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이른 바 색에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에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할지니라.
本論 但指三事 爲色等 謂自身 報恩 果報 故 偈 云自身及報恩 果報斯不着 護存己不施 防求於異事
천친의 반야론에는 다만 세 가지 일이 色(추상명사로서 조건이 있는 보시)등이 된다고 가리키니, 말하자면 자신과 보은과 과보이다. 그러므로 미륵게에 이르길, ‘자신과 보은과 과보에 대한 집착을 끊어서, 자신의 존립을 위해 베풀지 않는 것도 막고 다른 일을 구하는 것도 방비하라’ 고 하였다.
<보충설명>
1. 자신(自身): 남에게 보시하면서 자신의 영달을 구하는 것.
2. 보은(報恩): 미래에 은혜를 보답 받아야 한다는 것.
3. 과보(果報): 좋은 과보를 바라는 것.
[六祖]凡夫布施 只求身相端嚴 五欲快樂故 報盡 卽墮三塗 世尊 大慈 敎行無相布施 不求身相端嚴 五欲快樂 但令內破慳心 外利益一切衆生 如是相應 是名不住色布施
범부의 보시는 다만 몸과 외양의 단엄과 五欲(財色食名壽)의 쾌락을 구하는 까닭으로 과보가 다하면 곧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기 때문에, 세존이 큰 자비로 相이 없는 보시를 행해서 신상의 단엄과 오욕의 쾌락을 구하지 않게 하고 다만 안으로는 간탐심을 깨뜨리게 하며 밖으로는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가르쳤으니, 이와 같이 상응하는 것을 무주색보시라 이름한다.
[圭峰]三 摠結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무르지 않아야 함이니
前 但指三事 今則心境空有 微細盡袪 故 偈 云遠離取相心 論 云不見施物受者施者 無着 云不住相想 有人 將此結文 爲別答降伏 非也 前標次釋此結 皆云無住 都是脩中降伏之義 何忽偏配結文 爲別答問
앞에서는 다만 세 가지를 가리켰으나, 여기서는 심(心)과 경(境)과 공(空)과 유(有)를 미세하게 모두 제거할 것 (心境空有가 모두 상에 해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에는 이르길, ‘상을 취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라’ 고 하였으며, 반야론에는 이르길,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사람을 모두 보지 않아야 한다(→三輪淸淨)’고 하였으며, 무착은 이르길, “모습과 마음에 머무르지 말라.”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결론적인 경문을 두고 항복이라는 물음에 대한 별도의 답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앞에서는 표했고, 그 다음은 해석했고, 여기에서는 결론하니, 이 모두는 무주(無住)가 수행하는 가운데 항복받는다는 뜻이니, 어찌 치우쳐서 결문에만 배대하여 물음에 대한 별답이 되겠는가.
[六祖]應如無相心布施者 爲無能施之心 不見所施之物 不分別受施之人 是不住相布施也
응당 이와 같이 무상의 마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은, 능히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보시하는 물건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보시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으니, 이 것이 부주상보시이다.
[圭峰]四 顯益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富德 不可思量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가히 사량할 수 없는 것이니라.
[說]以智起行 獲福無邊
지혜로써 행을 일으킴에 복을 얻는 것이 가 없도다.
[六祖]菩薩 行施 心無所希 其所獲福 如十方虛空 不可較量 一說 布者 普也 施者 散也 能普散盡胸中 妄念習氣煩惱 四相 泯絶 無所蘊積 是眞布施 又說 布者 普也 不住六塵境界 又不有漏分別 惟常返歸淸淨 了萬法空寂 若不了此意 惟增諸業 故須內除貪愛 外行布施 內外相應 獲福無量 見人作惡 不見其過 自性 不生分別 是爲離相 依敎修行 心無能所 卽是善法 修行人 心有能所 不名善法 能所心 不滅 終不得解脫 念念常行般若智 其福 無量無邊 依如是修行 感得一切人天 恭敬供養 是名爲福德 常行不住相布施 普敬一切含生 其功德 無有邊際 不可稱計也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일설에 “보(布)는 넓다는 뜻이고 시(施)는 흩는다는 뜻이니, 능히 가슴 속의 망념과 습기와 번뇌를 널리 흩어 버리고 사상(四相)을 끊어 없애 전혀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 진실로 보시다.” 하였고, 또 일설에 “보(布)는 넓다는 뜻이니 육진경계에도 머물지 않고 유루의 분별도 하지 않으며, 오직 항상 청정한 진여에 돌아가서 만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만일 이 뜻을 요달하지 못하면, 오직 온갖 업만 증장시키기 때문에 모름지기 안으로는 탐애(貪愛)를 제거하고 밖으로는 보시를 행해서 안과 밖이 상응하여야 복 얻음이 무량할 것이다. 사람들의 악행을 보더라도 그 허물을 보지 않고 자성(自性)에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이 상을 여의는 것이 되고, 가르침에 의지하고 수행하여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善法)이라 이름할 수 없고, 능소의 마음이 멸하지 않으면 끝내 해탈할 수 없으니, 생각생각이 항상 반야의 지혜를 행해야만 그 복이 무량무변하다. 이와 같이 의지하여 수행하면 일체 인천(人天)의 공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으니, 이것이 복덕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항상 부주상보시를 행하여 일체의 중생을 널리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可히 헤아릴 수 없다.
[傅大士]檀波羅蜜布施頌 曰施門 通六行 六行 束三檀 資生無畏法 聲色勿相干 二邊 純莫立 中道 不須安 欲覓無生處 背境向心觀
단바라밀보시송에 이르길 ‘보시의 문이 여섯 가지의 실천에 통하고, 여섯 가지 실천이 삼단으로 묶인다. 자생(資生)과 무외(無畏)와 법(法)보시여! 성색(聲色)에 머물러 서로 범하지 않게 할지니라. 이쪽저쪽에도 세우지 말고 중도(中道)에도 모름지기 두지 말지니, 불생불멸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면 모든 경계를 등지고 마음을 향하여 관할지어다.’
尸羅波羅蜜持戒頌 曰尸羅得淸淨 無量劫來因 妄想 如怨賊 貪愛 若參辰 在欲而無欲 居塵不染塵 權依離垢地 當證法王身
시라바라밀지계송에 이르길 ‘지계로 청정을 얻음이여!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온 인(因)이로다. 망상은 원수나 도적처럼 여기고, 탐애(貪愛)는 저녁별(參星)과 새벽별(辰星)이 서로 만나지 못하듯 버릴지니라. 욕심의 경계에서 욕심을 없애고 티끌 속에 거해서도 티끌에 물들지 말지니, 방편으로 이구지(離垢地. 보살의 십지 가운데 제2지. 중도의 이치에 머물면서 중생계의 더러움을 여의는 지위)에 의지하여 마땅히 법왕의 몸을 증득할지어다.’
羼提波羅蜜忍辱頌 曰忍心 如幻夢 辱境 若龜毛 常能修此觀 逢難轉堅牢 無非亦無是 無下亦無高 欲滅貪嗔賊 須行智慧刀
찬제바라밀인욕송에 이르길 ‘참는 마음은 몽환과 같고 욕된 경계는 거북의 털과 같으니, 언제나 이렇게 능히 관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지혜가 견고해지리라. 시비(是非)도 없으며 고하(高下)도 없으니, 탐진(貪嗔)의 도적을 멸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지혜의 칼을 행해야 하니라.’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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