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것은 곧 ‘소유한다’이다
콘즈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리된 법(法,다르마)도 주체적 지각의 활동이 없이는 지각될 수 없다.
지금, 아비다르마는, 특정한 지각 활동이 대상을 ‘집어들고’, ‘주의하고’,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꽉 거머쥐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영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지각(perception)이라는 말은 per-CAP(*머리, 덮어씌운다)에서 왔고,
capio는 ‘잡는다’, ‘붙든다’, ‘꼭 잡아쥔다’는 뜻이다.
역시 어떤 것을 ‘붙든다’는 것에는, 그게 법(法)이든, 비법(非法)이든,
자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호’하는 행동이 포함되어 있고,
자기 이해와 자기 주장, 그리고 자기 강화와 자기 확대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이기적이지 않기(無我)가 어렵다.”
No separate dharma can possibly be perceived without a subjective act of “perception” taking place. Now the Abhidharma teaches that the specific function of perception consists in ‘taking up’ an object, ‘noting and recognizing’ it, ‘seizing upon’ it. Similarly, in our own language, ‘perception’ comes from per-CAP, and capio means ‘to take hold of, seize, grasp’. But to seize on anything, either a dharma or a no-dharma, automatically involves an act of preference, bound up with self-interest, self-assertion, and self-aggrandizement, and therefore, unbecoming to the selfless. (Conze, The Diamond Sutra, p. 34)
세계는 자아의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불교 이해의 관건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욕구, 주장, 그리고 지배와 권력의 의지를 통해,
주변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있는데,
이 ‘주관적 환상(相)’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如如)’ 객관적 ‘세계’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불교는 그래서 자기 관심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주관적 편견과 몰이해를 탈각한 ‘객관’, 즉 ‘진정 그러하게 있는 것(眞如)’을 보여주고,
그를 향해 정진(精進)해 나아가도록 권합니다.
진정한 해방과 우주적 평화가 이 비점착의 투명한 시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연하자면, ‘있다’를 뜻하는 한자의 유(有)라는 말도,
그 어원은 ‘손이 볏단을 끌어 모아 쥐고 있는 모습’을 본뜨고 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수확과 소유!
‘이기적’임을 뜻하는 사(私)자도 ‘벼를 칼로 베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자 하나가 인간의 근원적 진실을 웅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물은 늘 우리의 사적 관심과 목적의 ‘자장’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 경계는 블랙홀 주변의 우주 공간처럼 늘 ‘휘어져 있습니다.’
심하면 마구 헝클어져 있기도 합니다.
<금강경>이 그래서 말합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구절을 친절하게 제 멋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네 사적 의지와 관심의 투영, 다시 말해 ‘너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사태를 선명히 자각할 때, 그때 너는 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은 그래서 멀고 먼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관심과 편견을 문득, 유보하면,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자세를 문득 갖추고 나면,
한 순간에 만날 수도 있습니다.
붓다, 혹은 여래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사태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그 ‘객관’을 가장 순수하고 견고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파지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무지(無明)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다
우리는 이 과학적 사실(?)을 거의 모르고 삽니다.
나도 모르는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같은 불행의 연쇄고리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자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붓다만이 홀로 이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세계’를 부수고,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불행의 궁극적 기원은 탐욕과 분노라기보다,
그보다 더 깊이 있는 사실,
즉 우리가 이 추동의 연쇄고리를 모른다는 ‘무지(無明)’에 있습니다.
탐욕도 분노도 그 무지의 결과입니다.
<대승기신론>도 근본무명으로부터 탐욕과 분노가 파생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무명(無明)은 12연기의 시작이면서,
또 근원적 해악인 삼독의 뿌리입니다!
무명(無明)이라,
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뭘 하고 사는지도 잘 모릅니다.
이게 아이러니 중에서도 아이러니 아닙니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모르나이다.”
붓다나 예수뿐만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무지야말로 근원적 죄악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승려 나가세나는 메난드로스 왕에게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리이스 왕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왕이시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고 할 때,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존자여,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겠지요.”
“대왕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삼계유심, 만법유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결국,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낡은 새장을 넘어 자유와 평화를
우리가 알고 있는 ‘님’은 우리 자신의 그림자입니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한용운, <님의 침묵> 서문).
우리는 자신의 관심과 욕망을 투영한 대상을 두고,
그리워하고 갈망하며,
남들과 다투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갇혀 있는 이 비좁고 불완전하고 낡은 새장을 넘어 자유와 평화를 찾아 날아 봅시다.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요령은 알았으되,
실제 꺼내려면 얼만큼의 기술과 노력, 시간이 필요할까요.
멀다고 끙끙거릴 수도 있고,
문득 편안히 창공을 나는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앞의 것을 점교(漸敎), 나중 것을 돈교(頓敎)라 합니다.
‘세계’를 만든 것도 ‘마음’이고,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마음입니다.
혁명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하는 것.
<법구경>의 첫 머리를 정대 공양합니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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