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사대사가 왜 중요한가 ? |
참선하는 사람치고 생사(生死)의 일이 크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생사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망연하여 의례 대답을 못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고 해서 내가 넌즈시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대는 생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심한다' 하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생사의 일은 인간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실로 생사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농사일을 버리고 생식[酸穀]하는 사람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억지로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벽곡으로 이미 배고픔을 잊은 그는 벼나 기장을 심을 필요가 없으므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만 피웁니다. 이와 같이 참학을 하는 자가 생사의 단서부터 미혹되면 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것을 모른다. 이것을 생사라고 말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미친 소리입니다. 가령 오고 가는 곳을 안다 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생사인데 생사 자체에 빠져서 생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는 원래 체성(體性)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허망하게 윤회를 아서 한 생(生)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이 추우면 응결하여 얼음이 되지만, 그 추위가 사라지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혹이 마음에 축적되면 생사가 허망하게 응결되지만, 미혹했던 것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작용은 고요할 뿐입니다. 생사를 찾으려 하나, 마치 졸다가 깨어난 사람이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이치가 있겠읍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란 본래 공(空)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려면 깨달아야만 하고, 본래 열반(涅槃)이 있지만 미혹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혹 자기의 마음을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는데도 생사문제를 환히 깨달으려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계속 때면서 가마솥의 물이 끓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읍니까? 생사를 환히 깨닫는 데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보다 가까운 길이 없고, 마음을 깨닫는데도 발심(發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려면, 추위와 더위를 모두 잊고 침식(寢食)을 그만두며, 알음알이[情]와 허망한 생각[妄]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 일념(一念)을 어떤 곳에서든 꾸준히 하여, 마치 견고한 무기나 침범되지 않는 엄중한 성곽처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옛 사람들이 말했던 확고한 발심을 두루 살펴 그와 같이 하기를 조심해서 노력한다면 확철대오하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미 깨닫고 나면 생사만 공적(空寂)한 것이 아니라, 열반도 그러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생사와 미망(迷忘)이 교대로 결합하여 멀리는 광겁(曠劫)으로부터 미래제(未來際)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한 사이도 없이 유전(流轉)하겠습니까? `생사는 큰 일이다' 고 말하는 것이 왜 헛된 말이며, 어찌 빈 말이겠습니까?' |
'동어서화(東語西話)'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병고가 양약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 (0) | 2008.02.27 |
---|---|
4. 말로써 성품을 깨칠 수 있는가 ? (0) | 2008.02.27 |
3. 환법의 정체란 무엇인가 ? (0) | 2008.02.27 |
1.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0) | 2008.02.27 |
동어서화(東語西話) 해제 (0) | 2008.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