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규봉 종밀 소론찬요 병서 해설 1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0:41

 

 

본래 空한데 ‘내것-네것’따로 있나
 
한 생각 망령됨이 분별 일으키니
망령 여의면 일체 경계 사라지네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은 "아집이 무너져야 비로소 지혜가 열리고 온 우주가 내것임을 알게된다고"고 강조했다.

圭峯密禪師疎論纂要幷序
(규봉 종밀 선사가 반야론을 토대로 소를 짓고 요긴한 내용을 모은 글에, 아울러 서문을 짓다)

규봉종밀선사의 소론찬요는 그 학문의 근거가 확실하고 학문적 가치 또한 소중하여 금강경오가해의 생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론찬요 라고 함은 무착과 천친이 지은 반야론 (금강경에 대한 미륵보살의 80게송을 논한 것) 가운데에서 요긴한 내용을 모아 소를 달았다는 뜻입니다. 병서라 함은 소론찬요와 아울러 서문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經의 해석은 論으로, 論의 해석은 疏로, 疏의 해석은 記로, 점점 해석이 덧붙여집니다. 규봉스님의 금강경 소론찬요는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금강경에 대한 미륵보살의 80게송을 해석한 무착과 천친의 반야론에 疏를 붙인 것입니다. 반야론에 대한 규봉스님의 疏를 해석한 記 가운데에서 잘 알려진 것은 송나라 장수스님이 10권으로 지은 刊定記입니다. 규봉스님의 소론찬요처럼 經의 대의를 완전히 파악하도록 미리 개요를 소개해주는 것을 현담이라고 합니다. 청량국사의 화엄현담도 화엄경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개요입니다.

금강경으로 천자가 되기 위해 수업했던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어 간람했습니다. 소명태자와 달리 무착은 금강경에 대한 미륵보살의 80게송을, 복덕을 쌓아가는 관점에서 18주처로 나누어 반야론 3권을 지었습니다. 또, 무착의 동생 천친은 미륵보살 게송에 대해 의심을 끊어가는 관점에서 27단의로 나누어 반야론 3권을 지었습니다.

금강경은 무상, 무주, 무념의 보시를 여러 군데에서 강조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잠시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無常한 것이고 허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가 진짜인 것으로 착각하여 탐진치 삼독심이 생기는 것이니 그 업을 소멸시키려면 무상, 무주, 무념의 보시바라밀을 비롯한 육바라밀이 행해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아공·법공도 이루어지고, 色에 대하여·身에 대하여·識에 대하여도 자재로워서 탕탕히 비워진 한 모습으로 법성이 원융함을 깨달아야 금강경을 올바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려 21년이라는 긴 세월을 반야라는 주제로 설하신 까닭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을 장애하는 아집의 제거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아집이 무너져야 비로소 지혜가 열리고 온 우주가 내 것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외우는 금강경 사구게나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금강경오가해를 단지 법문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간절히 새겨서 진리에 계합되도록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무착의 반야론은, 무착논사가 禪定에 들어서 도솔천에 올라가 반야부 경전 600부 가운데에서 제 577권에 해당되는 능단금강경의 내용을 미륵보살(용화교주, 석가의 좌보처)에게 질문했을 때 미륵보살이 80게송으로 답해준 것에 대해서 해석을 붙인 것입니다. 미륵보살과 무착논사는 600년의 時差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무착은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인 양 곧잘 내세우지만 옛사람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뚜렷하게 밝히고 그 근거를 확실하게 잡아줍니다. 공자님도 述而不作이라 하여, 옛사람의 가르침을 기술할 뿐이지 공자 자신이 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鏡心 本淨 像色 元空 夢識 無初 物境 成有 由是 惑業 襲習 報應 綸輪 塵沙劫波 莫之알絶

거울과 같은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비치는) 모양과 색깔이 본래 텅 비어있는지라, 꿈같은 인식이 처음부터 없었거늘 (홀연히 모르는 사이에) 사물의 경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미혹된 행업이 자꾸 익혀지고 그 과보에 응하는 것이 실 감는 바퀴 같아서 항사 티끌 같은 시간의 물결 속에서 (업의 사슬을) 막아 끊을 수 없을새

〈보충설명〉 시비선악에 얽매인 우리의 의식은 집착때문에 이루어진 꿈입니다. 부처님의 교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법성은 본래 둥글고 하나이며 찾아지는 것이 아닌데 나’라는 인식이 ‘내 것’이라는 집착을 만들고 탐진치라는 몽식을 자라게 합니다. 간정기에서는 이 구절에만 무려 10장의 해설이 붙여져 있습니다.

1. 鏡心 本淨; 원래 우리의 마음은 거울같이 투명하고 청정하다는 뜻.
2. 像色 元空; 거울에 비치는 영상이 본래 텅 비었다는 뜻.
3. 夢識 無初 物境 成有; 본래 空한 마음에서 제8 아뢰야식에 감추어진 최초의 미세한 無明이 홀연히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눈앞 사물의 경계가 이루어지고 존재하게 된다는 뜻.

心也者 沖虛妙粹 炳煥靈明 如彼古鏡 體自虛明 瑩徹無石疑 妙絶名相之端 淨無能所之跡 故 云鏡心 本淨 內而根身 外而器界 皆謂之像色 阿賴耶識一念之妄 變起根身器界 若離妄念 卽無一切境界之相 故 云像色 元空 夢識 只因不覺而有 心若常覺 夢識 無由現發 故 云夢識 無初 不覺心動 名爲覺明 因明起照 見分 俄興 由照立塵 相分 妄布 於是 根身 頓起 世界成差 故 云物境 成有 根身 旣興 世界已成 根塵 相對 識風 相鼓 鎖眞覺於夢宅 고智眼於風塵 沈迷三界之中 匍匐九居之內 生死循環 無有窮已 故 云由是 惑業 襲習 報應 綸輪 塵沙劫波 莫之알絶

마음이란 것은 깊고 텅 비어 미묘하고 순수하며, 불꽃처럼 환하고 신령스럽게 밝은 것이, 마치 저 옛 거울의 바탕이 스스로 허명(虛明)하여 투명하고 걸림이 없어서, 묘하게도 명상(名相)의 실마리마저 끊어지고 깨끗하기는 능소(能所)의 자취마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거울과 같은 마음이 본래 깨끗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면으로는 육근의 몸이 있고 외면으로는 기계(器界)가 있으니 이를 일컬어 상색(像色)이라 한다. 아뢰야식 한 생각 망령됨이 근신과 기계를 일으키나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곧 일체 경계의 모습도 없어지기 때문에 ‘상색(像色)이 원래 공하다’라고 말한다. 꿈속의 인식은 다만 불각(不覺)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만약 항상 깨달아 있으면 꿈속의 인식이 현발(現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꿈속의 인식이 처음부터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불각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각명(覺明)이라 이름한다. 밝음으로 인하여 비췸이 일어나 견분(見分)이 문득 흥하고 비췸으로 말미암아 대상이 세워져서 상분(相分)이 망령되이 포진하나니, 이에 근신이 몰록 일어나서 세계의 차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경(物境)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근신이 이미 일어나고 세계가 이미 이루어지매 몸과 세상이 상대하고 식(識)의 바람이 서로 북치 듯 일어나서 참된 깨달음을 꿈속에 가두며 지혜의 눈을 풍진(風塵)속에 멀게 하는지라, 삼계(三界)의 가운데에 빠져 미혹하며 구거(九居)의 안에 포복하면서 생사의 순환을 벗어날 기약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런 까닭으로 혹업이 이어지고 보응이 실 감는 바퀴처럼 꼬여 항사 티끌 같은 시간의 파도 속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1. 沖; 어디에나 조화롭게 생명을 잉태시켜 주는 텅 빔.
2. 炳; 불꽃이 피어오르듯 환한 것.
3. 覺明; 밝혀야 될 깨달음 (능엄경에서)
4. 九居; 중국의 제자백가에서 백성을 아홉 종류로 나눈 것. 구류중생.

〈보충설명〉 起身論이나 都序에서는 깨달음에서 미혹의 방향으로 의식이 벌어지는 것을 十迷로 나누어 설명하고, 미혹에서 깨달음의 방향으로 의식이 고양되는 것을 十悟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우선 十迷에 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本覺(1)은 우리의 근본 깨달음인데 여기에서 최초의 無明이 움직여 본각이 흔들리고 根本不覺(2)이 生합니다. 이 不覺에 의해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기 이전의 行인 業相(3)이 生합니다. 업상에 의지하여 마치 꿈속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듯 (能見의 相) 미혹되는 것이 轉相(4)입니다. 자기를 인식하면 곧 明鏡이 色相을 나투는 것처럼 외부 경계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되는데 이 것이 現相(5)입니다. 업상, 전상, 현상을 세(細)라고 분류합니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인식이 생기면 다시 일상생활 가운데서 연속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 것이 智相相續(6)입니다. 이 지상상속의 의식에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 執取(7)이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분별하는 것이 計名(8)입니다. 사량분별로 업이 더욱 증장되는 것이 造業(=>六蔽. 9)이고, 그렇게 미혹된 행업으로 과보를 얻는 것이 受報(10)입니다.

十悟는 이런 미혹된 삶에서 다시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도록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覺頓悟(一)는 미혹된 이 마음의 원래 상태가 本覺인 것을 경전 또는 법문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돈오는 본각과 배대를 이룹니다. 미혹의 근원이 본각임을 알아차려 괴로움을 물리치려 발심하는 것이 怖苦發心(二)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수보가 두렵고, 또 수보는 근본불각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포고발심은 수보와 근본불각에 배대를 이룹니다. 造業, 즉 육폐(慳貪, 破戒, 瞋恚, 懈怠, 散亂, 愚癡)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아야 하므로 修六道(三)는 六蔽와 배대를 이룹니다. 자신에 집착하여 사량분별하는 계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三心(悲, 智, 願)을 開發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비심과 지혜심, 그리고 자비심과 지혜심의 바탕이 되는 원심(願心)의 三心을 열어 펴야한다고 해서 三心開發(四)이 계명과 배대를 이룹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집취를 없애려면 我空을 증득해야하므로 證我空(五)은 집취와 배대를 이룹니다. 지상상속을 없애기 위해서는 法空을 증득해야 하므로 證法空(六)이 지상상속과 배대를 이룹니다. 객관세계의 인식이 空을 이루려면 色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므로 色自在(七)는 現相과 배대를 이룹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려면 마음이 자유로워져야 하므로 轉相은 心自在(八)와 배대를 이룹니다. 업의 덩어리가 사라지려면 마음이랄 것조차 없어야 하므로 離心(九)은 業相과 배대를 이룹니다. 각돈오에서 출발하여 離心까지 수행이 익으면 成佛(十)하여 본각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불은 본각과 배대를 이룹니다.

시경 맛보기

공자는 ‘詩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덮어 말한다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고, 經禮 삼백 가지와 曲禮 삼천 가지를 한 마디로 덮어 말한다면 공경 아님이 없다’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 經禮三百曲禮三千 一言以蔽之曰 無不敬) 고 詩經에 관해 평했습니다.

겸가蒼蒼 白露爲霜 所謂伊人 在水一方
溯泂從之 道阻且長 溯游從之 宛在水中央


갈대가 우거지니 이슬이 서리되려는데
그리운 그 사람은 물 건너에 있다네
물길을 거슬러서 그를 쫓아가면 길이 험하고도 멀어서
물길 따라 내려가면 물 가운데 그가 있네

겸가凄凄 白露未晞 所謂伊人 在水之湄
溯泂從之 道阻且제 溯游從之 宛在水中지


갈대가 무성하니 이슬 맺혀 촉촉한데
그리운 그 사람은 물가에 있다네
물길을 거슬러서 그를 쫓아가면 길이 험하고도 가파르매
물길 따라 내려가면 모래톱에 그가 있네

겸가采采 白露未已 所謂伊人 在水之사
溯泂從之 道阻且右 溯游從之 宛在水中沚


갈대가 반짝이니 이슬 맺혀 흐르는데
그리운 그 사람은 강가에 있다네
물길을 거슬러서 그를 쫓아가면 길이 험하고도 돌지만
물길 따라 내려가면 물가의 작은 섬에 그가 있네 -詩經 上卷, 秦風에서-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