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생사문제(生死問題)와 선수행(禪修行) - 무여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5. 7. 13:54
 

 

 

생사문제(生死問題)와 선수행(禪修行) - 무여스님


오늘 법문은 생사문제와 선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생사문제와 선수행’은 선수행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심(發心)하는 것을 수행의 시작이라 한다면 구경(究竟)에는 깨달음을 얻어 생사자재하며 생사해탈하는 것이 수행의 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인생(人生)에 있어서 가장 큰일이 무엇일까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큰일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사문제보다 인생사에서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하며, 내가 있어야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 없는 세상이 무슨 뜻이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문제를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고 멸(滅)하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창공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은 무수한 습기(濕氣)가 모여서 한 조각의 구름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듯이 태어나는 것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즉 흙과 물과 불기운과 바람기운이 일시적으로 인연이 되어 계합(契合)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예쁘장한 얼굴과 애지중지하는 몸뚱어리가 그 흔한 흙과 물과 불성분과 바람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여러분의 육신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좋다는 것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지만 그 구성요소와 인연(因緣)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서 허황된 생각과 전도(顚倒)된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인연으로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결국은 흩어지고 맙니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입니다.

이것이 생멸(生滅)의 법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경사 났다고 하고, 축하하며 잔치도 벌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어났다 해서 너무 기뻐할 것도 없고 죽었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출발이요, 괴로움의 시작이고 죽는 것은 또 다른 출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이 몸뚱이를 위하여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은 생활환경이 좋으니까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류만 찾으면서 초호화판으로 흥청망청 살아간다고 합니다.

피부미용에 좋다고 해서 우유로 목욕을 하기도 하고 금이 건강에 좋다고 소주에 타마시기도 하고, 곰쓸개가 정력에 좋다고 하니까 외국까지 가서 밀렵하여 먹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설사 재벌이라 할지라도 아끼고 검소하게 살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육신은 춥고 배고프게 다스려야 복(福)이 쌓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자비(慈悲)와 보시(布施)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희생과 봉사의 미덕(美德)을 쌓으며 어질고 착하게 살아가면 선업(善業)이 저절로 쌓일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면 인과(因果)의 이치를 분명히 알아서, 선(善)한 인(因)을 심으면 선한 결과가 되고 악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가 달린다는 인과의 법칙은 조금도 헛되지 않아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받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여법(如法)하고 진실하게 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멸(滅)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이 떠가다가 바람이 분다든가 태양이 솟으면 사라지듯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몸뚱이를 보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아끼는 육체이지만 여러분이 죽으면 그 육체는, 살이나 뼈나 힘줄, 뇌, 골수 등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큰 흙덩이가 되었다가 점점 작아졌다가 결국은 먼지로 변하고 그것마저 바람에 날려 흔적없이 사라집니다.

침, 콧물, 피, 가래, 눈물, 오줌 등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서 그 물도 증발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더운 기운과 힘의 기운은 불의 성분과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참으로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것이 육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처럼 확실하게 오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 있는 물체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언젠가는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도, 이 순간에도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흔히 노인들에게 하는 인사말 중에서 ‘밤새 안녕하시냐?’고 묻습니다.

그 말은 ‘밤 사이 죽지 않고 잘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노인 뿐만 아니라 팔팔하고 씩씩한 젊은이도 숨 한 번 들이켰다가 내쉬지 못하면 내생(來生)입니다.

죽음은 영웅호걸이나 천하장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괴롭고 가장 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하고 ‘죽은 석숭(石崇 : 중국 진나라 때 부자)보다 산 돼지가 낫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생사문제,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인류의 가장 큰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태자 시절 사문(四門)을 유관(遊觀)하고 크게 발심합니다.

하루는 동문(東門)을 나가서 얼굴은 우글쭈글 잔주름이 가득하고, 허리는 활처럼 굽고, 머리는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노인을 보게 됩니다.

다음날은 병들어 피골이 상접하여 괴로워하는 병자를 보고, 그 다음에는 죽은 사람의 비참한 시신을 보고 인생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렇게 늙고 병들어 죽음을 면할 수는 없을까?’, ‘어떻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큰 괴로움을 면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괴로워하다가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코자 출가하였다고 하여 위대한 출가라고 합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천하의 대부분 출가 수행자들도 생사문제로 고민하다가 세속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생사문제야말로 불교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사문제는 어떤 외부의 힘이나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서도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세속적인 가치에 의한 권위나 논리에 의해서도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이나 도움을 통해서 역경(逆境)을 해탈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오직 우리의 주인공인 마음을 닦아야 하며, 수행이 깊어서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에 도달하여 항상 홀로 뚜렷하여 아주 맑고 고요한 경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최고의 수행법은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요즘 항간에서는 화두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수행법이 유행하고, 또 화두선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두선이 좋다, 최고의 수행법이다고 하는 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바로 부처의 경계이고, 궁극에는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화선의 우수성은 역대 조사(歷代祖師)와 천하의 선지식(善知識)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선수행을 잘 하여 생사문제를 잘 해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선(禪) 하기 전에 마음을 고요히, 아주 고요히 하십시오.

마음을 고요히 하려면 선(禪)할 때만이라도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만사를 쉬고 일체 모든 것을 놓으면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참선하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텅텅 비우고 쉬어야 합니다.

가령 천리 밖에서 늙은 부모가 몇 십 년 만에 면회를 왔더라도 무관심하며, 옆집에 불이 나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불길이 번질 것 같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옆자리에 앉은 도반이 사경(死境)을 헤매더라도 무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쉬고 비우고 놓으면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번뇌망상이 많고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일수록 무섭게 비우고 지독하게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비우고 쉬어서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자세가 편안한 상태에서 화두를 참구합니다.

참선자는 화두 드는 방법을 확실히 알아서 참구법(參究法)에 대해서는 조금도 망상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화두 참구의 요령은 ‘이 뭣꼬?’, ‘어째서 무(無)라 했을까?’,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을까?’ 간절하게 의심을 일으켜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참구해 가는 것입니다.


첫째, 화두는 진심으로 발심(發心)하여 간절하게 들어야 합니다.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입니다.

‘보리를 꼭 이루고야 말겠다.’ ‘내 주인공인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보아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하고 철저한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입니다.

참선자는 이 일이 가장 큰일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일뿐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만은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공부야말로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화두도 진의(眞疑)를 일으키느냐, 못 일으키느냐,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는 참선자의 뜻과 정성에 달렸습니다.

화두 참구는 참으로 절실해서 하고 싶게 해야 하고 진심(眞心)으로 해야 합니다.

고인의 말씀에 “화두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발심 있는 곳에 화두 있고, 화두 있는 곳에 발심 있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화구가 안 된다. 참선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발심이 안 된 상태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발심자(發心者)라면 어찌 화두 안 되는 것을 고심할 것이며, 어찌 깨치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며, 어찌 생사문제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일을 해마치는 것은 출가 재가에도 있지 않고, 초학 후학에도 있지 않으며, 여러 생의 훈습(薰習)에도 있지 않습니다.

갑자기 순간 깨치는 것은 오직 당사자의 분명한 결정적(決定的)인 포부에 있습니다.

공부인은 ‘오직 이 일뿐이다, 이 일은 반드시 언젠가는 꼭 해마쳐야 될 일이다.’라는 결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생사가 두렵고 내생이 두렵거든 지금 이 순간이라도 진정으로 발심하십시오.

그리하여 화두를 간절히 들어가십시오.

옛 선사의 말씀에 “화두 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 자면 족하다.”고 하였고 어떤 도인은 “참선하는 데는 간절함 한 마디가 요긴하다.” 하였고, 어떤 선지식은 간절 절(切)자를 이마에 써붙이고 다녀라.” 하였습니다.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두는 참으로 간절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하게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간절하게 든다는 것은 안 해서는 안 될 것처럼, 반드시 해야 될 것처럼,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참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 비유하기를 며칠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심하게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칠팔십된 노파가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 생각하듯이, 두세 살 먹은 어린 아이가 가출한 어머니만 생각하듯이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간절하게 의심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화두 공부는 오직 간절하게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서도 선 줄 모르며, 앉아도 앉은 줄 모르고, 수백 가지 소리가 요란해도 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으면서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화두가 간절히 들리면 선악(善惡)의 망상을 떠나게 되고, 해태와 방일이 있을 수 없으며 무기(無記)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마(魔)가 들어올 틈도 없으며, 분별심(分別心)도 나지 않아서 외도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하면 어찌 공부에 상응(相應)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어찌 고인의 경계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어찌 생사를 초탈하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이렇게 간절함이 있어야 진의가 돈발(頓發)하기 쉽고 의단이 독로(獨露)하여 일초즉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참선자여, 진심으로 발심하여 화두를 생명으로 삼고 오직 간절하게 참구하십시오.

화두가 간절하지 못하면 화두 참구가 아니고, 화두의 간절함을 모르면 공부인이 아닙니다.


둘째, 화두는 열심히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듯이 해야 합니다.

화두 참구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 능력 이상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라.

정성이 감응(感應)하면 능히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하시며 “지극한 마음으로 하라.

지극한 마음으로 하면 능히 불과(佛果)를 성취한다.”라고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도(道)를 구하고 마음을 닦는 데는 지극한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귀중한 것은 성실한 노력뿐이다’고 했습니다.

화두 참구는 오직 그것뿐이듯이, 안 하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듯이 하면 의외로 쉽게 되는 공부이기도 합니다.

화두 참구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 언제 어디서든지 한결같이,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부모의 상(喪)을 당한 듯이 오직 화두만 들어가야 됩니다.

한 번 한 번을 들 때마다 처음이고 마지막이듯이,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쓰듯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참선자는 신변이나 생활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화두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는 공부인이 아니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화두보다 급한 일이 있으면 참선자가 아니고, 화두 이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거나 흥미를 가지면 발심자(發心者)가 아닙니다.

공부인은 어떤 극한상황에 놓이더라도 화두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가령 물에 빠진 사람도 살아나올 생각보다는 화두를 먼저 들어야 하고, 불에 타죽을 처지에 있더라도 탈출할 구멍을 찾기보다는 화두를 먼저 지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괴로움의 상태에서도 화두에 먼저 의심을 일으켜야 하고, 죽어가면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고 ‘이 뭣꼬’ 하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합니다.

참선자는 화두 참구를 무엇보다도 더 지극하게 생각하고 더 대단하게 여겨서 화두에 목숨을 바치듯이 해야 합니다.


셋째, 화두 참구는 한결같이 끊임이 없이 하십시오.

참선자는 항상 일여(一如), 여여(如如)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화두 참구는 한결같이, 물 흐르듯이, 쉼이 없어야 합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잘 때까지, 언제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화두로 가고 화두로 오고 일을 하든 일을 안 하든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고요한 곳에서나 화두에 간단(間斷)이 없고 쉼이 없어야 합니다.

화두 참구는 간단이 되면 화두 공부가 아닙니다.

참선은 잠시도 중단이 없어야 합니다.

중단했다면 화두 참선이 아닙니다.

화두는 잠깐도 여읠 수 없습니다.

여의었다면 선(禪)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고인은 ‘닭이 알을 품듯이 해라’ 하였습니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거의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 봐도 알을 품고 있습니다.

닭은 더위를 많이 탄다고 합니다.

둥지에 앉아 있으면 더 더위를 느껴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듯이 가쁘게 숨을 쉬면서도 내려오지 않다가 배가 몹시 고프거나 목이 심하게 마를 때 잠깐 내려왔다가 얼른 올라갑니다.

왜 그렇게 알을 품을까요?

그렇게 품어서 21일간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병아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선자도 닭이 알을 품어서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듯이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가 없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참선자가 화두가 없으면 죽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참선자는 화두를 열 번 들어서 안 되면 백 번 들고, 백 번 들어서 안 되면 천 번 만 번 들어서 깨칠 때까지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들어가야 합니다.

참선자는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놓치지 않고 한결같이 끊임이 없이 들어가는 것이 향상(向上)하는 길입니다.


이상과 같이 화두 참구의 요령은 진심으로 발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듯이, 쉼이 없이 끊임이 없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화두 참구의 요지(要旨)는 참으로 대단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화두 참구는 단순한 화두 참구라는 생각을 말고, 내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법이라 생각하고, 내가 가장 괴롭고 비참할 때, 내가 죽어서 시체로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이 참담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속수무책일 때처럼, 오직 나를 살릴 길만을 생각하듯 참구해야 합니다.

화두 공부, 마음공부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상의 보통일은 대충하고 흉내만 내듯이 해도 됩니다.

씨앗만 뿌려 놓으면 그렇게 정성껏 관리 안 해도 촉이 틉니다.

가게도 문만 열어놓으면 손님이 옵니다.

책도 정독을 안 해도 책장만 넘기듯이 건성으로 해도 아는 것이 생깁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할 때는 정성껏 하고,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듯이 해야 합니다.

아주 공부에 폭 빠지듯이, 흡사 공부에 미친 사람처럼 참으로 애쓰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쉽게 바로 될 수가 있는 공부가 이 공부입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애쓰면 의외로 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안 되는 화두라도 애쓰다가 보면 어느 날 화두가 간절해질 것입니다. 화두를 간절하게 들지 않아도 화두가 간절해지는 순간 화두에 힘을 얻습니다. 문득 화두에 힘을 얻을 때는 놀라기도 하고 목이 콱 막히는 듯하기도 합니다.

화두에 힘을 얻으면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며, 의심치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며, 조금도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한결같이 들립니다. 그러면 놓으려야 놓을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고, 쫓아도 달아나지 않고,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항상 소소영영하며 분명하게 현전(現前)합니다.

이와 같이 화두에 의심이 간절하여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진의(眞疑)가 난다, 참의심이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화두가 제대로 되면 몸은 긴장된 것 같이 꼿꼿하게 앉게 됩니다. 앉은 자세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도 법당에 계신 부처님처럼 딱 버티어지고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힘차게 앉게 됩니다. 눈매는 빛이 나고 얼굴은 엄숙하며 경건해집니다. 입은 굳게 다물어지고 혀는 꼬부라지는 것 같고 소리가 조여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화두가 잘 되어도 조금도 다른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화두가 잘 된다고 기쁜 마음을 내지도 말고 화두에 득력(得力)을 했다 해서 즐거워하지도 말고 늘 현전한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화두가 잘 될수록 아주 담담한 마음으로 화두만 지극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참선자는 오직 깨달음을 철칙으로 삼고 의단(疑團)을 크게 일으켜서 의단을 깨뜨려서 귀결처(歸結處)를 찾는 데만 용맹심을 내야 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할 때이고, 죽자살자 화두를 물고 늘어질 때입니다.

방선(放禪)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으며 공양시간이 되어도 무심하며, 취침시간이 되어서 대중은 달콤한 잠에 빠졌더라도 잠도 자지 말고 오직 화두 화두 화두뿐이어야 합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졸음도 없고 망상도 없으며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용맹스럽게 화두만 들어가야 합니다.

이럴 때는 신변에 아주 중요한 일이나 급한 일이 아니면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주위도 조금도 의식치 말고 사람노릇도 하지 말고 화두만 끈질기게 고집스럽게 들어가야 합니다. 이때는 마치 화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흡사 화두에 미친 사람처럼 물고 늘어지듯이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참선자는 한 번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놓치지 않고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향상(向上)하는 길입니다.

대부분의 참선자가 대단한 마음을 내서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지 못하니 몇 년을 하고 몇 십 년을 해도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별 진전이 없어 괴로워합니다.

참선자는 기회가 오면 무섭게, 지독하게 정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때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서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고봉 원묘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학인(學人)이 공부하는 것은 한 개의 기왓장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멈추지 않고 곧장 바닥으로 가라앉듯이 하는 것이 좋다. 화두로 볼 때는 일구(一句) 화두를 가지고 그 밑바닥까지 보아야 한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곧장 화두를 파고들어가서 그 밑바닥을 간파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의 화두를 들어 두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7일이 되어도 도를 깨치지 못한다면 내가 영원히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떨어지리라.” 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화두 참구를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해야 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할 때는 쥐구멍 앞에 가서 딱 버티고 앉습니다. 보통 때는 영리한 놈이라 사람이나 저보다 큰 짐승이 나타나면 흘깃흘깃 눈치를 보며 피하지만 쥐를 발견하면 주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쥐구멍만 노려보다가 쥐가 나오면 잽싸게 나꿔채듯이 잡습니다. 그렇듯이 참선자도 의정(疑情)이 일어나면 주위에도 신경 쓰지 말고, 망상도 피우지 말고, 산란과 혼침에도 빠지지 말고 오직 화두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화두를 놓치지 않고 고양이가 쥐 잡듯이 의심을 지어가면 점점 힘차게 들리는 기운을 느낄 것이고, 의정이 불덩이처럼 확확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화두가 점점 깊어지고 순숙(純熟)해지면 크고 뚜렷하게 되어 하나의 의심뭉치, 의단(疑團)이 됩니다. 이 의단,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오롯이 들리는 것을 의단독로(疑團獨露)라고 합니다.

의단이 독로하면 화두가 흡사 큰 바람에 산불이 번지는 것 같고, 순풍에 돛단배와 같아서 순일한 공부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힘차게 들립니다.

이 시절에는 화두가 모든 생활 속에서도 조금도 어둡지 않고, 하루종일 화두가 간단없이 여여(如如)하며, 깊은 꿈속에서도 여여하게 들립니다.

더 애쓰다가 보면 화두가 점점 순숙되어서 몸과 마음이 비고 단박 움직이지 아니하여 마음 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홀연히 꿈을 깬 것 같고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보는 것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되면 나와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 즉 하나의 큰 의단이 됩니다. 이 의심덩어리는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고, 방향도 없는 온통 의심덩어리일 따름입니다. 이 의심덩어리가 삼천대천(三千大天) 세계에 꽉 차게 해야 합니다.

이 타성일편은 깨침으로 가는 길입니다. 옛 어른은 “타성일편을 못 깨칠까 걱정하지 말고 타성일편이 안 되는 것을 걱정하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마음 쓸 곳이 없는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경지’, 만길 낭떠러지에 이르면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덜컥 걸려들어가듯’ 부지불식간에 깊은 선정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입이 아프도록 꾸짖으면서 “네가 비록 억만 겁토록 여래의 비밀묘엄한 금옥(金玉)같은 말씀을 외워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인 선정을 익히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화두가 깊은 잠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아아!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구나, 인간의 본성은 죽거나 없어지지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정도만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던 사람도 담담해지고 자신만만해집니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스님은 “이 경지, 오매일여의 경지는 분골쇄신(粉骨碎身)해도 스승의 은혜는 다 갚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께서도 꼭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화두에 진의가 나서 의단이 독로하여 성성하고(또렷또렷하고) 적적하게(고요하고 고요하게) 들리더라도 성성(惺惺)과 적적(寂寂)이 균형을 이루어야 깨달음이 가깝습니다. 성성과 적적 한 상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성성한 상태가 지나치면 산란(散亂)한 상태에 빠지기 쉽고, 적적한 상태에 떨어지면 화두를 놓쳐서 무기(無記)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화두는 성성에도 빠지지 말고, 적적에도 떨어지지 않게 적당히 알맞게 들어가야 합니다.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면 오묘한 법열(法悅)을 느낍니다. 그것은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대단한 기분입니다. 어떤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아 고함을 치기도 하고 자신을 다스리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 기분의 극치(極致)가 바로 극락입니다. 극락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극락까지는 못 가더라도 오묘한 기분은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경지(境地)를 체험하면 ‘선(禪) 수행은 반드시 해야 한다. 꼭 해야 된다. 인생 최고의 길은 오직 이 길뿐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참행복은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을 맛보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법열을 느낄 때도 들뜨거나 기분에 빠지지 말고, 집착도 말아야 하며, 잘 될수록 더 주의하고 조심하며 더 담담하게 오직 애쓰고 애써야 합니다.


또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들리면 몸은 가볍고 편안하며 거뜬해집니다. 그러면 지혜가 생깁니다. 그간 이해가 안 되던 경전이나 어록을 보면 몇 구절 이해가 되고 거침이 없이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아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어디 가면 법문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합니다. 조금 지혜가 생겼다 하더라도 ‘내가 깨쳤다’, ‘내가 해마쳤다’는 생각을 절대 말고, 그럴수록 더 지극하게 밀고 나가야 참으로 깊은 경계(境界)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화두가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계를 지나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眼目)이 트이고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느낌이 있더라도 절대 즐기거나 빠지지 말고 그럴수록 열심히 하고 더 애써야 합니다. 대부분의 참선자가 신통한 경계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신통한 경계는 말변사(末邊事)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엽적인 일이고 본분사는 아닙니다.


깨달음, 확철대오는 반드시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선정에는 들어야 하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투과해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해야 드디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생사자재(生死自在),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마음대로 한다, 생사를 벗어난다, 이런 말은 선가(禪家)에서만 쓸 수 있는 대단한 언어입니다. 불교의 이상은 생사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에 자재한 옛 어른들의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사 중에서 최초로 신비한 모습으로 입적한 이는 선종(禪宗) 3조 승찬(僧璨) 대사입니다. 대사는 법회를 열었던 큰 나무 밑에서 수많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합장하고 원적(圓寂)에 들었습니다. 이 원적의 모습이 후대 선사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선불교가 중국 천지에 활짝 꽃피운 당․송(唐宋) 시대에는 기라성 같은 무수한 도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기서 배출되었는데 이때 선사들은 천화(遷化)한 모습도 여러 가지로 신비하고 기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어떤 스님이 입적하시면 문상 간 객스님은 첫마디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돌아가실 때 앉아서 갔는지, 서서 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세속의 보통사람의 죽음처럼 인사불성인 상태로 괴롭게 갔는지를 묻고 그 스님을 평가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대단한 선사는 몸을 바꾸기 며칠 전에 “내가 모일 모시에 가겠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기의 의지를 말한 것이고, 둘째는 자기 생명의 시한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 즉 나는 모일 모시까지만 살다가 죽겠다는 선사가 생사를 자재한 선사라 할 수 있고, 내 생명이 모일 모시까지밖에 안 된다는 도인은 자기 의지를 말한 선사보다는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들 생사를 자재한 선사들의 대부분은 좌탈입망(坐脫入亡), 즉 앉아서 가셨고 어떤 선사는 입탈(立脫)로 가신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스스로 자화장(自火葬)하여 가신 선지식도 있고, 미리 관을 짜달라고 해서 관 속에 들어가 죽기도 하고, 문도들에게 부도를 만들라고 하여 다 조성하였다는 전갈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영원히 입적하신 도인도 있습니다.

선사 중에는 참으로 대단한 도인도 있었습니다.

관계 지한(灌溪志閑) 선사는 당나라 건녕 2년 5월에 시자(侍者)와 같이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고금(古今) 선사들의 임종 모양을 평하고 있었습니다.

“앉아서 가는 것도 신기할 게 없고, 서서 가는 것은 신통치 않으며, 거꾸로 서서 가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예사롭게 말하듯이 일어나서 조용히 무겁게 앞으로 발자국만 떼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네 발짝… 일곱 발짝까지 나아가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 입적하였습니다. 대단하지요.


생사자재의 압권은 자기의 죽음을 마치 장난치듯 연출한 선사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鄧隱峰) 스님은 어느 날 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제방의 큰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앉아서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야 신통할 것이 없는 것이고, 선 채로 몸을 바꾸면 좀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떤 고승이 대꾸합니다.

“그렇습니다. 서서 간다면야 좀 특별하지요.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일은 아닙니다.”

은봉 스님이 이 말을 받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거꾸로 서서 갔다는 선사는 없는가?”

대중이 말이 없자,

“나는 거꾸로 서서 가야겠다.” 합니다.

순간 노인답지 않게 두 손으로 땅을 짚자마자 다리를 공중으로 번쩍 들고 거꾸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대중 스님들은 아연실색하여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습니다.

화상은 거꾸로 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입고 있는 법복이 조금도 흘러내리거나 벗겨지지 않고 몸에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신도와 일반인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찬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장례식을 올리기 위하여 시신을 납관(納棺)하게 되었습니다. 시신은 여전히 거꾸로 선 자세 그대로 꼿꼿하여 아무리 밀고 당겨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당해하였습니다.

이때 한 여승이 대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더니 시신을 보고 꾸중을 하였습니다.

“오라버니 스님, 이 무슨 짓입니까? 살아서도 기행(奇行)하더니 죽어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까?”

그렇게 꿈쩍도 않고 거꾸로 서 있던 시신이 여동생이 손끝으로 시신을 슬쩍 밀자 힘없이 넘어졌습니다.

이 여동생 스님도 오래 전에 도를 깨친 선승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입니다. 이런 죽음 앞에 슬픔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도 미학(美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뿐입니다.


임제(臨濟) 스님 당시에 보화 존자라는 선성(禪聖)이 있었습니다. 보화 존자는 세칭 허무승(虛無僧)의 비조(鼻祖)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네거리 한복판에서 요령을 흔들면서 색다른 소리를 외쳤습니다.

“나에게 옷을 한 벌 보시하시오, 옷을 한 벌 보시하시오.”

사람들은 다투어 옷을 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자는 옷을 도로 주면서

“나에게는 이런 옷은 필요 없습니다.”

하며 손을 내젖는 것이었습니다. 임제 선사가 이 말을 듣고 관(棺)을 잘 짜서 드리니 존자는 희희낙락하며 그 관을 짊어지고 춤을 추면서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선언하였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훌륭한 옷을 만들어 주셨으니 동문(東門)으로 가서 이것을 입고 열반에 들겠소이다.”

그는 동문을 향하여 요령을 흔들며 갔습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나서 물밀 듯이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온시선이 동문으로 동문으로 몰렸습니다.

화상은 구름같이 모인 대중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오늘은 날짜가 좋지 않으니 내일 남문에서 입적하겠소.”

군중은 하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남문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대중들은 무슨 기이한 일이 일어날까 잔뜩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보화 존자는 전날과 똑같은 행색을 차리고 나타나더니 오늘도 일기가 나빠서 내일 열반에 들겠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군중은 크게 실망하여 존자를 불신(不信)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몇 사람만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채 서문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전날 같은 핑계를 대고 다음 날 북문에서 입적하겠다고 유유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하여 화를 내고 욕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네 번째로 선언을 한 북문으로 그의 말을 믿고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북문에 이르자 문 밖으로 나가서 편편한 바위 위에 관을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고 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마침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서 뚜껑을 닫고 못을 단단히 박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장안(長安)에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반석(磐石) 위에 놓인 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처음에 놓여 있던 모양 그대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군중들은 관을 열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못을 하나하나 빼는 동안 군중들은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긴장하였습니다. 드디어 관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관 속은 머리털 한 오라기 없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딸랑딸랑 귀에 익은 요령소리가 공중에서 울려왔습니다. 군중들은 깜짝 놀라서 일제히 머리를 들고 소리나는 곳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한 줄기의 서광(瑞光)이 하늘 높이 찬란하게 뻗쳐 있고 요령소리만이 들려왔습니다.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요령소리가 들려오는 허공을 향하여 무수히 배례(拜禮)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전기적(傳記的)인 신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대단한 옛어른들은 생사문제를 자유자재로 했습니다. 예부터 선가(禪家)에서는 죽음을 옷을 갈아입는 데 비유했습니다. 옷은 오랜 동안 입다가 낡거나 검어지면 새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몸뚱이도 늙거나 병들면 새몸으로 마음대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옛선사는 죽음을 오온(五蘊)의 껍데기를 벗어버린다, 가죽푸대를 간다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기화(己和) 스님은 “부스럼 딱지를 없애는 것과 같고, 묶은 것을 풀어서 칼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으며, 새가 조롱을 나온 것과 같으며, 말이 마구간에서 나온 것과 같아서 마음이 탁 트여 소요(逍遙)를 즐겨서 무애(無碍)의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자재하고 생사를 해탈하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고 선정(禪定)을 익혀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수행을 잘하여 생사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고, 생사문제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명제이고, 극복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과제인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평생 수행해온 선승들은 입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합니다. 여러분도 죽음이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법신(法身)의 탄생이며, 열반의 기쁨이라는 것을 겪어보시기 바랍니다. 열반은 최고의 행복이며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상(無常)하다. 내 지금 금강(金剛)의 몸이지만 무상하여 변하는 것을 면치 못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精進)해야 한다. 속히 생사(生死) 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라. 이것이 곧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니라.” 하였습니다.

불자 여러분, 명심,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