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山艤雜錄)

31. 불상 조각가 광보살(光菩薩)의 일생

通達無我法者 2008. 3. 5. 21:45
 

 

 

31. 불상 조각가 광보살(光菩薩)의 일생


광(光)보살은 은현(鄞縣) 사람으로 장(張)씨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조소(彫塑)를 가업으로 해왔는데 광(光)보살 대에 와서는 더욱 정교한 솜씨를 갖게 되었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식구에게 얽매여 사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해회사(海會寺) 수 매봉(壽梅峰)스님에게 귀의, 삭발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의 아내가 자식을 데리고 관가를 찾아 호소하는 바람에 수스님이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보살은 만호(萬戶) 완도(完都)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광보살에게 도망할 것을 권유하자 광보살은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칼을 뽑아 자기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 그 후 절강을 건너 패구(貝區)를 지나 광부(匡阜) 땅에 오르는 동안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수스님을 찾아뵈려고 하였으나 그는 벌써 입적한 뒤였다. 화정사(華頂寺) 무견(無見)화상의 도행이 높다는 말을 듣고 가슴 속에 품어온 의심들을 말하자 무견스님은 그에게 “개에게 불성이 없다 [狗子無佛性] '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내 깨친 바 있어 무견화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를 은사로 삼았다.

광보살은 일생 동안 절강 양편, 여러 사찰의 불상과 보살상을 매우 많이 조성하였지만 일을 끝마치면 짐을 꾸려 곧장 떠나갔으며 보수는 조금도 받지 않았다. 노년에 화정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석교암(石橋菴)의 오백나한상을 빚었는데 그 정교함은 극치를 다하였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던 새벽녘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북소리․종소리․범패소리가 가득히 울려왔으며, 끝마친 후에는 채소밭에 먹을 것이 없었다. 광보살은 사람을 보내 시주를 하려 하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영해(寧海) 다보사(多寶寺)의 원(圓)강주가 채소를 보내왔다. 광보살은 기뻐하며 그 까닭을 물으니, 얼마 전 진보살이 부처님의 명을 받고 그의 절을 찾아와 채소를 시주하라고 말해주길래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석교암에 진(眞)이라는 승려가 있었지만 그는 병으로 몸져 누워 오랫동안 문밖 출입을 못하던 자였다. 이 사실로 본다면 다보사를 찾아간 사람은 신인(神人)의 응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광보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73세에 아무런 병이 없이 화정(華頂)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으며 화장을 한 후 산중에 부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