金]에 배대하였으니 능히 끊어 잘랐기 때문이며,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콩팥이 겨울에 간직함[冬臧]의 법에 배대하였으니 이미 있던 것이 도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음은 이미 비장에 배대하였으니, 네 가지 진리를 열어 통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지 열두 가지 인연과 여섯 가지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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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은 이것을 유추하면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법장(法藏)으로 여래의 온갖 교의 문을 거두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가 마음을 밝고 날카롭게 하여 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내 온갖 불법의 이름과 이치를 깨달아 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이 몸을 분명히 알면 바로 이것이 온갖 것을 통달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안의 이치와 세간의 이치가 서로 관련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니, 뜻은 오묘하고 비밀한 데에 있다. 깨친 것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위에서와 같이 모든 성인의 은미한 말씀들을 널리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몸과 마음이 세간과 출세간과 온갖 깨끗하거나 더러운 국토와 진리와 세속의 법의 문에 배당하여도 차이가 없고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한 티끌이 법계를 포함하고 아홉 세상이 찰나 동안이다”라고 했고, 또 이르기를 “알면 시방이 한 마음 속이요, 미혹하면 방촌(方寸)도 천 리의 밖이다”라고 했다.
  만일 이와 같이 바르게 알고 뚜렷이 통달하면 시방의 세계가 손바닥 안에 쥐어 있고 사해(四海)의 파랑이 털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리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은밀한 방에 조용히 앉으면 부처가 됨이 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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