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대승정종분/2/오직 가섭만이 미소 지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21:08

 

 

無門關 第 6則 世尊拈花

[本則] 世尊 昔在靈山會上 拈花示衆 是時 衆皆黙言 惟迦葉尊者 破顔微笑 世尊云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世尊께서 그 옛날 靈山會上에 올라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이 때 대중이 모두 아무 말 없었지만 오직 迦葉 존자 만 빙그레 미소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正法眼藏이 있으니 涅槃妙心이로다. 그 자리는 實相이지만 모든 相이 끊어졌고, 微妙한 法의 門이요, 文字를 세울 수도 없으며, 가르침 밖에 따로 傳하는 것이니 이를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

[評唱] 黃面瞿曇 傍若無人 壓良爲賤 懸羊頭賣狗肉 將謂多少奇特 只如當時大衆都笑 正法眼藏 作麽生傳 設使迦葉不笑 正法眼藏 又作麽生傳 若道正法眼藏 有傳授 黃面老子 誑謼閭閻 若道無傳授 爲甚麽獨許迦葉
(무문혜개가 말하건대,) 누리끼리한 얼굴의 고타마가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 선량한 사람들을 제외시켜 천하게 전락시켜버렸으니,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형국이로다. 얼핏 기특할 법하다고 다소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때 모든 대중이 웃었다면 정법안장을 누구에게 전했겠는가? 설사 가섭이 미소 짓지 않았다면 또 정법안장을 누구에게 전했을 것인가? 만약, 정법안장이 전해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얼굴 누런 고타마가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혼란시킨 것이며, 또 전하고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유독 가섭에게만 허여했는가?

頌曰 拈起花來 尾巴已露 迦葉破顔 人天罔措
송하여 가로되, 꽃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꼬리까지 온몸이 다 드러났도다. 가섭이 미소 지었으니, 人天 모두 몸 둘 바를 몰랐도다.


<보충설명>
1. 염화미소는 법화경 시설 당시 가섭이 부처님의 법을 인가 받는 장면입니다. 부처님께서 無言으로 연꽃을 들어 보임은 모든 가식을 떨구어 내고 物我가 하나인 本源의 모습을 보인 것이며, 가섭이 미소 지은 것은 진공에서 벌어진 妙有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서 禪法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2. 평창은 부처님 말씀에 대한 무문스님의 評인데 禪家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拈弄(염송으로 희롱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교주의 가르침을 평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선(禪)에서는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수에 도달케 하는 길잡이로서 활달하고 자재롭게 행해집니다.
3.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생 동안 說했습니다. 불성의 자리는 말로서 표현할 수 도 없고 전해 줄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것을 정법안장이란 말로 표현해서 가섭에게만 전해 준다면 다른 사람의 살림살이를 모두 무시하는 모순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문스님은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염롱해보는 것입니다. 선(禪)의 입장, 절대적인 진리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꽃을 들고 가섭이 미소 짓는 것은 진리에 관해 이심전심으로 교류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모습에 걸려들면 안 됩니다.
3. 황면: 나뭇잎이 말라서 누렇게 퇴색한 것처럼 볼품없는 모습. 부처님이 별 볼일 없는 노인이라는 의미.
4. 정법안장: 바른 법의 눈의 창고, 진리 그 당처, 능소가 사라진 한 모습의 진리.
5. 열반묘심: 생사가 따로 없고, 진공의 자리에서 꽃피고 열매가 맺히듯 삼라만상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
6. 실상무상: 탐진치에서 벗어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는 진리의 실상은 無相이라는 뜻.
7. 미묘법문: 언설로써는 표현할 수 없어 방편으로 연꽃을 들어 보일 수밖에 없는 진리.
8. 불립문자, 교외별전: 지식이나 언어를 뛰어 넘어 진리를 깨닫게 하는 禪의 가르침. 禪의 공안에는 역설, 모순, 미로 등과 직면하여 일상적인 인식을 분쇄시키는 파격적 요법이 많다.
9. 拈起花來, 尾巴已露: 傳授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진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모습이 다 드러났다는 뜻.
10. 人天罔措: 법회에 모인 人天 모두 어리둥절하여 몸둘 곳을 몰랐다는 뜻.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