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 해제(解題)
선문에서는 옛 조사들이 남긴 언행 중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것 을 고칙(古則)이라 한다.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스님이 명주(明 州:지금의 浙江省 奉化縣)에 있는 설두산의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면서, 고칙을 100개로 정리하고 거기에 송을 붙인 것이「설두송고」이다. 이 송 고집은 당시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선과 문학의 조화를 잘 드러낸 작품 으로,「선림보훈」에 의하면 임제종 분양선소(汾陽善昭:947-1024)의 「분양송고(汾陽頌古)」를 본따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이런 송고류를 만들었는데, 이 풍조는 「경덕전등록」의 편찬을 거슬러 올라가서「조당집」의 편찬 등에 의해 격발된 것으로 보인다.
사천성 출신인 설두스님은 설봉-운문-향림-지문-설두로 이어지는 운문 계의 선사이다. 그러나 여하경(呂夏卿)이 지은 탑명에 의하면 설두스님 은 마조의 9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특출한 선사는 모두 마조 의 법손이라고 믿는 당시의 사상을 잘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에는 이미 마조-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지는 임제종이 선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송대 임제종에 속하는 원오스님이 이 송고집을 거량하여 「벽암록」으로 후세에 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설두송고」를 대본으로 원오 극근(원悟克勤:1063-1135)스님이 당시 의 수행자들에게 제창한 것이 바로 이 「벽암록」이며, 이 책은 「벽암집」 「불과원오선사벽암록」등으로 불려왔고,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 라는 칭호와 함께 선서(禪書)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설 두스님이 하신 [본칙]·[송]과 원오스님이 하신 [수시]·[평창]·[착어] 로 구성되어 있다. [수시]는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일종의 문제제기 이고, [평창]은 [본칙]과 [송]에 대한 설명이고, [착어]는 한두 마디로 상대를 격발시키는 간단한 평가이다.
그러나 원오스님의 제창은 단순한 글자 해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님 자신의 전인격이 투여되어 있다. 특히 말이나 문헌에 대한 집착을 끊어주기 위하여 당시의 구어와 속어를 종횡무진하게 사용하여 수행자들 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러한 원오스님의 생생하고 발랄한 강의의 모습은 그의 훌륭한 기록자들에 의해 그 몸짓마저도 전해지고 있다. 설두스님이 표전(表전)의 논리로 본분의 소식을 알린 반면, 원오스님은 차전(遮전) 의 방식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뛰어넘어 자기의 본래면목을 단박에 깨 치도록 하였다. "「벽암록」을 읽으면 모든 알음알이가 딱 끊어진다"고 한 성철스님의 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벽암록」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밀도 있게 완성되어, 중당 이후 의 문단(文壇)의 중심적인 사조인 돈오무심(頓悟無心) 사상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더구나 송대의「창랑시화(滄浪詩話)」등의 시평어집에서 당대(唐代)에 유행하던 돈오돈수 사상을 근거로 당시(唐詩)를 평한 것을 상기할 때에「벽암록」이 갖는 불교문학사적 위치는 대단히 크다. 순간 적으로 포착된 느낌을 압축된 언어로 정착시켜야만 하는 시인의 긴장감 이 일체의 사량분별이나 점진적인 단계를 철저히 거부하는 선사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룬 것이다.
선 사상사로 보더라도 돈오견성을 부르짖는「육조단경」의 사상과, 철 저한 자기 주체성을 강조하는 선사들의 정신이「벽암록」에 집약되어 있 다. "기봉이 단계적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독바다에 떨어진다"라든 가, "남으로부터 얻은 보물은 자기의 보물이 아니다"라는 옛 조사들의 말을 원오스님은 누누이 인용하고 있다.
원오스님은 팽주 숭녕(彭州崇寧:사천성 성도) 출신으로 자(字)는 무착 (無着)이고 극근은 스님의 휘(諱)이다. 생전에는 북송의 휘종 임금이 불 과(佛果)라는 법호를, 사후에는 남송의 고종 임금이 원오라는 법호를 내 렸다. 어려서 출가하여 뒷날 오조 법연(五祖法演:?-1104)스님의 법을 이 어 임제의 가풍을 날렸으나, 문하에는 항상 천여 명의 납자가 있었으며 그 중 대혜 종고(大慧宗 )와 호구 소륭(虎丘韶隆)스님이 유명하다. 당시의 한림학사 곽지장(郭知章)과 재상 장상영(張商英)의 귀의를 받아 여 러 관사(官寺)에서 종풍을 선양하던 중 성도의 소각사(昭覺寺), 호남의 협산사(夾山寺)와 도림사(道林寺) 등지에서 「설두송고」를 제창하여 「벽암록」으로 오늘에 전하고 있다. '벽암'은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 에 있는 한 건물의 편액에 있는 글자이다. 스님의 법어는 제자들에 의해 '어록'과 '심요'로 편집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벽암록」의 텍스트와 그 계통은 매우 복잡한데, 여기서는 이 책의 대 본이 된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이하 삼성본으로 약칭)을 중심으로 간단 히 설명하기로 한다. 선화(宣和) 7년(1125)에 쓴 무당(無黨)스님의 후서 에 의하면, 우너오스님이 성도에서「설두송고」를 제창했다고 한다. 그 후 협산·도림에서도 또다시 제창하였는데 그때마다 말씀은 조금씩 달랐 으나 그 뜻은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염(建炎) 2년(1128)에 쓰인 보조 스님의 서에 의하면 협산 영천원의 벽암에 주석하시던 중 제창하신 것으 로 되어 있으므로 모순이다. 아마도 성도 강의록과 협산 강의록이 필사 본의 형태로 둘 다 유행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뒷날 여러 다른 종류 의 판본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성본「벽암록」은 조선조 세조 11년(1465)에 제작한 을유자(乙酉字: 중간 크기의 동활자)로 찍은 책이다. 이 책은 ①보조의 서, ②만리방회의 서, ③삼교노인의 서, ④주치의 서의 순으로 서가 붙어 있다. 그리고 ① 무당의 후서, ②희릉의 후서, ③정일의 후서, ④풍자진의 후서, ⑤중간 원오선사벽암집소 순으로 후서가 붙어 있다. 이 후서 중 ② ③ ④에 모 두 장명원의 재판(再版)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성본은 장 명원본 계통을 저본으로하여 활자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흥장 속장본과 건륭장경본의 권제10 뒤에,「북판(北版)」이 잘못된 부분을 지 적한 대목이 있는데,삼성본도「북판」이 오류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 로 미루어, 장명원본 계통 중에서도「북판」과 같은 계통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삼성본은 각 칙의 내용을 표시하는 제목이 없고, 각 칙의 본 칙의 첫머리에 번호가 붙어 있고, 권제1 끝에 '협산무애선사항마표'가 없는 점 등이 중국의 명본(明本), 가흥장속장본, 건륭장본, 대청광서본 과는 다른 점이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에 삼성본은 옛날의 원형 에 가까운 계통이라 할 수 있다.
삼성본은 1991년 9월 30일에 보물 제1093호로 지정된 책으로, 두 권씩 제본하여 5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1책은 27장, 제2책은 1장, 제3책 은 12장, 제4책은 3장이 각각 빠져 있고, 제5책은 온전하다. 그리고 뒷 사람들이 수리하는 과정에서 제1책·제4책·제5책의 일부의 순서가 뒤바 뀐 듯하다. 본 선림고경총서의 영인본에서는 다른 판본 등과 대조하여 삼성본으 순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삼성본의 빠진 부분과 파손된 글자는, 조선의 을유자로 인쇄된 일본의 대동급기념문고(大東急記念文庫) 소 장본을 이용하여 복원하였다. 이 일본 소장본은 일본인의 손에 이한 토 가 달려 있어, 독자들은 삼성본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문의 오자(誤字)나 낙자(落字)는 일본 암파문고(巖派文庫)의「벽암록」을 참 고하기 바란다.
이 삼성본「벽암록」의 원형이 학계에 알려짐에 의해, 조선 초기「벽 암록」의 유통과 중국 선서를 수용하는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중국 선종의 여러 가풍 중에서 임제의 가풍을 선 택적으로 수용하는 우리나라 선종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귀중 한 문헌을 제공해준 삼성출판박물관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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