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불승론(佛乘論)-2.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46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달마의 말은 다른 어떤 깨달은 사람보다 정확하다. 그의 말은 정수를 곧바로 찌른다. 그대가 깨달음의 경험을 표현할 때는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전혀 실수를 할 수 없다고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자는 절대로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꾸란》에도 실수는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언자 마호메트는 결코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역시 실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2천 년 동안 자신들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틀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잔다르크는 당시 교황에 의해서 마녀로 낙인 찍혔다. 본래 마녀란 뜻의 '위치(witch)'란 단어는 '지혜로운 여자'란 뜻이다. 그런데 교황은 그 말을 악마와 간음한 여자로 정의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 교황은 지혜로운 여자들은 모두 악마의 손아귀에 빠진 여자라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런 여자가 있으면 일단 잡아와서 참을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고문을 멈출 수 있는 길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곧바로 종교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그 불쌍한 여인이 악마와 간음을 했다는 등, 추한 욕설로 그녀를 묘사했다. 그리고는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유럽에서는 수천 명의 지혜로운 여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잔다르크는 그녀의 나라를 위해서 싸웠다. 그녀는 어렸지만 매우 용기 있는 아가씨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 이겼다. 그녀는 곧 영웅이 되었다. 그러자 시기심 많은 교황은 잔다르크를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잔다르크가 더 훌륭한가, 아니면 교황이 더 훌륭한가?"하는 비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길은 그녀를 마녀로 낙인찍는 길이었다. 곧 그 불쌍한 아가씨는 잡혀 왔고 그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이 가해졌다. 그녀에게는 화형을 당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황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났고 잔다르크는 순교자가 되었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추앙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3백 년이 지난 후, 다른 교황은 과거의 교황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교황이 불필요한 순교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통해서 보통 여자는 그대로 매장해 버리기가 쉬웠지만 잔다르크 같은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잔다르크가 죽은 지 3백 년, 교황은 그녀가 마녀가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성자였으며 그녀의 뼈는 무덤에서 파내어져서 성인의 유골로 모셔졌다. 거대한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제 그녀는 '성녀 잔다르크'가 되었다. 그대도 알 수 있듯이 분명히 두 사람의 교황 중에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둘 다 잘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교황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깨달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동양은 일만 년 동안 깨달음의 현상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그것은 확실히 그대에게 빛과 명료함, 환희심과 불멸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대의 깨달음이 그처럼 위대한 것이지만, 존재계는 너무나 광대해서 그대의 경험은 바다 속에 떨어진 한 방울의 이슬에 불과하다. 그대의 이해는 얼마나 투명한지 모른다. 하지만 항상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기에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그 사실이 인식되어졌다.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존재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그것은 모든 차원에서 무한하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조차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정한 종교적 자세이며 참된 겸손이다.

완전하다는 생각은 추한 에고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달마 역시 틀릴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달마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달마는 깨달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경지는 아무나 쉽사리 흉내 내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그대의 존재 전체에 봄을 가져다주고 그대의 잠재성을 꽃피운다 할지라도, 그대가 어떤 실수도 하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깨달은 사람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대가 실수를 지적한다면 그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어떤 에고도 없다. 그는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과는 분리되어 있다. 존재계는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기에, 그리고 말이나 행동은 일방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계는 모든 모순을 다 포함한다. 그리고 가장 지고한 깨달음의 관점에서조차도 모순들을 다 소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인간이다. 그는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차라리 한족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쪽은 반대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달은 사람조차도 부분적으로 나타나 보일 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광대함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마하비라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하비라의 제자들은 마하비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존재했던 모든 것을 알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안다고 그의 제자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석가모니 부처는 웃었다. 이 사실은 기억해야 할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하비라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앞에 서서 음식을 구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환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집 안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 석가모니는 마하비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는 날 나는 마하비라가 새벽 일찍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한여름이어서 해가 뜨면 매우 덥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언젠가 한번 개의 꼬리를 밟은 적이 있었다. 그 개가 짖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개의 고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는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 발 밑에 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하비라는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 달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하비라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그를 좋아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이 석가모니 부처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당신의 경지는 어는 정도로 높은 것입니까?"

석가모니 부처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나는 단지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을 뿐, 그것은 존재계의 광대함에 비교한다면 하나의 작은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 나는 과거에 대해서 알 수는 없다. 과거에 대해서 초점을 맞춘다면 말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춘다면 미래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초점을 맞춘다는 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집중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깨달음은 무심에서 나온다. 무심은 초점이 없다. 그것은 어떤 경계선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라도 때때로 미세한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깨달음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 어록에서 달마가 보살에 대해서 찬성하고 아라한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그의 작은 실수임을 그대에게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나는 아라한의 경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마하야나(Mahayana:대승)를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히나야나(Hinayana:소승)는 비난하고 있다. 그것은 소승의 가르침이며 아라한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중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쪽 면에 있는 사람은 다른 쪽 면을 보지 못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양쪽 면을 모두 볼 수 있다. 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도(道)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모든 무지와 어둠이 바로 이 집착의 수천 가지 결합에서 빚어내는 작품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할 때, 우리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대는 아마 돈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그대는 파산할 수도 있다. 그대는 권력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물거품이다. 오늘 있었다가도 내일은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때 총리였던 케렌스키(Kerensky)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차르(czar)의 가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혼란한 시대에 차르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혁명의 세력은 6개월 짜리 아기도 남겨 두지 않고 죽였다. 그들은 이 세상에 차르의 피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60년까지 뉴욕에서 과일가게를 하며 살았다.

러시아 제국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큰 제국이었다. 그 영토는 한없이 넓다. 그리고 그 나라의 총리라면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는 식품점 주인으로 몰락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바꾸었다. 그가 죽고 나서 신문에 그의 일기가 발표되었고, 그가 차르 황족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의 모든 지위, 권력, 재산, 명성, 이런 것들은 모두 물거품과 같다. 그래서 '도의 본질은 벗어남에 있다.'는 말은 확실히 옳다. 그러니 물거품에 집착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계속 고통과 비극 속에 살아갈 것이다. 그 물거품은 그대를 봐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계속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그것에 집착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대의 에고에 깊은 실패감과 자괴감을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삶은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도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놓아 버리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이 그대 안으로 들어와서 살게끔 하지 말라. 이 모두가 아름다운 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집착은 그대의 무의식 때문에 일어난다. 그대가 놓아 버리기 시작할 때 거대한 에너지의 해방이 그대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사물에 집착함으로 해서 묶여 있던 에너지가 해방되어 이제 그대를 깨어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빛으로 말이다. 거기에는 고통과 번민과 비극이 일어날 어떤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그대의 본래의 자신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미묘한 기쁨 속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속에는 웃음의 근원이 있다. 그것이 달마가 부처는 웃음 없이 웃는다고 말한 뜻이다. 아무도 웃고 있는 불상을 보지 않았다. 부처는 웃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그의 전 존재가 웃음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