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 날, 아침 법문
지금까지 수행에서 대상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해드렸습니다. 수행자들께서는 이해가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남은 시간에 꼭 알아차리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온의 일어남 사라짐을 본 수행자께서도 이것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십시오.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싫어하게 될 만큼 알아차리셔야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만큼 여러분이 열반에 가까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상 하나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순간순간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바로 그 길이 열반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오늘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홉번째 날, 저녁 법문
오늘 법문에서는 범부(凡夫)와 수다원(須陀洹. 預流. sotaapanna) 도과(道果)를 성취한 성자(聖者. ariya)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오온(五蘊)이 어떻게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온[色, 受, 想, 行, 識의 무더기]이 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먼저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과 대상인 모양이 부딪쳐서 이것을 아는 마음인 안식(眼識)이 생깁니다. 아는 마음이 생길 때는 여러분의 눈과 모양이 물질의 무더기[色蘊]입니다. 안식이 일어날 때의 식(識)은 오온의 무더기 중에서 다섯 번째인 식의 무더기[識蘊]입니다.
여기서 모양이 좋고, 싫고 하는 느낌이 있는데 느낌은 수(受)의 무더기[受蘊]입니다. 보이는 대상이 남자, 여자, 볼펜 등등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것은 상(想)의 무더기[想蘊]입니다.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보게 되는데 여기서 원하는 마음이 행(行)의 무더기[行蘊]입니다. 이처럼 안식이 생길 때 오온의 다섯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의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이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육경(六境)과 부딪쳐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육식(六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수행자가 눈[眼]과 모양이 부딪쳐서 아는 마음[眼識]이 생겼을 때, 그것은 내가 보고,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오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내가 포함되지 않는 오온의 작용일 뿐입니다.
귀[耳]와 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듣는 것입니다. 귀와 소리는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소리를 듣고 아는 마음[耳識]은 식의 무더기[識蘊]로 앞서와 똑같은 과정입니다.
냄새와 코[鼻]도 마찬가지로 물질의 무더기[色蘊]입니다. 냄새를 맡고 아는 마음[鼻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다시 이 냄새를 좋고, 싫고로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지각하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이고, 냄새를 맡기를 원하여 냄새를 맡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혀[舌]와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혀와 맛은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맛을 아는 마음[舌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맛을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아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이고 먹기 위해 입을 움직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닿음은 몸[身]과의 닿음입니다. 몸이 있으므로 대상과 부딪치는 것입니다. 몸과 와서 닿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닿음을 아는 것[身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며, 닿음의 촉감이 좋고, 싫고를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이며, 무엇이 닿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입니다. 닿도록 몸을 움직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다음은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法]입니다. 마음은 정신의 무더기[識蘊]입니다. 마음은 물질과 다르게 아는 것이 특성이지만 우리의 심장 어느 부분의 물질에 의존해서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감각기관의 하나로 봅니다.)
마음의 대상인 법(法)에는 물질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있고 거기에 마음의 대상이 부딪쳐서 생각하고 망상을 할 때 이것을 아는 마음[意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그것이 좋고, 싫고 하는 느낌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알아보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저나 여러분들께서나 마음이 한번 일어날 때마다 이 오온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오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온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단지 오온의 작용일 뿐이라고 여러분께서 알고 보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인(聖人)의 첫 번째 도과(道果)인 수다원에 드신 분의 마음가짐과 범부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범부로 죽게 되면 다시 인간계인 범부로 태어나거나, 천상에 태어나거나, 사악도(四惡道)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를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첫 번째 도인 수다원에 드신 분들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최소한 사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는 좋은 곳으로 가도록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범부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범부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항상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도 항상 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이나 성인의 대열에 들어선 분들에 대한 믿음도 있다가 없다가 합니다.
부처님과 법과 성인에 대한 믿음이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고 또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범부는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바꾸기도 하고, 사업에 유리해서 종교를 바꾸기도 하며, 좋아하는 사람에 따라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바꿀까요? 그것은 첫 번째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가 없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오계를 항상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키다가 때로는 지키지 않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최소한 꼭 지켜야 하는 오계를 자기의 몸을 보신하거나, 사업, 또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계를 범하게 됩니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살생과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다는 것, 부정한 성 관계를 맺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들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는 믿음도 항상 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는 것도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가야 할 곳도 항상 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다원에 드신 분은 범부보다 믿음이 훨씬 강하고 오계를 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몸보신이나 사업이나 애인 때문에 오계를 범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과 승가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인의 대열에 드신 분들은 종교를 바꾸지 않고 항상 오계와 함께 합니다. 절대 오계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도 범부에서 성인의 대열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갈곳이 정해지지 않은 항상 하지 않는 것에서 갈곳이 정해진 항상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인의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모양이 더 예뻐지고 뚱뚱한 것이 날씬해지고 하는 외적인 모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즉 외적인 변화는 없지만 마음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때로는 수행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만약 수다원과를 얻는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수다원에 든다는 것은 유신견(有身見)과 같은 잘못된 견해와 회의적 의심이 제거되고 다른 것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딸을 낳고 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부처님 당시에 위빠까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에 수다원에 들고 그 후에 결혼을 해서 아들 딸도 많이 낳았습니다. 설령 수다원을 얻었다고 해도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인가 하면 수다원에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갈애가 다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애는 사다함에 가서 거의 제거되고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제거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범부와 성인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법문을 듣고 내가 아직 범부인가? 아니면 도와 과에 가까운가? 한번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범부에게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자만심이 있으며 자주 이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수다원에 든 성인의 대열에 드신 분들도 때로는 이런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원하는 마음은 강하고 깁니다. 수다원에 드신 분은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곧 사라집니다.
범부는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다원 역시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부가 화를 냈을 때는 강하고 지속되는 시간이 깁니다. 그러나 수다원이 된 성인은 화를 내고 금방 알아차리고 화를 낸 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곧 제거됩니다.
범부 역시 자만심을 갖고, 수다원을 얻은 분도 자만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욕심이 났을 때 이 욕심이 지속되는 것이 하루인가, 한 달인가, 일년인가 생각해 보고 길다면 틀림없이 범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원하는 마음이 계속 지속됩니다. 어떤 범부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불만스러울 때 다시는 이 사람을 이생에서도 안 보고 다음 생에서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범부입니다.
성인 역시 불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불만스러워 화가 나지만 화내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불선(不善)한 마음임을 알아서 불만이나 화를 계속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부는 계속 불만이나 화가 생기고 또 생기고 하지만 성인은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수행자들께서는 좋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더라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지 마십시오.
두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성인이나 범부나 모두 불선한 행을 원인으로 불선업을 짓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불선업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불선업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범부는 욕심이 생길 때 계속 그 욕심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성인은 욕심이 일어났다가 제거됩니다.
범부는 나를 위해서 꼭 필요하고, 내 가족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어서 얻으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원하는 마음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도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사업을 하지만 나와 나의 식구 등 나라고 하는 것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성인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려는 생각하면서 욕심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께서도 욕심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나고 자만심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범부는 믿음이 있다가 없고 항상 하지 않지만 성인의 믿음은 항상 하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범부들은 불교의 수행을 통해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적어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며 수행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불교를 통해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항상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항상 하지 않은 것은 범부이고, 믿음이 항상 하는 것은 성인입니다.
네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범부와 성인 모두 불선업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불선업은 사악도에 떨어질 만큼의 불선업이 아닙니다. 욕심이나 화를 내거나 자만심 정도의 불선업입니다.
하지만 범부는 어떤 불선업을 행하고도 제거하길 원하는 마음도 없고, 또한 어떻게 제거할지 방법도 모릅니다. 불선업을 행하므로 다음에 어떤 결과를 갖게 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계속 불선업을 행하기 때문에 범부라고 합니다.
성인은 욕심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화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자만심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등등 이렇게 무엇이나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불선업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예불을 하고 수행을 하고 보시를 행하면서 일어난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께서도 욕심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까지, 화를 내는 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불선한 행과 불선한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예를 들면 어린이가 뜨거운 것을 모르고 손으로 집었을 때, 뜨거운 것을 알면 바로 놓아버립니다. 이와 같이 성인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고 놓습니다. 그래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성인도 범부와 같이 사업을 하고, 사회적인 일과 의무도 하고, 자신의 건강과 자신의 삶을 위한 사업도 합니다. 이처럼 범부나 성인이 똑같이 일을 하지만 일하는 과정이나 일을 대하는 마음이 다릅니다. 범부는 인간관계, 사업,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계율을 상관하지 않고 등한시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친구들과 관계에서 바른 것을 바르지 않은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곡사야도께서는 범부가 1000원을 벌면 1000원어치만큼 사악도에 떨어질 확률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성인은 인간관계, 사업, 건강에 관한 어떤 일을 하던지 항상 계율과 함께 합니다. 인간관계나 사업에서 절대 계율을 어기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미 소가 새끼인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고 있는데, 어미 소는 자기 먹을 풀을 뜯으면서도 송아지가 다른 곳에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인간관계, 사업에서 계율을 어기지 않고 계율과 함께 하는 방법을 찾아서 합니다.
여섯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이 다른 점은 범부나 성인 모두 다 법문을 듣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똑같이 듣지만 듣는 자세나 듣고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범부는 법문을 듣지만 마음은 집으로, 사업으로, 아들, 딸, 남편, 아내에게로 갑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법문을 듣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데 범부는 대상 하나에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법문을 들 때 마음을 법문을 듣는 것에만 기울이고, 이 법이 나에게 이익이 있으므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집중하여 법문을 듣습니다.
일곱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모두 법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범부는 금방 듣고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법문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므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대해 고맙고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법문을 해 주신 분에 대해 고마운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서 집에 가서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범부를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범부는 법문을 듣고 알아지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이익이 없고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인은 법문을 듣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전에 알았던 것이 좀더 분명해지고, 그러므로 기쁨과 강한 믿음이 생기고 불, 법, 승 삼보에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이 함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선한 마음이 생기므로 해서, 법문을 듣고 집에 돌아갈 때 기쁨과 희열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 생기기도 하고 기쁨도 점점 많아져 좋은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성인의 마음입니다.
수행자들께서 수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무슨 법문을 들었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여러분들이 들은 법문을 이 센터에 다 놓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수행자들께서는 법문을 듣고 전에 알고 있던 것에 대해 더 확실하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아야 할 대상을 볼 수 있는 만큼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도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성인에 들어선 스님들에 대해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법문을 해 주신 분과 법문 자체에도 고마움을 가지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이 다른 점 일곱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들께서 자신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범부인가? 수다원에 든 성인인가? 아니면 수다원의 성인에 가까운가?
본인이 범부라고 생각되면 좀더 성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인의 대열에 가까운 분이라면 성인의 대열에 들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가 수다원이 되었을 때만이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인의 대열에 들어서길 기원하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홉번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인연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했을 때 인간관계를 갖기 힘들고, 또 다가오는 인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요?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우리에게는 세속적인 일과 출세간적인 일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출세간 적인 일이고, 밖에 나가 생활하는 것은 세간적인 일로 인간관계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인간관계에서 다가오는 인연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항상 하지 않으므로 결과 역시 항상 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질문 2 :
수행 중에 보고 있는 대상을 사라질 때까지 보아야 하는가요? 만일 더 큰 대상이 나타나면 대상을 바꾸어야 하는지요? 그리고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고 그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보아야 하는지요? 아니면 마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생각을 끊어야 하는지요?
답변 2 :
이 상태에서 처음 보는 대상을 계속 볼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십시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대상이 너무 강해서 계속 알아차릴 수 없다면 할 수 없지만 되도록 하나의 대상이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질문 3 :
초보 수행자로서 사회생활에 몰두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미약해져서 자신이 경험한 정도까지 회복하기 힘듭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단계만큼 공부가 되어야 매일 이어지는 수행이 없이도 최소한의 자기 수준을 유지 할 수 있는지요?
답변 3 :
수행자들께서는 밖에서도 자신과 알아차림을 구분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하면 알아차림이 강해집니다. 물론 일하면서 놓치게 되면 놓친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림을 계속하십시오.
질문 4 :
매일 수행을 하면 좋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할 때 보편적으로 수행 공백기가 얼마까지 괜찮을까요?
답변 4 :
도와 과를 얻기 전까지는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력의 유지가 어렵습니다. 수행과 수행사이의 공백기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출가하신 스님들은 재가자보다 생활이 단순해서 수행력이 재가자보다 길게 이어지지만,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재가 수행자들은 수행력을 유지하는 기간이 아무래도 짧아집니다.
<질문에 답변을 하신 후에 참회의 말씀을 하심>
그간에 제가 법문을 할 때 여기가 한국이지만 한국사람, 미얀마사람이라는 구별 없이 미얀마에서 법문을 하는 것처럼 똑같이 법문을 했습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여러분들의 관습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신 한국 수행자들은 미얀마의 한 종족인 샨족(중국 국경과 닿아있는 부족. 얼굴 모양뿐 아니라 음식도 비슷함)과 피부색이나 모습이 비슷합니다. 제가 법문을 할 때 샨족에게 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나 행동들이 한국의 문화와 관습과 차이가 있더라도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용서하신다면 모두 함께 '사두! 사두! 사두!'를 하십시오.
일동 : 사두! 사두! 사두!
여러분이 제 허물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으므로 저도 여러분의 허물이나 부족함을 다 용서하겠습니다. 모든 수행자가 도와 과를 얻어 꼭 열반을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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