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선시 맛보기

通達無我法者 2008. 9. 29. 05:43

 

 

1. 군말 (만해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보충설명>
1. 한용운 스님의 詩語 ‘님’은 바로 침묵으로 말하는 진리입니다. 유무(有無)에 관한 외도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응답한 침묵, 문수보살의 질문에 대해 유마거사가 응답한 침묵이며, 바로 진리에 대한 언어입니다. 부처님과 유마거사의 응답에서 볼 수 있듯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한 그 침묵의 자리에서 장미꽃도 피어나고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이 나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 긔룬 것: 그리워하는 것.
3.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님과 내가 둘이 아닌 일체라는 뜻.
4.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진공에서 벌어진 묘유가 살아있는 자유, 즉 해탈의 자유만이 참다운 자유.
5.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을 위해 시를 쓰는 마음은 중생제도의 원력을 지닌 보살의 마음.

2. 임께서 부르시면 (신석정) (「동광」 24호, 1931.8)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를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보충설명>
1. 전원시인 신석정은 서정주나 고은 보다 훨씬 선배 시인으로서 1930년대에 ‘촛불’이라는 시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신석정 시인은 노자와 장자, 금강경에 대해서도 매우 밝았는데 ‘임께서 부르시면’이란 시는 금강경 분위기에 많이 근접해 있습니다.
2. 자신의 수행에만 편히 안주한 소승의 마음이 아니고 일체의 생명을 모두 공경하고 존증하는 대승의 마음으로 부처님 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의 경지를 표현했다고 감상하면 아주 재미있는 詩입니다. 말없이 재를 넘는 초승달처럼 자연과 한 몸으로 교감하면서,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가는 낙엽처럼 作爲 없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四相을 제거한 청정심으로, 잔디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동사섭(同事攝)의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할 때라야 진정한 진리에 이른 것입니다.

3. 黃蘗希運의 해제시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진로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어서
굳건히 노끈을 조여서 한 마당을 지었네.
이 한 번이라도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겠는가?


<보충설명>
1. 동안거가 끝날 때 대중에게 들려준 황벽스님의 시입니다. 황벽희운스님은 백장스님의 제자로 기백이 대단했던 분입니다. 이 시는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짙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처럼, 화두를 들고 뼈를 깎는 精進을 거쳐야 불법을 바르게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2. 굳건히 노끈을 잡아당겨 한 마당을 지었다는 것은 긴장하는 마음으로 화두도 들고 또 생명을 걸면서 정진의 한마당을 펼쳐보라는 뜻입니다.
3. 코를 찌르는 매화의 향기는 수행자가 얻는 금강반야입니다. 매화는 추위를 견디고 피어납니다. 추위와 얼음과 눈에 결코 야합하지 않고 도도한 군자의 마음으로 이겨내기 때문에 향기를 뿜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도 주위의 모습에 끌려 다니거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4. 月夜詠梅 (退溪李滉의 陶山月夜詠梅 六首 가운데 第一首)

獨倚山窓夜色寒
梅梢月上正團團
不須更喚微風至
自有淸香滿院間

산창에 홀로 기댄 밤기운이 차가운데
매화가지 끝에 걸린 달은 둥글고 둥그러라.
실바람 살랑 불어오지 않아도
저절로 맑은 향기 뜨락 가득 퍼지네.


<보충설명>
1. 봄을 기다리며 짓는 시를 ‘투춘시(偸春詩)’라고 합니다. 이 시는 퇴계선생이 도산서원에 있으면서 달밤의 매화를 두고 노래로 읊은 것입니다.
2. 夜色寒: 밤기운이 차갑다는 것은 모든 名相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3.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와 그 끝에 걸려 있는 둥근 달은 서로 잘 어울리는 짝입니다. 향기와 광명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4. 不須更喚微風至 自有淸香滿院間: 신령스런 우리의 진여가 현실에 활발발하게 드러나는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모습을 표현한 詩句입니다.

5. 鳥鳴澗 (王維)

人閑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사람은 한가롭고 월계꽃은 뚝뚝 떨어지는데
밤이 고요하니 봄 산도 덩그러니 비었구나.
달이 떠오르니 산새가 놀라고
때때로 냇물에 섞여 울음소리 들리네.


<보충설명>
1. 詩佛이라는 칭호를 얻은 왕유는 젊어서 喪妻한 뒤로 자연과 더불어 혼자 살면서 대지조율사를 섬기며 참선도 많이 하고 육조스님의 비문도 지었습니다.
2. 사람들이 바쁘게 살면 계절이 왔다 가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지각하기 어렵습니다. 분주함에서 벗어나 안과 밖이 편안하고 한가로워야 비로소 꽃잎이 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시는 마음의 한가로움, 고요한 밤, 텅빈 산이라는 진공의 분위기에서 툭툭 떨어지는 꽃, 떠오르는 달, 산새의 울음, 시냇물 소리 등의 묘유가 매우 아름답게 어울립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