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굉지선사 묵조명 해설 1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0:36

 

 

정-편이 서로 어울리니 理·事가 하나네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존재하니
하나 또한 고수하지 말지어다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이 한 불교행사에 참석, 입정에 들어있다.

오늘은 ‘좌선잠’도 물론이지만 선시의 백미로 꼽히는 굉지선사의 ‘묵조명’으로 금강경 맛을 느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좌선잠이나 묵조명 같은 선사의 시를 자꾸 음미하다보면 금강경의 참 맛이 좀 더 깊게 우러나게 됩니다. ‘銘’도, ‘箴’도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가까이 적어두고 잘 새기라는 것이니 우리의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일상에서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默照란 깨달음을 체득한 경지이지 지식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후학을 위해 그 경지를 이해시키려면 부득이 문자를 빌릴 수 밖에 없겠지요. 묵조란 부처님의 삼매의 경지여서 부처님의 법을 이은 가섭존자도 알 수 없고 가섭의 법을 이은 아난도 알 수 없고, 달마의 법을 이은 혜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법계의 살림살이가 너, 나 없는 한 덩어리일 때 비로소 묵(默)과 조(照)의 참 맛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默은 진리이고 照는 진리가 현실화되어 삼라만상의 모습으로 나온 진리의 대변인이므로 곧 진공묘유의 법계 살림인 것입니다.

묵조명은 조금 길지만 문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묵조명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다음 주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默照銘 (상) (宏智禪師)

默默忘言 昭昭現前
침묵하고 침묵하여 언어가 끊어짐이여, 밝고 또렷하게 앞에 드러남이로다.

鑑時廓爾 體處靈然
거울처럼 밝게 비칠 때에 툭 트임이여, 본바탕은 신령스럽도다.

靈然獨照 照中還妙
신령스럽게 홀로 비춤이여, 비추는 가운데 도리어 미묘하도다.

露月星河 雪松雲嶠
이슬에 잠든 달과 은하수에 목욕하는 별이요, 눈 덮인 소나무와 구름 덮인 봉우리로다.

晦而彌明 隱而愈現
어두울수록 더욱 밝아지고 숨으려 할수록 더욱 드러나도다.

鶴夢煙寒 水含秋遠
차가운 저녁놀에 학이 꿈꾸듯, 가을 물이 먼 정경까지 머금은 듯,

浩劫空空 相與雷同
무한한 시간 속에 텅 비고 텅 비었지만, 서로 어울림이 우뢰와 같도다.

妙存默處 巧存照中
묘연함은 침묵 속에 존재하고, 공교함은 비춤 속에 존재하도다.

巧存何存 惺惺破昏
교묘함의 존재는 어떻게 지키는가? 안과 밖이 성성하게 혼침을 깨야하나니,

默照之道 離微之根
묵과 조의 도는 이와 미를 뿌리 삼도다.

徹見離微 金梭玉機
이와 미를 꿰뚫어 살피면, 옥 베틀에 황금북이 돌아가고

正偏宛轉 明暗因依
정과 편이 완연히 굴러, 밝고 어두움이 서로 어울리도다.

依無能所 底時回互
서로 어울리되 능소가 없음이여, 理와 事가 자재롭게 하나로 돌아가도다.

〈보충설명〉
1. 默默忘言 昭昭現前
부처님께서 6년 동안 설산에서 고행하며 침묵을 지킨 모습, 유마거사가 문병차 찾아온 문수보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모습, 달마대사가 9년 동안 소림굴에서 침묵을 지킨 모습, 언설의 바다가 고요히 잠든 이 침묵이 바로 默默忘言입니다. 부처님의 침묵, 유마의 침묵, 달마의 침묵은 단지 멈추어 있기만 한 소극적 침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살아 숨쉬는 적극적 대화입니다. 마치 겨우내 우뢰가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봄이 되면 얼음을 녹여 꽃을 피워주고, 여름이면 하늘로 올라가 비를 내려 만물이 무성하게 하고, 가을에는 오곡을 익게 하는 위대한 울림입니다. 그리고 이런 침묵(默)과 침묵(默)으로 뿌리내린 부처님의 49년 설법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이 소소현전입니다. 그러므로 空함까지 空하여 俱空을 이루어 시비분별이 사라진 ‘묵묵망언’은 체(體)에 관한 표현이고, 소소현전은 용(用)에 관한 표현입니다. 굉지선사는 법성의 아름다움을 默과 照, 體와 用으로 번갈아 읊어가며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새기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2. 鑑時廓爾 體處靈然
여기서의 거울은 투명하며 티 한 점 없는 맑은 거울입니다. 모습이 비치든 비치지 않든 맑아서 편안한 거울, 이 것이 바로 신령스러운 삼매의 경지입니다.
3. 靈然獨照 照中還妙 露月星河 雪松雲嶠
이슬과 달과 별, 하얀 눈과 푸른 소나무, 떠도는 구름과 우뚝 선 산봉우리는 서로 이질적이지만 법계 살림 안에서 함께 만나면 절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깨달음 가운데서는 모든 사물이 오염되지 않아서 서로 어긋남 없이 원만히 잘 어울리므로 妙하다 한 것입니다.

4. 晦而彌明 隱而愈現
소나무가 눈에 덮여 있어도 더욱 파랗게 드러나고, 산봉우리가 구름에 덮여도 우뚝함이 더욱 드러나듯이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숨겨진 가운데서도 밝게 드러납니다. 중용에도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삼가면 숨을수록 더욱 빛난다고 했습니다.

5. 鶴夢煙寒 水含秋遠
묵조의 상태는 鶴夢처럼 모든 번뇌가 사라진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번뇌의 열기가 사라진 우리 마음의 당처는 차가운 것으로 표현됩니다. 가을철 공기는 차갑고 맑아서 먼 곳 풍경까지 환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또, 파란 하늘빛을 머금고 먼 풍경을 비추는 강물도 따라서 차갑습니다. 삼라만상을 모두 비추는 차가운 강물은 바로 묵조의 상태이며 한데 어우러진 원만한 진리의 모습입니다. 화엄경에서도 진리에 대해 ‘구류중생이 황금 보자기에 흩어놓은 아름다운 구슬(紫羅帳裏散眞珠)’이라고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잖습니까?

6. 浩劫空空 相與雷同
주역의 64卦중에는 地雷復(지뢰복)卦가 있습니다. 이 괘가 절기를 가르킬 때는 동지를 가르키는데 음효 5개가 위로 겹쳐 있고 제일 밑에 양효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괘의 제일 밑에 있는 양효(陽爻)는 우뢰를 상징합니다. 동지(冬至)가 되면 땅 밑에서 잠자고 있던 우뢰가 기지개를 켜고 다시 땅위로 올라와 꽃을 피우게 하듯이, 진리도 텅 비워져 잠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동지의 우뢰처럼 만물을 생겨나게 하지 않습니까?

7. 妙存默處 巧存照中
침묵이 그저 침묵으로만 끝나면 죽은 침묵입니다. 동지의 우뢰처럼 생명의 싹이 내재되어야 현실에서 묘용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6천년 전에 정리된 周易의 52번째 ‘重山艮’卦에서도 주관과 객관(能所)이 뚝 떨어졌을 때는 허물이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重山艮’卦는 산이 두 개 겹쳐있는 모양의 卦입니다. 공자는 艮卦의 모양을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象曰 艮其背면 不獲其身이요 行其庭하야도 不見其人이니 無咎라.

모양으로서 설명하면,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않을 것이요,
그 사람의 뜨락을 거닐어도 그 사람을 보려하지 않으니 허물이 없도다.”
艮卦에서의 艮은 멈춘다는(止=>止於至善. 군자는 敬에 머물고, 신하는 忠에 머물고 자식은 孝에 머무는 등)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멈춤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고 動 가운데의 靜을 의미합니다. 默照에서 볼 때, 照가 살아있는 默과 일맥상통하지요. 산이 겹겹이 둘려 있을 때에는 무리하게 전진하기 보다 고요히 멈추어서 자신도 반조하고 진리도 살펴야 되잖아요? ‘艮其背 不獲其身’은 등만 보고 몸 전체를 보려하지 말라는 我空의 뜻이 있습니다. 곧, 등은 내 몸과 마음을 볼 수 없는 자리이니 몸도 마음도 잊으라는 가르침입니다. ‘行其庭 不見其人’ 은 타인(객관세계)에 대해 마음을 비우라는 法空의 뜻이 있습니다. 我空과 法空이 이루어지면 당연히 허물이 없어집니다. 견문각지는 우리 마음의 본체가 아니고 그림자여서 시비선악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은 모르는 대로 맡겨둬야 허물이 없습니다. 묵조의 살림살이는 바로 언어가 끊긴 경지이니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맡겨야겠지요. 그래야 반야가 살아납니다. 이 것이 진리를 바로 살피는 우리의 입장입니다.

승찬대사의 信心銘에 의거하여 보더라도 默과 照가 허물이 없으려면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존재하니 하나 또한 고수하지 말지어다.
한 생각이라도 내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에도 의미를 둘 것이 없고,
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마음이라 세울 것도 없다.
허물은 하찮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지를 치는 차별의 모습에 노예가 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서 차별의 모습을 수용하면 서로 비추며 조화를 이루는데 어찌 허물이 붙겠습니까? 허물없는 이 것이 바로 노월성하(露月星河)입니다.

8. 默照之道 離微之根

離는 法性의 體를 말하며 微는 法性의 用을 말합니다. 따라서 묵조의 도는 체와 용이 뿌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조를 실천하기 위해,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일깨워 밖에 벌어진 삼라만상과, 나를 구성하고 있는 四大와 五蘊이 空한 것임을 알아차려, 숨을 들이킬 때에는(入息) 法性의 體(離)를 관하고, 숨을 내 쉴 때에는(出息) 法性의 用(微)을 觀해야 합니다.

9. 徹見離微 金梭玉機
법성의 체와 용인 이미(離微)를 확철대오해서 살피면, 法界는 바로 황금북(用)이 옥베틀(體)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직조하는 만다라로 보입니다. 부처님의 49년 설법도 이 옥베틀을 움직이며 황금북이 직조한 만다라입니다.

10. 正偏宛轉 明暗因依
정(正)은 절대평등의 體(眞空, 理, )를 의미하고, 편(偏)은 차별의 모습(妙有, 事)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당처인 體와, 차별적 세계인 현실에서의 用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그러므로 명(明)은 현실의 모습이고 色을 의미하고, 암(暗)은 잘 드러나지 않는 진리의 본체이며 空을 의미합니다. 正偏, 色空, 明暗은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고 만다라 베를 짜 듯이 서로 어울리며 의존하는 법계의 살림살이입니다. 사찰에서 목탁을 치거나 종을 울릴 때 아침에는 소리를 점점 올리고 저녁에는 소리를 점점 내리는 것도 명암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진리의 리듬입니다.

11. 依無能所 底時回互
回互는, 正偏, 色空, 明暗 등이 서로 어울리는 법계의 살림살이가 能所로 나뉘지 않아서 서로 만나지만 걸림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理事無碍의 뜻입니다.
반대로 不回互는 사람은 사람대로, 학은 학대로, 사물이 자기 위치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