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종경록』 해설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36

 

太湖에 달 떴거늘 누구에 말할 수 있나
 
불법, 세간서 진리 찾는 것
세간 떠나 보리 구할 수 있나

有가 이롭게 쓰이는 것은
無가 쓰임을 만들기 때문


〈제강〉

只這一卷經 六道含靈 一切性中 皆悉具足 盖爲受身之後 妄爲六根六塵 埋沒此一段靈光 終日冥冥 不知不覺 故 我佛生慈悲心 願救一切衆生 齊超苦海 共證菩提 所以 在舍衛國 爲說是經 大意 只是爲人 解粘去縛 直下 明了自性 免逐輪회 不爲六根六塵 所惑

다만 이 한 권의 경은 六道(=>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중생의 일체의 성품 가운데에 모두 다 갖추어져 있지만, 대개 (업에 의해) 몸을 받은 뒤에 망령되이 육근과 육진이 일어 이 일단의 신령스런 광명을 매몰시켜서 종일토록(죽을 때까지) 어둑어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고로 우리 부처님이 자비심을 내어, 일체 중생을 구하여 나란히 고통의 바다를 뛰어넘고 함께 보리를 증득하길 발원하셨다. 그리하여 사위국에 계실 때 이 경을 설하시니, 이 경전의 대의(大義)는 다만 사람들에게 끈끈하게 붙어있는 것(=>탐, 진, 치)을 풀어주고 (현실생활에) 묶여 있는 것을 제거하여 곧바로 자성(自性)을 밝게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고 육근육진에 미혹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이 청계산 청계사를 찾아 사적비를 살펴보고 있다.

若人 具上根上智 不撥自轉 是胸中 自有此經 且將置三十二分於空閑無用之地 亦不是過 如或未然 且聽山野 與汝 打葛藤去也

어떤 사람이 상근기와 높은 지혜를 갖추면 건드리지 않고도 (구슬처럼 걸림 없이) 저절로 굴러 가슴 가운데 스스로 이 경을 지닐 것이니, 32분의 이 능단금강경을 쓸모 없는 텅 빈 땅에 던져버린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산에 묻혀 사는 이 야인이 그대들에게 군소리 해주는 것을 들어야 한다.
* 山野는 산에서 나무하고 들에서 나물 캐는 평범한 사람이란 뜻. 여기서는 종경스님이 스스로를 낮춘 말.

夫金剛經者 自性 堅固 萬劫不壞 況金性堅剛也 般若者 智慧也 波羅蜜者 登彼岸義也 見性得度 卽登彼岸 未得度者 卽是此岸 經者 徑也 我佛 若不開箇徑路 後代兒孫 又向甚마處 進步 且道 這一步 又如何進 看取下文

대저 금강경이란 자성이 견고하여 만겁토록 무너지지 않는 것을 금성(金性)의 견고함에 비유한 것이요, 반야란 지혜요, 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뜻이니, 자성을 보아 건너감을 얻으면 곧 저 언덕에 오르는 것이요, 건너감을 얻지 못하면 곧 이 언덕에 있는 것이다. 경(經)이란 것은 곧바른 지름길(徑)이니, 우리 부처님이 만약 낱낱의 똑바른 지름길을 열지 않으셨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또한 어느 곳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자! 일러보라! 이 (최초의) 한 걸음을 어떻게 내딛을 것인가? 아래 글을 잘 살피고 취하라.
* 況은 比의 뜻.

此經深旨 無相 爲宗 顯妄明眞 ‘○’劍鋒 微露 掃萬法之本空 心花發明 照五蘊之非有 直得雲收雨霽 海湛空澄 快登般若慈舟 直到菩提彼岸 且道 心花發明 在甚마處 太湖三萬六千頃 月在波心說向誰

이 경의 깊은 뜻은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아서 허망한 것을 들추어내고 참됨을 밝히는 것이니, “○” 금강 보검의 칼날을 살짝 드러내어 만법이 空하도록 (일체를) 쓸어버리고, 마음 꽃이 피어나 오온(=>色, 受, 想, 行, 識)이 있지 않음을 밝게 비춘다.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며 바다가 맑고 허공이 깨끗하여, 쾌히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가서 보리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다. 또한 일러보라. 마음 꽃이 환하게 피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가? 삼만육천 이랑의 넓은 호수 (太湖) 한 복판에 달이 있는데 누구를 향하여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보충설명〉 달은 마음이 텅 비워졌을 때에 드러나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물이 청정해야 달이 절로 비치고 물이 탁하면 달이 비치지 않듯이 지혜도 마음이 텅 비워져야 드러나게 됩니다. 月在波心說向誰는, 큰 호수에 비친 달은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듯 이 경전의 진리도 느끼는 사람의 몫이란 뜻입니다.

설의) 劍鋒 至彼岸 萬法 本空 五陰 非有 但以妄緣 而得成立 智照 妄緣 萬法 俱沈 體露眞常 五蘊 皆空 到這裏 一似雲收雨霽 海湛空 澄 無一物爲緣爲對 無一事爲障爲碍 快登般若慈舟 直到菩提彼岸 太 湖云云 佛法 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猶如求兎角 欲識得佛 法的的大意 直須向十二時中四威儀內覺觀波濤中 처捕來 처捕去 來 去 忽地 識得根源去在 縱然識得根源去 只可自怡悅 不堪持 贈君

검봉에서부터 피안까지의 문장은, 만법이 본래 공하여 오음이 있지 않은데 단지 허망한 인연으로써 성립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혜로 허망한 인연을 비추면 만법이 모두 잠겨버리고 본체의 참되고 항상함이 드러나 오온이 모두 공해진다. 이 가운데 이르면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어 바다가 맑고 허공이 깨끗하여 한 물건도 반연되지 않고 한 가지 일도 장애됨이 없어서 쾌히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 곧바로 보리의 저 언덕에 다다른다. ‘태호~’운운은 ‘불법이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여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니 세간을 떠나 보리를 구한다면 토끼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불법의 적적한 대의를 알고자 한다면 곧 모름지기 하루 내내 4위의(=>行, 住, 坐, 臥)에서 일어나는 覺觀의 파도(=>망상 덩어리)를 향해 엿보고 잡아오고 엿보고 잡아가야 할지니, 엿보아 오고 엿보아 가면 문득 근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원을 알았다 하더라도 단지 스스로 기뻐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송요〉
法王權實令雙行 雷捲風馳海岳傾

부처님이 방편과 실상의 이치를 쌍으로 행하니
우뢰가 떨치고 바람이 몰아쳐 바다가 침몰하고 산이 기울도다.

霹靂一聲雲散盡 到家元不涉途程

우뢰 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모두 흩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원래부터 길을 밟은 적이 없도다.

〈보충설명〉 第二句에서 바다가 침몰하고 산이 기운다는 것은, 오욕락의 業海와 人我相의 산이 추풍낙엽처럼 다 사라져 空해진다는 뜻입니다. 第三句와 第四句는, 여러 가지 相에 집착해서 살다가 금강경의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의 본래 자성이 진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게된다는 뜻입니다.

설의) 捲 當作震

권(捲)은 마땅히 진(震)으로 써야한다.

大凡垂化 有權有實 有照有用 今佛 從無言中 興敎海之彼瀾 向 敎海裏 現無言之密旨 是謂權實令雙行也 風行草偃 化功 神速 五欲海 自渴 我人山 自倒 圓音落處 雲散盡 不曾擡步便還家

대체로 (부처님의) 교화를 드리우는 데는 방편(경)도 있고 실상(이치)도 있으며 (지혜의) 비춤도 있고 동용(행동)도 있다. 이제 부처님이 말없는 가운데 가르침의 바다에서 물결을 일으키시고 그 바다 가운데를 향하여 말없는 비밀스런 가르침을 나타내시니, 이것이 바로 ‘방편과 실상을 쌍으로 행한다’라는 것이다. 바람이 일어(유교에서는 군자의 덕) 초목이 눕고(유교에서는 소인의 덕) 교화의 공덕이 너무도 빠르니, 오욕의 바다가 저절로 말라버리고 아상과 인상의 산이 저절로 무너져서, 圓音(부처님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구름이 모두 흩어지니 일찍이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다시 고향(대법왕)에 돌아오는 것이다.

〈참고〉 우리는 존재(有)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존재에 대한 인식이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존재(有)는 없는 것(無)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나지요. 비어 있는 공간이 우선이고 존재는 그 공간에 의지하면서 쓰임이 생겨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 무(無)의 용(用)에 관해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중국에 전해진 금강경은 이미 활짝 꽃 핀 노자사상에 의해 더 잘 소화될 수 있었습니다.

道德經 第 11章 無之用
三十輻共一곡 當其無有車之用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하나의 바퀴 통과 함께 하니
바퀴 통에 공간이 있어 수레가 돌아가도다.

연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진흙을 비벼서 그릇을 만드니
그릇이 비어있어 쓸모가 있도다.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드니
그 방이 비어 있어 쓰임이 있도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그러므로, 有(존재)가 이롭게 쓰이는 것은
無가 쓰임을 만들기 때문이로다.

〈보충설명〉 수레바퀴는 비어있는 바퀴 통에 여러 개의 바퀴 살이 모여 하나로 연결되어야 돌아가게 됩니다. 그릇도 안이 비어 있어야 내용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방도 마찬가지겠지요. 문과 창문을 내고 실내에 공간이 생겨야 안과 밖의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함이 없고, 소리도 없고, 모습도 없는 無의 세계가 근본이 되어 만물의 쓰임이 존재하게 됩니다. 만물의 존재에 우선하는 도덕경의 이 無는 금강경에서의 無相과 상통합니다. 또, 無를 근본 삼은 도덕경에서의 用은 我空과 法空의 바탕에서 행해지는 바라밀과 상통합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