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불승론(佛乘論)-3.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48

 

 

그대는 웃음의 심리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는 너무 일찍 웃는다. 그러나 그대의 웃음은 부처의 웃음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대의 웃음은 삶이 너무 불행해서 나오는 웃음이다. 우스운 일이 벌어질 때 그 순간 고통을 잊어버리는 그런 웃음이다. 그대의 긴장이 잠시 사라질 때 거기에 웃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웃음이란 건강한 것이고 푸근한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웃음이라도 그대의 긴장은 풀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대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부처의 웃음은 긴장이 풀어질 때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그는 긴장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는 삶 자체가 우스개라는 사실을 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모두 우스운 것이다. 웃음은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그것은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여인이 침대 위에서 남자와 함께 누워 있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일어나욧, 빨리! 남편의 차 소리가 들렸어요. 그 차는 너무 낡아서 1킬로 밖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는 지금 집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요. 그러니 빨리 일어나요."

그 사내는 허둥지둥 일어나서 말했다.
"어디로 가면 좋겠소?"

그녀가 말했다.
"창 밖으로 뛰어나가요."

다행스럽게도 그 건물은 60층 짜리가 아니었다. 단지 일 층 짜리였다. 그래서 그는 창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마구 달렸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조깅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 그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벌거벗은 채 서 있다가는 감기가 들 것이다. 무리를 지어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한 20명쯤 되어 보였다. 때는 이른 새벽이라 아직 어두웠고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런데 한 남자가 그가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항상 벌거벗고 조깅을 합니까?"

그 사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때 어둠이 사라지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은 그 벌거벗은 주자가 바로 주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벌거벗은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콘돔을 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또 물었다.
"신부님, 당신은 항상 콘돔을 끼고 달리시나요?"

주교가 말했다.
"아니오, 항상은 아니오. 비가 올 때만 낍니다."

그대가 삶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그대는 삶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주위에서 웃기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웃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그는 깨어 있는 그의 세포마다 웃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내어 웃을 필요가 없다. 그저 고요히 웃음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웃음 없는 웃음이다.

만약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을 보고 웃을 것이다. 전에는 그대도 같은 배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실히 집착을 벗어나는 것은 도의 본질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수행의 목적지가 된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단지 껍데기일 뿐이다. 그 겉모습 뒤로 깊숙이 실체가 숨어 있다. 시체를 알려면 그대는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대의 집착이 그대를 구속한다. 하지만 그대가 집착하는 것은 껍데기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장난감을 계속 바꿀 뿐이다. 그대는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다. 그래서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대는 철도역이나 공항을 가보면 아이들의 손에 곰인형이 들려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곰인형이 없으면 잠도 잘 수 없다. 곰인형은 그들의 절친한 친구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곰인형을 떠난다. 그들은 새로운 곰인형을 발견한 것이다. 곰인형의 겉모양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돈도 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는 지독한 구두쇠가 살았다. 나는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매우 부자였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을 할 때면 항상 떠들썩하게 말을 한다. 또한 하루 종일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는 이상한 생각에 집착해서 불쑥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주머니에 100루피가 없으면 나는 오줌을 누지 않겠다."

그는 마을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100루피는 항상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소변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부유함을 항상 뽐내며 다녔다. 그런데 그때는 지폐가 흔하지 않을 때다. 그래서 그는 100루피를 금화로 바꾸어 갖고 다녔다. 그래서 그의 주머니는 항상 묵직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이렇게 묻곤 했다.
"어디를 가는가? 당신은 당신 돈을 세어 보았는가?"

만약 그가 돈이 99루피였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면 그때는 곤란할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돈을 세어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없다. 100루피가 그대로 있다. 나는 일 루피만 없어져도 소변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위대하다고 할 것인가? 그의 돈은 그에게 곰인형과 꼭 같다. 그는 100루피와 함께 잠을 잘 정도였다. 그대가 조금만 깨어 있어도 그대는 자신의 곰인형이 무엇인지 한번 조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들 때문에 그대는 세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겉모습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대가 시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그 모습들은 그대의 꿈을 마드는 재료가 되어 그대를 계속 고문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것을 떨쳐 버릴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살수밖에 없다. 달마는 그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도를 말이다. 그것은 모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벗어남은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이다. 그대는 이 삼계를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깨달음을 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는 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사실만을 진술한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종교의 가르침 전체를 축약시켜서 몇 가지 말로 그 본질을 제시한다.

탐욕은 그대를 이루고 있는 한 가지 구성 요소이다. 그것은 항상 좀더 뭔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계속 좀더 많이 갈구한다. 그대가 갈구하기 때문에 그대는 항상 불행하다. 그대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대는 그것을 즐길 수 없다. 그대는 좀더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좀더 가진다면 그때는 그대의 욕심이 그대를 앞서 나간다. 그러면 그대는 다시 전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나는 캘커타에 가면 매우 부잣집에 머물곤 했는데, 그들 부부는 나를 공항까지 마중 나오곤 했다. 그 남편은 항상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꼭 한번 그가 슬픈 기색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는 차를 몰면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웃고 있었다. 그는 차를 몰면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인가?"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물으시니 나는 대답을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기 싫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가 저렇게 슬퍼하는 것은 50만 루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 웃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말했다.
"사실 50만 루피를 그가 땄기 때문에 나는 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100만 루피를 따리라고 기대했는데, 50만 루피밖에 따지 못해서 저렇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의 불행은 그가 50만 루피밖에 따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1파이사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문제인가?"

그가 말했다.
"그녀가 옳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슬픕니다 그 사업에서는 100만 루피를 따내는 것이 확실했는데, 겨우 50만 루피밖에 못 땄으니 나는 나머지 50만 루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대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대의 기대는 항상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보다 앞서 나간다. 그래서 거기에는 항상 실패감이 뒤따른다. 탐욕은 존재계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이다. 그대는 될 수 있는 한 많이 긁어모으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왜 인생을 긁어모으는 데만 낭비하는가? 긁어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은 그대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다음 순간 그대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동안 긁어모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한 지독한 구두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그의 아내가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도 돈 계산만 하고 있었다. 옆에서 의사를 불러야 할 때라고 말해도 그는 "돈이 너무 많이 들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죽으면 또 장가를 들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이다. 그러니 왜 쓸데없이 돈을 쓰겠는가? 만약 그녀가 살아날 운명이라면 어차피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의사를 부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자 옆에서 그의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네같이 욕심 많은 친구는 처음 보았다. 나는 자네가 욕심이 많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자네가 죽으면 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말했다.
"물론 나는 계획이 있다."

친구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물었다.
"무슨 계획이 있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죽기 전에 이 돈을 배에 싣고 가다가 돈과 함께 바다 깊숙이 뛰어들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그들이 말했다.
"자네는 정말 미쳤군. 자네는 그 돈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하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도 안다네. 하지만 적어도 내 돈으로 다른 사람이 즐기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