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불승론(佛乘論)-4.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49

 

 

그대는 모든 종류의 욕심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대 속에도 모든 종류의 욕심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화가 나고 좌절감이 뒤따른다. 그대는 이 세상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 자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는 모든 사람을 저주할 것이다.

그대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잔소리가 많은지 아는가? 그들과 잠시도 같이 앉아 있기 힘든 이유를 아는가? 그들은 모두 좌절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삶을 긁어모으는데 허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긁어모아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삶을 저주하고 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탐욕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대를 분노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그대의 분노는 세 번째 것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미혹은 하나의 위로가 된다. 미혹은 그대 자신을 어떻게든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네루(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수상이 되었을 때, 자신이 바로 네루 수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적어도 열 명이 되었다. 그들은 이름이 똑같았으며, 똑같은 베레모를 썼고, 손으로 짠 카디와 자와르 재킷을 입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내가 사는 도시에 있었는데, 그는 어투도 네루와 똑같이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의하는 대학에 가서 그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그리고 그는 칸하키슬리(Kanhakisli)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왕궁을 방문하러 가겠다고 전보를 치곤 했다. 그곳은 수천 마리의 사슴이 사는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는 전보에다 이렇게 썼다.
"네루가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네루의 비서라고 서명했다.
그는 사람들을 여러 번 속였다. 네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저택의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방을 비우고 청소를 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동명이인임이 밝혀졌고, 그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처칠(Winston Churchill)이 살아 있을 때, 적어도 영국에는 세 명의 윈스턴 처칠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완전히 윈스턴 처칠 수상이라고 믿었다.

칼리프 오마르(Kalif Omar)의 생애에도 이런 기록이 나온다.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자신은 신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왔다고 주장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구식이다. 그가 죽은 뒤로 천 년이 흘렀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래서 신은 나를 그의 새로운 예언자로 보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매우 광적이다. 오마르는 이 사람을 7일 동안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이 자를 벌거벗겨 기둥에다 묶고 매로 쳐라. 먹을 것을 아무것도 주지 말라. 7일 후에 이 자를 보러 오겠다."

7일이 지나자 그가 다시 왔다. 기둥에 묶인 사람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 매질을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렸고 음식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마르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이 바뀌었는가?"

그러자 죽어가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냐고? 내가 신의 곁을 떠날 때, 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모든 예언자들은 항상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의 고문이 내가 진짜 예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자 그 옆 기둥에 묶여 다 죽어가던 사람이 눈을 뜨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한 죄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묶여 있었다.
"이 바보의 말을 믿지 말라. 나는 마호메트 이후로 어떤 예언자도 보내지 않았다. 마호메트는 나의 유일한 예언자이며 그는 사기꾼이다."

이제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겠는가? 그들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종의 미혹에 빠져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미혹들은 그대의 삶이 흘러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한다.

대단한 위로가 된다. 그대가 수상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대는 수상이라는 미혹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렇다고 믿을 수는 있다. 그대는 자신만의 미혹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은 너무나 굳건해서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미친 사람을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왔다. 그는 아주 특별하게 미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상점에 갔다오라고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상점에 가느냐?"

가족들은 그가 완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봤으나 허사였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죽은 것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당신들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결국 그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그를 데려왔고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를 말끔히 고쳐 놓겠소."

그리고 그는 미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 피를 흘린다고 생각하는가?"

미친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소."

그러자 의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간단한 실험을 하겠소."

그는 칼을 갖고 와서 그 미친 사람의 손가락을 베었다. 금방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족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제 그는 마음을 고쳐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혹이라는 것이 그리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친 사람은 웃고 있었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보시오. 이 피가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않소?"

그러자 미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이 피가 바로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틀렸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오.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린다오. 내가 바로 그 증거요.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이제 그 속담을 고쳐야 할 것이오.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린다.'로 말이오."

미혹은 그대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좌절한 채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미혹된 대로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이 미혹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대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달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이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말한다.

사실 계, 정, 혜는 세 가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지 것에 대한 세 가지 이름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정(定)'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삶의 한쪽 면에 계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른 쪽 면에서 보면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가 직접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완전한 계율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명상뿐이다. 계율과 지혜는 명상의 부산물이다. 계율은 그대의 행동을 나타내며, 지혜는 그대의 지성, 그대의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경에 일렀으되 "오직 사람이 세 가지 독(毒)에 물든 세상에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갈 때 그가 곧 부처다."라고 했다.

달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부처조차도 그대가 겪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안 사람이다. 그때 이 세 가지 독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해독제를 발견한 것이다. 명상은 그대의 삶을 해치는 모든 독에 대한 해독제이다. 그것은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키워나간다.

세 가지 독이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나는 이것을 편견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계속 대승의 우월함을 강조했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는, 논리적인 마음에는 이 말이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릴 것이다. 먼저 그는 말한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말한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걸음 없는 걸음, 행위 없는 행위, 말없는 말…… 등을 말할 때와 같은 맥락이다. 거기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는 단지 수레란 말을 더 사용했을 뿐이다. 가장 위대한 수레는 바로 '수레 없음'인 것이다.

또 경에 일렀으되 "오대(五大)가 한데 모인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대승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오대는 그대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이다. 그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이다. 이 다섯 가지로 구성된 그대의 존재 속에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곧 선의 마당이다. 이 다섯 가지로 만들어진 사원 안에 그대의 깨어 있음이 있다.

이 몸은 사원이다. 그대의 의식은 사원의 신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점점 깨어날 때 그대는 제삼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미 있는 두 개의 눈은 그대의 외부를 보는 것이라면, 제삼의 눈은 그대의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을 보는 것은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다면 그때는 외부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은 빛을 잃는다. 한번 그대의 순수함을 보게 되면 그때 외부의 모든 것은 오염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번 그대가 내면의 광채를 바라보면 그때는 아무리 아름다운 일출 광경도, 석양의 노을도 밤하늘의 별빛도 그것과는 견줄 수가 없다. 그때 그대는 진화의 정점에 있으며 의식의 봉우리에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