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8. 여섯째 날, 아침 법문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4:01
 

 

 

여섯째 날,  아침 법문


마음을 보는 법을 기본으로 해서 모곡 사야도께서 설하신 사념처 수행의 끝으로 인도하는 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념처(四念處)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사념처의 첫 번째는 우리의 몸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할 때 알아차림은 대상에 마음을 붙이는 기능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식의 기능이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함께 본다'는 것은 주시해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주시(注視)라는 의미로 함께 쓰입니다.)


어느 수행자이든지 사념처의 대상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들숨, 날숨, 가고, 서고, 앉고, 구부리고, 펴고, 화장실에서 보는 일까지 모든 것들을 시작과 끝까지 다 알아차림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밖에 있는 것뿐이 아니라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 모두를 보아야 합니다. 집중하는 힘이 좋아지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몸이 4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몸이 물질일 뿐만 아니라 무상, 고, 무아임을 숙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상, 고, 무아까지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을 보면서 모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수행이 됩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생성과 소멸을 보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일어나고 사리지는 생멸(生滅)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몸과 마음이란 대상은 항상 일정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게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게 되며 이것을 보는 것이 바로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변화는 무상입니다. 그래서 위빠싸나 수행은 먼저 변화를 보는 수행입니다.

무엇을 보거나 대상을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무수히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일어남 사라짐입니다. 이 일어남 사라짐은 단순히 호흡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느낌 그 자체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할 일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림과 노력과 지혜로,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볼 때는 보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었을 때 듣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았을 때 냄새를 맡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었을 때는 먹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접촉, 느낌이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의 대상이 이어지면 거기엔 아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집중력(사마디)이 좋아지면 아는 마음 하나만 있으며 그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 하나만 남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이 매우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음이 오직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을 앎이라고 표현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남과 사라짐을 합니다. 대상이 생기고 알고, 생기고 알고 하는 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정확한 표현은 대상이 생기는 것을 생기면서 알고, 생기는 것을 생기면서 알고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과 함께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대상의 변화를 함께 예의 주시하고 또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에서 대상이 생기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은 일치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상이 생긴 뒤에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기면서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일어났을 때 대상에 향해지는 알아차림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과는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시성, 일치성, 현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수관(隋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요령입니다.)


아는 마음 역시 내가 아니고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몸의 육문(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門)이 육경(색, 성, 향, 미, 촉, 법)에 부딪치는 것 역시 항상 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게 될 때 사라짐이 보다 강하게 알아차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는 사라짐을 더 강조해서 보아야 합니다.

알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사라짐을 계속 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사라지고, 알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순서에 의해 알아차림을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첫 번째 단계는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즉 생성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이것을 알고, 일어나고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어나는 것 하나를 아는 것에 주력합니다. 그래서 생(生)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이미 아는 마음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짐을 아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라짐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이것은 멸(滅)하는 현상에 주의를 집중하여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같이 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는 것에 지루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때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하나로 묶어서 생멸(生滅)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보는 힘이 차츰 생기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힘이 없을 때는 간단한 것부터 보면서 집중과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이 생기면 더 자세한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모든 생기는(일어나는) 것은 다 사라진다는 법을 보게 됩니다. 단지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모든 생기는 것은 다 사라진다는 법을 직접 봄으로써 거기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단순한 법으로써 일어남과 사라짐뿐이지 내가 거기에 없음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런 숙고는 거기에 갈애와 집착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제거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갈애 역시 나라는 대상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부심 역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질투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여기서 잘못된 견해는 단지 법을 가지고 거기에 내가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갈애과 자부심과 잘못된 견해의 세 가지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알면 떨리게 됩니다. 계속 고의 연속임을 알아차리고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고의 연속임을 보고 있으면 고의 혐오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알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생기게 됩니다.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마지막에는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쁨을 도(道)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평화로움을 맞이했을 때 거기서 수행은 끝이 납니다.


모든 수행자가 대상이 끊어지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수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여섯째 날, 저녁 법문


어제는 12연기에 대해서 법문을 했는데 오늘도 12연기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고자 합니다.

오온과 12처, 18계에 관하여 법문을 하겠고, 현생에서 12연기를 어떻게 돌고 있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경(經)에 두 범부가 있었습니다. 한 범부는 분명한 앎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고, 한 범부는 바른 앎과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앎(아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미얀마에서는 장님이라고 합니다.

앎이 있는 사람을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몸에 오온이 있지만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을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몸에 오온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을 눈이 좋은 범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지혜이고 모른다는 것은 무명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혜안이라고 합니다.)


눈을 볼 수 없는 장님은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즉 변하는 오온의 속성을 모르고 내 몸이 변한다고 믿습니다.

느낌 역시 수(受)의 작용임을 모르므로 내가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지각(知覺)하고 기억하는 것을 상(想)의 무더기의 작용임을 모르므로 내가 지각한다고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행(行) 역시 조건지어진 형성력이 아닌 내가 행한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는 마음[認識] 역시 식(識)의 작용이 아닌 내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이런 사람을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눈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범부는 수행을 행함으로써 물질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은 색의 무더기[色蘊]라는 물질의 본성이라는 것을 압니다. 느낌 역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의 본성이라고 바르게 압니다.

상(想) 역시도 내가 아닌 상의 무더기[想蘊] 자체의 역할일 뿐인 것입니다. 행(行) 역시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지어진 행의 무더기[行蘊]의 역할일 뿐인 것입니다. 식(識. 認識. 아는 마음)도 식의 무더기[識 ]의 역할이라고 아는 것이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법을 보고,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눈이 좋은 범부라고 합니다.


수행자도 오온(五蘊)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오온은 색의 무더기[色蘊], 수의 무더기[受蘊], 상의 무더기[想蘊], 행의 무더기[行蘊], 식의 무더기[識蘊] 다섯 가지입니다.


이제 오온에 대한 것을 끝내고 12처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2처(十二處)를 설명하자면 내적인 인식기관 6가지, 외적인 인식 대상 6가지를 합쳐서 12처가 됩니다.

여기서 내적인 인식기관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눈, 귀, 코, 몸, 마음을 말하며 그래서 이것을 안에 있는 여섯 가지[六內處]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으로써는 눈의 대상으로 모양, 귀의 대상으로 소리, 코의 대상으로 냄새, 혀의 대상으로 맛, 몸의 대상으로 접촉, 마음의 대상으로 법(마음의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고 하며 밖에 있는 여섯 가지[六外處]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포함하여 12처라고 합니다. 왜 12처라고 부르는가 하면 윤회를 돌게 만들기 때문에 12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2처 중에 안에서의 6가지는 물질로써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이고 마음으로써는 의(意) 하나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은 물질로써는 모양, 소리, 냄새, 맛, 접촉이 있고, 여섯 번째는 마음의 대상, 혹은 현상, 법으로써 이렇게 여섯 가지가 정신과 물질이 둘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12처도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18계(十八界)를 설명하겠습니다. 이 18계를 이해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12연기를 왜 돌게 되는 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18계는 내적인 인식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여섯 가지와, 외적인 인식대상으로 와서 자극하는 여섯 가지가 부딪쳐서 생긴 여섯 가지 식(識)을 합쳐서 18계입니다.


수행자께서 지금 보고 있는 도표는 글로써 보여주는 연기이고,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 우리가 생활하면서 돌고 있는 연기입니다.

수행자의 몸에는 눈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양이라는 물질입니다. 물질로써 눈과 물질로써의 모양이 부딪쳐서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눈과 모양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써 아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즉 눈과 눈의 대상인 모양, 형상이 있으므로 결과로써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이 촉(觸)입니다. 눈과 모양과 마음[識]이 합쳐졌을 때 촉이라고 하는 부딪침이 생깁니다. 눈과 대상인 모양이 있음으로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 있고 이것이 원인이 된 결과로써 촉이 있게 됩니다. 촉이 일어날 때마다 촉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할 때 촉(觸)이 고제(苦諦)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촉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좋은 모양,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몸의 접촉이 있을 때, 좋은 생각들이 들 때마다 이 생각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갈애(渴愛)입니다.


이렇게 촉을 원인으로 해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원인으로 해서 갈애로 이어집니다. 원하는 마음을 보지 않음으로 해서, 아니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함으로 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자체가 사성제(四聖諦) 중의 고제(苦諦)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 다음 단계인 집착[取]이 생깁니다.


집착은 좋은 모양에 대한 집착, 좋은 소리에 대한 집착, 좋은 냄새에 대한 집착, 좋은 맛에 대한 집착, 좋은 접촉에 대한 집착, 이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집착에는 다음의 네 가지 종류의 집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집착은 안, 이, 비, 설, 신에 대한 감각적 욕망[愛取]입니다.


두 번째 집착은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見取]입니다. 우리 몸에 내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과 이 세상으로 끝이라는 단견(斷見)과 영원한 것이라는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세 번째 집착은 잘못된 수행법, 잘못된 계율에 대한 집착[戒禁取]입니다. 잘못된 수행법은 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이 열반에 빨리 다다른다는 잘못된 수행법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인간이지만 동물같이 네 발로 걸으면서 수행을 함으로써 열반에 빨리 다다를 수 있다는 수행법도 있습니다.


네 번째는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자가 네 가지 집착이 남아 있다면 신(身), 구(口), 의(意)라는 몸과 말과 생각이라는 3업으로 이어집니다. 밖에서 생활하면서 일을 할 때도 집착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살아있는 생명들은 집착을 갖고 있는 일, 집착하는 일, 집착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있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있고,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있고,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다시 미래생이 있습니다. 현재 12연기를 돌고 있음으로 미래생으로 이어집니다.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본생경(本生經. jaataka)에 부처님의 어느 전생에서 범천을 다스리는 왕자로 태어나 왕이 된 후에 왕궁을 버리고 사무량심(四無量心)인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닦으면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왕비의 마음에 좋지 않은 징조가 떠올랐습니다. 나쁜 징조를 본 왕비는 왕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왕비가 왕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 편안한 평상시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무량심과 함께 생활을 하던 중 죽음이 가까워 졌을 때 왕비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왕국의 백성과 나를 측은히 여겨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왕비에게 나에게 더 이상 갈애와 연관된 말을,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과 백성을 측은히 여겨서 갈애와 함께 죽는다면 갈애를 원인으로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을 원인으로 신, 구, 의 3업이 생겨 이 업과 함께 죽으면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죽을 무렵에 원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나쁜 곳에 태어나게 되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법에 의하면 자신의 소유인 집, 자신의 딸, 자신의 아들, 자신의 재산, 자신의 몸 등을 좋아하여 집착하는 마음,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마음이 떠나지 못하고 죽는 다면 9가지 생 중에 하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집이나 재산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원하고 집착하게 되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생을 바꾸게 되는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연결이 될 때 이생에서 마지막에 이런 생각(집착)을 한다면 좋은 생으로 태어나지 않고 축생이나 나쁜 생을 받게 됩니다.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염소, 쥐, 닭, 빈대, 물소, 개 등등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벌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전생일 적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고 원함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고 원함을 제거하는 말을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왕비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습니다. '왕이시어, 이 왕국과 저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수행을 하시면서 죽음을 맞이해서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전신인 왕께서는 '사두! 사두! 사두!'로 답하셨습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1. 자애[慈] : 선의, 자비, 보편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신의 진실한 마음이 모든 존재들의 행복과 평화와 번영을 기원합니다.

2. 동정[悲] : 다른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동정심입니다.

3.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 숭고한 덕은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한 동정심의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해하여 주는 기쁨입니다.

4. 평정한 마음[捨] : 집착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균형을 가진 평등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12연기를 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눈과 보여지는 모양, 그리고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라는 이 세 가지는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생긴 육식이라고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12연기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첫째, 눈이라는 안근(眼根)이

둘째, 대상으로써의 모양, 형상과 부딪쳐서

셋째,  보고, 아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촉(부딪침)이 생기고 다시 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기고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으로 이어지고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형성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그리고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하는 마음[意識]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멸(生滅)을 보아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고 볼 수 있으면 고제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이렇게 고(苦)에 대한 이해가 생김으로써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가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것은 사라진다는 분명한 앎이 앞서 인도하는 정도(正道)입니다. 이렇게 팔정도(八正道)가운데서 혜(慧)에 해당하는 정도[正見, 正思惟]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이 생에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설령 도(道)와 과(果)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에 좋은 생을 받을 수 있으며 다음 생에서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도과(道果)를 얻기 전에는 계속해서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촉(觸)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다시 이 느낌을 보지 않음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느낌이 많아집니다.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느낌일 것입니다. 심한 고통이 일어났을 때 내가 괴롭고,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은 느낌의 작용일 뿐이지 나와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는 몸만 보아야지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까지 아프면 화살을 두 번 맞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느낌은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에 다다랐을 때 고통스러운 느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만약 갈애가 일어났다면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도록 하십시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생깁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갈애가 일어나면 죽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아들과 딸과 헤어지기 싫고, 집을 떠나기도 싫어집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욕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욕심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욕심이 일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욕심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신과 아들, 딸, 아내, 남편, 재산에 대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애와 집착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보면서 죽는다면 12연기의 고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왕비가 왕에게 '갈애를 버리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십시오.' 라고 말씀드린 후에 왕은 죽음을 맞았고 죽은 다음에 좋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수행자가 해야할 일은 왜 12연기를 돌아야 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있은 다음 고리를 자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눈의 대상인 형상이 부딪침으로 인해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는 과정이 촉(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촉을 원인으로 느낌[受]이 있게 되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渴愛)가 생기고 갈애를 원인으로 취(取)가 일어나며 취라는 원인으로 유(有)라고 하는 업의 생성이 있고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생(生)이 있고 생을 원인으로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다시 귀가 소리와 마주쳐서 듣는 마음[耳識]이 생기고 이러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로 이어집니다.


코와 냄새가 부딪쳐서 냄새 맡는 마음[鼻識]이 생기고 촉을 원인으로 느낌을,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혀도 마찬가지로 맛과 부딪쳐서 설식[舌識]이 생기고 촉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기게 됩니다.


몸과 접촉도 마찬가지로 몸의 접촉을 아는 마음[身識]이 생기고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마음과 생각도 마음의 대상인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意識]이 생기고 다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이것이 현재의 생에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함으로써 미래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은 현생의 12연기를 계속 돌 것입니까? 아니면 고리를 자를 것입니까?

윤회에 돌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항상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즉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이렇게 수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하나고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써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지 않고, 현재 좋아하지 않음으로써 미래에도 오온을 갖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오온이 고제임을 알 때 미래의 오온도 역시 고라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제라고 알았을 때 미래의 오온도 역시 고제라고 안다면 수행자의 마음에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라고 알게 됩니다.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라고 알게 되면 갈애를 제거함으로써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를 제거할 때만이 윤회의 고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12연기를 통한 윤회를 돌지 않으려면 갈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갈애를 제거하려면 고귀한 진리인 사성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성제(四聖諦)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가 괴로움인 고제(苦諦)입니다.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집제(集諦)입니다.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인 멸제(滅諦)입니다.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제(道諦)입니다.


여기서 고제와 집제가 좋지 않은 성제(聖諦)이고 멸제와 도제는 좋은 성제입니다.

(첫째,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다. 셋째, 괴로움은 소멸시킬 수 있다. 넷째,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은 팔정도이다,)


고제란 무엇인가요? 오온(五蘊)을 고제라고도 합니다. 12처 중에서 받아들이는 역할의 내적인 감각기관 여섯 가지를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고제입니다. 다시 와서 부딪치는 외적인 대상이 여섯 가지를 육경(六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고제입니다.

이상 12처에서 생긴 것을 아는 마음인 식(識)이며, 이 여섯 가지를 육식(六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두 합쳐 18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고제입니다.


왜 오온과 12처와 18계가 고(苦)인가 하면 일어나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고라고 부르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고(苦)가 하는 일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먹기를 원하면 먹어야 하고, 가기를 원하면 가야하고, 졸리면 자야합니다.


오온이 괴롭히므로 수행자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달래야 하는 것입니다. 안 먹으면 배가 고파서 괴롭고, 먹으면 배가 불러서 고통스럽습니다. 조금 오래 누워있으면 등이 아프고, 그래서 옆으로 누워보지만 편치가 않습니다. 겨울이면 추워서 괴롭고, 여름이면 더워서 괴롭고, 모든 많은 일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모곡 사야도께서는 오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설명하실 때 어머니 한 분이 두 아들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두 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두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은 나면서부터 장님이었고 또 다른 아들은 소아마비였으므로 잘 걸을 수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으로 태어난 아들은 장님뿐만 아니라 설사하는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아마비 아들은 약간의 정신이상도 있었습니다.


장님이 갖고 있는 설사하는 병과 소아마비인 아들이 갖고 있는 정신질환도 어머니가 돌보아야 합니다. 한 아들이 설사를 하고 나면 먹여야 하고, 먹고 난 후 설사를 하면 다시 씻겨야 하는 일을 어머니 혼자서 해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쉴 사이가 없었습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아들은 항상 이것을 원하고 또 저것을 원하고 얻은 후에도 불만스러워하고 다시 요구하면서 여러 면에서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어린이가 둘이고 돌보는 어머니는 한 분이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두 아들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는 몸이 얼마나 고달픈 것일까요? 어머니가 피곤할까요? 안 그럴까요?

수행자 : '피곤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어머니가 오온과 함께 하고 있는 저와 수행자 여러분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아들 둘은 자신의 마음과 물질입니다.


첫 번째,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오온이 있지만 이것을 보지 않으므로 오온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수행자의 몸으로 불리우는 물질에는 아는 속성이 없습니다. 장님과 같을 뿐만 아니라 이 물질은 화장실을 가고, 대소변을 보고,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등등 물질로써 항상 괴롭힙니다. 물질로써 우리의 몸은 괴로움 자체인 고(苦)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물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저나 수행자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인가요? 행복한 일인가요?

수행자 : '고통입니다.'


두 번째,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이상을 갖고 있는 아들은 마음에 해당합니다. 수행자 자신의 마음을 보십시오. 이것저것을 원하고 때로는 흰색 옷을 원해서 사주면 불만스러워하고 싫어져서 빨간색 옷을 원합니다. 다시 빨간색 옷을 사서주면 그 빨간색 옷이 싫어져서 다른 옷을 원하고 이와 같이 마음은 정신병자와 비슷하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계란하나 먹는 것에도 삶은 것을 달라, 프라이팬에 익힌 것을 먹고싶다는 등등 먹을 때도 항상 이것저것을 원해서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만족을 못합니다. 무엇을 볼 때 느껴지는 것도 불만으로 생각하여 소아마비일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 중에서 장님은 물질에 비유됩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질환은 마음입니다. 왜 우리가 괴롭고 고통스러운가는 장님과 소아마비 둘을 다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께서 두 아들과 함께 산다면 그 생이 과연 행복한 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를 괴롭히는 법인가요? 아니면 행복하게 하는 법인가요?

우리를 괴롭히는 마음과 물질을 계속해서 좋아할 것인가요? 아니면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요?

그래서 갈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마음과 물질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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