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은 버드나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저번 강의에서 12연기를 통해 자아가 어떻게 강화되고,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12개 항목 가운데 아직 4번째부터 9번째 항목까지밖에 살피지 못했습니다.
붓다고사의 분류에 의하면, 현생의 고리밖에는 다루지 못했지요.
그 나머지를 더 살펴봅시다.
직업, 취향, 습관, 기분 등등에 따라 어떤 자극을 수용하고 어떤 자극을 배제할 것인가는 각기 서로 다른 지형도를 그립니다.
예를 들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리.”
“백정이 버드나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요.
이 속담들은 직업과 개성에 따라 자극과 반응의 수용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재망각, 혹은 고향상실
여기서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앞의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또 삶을 대해는 고유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개성과 그들의 ‘세계’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 문제를 전혀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쳇말로 “나, 이렇게 살다 갈래”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불교는 이들을 억지로 붙들어 교육시키거나, 감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불교는 “진정, 너는 행복하냐”고 딴죽을 겁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너는 그 행복의 이면에 있는 삶의 근본 조건과 그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불교는 단호히 말합니다.
“탐욕과 공격성에 의해 추동되는 삶 속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없고,
그것은 갈등과 좌절을 피할 수 없다!”
대상을 향한 소유와 지배는 어느 한 대상을 취득하고 동화시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또 다른 대상을, 그리고 보다 큰 대상을 향해 손을 벌리고, 헉헉거립니다.
그 대상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그리고 물질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 모두를 향해 있습니다.
재산, 명예,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은 타자인 인간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들’도 또한 너의 소유를 탐내고 너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사람들이 ‘소유’와 ‘탐욕’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는 박제되고, 사람은 소외됩니다.
이리하여 본시 고요했던 세계는 인간의 관심에 의해,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12연기의 10번째 항목인, ‘유(有)’가 바로 이 사태를 의미하는 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와 축적!
기억하십시오.
세계는 바로 이 사유(私有)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눈이 있어 보는 게 아니라, 보려는 의지가 눈을 만들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도시나 나라인데,
누군가가 거기 있거나 살았다는 기억으로 하여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역시 세계는 주관적으로 ‘의미화’되어서만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쇼펜하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눈이 있어 사물을 보게 되었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을 만들었고, 들으려는 ‘의지’가 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코앞에 두고도 언제 있었더냐 싶지요.
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눈도 또한 없습니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다 그렇습니다.
<반야심경>을 기억할 것입니다.
공중(空中)에는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습니다.
당연히 이 둘이 교접한 결과인 안이비설신의 식(識)도 없겠지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명저대로, 세계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세계는 그 의지를 통해 구성된 표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 제목을 불교식으로 번역하면 곧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 됩니다.
모든 존재는 의식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그 활동의 결과입니다.
이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유식입니다.
유식에서 선명히 갈라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법(法)과 상(相)입니다.
여기서 법(法)은 객관적 실제를 가리키고,
상(相)은 의지와 표상으로 하여 드러나는 주관적 세계를 가리킵니다.
시급히 할 일은 각자가 가진 것은 상일 뿐,
법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자아의 주관적 환상 속에서,
그 편견을 의지하여(住) 살고 있다는 것을 화들짝 깨닫는 일입니다.
이곳이 불교의 첫걸음이고, 주춧돌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불교의 목표인 무아!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식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란 무엇인가
유식은 삼성(三性), 즉 ‘우리가 사물을 보는 세 가지 시각’에 대해서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첫째 것이 변계소집(遍計所執)입니다.
변계소집이 바로 ‘인간의 의지와 표상에 의해 드러난 세계’를 가리킵니다.
제가 보는 한문본 <금강경오가해> 끝에는 몇 가지 부록이 달려 있는데,
거기 삼성(三性)을 두고 읊은 부대사(傅大士)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망계(妄計)로 인한 집착인 게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다니.
마음 속 의심이 곧 암귀(暗鬼)가 되고, 눈에 병이 들면 허공에 없는 꽃이 어지럽지.
풍경은 하나인데, 세 사람이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이 비밀을 깨달으면 명(名)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거야.
그럼, 백우거(白牛車)를 유유히 끌 텐데.”
망계는 ‘주관적 판단’이라는 것이고, 집착은 ‘의지와 욕망의 추동’이라는 뜻입니다.
사물의 판단 이전에 ‘의지와 욕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기에,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있으면, 사람이나 사물이 온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암귀(疑心暗鬼)는 유명한 고사입니다.
<열자(列子)>에 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웃집 꼬마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걷는 것을 보아도 도끼도둑이고, 말을 하는 것을 보아도 영락없는 도끼도둑처럼 말하더란 말입니다.
마음속에 이 ‘의거(住)’하는 바가 사물을 보는 태도와 판단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풍경은 분명 하나인데, 세 사람이 본 것이 서로 다르고,
사태는 하나인데 의견들은 서로 갈리는 것입니다.
명부실(名不實), 우리들의 모든 인식과 판단(名)은 그러므로 개인적 집단적 집착과 편견의 소산이므로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