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대승정종분/6/중생과 부처는 평등한 하나의 근원

通達無我法者 2008. 9. 30. 16:44

 

 

[宗鏡]涅槃淸淨 盡令含識依歸 四相俱忘 實無衆生滅度 如斯了悟 便能脫死超生 其或未然 依舊迷封滯殼 會麽 生死涅槃 本平等 妄心盡處卽菩提

열반청정이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진여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요, 사상(四相)이 함께 사라졌음이여! 실로 한 중생도 멸도했다는 흔적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깨달으면 문득 능히 생사를 초탈할 것이나, 혹 그렇지 않으면 예나 다름없이 진여가 봉해져 미혹되고 껍질에 쌓여 있으리라. 알겠는가? 생사열반이 본래 평등하니 망심(妄心)을 다한 곳이 곧 보리로다.

<보충설명>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도 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다는 진공의 자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본래 그 자리가 열반청정입니다. 이 열반청정은 푸른 하늘과 같아서 우리가 밑에서 볼 때, 구름에 가려지면 없는 것 같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說]悲化含生 卽不無 爭乃能所歷然 智冥眞際 平等無有高下 如斯了悟 便能超生脫死 其或未然 依舊迷無明之封蔀 滯有漏之形殼

자비로서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능소(能所)가 역연(歷然)한 것을 어찌 하겠는가. 지혜로 가만히 진리에 합하게 되면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으니, 이처럼 깨달으면 문득 능히 생사를 초탈할 것이나, 혹 그렇지 못하면 예나 다름없이 무명(無明)의 덮개에 미혹되고 유루(有漏)의 껍질에 막힐 것이다.

<보충설명> 현상계를 바라보면 주관과 객체가 엄연히 따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현상계의 모습들을 굳이 능소로 나누어 상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空히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분주한 망상도 알고 보면 無常한 것이니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망상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 그 것이 허망한 망상임을 놓치지 말고 자각하여 가라앉히면 됩니다.
마치 맑은 물을 얻기 위해 더러워진 샘물을 퍼내버리고 새로운 샘을 파내려고 애쓰면 새로 맑은 물을 얻기가 어렵지만, 밑바닥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도록 더러워진 샘물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곧 맑은 물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頂門具眼辨來端 衆類何曾入涅槃 絶後再甦無一物 了知生死不相干

정문(頂門)에 갖춘 눈으로 오는 이유마다 변별하니 중생들이 어찌 일찍이 열반에 들겠으리오. 끊어진 뒤에 다시 태어나 한 물건도 없어야 생사(生死)가 서로 간섭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리라.

[說]有智無悲 亦只是一隻眼 有悲無智 亦只是一隻眼 悲智雙運 出入自在 方得名爲頂門具眼 來端者 生佛平等之一源 悲智不二之一體 唯有具眼 辨得有分 來端 旣已辨得 何更見有能度所度 衆生滅盡而無滅 生佛 都盧眼裏花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단지 한쪽 눈이요,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어도 또한 한쪽 눈이니, 자비와 지혜가 쌍으로 움직여서 출입(出入)이 자재하여야 바야흐로 정문구안(頂門具眼)이라 이름 할 수 있다. 來端(오는 이유→ 생명의 줄기로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여러 가지 단서들)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한 하나의 근원이며 자비와 지혜가 둘이 아닌 하나의 몸인 것이니, 오직 두 눈을 갖추어야 분수의 유무를 바르게 변별할 것이다.
오는 이유(來端)를 이미 변별한다면 어찌 다시 내가 제도(능도)했고 저 사람이 제도됐다(소도)는 차별의 생각이 있겠는가. 중생을 멸도해 마치되 멸도했다는 흔적조차 없으면, 중생과 부처가 한갓 눈병 가운데 보이는 허상의 꽃과 같다.

[圭峰]二 答修行降心問 於中 又五 一 摠標

두 번째는 수행항심의 물음에 답한 것이니, 그 가운데 또 다섯이 있다. 첫째는 총히 표한 것이다.

妙行無住分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다시 수보리야, 보살이 법에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니

<보충설명1> ‘부차(復次)’는 안주항심과 수행항심의 두 가지 물음 중에 안주항심의 답이 앞에서 끝나고 뒤이어 수행항심의 물음에 답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보충설명2> ‘응(應)’이란 단어는 ‘뻑뻑이’ ‘응당히’라고 새겨지는데 금강경에 자주 둥장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아주 소중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내가 부처의 지혜를 지니고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아직은 연꽃이 올라오지 않은 연잎의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연꽃을 활짝 피워 그 향기가 우주에 충만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보충설명3> ‘於法’에서의 법(法)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 육진(六塵)을 이야기 합니다.
<보충설명4> ‘應無所住 行於布施’는, 보살이 육진의 세계에 조금도 물들지 않고 텅 빈 자리에서 보시공덕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