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17강/12연기(緣起), 혹은 곤경의 연쇄 고리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22:13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원숭이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합니다. ‘나만의 세계!’라고….

여기서 말하는 이 세계는 물질적 환경이나 지리적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각자의 고유한 ‘자아’가 의존(住)하고 있는 심리적 공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

우리 각자의 자아는 서로 다른 유전적 자질에,

서로 다른 가정적 환경에, 오랜 사회적 훈련에 의해 고유하게 만들어진 ‘의미체’입니다.

이 구성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각자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바로 이 심리적 자아의 세계를 통해 살고 있습니다.

자아는 외계와 접촉하고, 그것을 판단하며,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선택하는 도구입니다.

자아는 또한 그 기획과 활동을 통해 다시 자신의 세계를 수정하고 재구성해 나가는데,

그것을 우리는 총체적으로 ‘성격’ 혹은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각자의 세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과연 몇 개의 세계가 있나
그런데, 이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굳이 따지자면, 이 세계는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또 그 안에서 울고 웃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없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통해 얽은 가건물일 뿐,

객관적 물질성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양면성과 가변성이 불교의 불가해한 역설과 휘황한 변증을 가능하게 한 진원지입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있는 것일까요.

사람 수만큼 있겠지요.

불교는 대체로 여섯 개가 있다고 합니다.

육도(六途)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살고,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살며, 어떤 사람은 아귀처럼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수라처럼 싸우고, 어떤 사람은 예외적으로 훌쩍 신선으로 축복받은 삶을 누립니다.

이들은 극단적 케이스겠지요.

보통사람들은 때로 기쁘고 때로 슬프며, 때로 즐겁고 때로 비참하며,

그래도 사람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세(人間世)’의 장삼이사들입니다.


불교는 이 ‘욕망의 세계(欲界)’를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합니다.

짐승이라면 사람 노릇하라고 권하고, 사람이라면 신선이 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불교는 신선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다른 행복의 철학과는 좀 다릅니다.

신선들은 육체의 제약이 적고 장수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인간세보다 나아보이나,

그 축복은 공덕이 다하면 언젠가는 다시 하급의 윤회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아예 이 윤회의 바퀴를 영원히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금강경>도 설파하고 있습니다.

불도(佛道)를 통해 ‘삶의 물길이 바뀌면(豫流)’ 처음에는 ‘한번만 더 윤회했다가(一來)’ ‘더 이상 윤회하지 않다가(不來)’ 마침내 ‘이 사바의 곤경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아라한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 과정 또한 함부로 가보지도 않고 용훼(容喙)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수정 변혁해야만 아라한의 과실을 기약할 수 있을까를 짚어보는 것입니다.

12연기는 욕망에서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욕망의 세계에서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2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열두 개의 정식항을 두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핵심적인 취지는 분명합니다.

5세기 남방불교의 집대성자로,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쓴 붓다고사는 이 12개를 세 묶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앞의 것은 전생에, 가운데 것은 현생에, 뒤의 것은 내생에 배정했던 것입니다.

논란이 있습니다마는 방편으로 취하기로 합니다.

전생은 알 수 없고, 내생은 오지 않았으니, 현생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4번째 명색(名色) : 세계의 출발은 개인의 몸(色)과 마음(名)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이 신체와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순전히 무(無)일 뿐이겠습니다.

각 개인은 외적 내적 대상과의 통로인

5번째 육입(六入) : 즉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또한 일종의 감각기관입니다.


“세계는 육입(六入)을 통해 일어난다.

그 육입을 통해 세계가 알려진다.

세계는 육입 위에 세워지며, 육입 속에서 사라진다.”

아난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눈, 코, 귀, 혀, 몸, 그리고 의식이라는 육입을 통해서 세계를 의식하고,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세계이다.”


감각 기관은 대상을 향해 ‘불타오릅니다.’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을 기억하십시오.

감각기관은 그 대상이 없이는 공허하고 굶주리기 때문에 늘 그 짝을 찾아 날뜁니다.

흡사 ‘불이 장작을 먹어치우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원숭이가 나무들 사이를 폴짝대며 뛰어다니듯이.’
6번째 촉(觸) :
이것은 감각기관이 구체적으로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대상이 감각기관과 ‘어우러져’ ‘사랑을 나눕니다.’

유명한 티베트판 윤회도에는 이 항목이 남녀간의 사랑 행위로 그려져 있습니다.

수백 개의 화살이 박힌 상처 입은 짐승
7번째 수(受) : 대상이 감각기관을 자극하면, ‘느낌’이 오겠지요,

옛 경전에는, “나무토막을 비비면 열이 발생하듯이 쾌감을 주는 접촉으로 인하여 쾌감이 온다”고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티베트판 윤회도에서는 이것이 ‘눈에 화살이 박힌 형국’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섬뜩하지요.

그것은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말합니다.

“인간은 수백 개의 화살이 꽂힌 상처 입은 짐승이다!”

여기 ‘화살들’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향해 시시각각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8번째 애(愛) : 이때 쾌감을 주는 자극은 계속시키려 하고, 불쾌감을 주는 자극은 단절시키려 합니다.

인간은 감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한 다음,

적극적으로 수용 혹은 배제하려 합니다.

이 과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행됩니다.

가끔 의식되기도 합니다.

이 적극적 반응을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9번째 취(取) : 욕망은 지속되면서 집착으로 굳어지고, 특정한 패턴과 지형을 형성하게 됩니다.

각자는 이 지형도에 따라 대상을 선별하고, 인식의 영역을 결정해 나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일상적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그 반응’의 구조입니다.

이 사이클은 반복 강화되어 한 인간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하고, 그의 세계를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