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 저녁 법문
오늘은 처음시간에 법문을 해드렸던 일곱 가지 청정 중에서 계청정(戒淸淨), 심청정(心淸淨), 견청정(見淸淨) 다음으로 4번째 청정인 도의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ra.na-visuddhi)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의 청정은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파악하는 12연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이 창조주가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생긴 것도 아닙니다. 과거에 무명과 업의 형성에 의한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이 '원인이 있는 결과로 이루어진 것(조건을 식별하는 지혜)'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 일곱 가지 청정 중에서 네 번째 청정인 도의 청정을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이 오온이 결과로써 얻어진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여러분의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셔야 합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방법은 첫째는 물질의 무더기[色蘊]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를 알지만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는 무아(無我)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실 때 항상 하지 않는 무상(無常)으로 알고, 고(苦)로 알고, 무아(無我)로 아십시오.
여기서 무상(無常)이란 일어나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바로 고(苦)입니다. 무아(無我)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무더기들도 역시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으로 알아야 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다는 무상(無常)으로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이 항상 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것에서 고(苦)라고 알아야 합니다.
수, 상, 행, 식의 무더기[蘊]를 무아로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보는 것이 많아지므로 오온을 무상으로 보고, 좋은 느낌도 무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봄으로써 모든 것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이라고 알면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우리 몸에서 마음을 원인으로 해서 생긴 물질 역시 깨끗해 질 것입니다. 깨끗해짐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나 좌선 중에 빛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좌선을 하고 있는 방이나 법당이 환해지는 것을 봄으로 해서 이 빛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빛이 나타나는 것을 도와 과를 얻어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하면 이것 역시 갈애이고 이것을 좋아한다면 길을 잘못 들었으며 수행은 점점 힘을 잃을 것입니다.
이 빛을 좋아하게 되면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원하는 마음도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보지 못한다면 수행의 진전이 없게 됩니다.
색깔이나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좋아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빛이 나타난 것을 알고, 그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입니다. 이처럼 수행의 향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첫째는 광명(光明. obhaasa)이나 색깔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타나는 것은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되는 앎[知. ~naa.na]이 생깁니다. 그래서 수행 과정의 모든 것을 일어나고 사라짐을 분명하게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보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쁨[喜], 또는 희열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삐띠(喜. piiti)라고 합니다.
기쁨[喜. piiti]의 종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조그만 기쁨(khuddikaa piiti) : 닭살이 돋는 것 같은 작은 기쁨입니다. 소름이 끼치고 몸에 잔털이 일어서며 머리털이 쭈뼛쭈뼛 거리는 기쁨입니다.
2. 순간적인 기쁨(kha.nikaa piiti) : 섬광이 번쩍이는 것 같은 찰나의 기쁨입니다. 번개 불이 번쩍이듯 하는 순간의 기쁨입니다.
3. 진동의 기쁨(okkantika piiti) : 큰 파도 위에 실린 것 같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거듭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깊숙이 스며드는 기쁨입니다.
4. 도취의 기쁨(ubbegaa piiti) :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큰 기쁨입니다. 바닥에 앉아서 좌선하고 있지만 몸이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느끼는 기쁨입니다.
5. 널리 퍼지는 기쁨(phara.na piiti) : 몸의 부분이 아닌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사방에 가득 찬 기쁨입니다. 몸 전체를 바람으로 가득 채운 풍선처럼, 크게 흐르는 골짜기 물처럼 끊임없이 닿아서 퍼지는 기쁨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기쁨(Piiti) 중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든지 좋아하면 안 됩니다. 어떤 기쁨이라도 좋아한다면 여러분의 수행은 향상이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기쁨이든 무상으로 보셔야 합니다. 기쁨 역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네 번째 나타나는 것은 수행의 향상으로 기쁨 다음으로 평온(平穩. 輕安. passaddhi)입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가볍고 부드러운 평온의 요소들이 나타날 때 여러분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이것 역시 무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뒤따르는 것이 행복(幸福. sukha)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행복함이란 전에는 수행을 하는 것이 괴로웠지만 지금은 수행을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행복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이렇게 행복함을 느낄 때 도와 과의 열반의 행복인가하고 좋아합니다. 이 행복은 도와 과의 열반의 행복이 아니고 위빠싸나 수행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며 이 행복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행복 다음에 나타나는 확신(確信. 勝解. adhimokkha)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믿음이 적었지만 지금은 법의 본성을 보고 느낌으로써 믿음이 강해집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해질 때 이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이런 강한 믿음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셔야 합니다.
일곱 번째로 이렇게 강한 믿음이 생기고 사라진 뒤에는 강한 정진력(精進力)이 생겨 좀더 향상된 노력(努力. paggaaha)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노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계속 보지만 피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한 시간을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두 세시간을 앉아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때 정진력이 강해져서 좀더 수행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덟 번째로 흔들림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는 현기(現起. upa.t.taana)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좀더 강력해져서 모든 대상이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봅니다.
그 다음에 아홉 번째로 평정[捨. upekkhaa]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도록 노력을 해야 보였는데 이 상태에서는 여러분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모든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보여 집니다. 일어날 때 알고, 사라질 때 알고, 일어나면서 알고, 사라지면서 알고, 이렇게 일어날 때마다 알고, 사라질 때마다 알고 하는 것이 계속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것에 대하여 이런 단계를 거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가 나타날 때마다 여러분은 이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지막 열 번째로 이런 것들이 계속 나타나기를 바라는 욕구(欲求. nikanti)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도 이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까지 위빠싸나 수행을 하면서 향상되어 나타나는 현상들 빛, 앎, 기쁨, 평온, 행복, 확신, 노력, 현기, 평정의 아홉 가지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열 번째 바라는 마음인 욕구입니다. 이상 아홉 가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위빠싸나의 열 가지 번뇌라고 합니다. 좋아하면 깨끗하고 바른 위빠싸나가 아닙니다.
이상 열 가지 번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광명(光明. 빛. ochaasa) :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합니다.
② 지(知. 앎. ~naa.na) :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됩니다.
③ 희(喜. 기쁨. piiti) :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깁니다.
④ 평온(平穩. 輕安. passaddhi) :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집니다.
⑤ 행복(幸福. 樂. sukha) :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낍니다.
⑥ 확신(確信. 勝解. adhimokkha) : 강한 믿음과 신심이 생깁니다.
⑦ 노력(努力. paggaho) :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합니다.
⑧ 현기(現起. upa.t.taana) : 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습니다.
⑨ 평정(平正. 捨. upekkhaa) :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됩니다.
⑩ 욕구(欲求. nikanti) :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런 번뇌가 있으므로 해서 여러분의 수행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도 번뇌로 더럽혀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때마다 좋아하지 말고 오로지 알아차릴 대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꼭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위빠싸나 수행과정 중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열 가지 번뇌라고 하는 현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이 현상을 좋아하는 것이 수행을 시들게 만들고 쇠퇴한 위빠싸나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므로 여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번뇌에 빠지지 않을 때 칠청정 중에서 청정의 네 번째 단계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 visuddhi)이 됩니다. 이는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입니다. 빨리어 막가(magga)는 바른 길을 말하며 아막가(amagga)는 잘못된 길을 말합니다. 냐나(~naa.na)는 안다는 뜻이고 다사나(dassana)는 통찰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 visuddhi)이란 말을 설명하면 도의 옳고 그름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고 아는 앎의 청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른 길이란 어떤 대상이든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이란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고 좋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께서는 바른 길과 바르지 않은 길을 분명하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도비도지견청정입니다.
여기까지 칠청정(七淸淨) 중에서 다섯 가지 청정인 계청정(戒淸淨), 심청정(心淸淨), 견청정(見淸淨), 도의청정(道疑淸淨),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을 말씀드렸습니다.
① 계청정이란 말 그대로 계율을 지켜서 계(戒)가 청정한 것입니다.
② 심청정이란 마음이 깨끗한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함으로써 집중(사마디)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집중이 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③ 견청정이란 유신견, 단견, 상견이 없는 청정입니다.
④ 도의청정이란 과거의 원인으로 결과로써 현생의 오온이 있는 것이고, 현생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도의청정입니다.
⑤ 도비도지견청정이란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상의 일곱 가지 청정 중에 앞의 네 가지가 청정해졌다면 작은 수다원(culla sotaapatti)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수다원은 수다원에 들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계가 청정하고, 사마디(집중)가 있으므로 해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고, 12연기를 이해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고, 이 과정을 다 이해한다면 작은 수다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청정에서 네 번째 청정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죽은 후에 최소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은 수다원은 수다원과 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작은 수다원에서는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완전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하게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수다원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작은 수다원에서 우리의 목적인 수다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계속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온의 일어남 사라짐을 보고 알고 없고, 보고 알고 없고를 계속하면 앞에서 말한 빛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나는 앎이나 기쁨, 행복 등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청정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입니다.
수행자가 도비도지견청정을 얻기를 원한다면 노력(viriya), 알아차림(sati), 집중(samaadhi)이라는 세 가지와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수행 중에 지루한 마음, 졸림, 망상 등 어떤 마음이 일어나든지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란 자기의 오온에 연연하지 않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좋아졌을 때 노력이 좋아지고 노력이 좋아 졌을 때 알아차림 역시 좋아집니다.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한다면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집중력이 생긴 후에는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고 사라질 때마다 알아차립니다.
여러분은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남을 알고, 아는 마음이 사라질 때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림으로써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생기고 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림(sati)에는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이 항상 뒤에 따라야 합니다.
수행자가 위빠싸나 수행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과 함께 지혜(智慧. pa~n~naa)가 향상되어 원숙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얻기 원하신다면 정말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수행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마다 굉장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한국 수행자들이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봄으로써 이론이 아닌 실재의 경험으로 생하고 멸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과 집에 돌아가셔서도 계속 이러한 노력이 이어진다면 여러분은 이번 생에서 12연기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계속 법문을 했지만 수행자 모두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분도 계실 것이고, 조금 받아들이거나 또는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가 다 맞습니다. 범부(凡夫)들은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아주 드뭅니다. 이것이 범부의 마음입니다. 범부의 마음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답변도 옳습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본인이 무아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수다원과를 얻기 직전까지는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이지 내가 있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온에 내가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아는 것이 수다원의 도과입니다. 수행자들의 입장에서 이건 단지 오온일 뿐이고 내가 없다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분명하게 받아들이기 원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수다원과를 얻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수다원과를 얻으면 분명해 집니다.
때로는 수행자가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단지 오온일 뿐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수행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일단 무아를 믿고 수행을 계속하십시오. 수행을 계속하다보면 알게 되고, 안 후에는 믿음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믿음보다는 먼저 수행을 통해서 보고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믿음이 아는 것보다 항상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제가 한국에 와서 법문을 한 것을 미얀마에 돌아가서 한국의 아름다운 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행센터에서 한국 수행자들에게 12연기 법문을 하고, 그들이 이해하고, 인터뷰를 하고 등등을 미얀마 신도들에게 말하면서 여러분들은 내 말을 믿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미얀마 신도들은 보지는 못했지만 제 말을 믿고 받아들인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12연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외국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12연기에 대해 믿지 않았지만 법문을 듣고 이해하므로 12연기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믿고 아는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알고 믿는 것은 항상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법문을 했지만 여러분이 직접 수행을 통해서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일곱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12연기 도표 중에서 1번 칸의 행(行. sa!nkhaara)과 3번 칸의 업의 생성[有. kamma bhava]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두 가지 다 업(業)을 형성한다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단지 1번 칸의 행(行)이라고 하는 상카라(sa!nkhaara)는 과거 생에 무명(無明)으로 지은 업이며 3번 칸의 유(有)라고 하는 깜마바와(kamma bhava)는 현생에 갈애와 집착으로 업을 형성하고 있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행과 현재의 행의 차이입니다.
<이번 12연기 법문에서는 편의상 행(行. sa!nkhaara)은 '업의 형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유(有. kamma bhava)는 '업의 생성'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질문 2 :
사람이 육신의 몸을 벗을 때 그 의식이 49일간 또는 7일간 머문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로 머물게 되는지요?
답변 2 :
이런 것은 전래되어온 생각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상좌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이런 말은 정설이 아닙니다. 상좌불교의 교리는 죽을 때 죽는 의식이 바로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죽을 때 믿는 업에 따라 바뀐다는 것은, 평소에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도 죽을 때 아들, 딸, 재산 등에 집착하면서 죽는다면 평소 선행을 한 대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탐심의 악업의 마음과 같은 악도에 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집착이 크면 일정한 곳에 머무는 몸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말하는 중음신은 아닙니다. 영가를 위한 행위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영가를 위해 공덕을 쌓고 그 공덕을 영가에게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질문 3 :
육근의 의(意)의 대상인 법(法)이 물질과 마음을 다 포함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3 :
육근 중 마음의 대상인 법(法)은 너무 넓습니다. 의(意)의 대상인 법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대상인 법은 집이라는 물질이 되고, 또 일어난 마음을 대상으로 만나면 이 마음이 법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의(意)의 대상인 법에는 정신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도 포함됩니다.
질문 4 :
마음을 뜻하는 찌따(citta), 나마(naama), 마노(mano)에 대하여 차이점을 말하여 주십시오.
답변 4 :
찌따(citta)와 마노(mano)는 육근의 마음으로써는 보통은 같은 것으로 봅니다. 다만 18계에서는 마노를 다르게 봅니다. 마노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라고 하는 것으로 생을 연결시켜주는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기 전의 최초의 마음, 본래의 마음을 마노라고 합니다.
나마(naama)는 나마 루빠(naama ruupa)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에서 정신을 나마(naama)라고 합니다. 나마는 마음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수, 상, 행, 식)가 같이 포함됩니다.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心所. cetasika]는 수(受), 상(想), 행(行)으로 항상 식(識. vi~n~naa.na)과 함께 일어납니다.
식(識)은 아는 마음으로 백지이고 마음의 작용[心所]에 욕심이 있을 때 백지인 마음에 욕심이 붙어 욕심을 내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에는 52가지 작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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