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말로써 성품을 깨칠 수 있는가 ? |
묘희 대혜(大慧;1088∼1163)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례히 말로써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 너희들이 알아듣도록 잘 가르칠 것이니, 삼십 년 후에 내가 말했던 것을 검토해 보라" 하였다. 이런 지극한 말씀이 없다고 해도 교화는 날로 쇠퇴하고 인심은 날로 쇠락해 갔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다름이 아니라 수행하여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성품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수행은 하지 않고서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사는 서울에 천하의 빼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것과 같다. 다른 지방·다른 나라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어린애나 더벅머리 총각도 서울이 있는 방향은 가리킬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에 대한 말이 많을수록 설명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말에 의지해서 서울 사정을 알려고 할 것이며, 더구나 실없는 말이나 연구하여 헛된 것을 찾으려는 선승이 되려 하겠는가? 발심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양식을 준비하여 튼튼한 신발을 신고 천 리나 먼 길이라 해도 서울을 향해 고생을 무릅쓰고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몸소 서울에 도착하면 화려한 대궐과 많은 인파, 번화한 문물과 엄청난 부귀를 직접 보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직접 서울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직접 본 사람이라야 고향에 되돌아 가서 서울의 사정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훌륭한 것을 억지로 천한 것이라 하며, 종일토록 자기 멋대로 말하더라도 결코 그가 몸소 보았던 진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나는 `법왕(法王)은 법에 자재(自在)한 분이다' 고 한다. 몸소 도달해서 본 사람과 도달하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한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설명하려 했던 경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뽐내려는 마음이다. 대체로 말로만 하는 자는 천부적인 자질이 준수하고 민첩하여 많이 듣고 널리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버릇이 알음알이를 움직여서 알음알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알음알이는 그의 뽐내는 행위를 더더욱 부추기고, 뽐내는 마음은 알음알이를 더더욱 빛나게 하여 말을 하면 할수록 사생(死生)의 결박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러나 몸소 본 사람은 종일토록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실한 음성은 우주에 가득 찬다. 그래서 영가(永圈;647∼713)스님은, "말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묵묵하라.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놓으니 막힘이 없다" 고 하셨다. 그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삼십 년 뒤에 이 말을 검토해 보라" 고 한 그 말씀이 없었던가? 대혜스님의 이 말씀을 칭찬해야 할는지 깎아내려야 할는지.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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