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10. 여덟째 날, 아침 법문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4:05
 

 

 

여덟째 날, 아침 법문


수행자들께서 지금쯤 보고 아는 것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간에 아침법문과 저녁법문을 통하여 수행하는 방법과 대상이 일어날 때 보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께서는 법을 보고 알고, 보고 알고, 하면서 법을 얻기를 원한다면 알아차림과 노력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나 법회가 있을 때, 시작하는 순간부터 중간 그리고 끝이 날 때까지 1초 1초 대상을 놓치지 않고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알아차리면서 노력과 함께 할 때만이 집중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대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 하나 하나를 집중해서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분명한 앎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 있으면 일어남도 고(苦)이고 역시 사라짐도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은 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고 고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수행이 바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이해하도록 하는 의무는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다할 때 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알아차리는 것이 많아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알아차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여러분들이 도와 과의 열반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대상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많이 알아차리기를 요청하면서 아침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여덟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좌선을 하면서 알아차릴 때 마음속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마음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므로 괜찮습니다.


(참고 :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혼자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말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대상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좌선 중에 말을 한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을 놓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상태가 계속되게 됩니다.)


질문 2 :

이론적으로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많이 들어서 알겠는데 정작 마음으로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답변 2 :

맞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아는 만큼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어남 사라짐을 보는 것은 생멸을 보는 것으로 집중(사마디)과 모든 조건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계속하다 보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질문 3 :

주된 대상을 어느 것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답변 3 :

수행에서 주된 대상은 없습니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앎이 이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고 : 위빠싸나 수행의 대상은 신, 수, 심, 법 네 가지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또한 좌선을 할 때의 대상과 경행을 할 때의 대상이 다르고 일상의 활동을 할 때가 다 다릅니다. 좌선을 할 때의 주된 대상은 호흡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좌선이 꼭 호흡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릴 것이 없을 경우에는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상태에 따라 강한 것보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는 발을 주시하는 것으로 출발을 해야 하며 일상의 알아차림에서는 하고 있는 동작의 움직임이나 느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질문 4 :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면서 이것이 고(苦)라고 마음을 내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지요?


답변 4 : 고(苦)라고 숙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숙고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 : 고라고 하는 것은 삼법인의 지혜가 난 것입니다. 지혜가 나면 바로 알아차려서 그런 현상을 알아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혜로 인하여 계속 생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 5 :

오온을 모두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답변 5 :

몸이나 느낌을 볼 수 있으면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십시오. 목적은 아는 마음입니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6 :

오온을 가지고 편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변 6 :

간단합니다. 원하는 마음을 점점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현재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문 7 :

열반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생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답변 7 :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지만 수행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고 : 윤회가 끊어진다는 사실은 수행을 하는 초보자에게는 매우 불안하고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말입니다. 윤회가 끊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지혜가 난 사람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열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 교리의 궁극적 핵심은 열반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괴로움이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지혜가 나서 아는 것이므로 이 상태에서는 자연스럽게 열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문제는 수행자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해서는 현재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열반은 나중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를 때부터 열반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그것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이익이 있습니다.)


질문 8 :

좌선 시에 멍한 상태가 옵니다. 졸린 것이 아닌데 의식이 잠시 멈추는 듯한 상태가 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멍한 상태였음을 조금 지난 후에 알고 경행을 합니다.


답변 8 :

멍한 상태를 알고 대상을 바꾸기보다는 그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더욱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질문 9 :

12연기를 이해하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가족, 친구, 애인 등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답변 9 :

항상 우리 마음엔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어도 결혼을 해서 삽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점차로 되어 가는 것이지 너무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 10 :

사야도께서는 수행자에게 재가자의 삶을 권하시는 지요? 아니면 출가자의 삶을 권하시는 지요?


답변 10 :

비구, 비구니, 기혼, 미혼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가자의 장점은 자기가 오후 불식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상황이 어렵게 됩니다. 가족들의 상황, 이런 인간관계에 갇히게 됩니다.

결혼은 한 웅덩이에서 물 없이 서로 살아야 하는 물고기처럼 계속 점점 고가 많아지는 생활입니다. 결혼을 안 한 사람은 고가 하나이지만 결혼을 한 사람은 고가 계속 많아집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가 적은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덟째 날, 저녁 법문


오늘 법문은 어제에 이어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 중에서 여섯 번째 청정인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행도지견청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다섯 가지 지혜(智慧. pa~n~naa)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어 빤냐(pa~n~naa)를 중국에서 소리나는 대로 음사[音譯]한 것이 반야(般若)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의역(意譯)을 한 것이 지혜(智慧)입니다. 지혜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지혜까지 있습니다. 지혜는 아는 것을 말하며 지혜의 반대는 무명입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선업이고 무명은 불선업입니다.>


다섯 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업(業)에 관한 지혜이고,

두 번째는 선정(禪定)에 관한 지혜이고,

세 번째는 위빠싸나[內觀. vipassanaa]에 관한 지혜이고.

네 번째는 도(道)의 지혜에 관한 것이며,

다섯 번째는 과(果)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업(業)에 관한 지혜입니다.


업(業)에 관한 지혜에서 여러분들은 업에 관한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업에 연관되어 지녀야 할 분명한 앎은 업이 있음을 믿고, 업에 의한 결과를 믿어야 합니다. 업은 과거에 지어놓은 업과 현재에 짓고 있는 업이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결과들은 과거의 업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도라면 과거의 업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현재의 업을 의지해야 합니다. 현재의 업을 지혜와 노력이 함께 지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업과 현재의 업을 믿음으로써 업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있게 됩니다. 좋은 업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업은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좋은 말, 좋은 행동, 좋은 생각들을 내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행(行)은 역시 결과 역시 좋지 않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업과 연관된 첫 번째 지혜를 깜마사까따 삼마디띠(業自性 正見. kammassakataa-sammaadi.t.thi)라고 합니다.

<깜마사까따(kammassakataa)는 업(業)을 자기(自己)라고 하는 업자성(業自性)의 뜻입니다. 즉 업이 자신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삼마디티(sammaadi.t.thi)는 바른 견해[正見]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업은 자신이 행하고 자신이 받는다는 것을 아는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두 번째, 선정(禪定. jhaana)에 관하여 분명히 아는 지혜입니다.


선정에 관한 지혜는 사마타깜마타나(寂止修行. 止業處. samathakamma.t.thaana)를 계속함으로써 색계 선정이나 무색계 선정에 들게 됩니다. 색계 선정을 닦으면 색계에 태어나고 무색계 선정을 닦으면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정삼매에 관한 것을 쟈나 삼마디티(禪定 正見. jhaana-sammaadi.t.thi)라고 합니다. 이는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세 번째, 위빠싸나(vipassanaa)의 지혜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위빠싸나의 지혜를 세분하면 열 가지로 분류합니다.

1)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asana-~naa.na) : 삼마사나 냐나는 현상들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자신의 오온을 무상, 고, 무아로 바로 보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물질의 무더기[色蘊]가 여러분들의 수행 중에 나타나면 무상, 고, 무아로 보셔야 하고 수, 상, 행, 식의 무더기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상, 고, 무아로 보고 숙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2)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udayabbaya-~naa.na) : 우다야바야 냐나는 발생과 소멸[生滅]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인 물질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이처럼 생성하는 것은 소멸한다는 분명한 앎이 생기게 됩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앎이 강해졌을 때 어제 설명한 위빠싸나의 열 가지 번뇌가 나타납니다. 이때 좋아하지 않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3) 사라짐의 지혜(bha!nga-~naa.na) : 방가 냐나는 소멸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보고 알고, 보고 알고 해서 분명한 앎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일어남이 너무 빨라서 사라짐이 더 분명하게 보이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라짐에 대한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면 땅에 닿으면서 없어지듯이 오온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사라짐이 더 분명해 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두려움에 대한 지혜(bhaya-~naa.na) : 바야 냐나는 두려움에 대한 앎입니다. 세 번째 사라짐의 지혜에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에서 사라짐의 두드러짐을 봄으로 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두려움에 대한 앎입니다.


5) 불행에 대한 지혜(aadiinava-~naa.na) : 아디나와 냐나는 불행, 재난, 위험, 허물 등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을 볼 때 사라짐만 보이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난 뒤에 오온에 대한 허물이 보여 불행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전에는 오온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 단계에서는 오온 자체가 위험이고 허물로 보이게 됩니다.


6)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aa-~naa.na) : 닛비다 냐나는 싫어해서 멀리하는 앎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계속 사라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봄으로써 두려움과 위험으로 싫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이 함께 하는 삶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지혜가 생깁니다.


7)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mu~ncitukamyataa-~naa.na) : 문찌뚜깜야따 냐나는 벗어나고자 하는 앎입니다.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다음에 고(苦)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정신과 물질을 보는 것이 싫은 단계에 접어들면 수행이 게을러지고 싫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고(苦)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는데  배가 뒤집혀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강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은 수영을 해서라도 건너편 언덕에 닿도록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강 언덕을 향해 계속 수영을 하며 노력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어떤 도움이 되는 물건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때 하나의 물건이 잡혀서 의지하며 정신없이 가다가 강 언덕에 가까이 갔을 때 비로소 붙잡고 있는 물건을 보니 죽은 개의 시체였습니다. 개의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털은 다 빠져 몰골이 흉했습니다. 이 순간 이 사람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아했던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썩은 개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개의 시체를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지금은 저 강 언덕에 다다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죽은 개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헤엄을 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명과 갈애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무명과 갈애로 받는 오온이 행복한 것이라고,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답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온은 위빠싸나 지혜의 분명한 앎과 함께 보면 결국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정신과 물질의 불행과 허물도 보게 되고 다시 싫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싫어하는 마음이 있지만 내 몸에서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개의 썩은 시체에와 같은 고(苦)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8) 다시 살펴보는 지혜(pa.tisa!nkhaa-~naa.na) : 빠띠상카 냐나는 되돌아 살펴보는 앎입니다. 계속해서 수행이 향상되어 갈 수 있도록 앞의 단계에서 준비를 마쳤지만 오온인 물질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다시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에 대해서 전생에서부터 항상 하는 것이고, 행복하고, 또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행을 통해서 오온이 일어나면 사라지지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이라는 것과,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다시 한번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낮은 물가로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를 하는 중에 몸체가 긴 물고기가 잡혀 건져 올리면서 바로 물고기의 목을 붙잡았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건져 올리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장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면서 건져 올렸지만 장어가 아니고 독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놓고 싶었지만 바로 놓으면 뱀에게 물릴 것을 염려해서 목을 잡고 대 여섯 번 돌린 후에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모르므로 전생에서 오온을 좋고 행복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좋아하고 집착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현재의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다시 무상, 고, 무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9)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nkhaarupekkhaa-~naa.na) : 상카루�카 냐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평등하고 평정한 앎입니다. 대상이 계속 일어나고 알고, 사라지고 알고 하는 것이 이어질 때,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되고, 사라짐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마음만이 연속되는 것이 현상에 대한 평등한 지혜입니다. 일어남이 고(苦)라는 것을 알고, 사라짐이 고(苦)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좋은 것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평정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알고, 사라지고 알고 하는 것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일어남과 동시에 함께 주시하여 알고, 사라지는 것을 사라짐과 동시에 함께 주시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을 때 이것을 주시하는 것과 아는 것이 모두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과, 주시와, 아는 마음은 항상 일치해야 합니다.)


10) 적응의 지혜(anuloma-~naa.na) : 아누로마 냐나는 순서에 맞게 순응하는 앎입니다. 이것을 네 가지 도(道)와 네 가지 과(果)에 대한 앎이기도 합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싫어하는 마음이나 좋아하는 마음 없이 평등심으로 볼 수 있을 때 여러분의 위빠싸나 수행은 커다란 힘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가 도(道)에 다다르는 것도 분명하게 보게됩니다. 그리고 지난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 이어집니다.

적응의 지혜는 지금까지 말한 앞선 아홉 단계와, 마지막 열 번째 도(道)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입니다. 여기까지가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입니다.


이상 열 가지 분명한 앎을 위빠싸나의 열 가지 지혜라고 합니다.

네 번째, 도의 지혜(道智. magga-~naa.na)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에 아는 것이 끝이 있게 될 때에 고(苦)가 끊어지고 궁극적인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평화를 아는 마음을 도의 지혜[道智]라고 합니다. 도(道)에는 고(苦)가 없고 짧은 순간에 궁극적인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아는 것이 끝이 난 이때를 닙바나[涅槃. nibbaana]에 이른 상태라고 말합니다. 닙바나의 상태에서 평화를 맛보는 것이 아니고 닙바나에서 깨어나 평화를 맛봅니다.>


다섯 번째, 과의 지혜(果智. phala-~naa.na)입니다.


과의 지혜는 바른 길에 대한 결과의 지혜로 계속해서 궁극적인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의 지혜는 궁극적인 평화를 한 번 경험하지만 과의 지혜는 두 번, 세 번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 각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도와 과의 궁극적인 평화의 다른 점을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큰 나무 조각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 물을 뿌리면 그 불은 꺼집니다. 이것을 도의 궁극적 평화라고 합니다.


(닙바나에 이르렀다는 것은 탐진치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궁극적 평화라고 말합니다. 이 평화는 스스로가 느끼는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불타던 곳에 불은 꺼졌지만 아직 뜨거운 열기와 연기는 남아있습니다. 다시 물을 두 번, 세 번 더 뿌려서 불이나 열기나 연기를 완전히 없앤 것이 과의 지혜로 나타난 궁극적 평화입니다. 이러한 궁극적 평화를 맛본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아주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일곱 번째 청정인 지견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dhi)입니다. 지견청정은 지혜통찰의 청정으로 열반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곱 가지 청정(계청정, 심청정, 견청정, 도의청정, 도비도지견청정, 행도지견청정, 지견청정)을 완벽하게 얻은 다음 여러분들의 목표인 과의 지혜, 궁극적인 평화, 열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계속 수행을 했으므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12연기의 윤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수행을 통해 12연기의 고리를 자를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남녀 재가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을 보여 주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 길을 끝가지 가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가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수행자는 그 방법을 받아들여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얻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수행자 질문 : 경행이나 좌선을 할 때 한 동작을 움직일 때마다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과 움직일 때의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 우선 매 단계마다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움직임의 특성은 나중에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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