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여리실견분/1/일체의 선악은 법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通達無我法者 2008. 9. 30. 17:18

 

 

일체의 선악은 법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수보리야 너의 뜻은 어떠한가, 가히 겉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보충설명1>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가 정리한 금강경 32분 가운데, 앞에서 배운 第三大乘正宗分에서는 보살이 四心(廣大心, 第一心, 常心, 不顚倒心)으로써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第四妙行無住分에서는 不住相布施할 때 그 복덕이 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배울 第五如理實見分은 모습이 없는 모습으로 여래를 보아야 비로서 佛果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보충설명2> 여리실견분을 천친의 27단위(斷位)에 배대하여 살펴보면 단구불행시주상의(斷求佛行施住相疑)에 해당합니다. 묘행무주분에서 머무는 바도 없고 相(모습)도 없이 보시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부주상보시하여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부처가 된다면, 이것도 결국 相을 쫒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런 의심을 끊어주려고 수보리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겉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습니다.

<보충설명3> 부처님께서 나투신 32상 80종호는 인연의 화합으로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므로 진실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진실된 모습을 보려면 모습이 사라지고 없는 본래의 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것이 이치에 알맞은 實見이 되는 것입니다.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겉모습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六祖] 色身 卽有相 法身 卽無相 色身者 四大和合 父母所生 肉眼所見 法身者 無有形段 非有靑黃赤白 無一切相貌 非肉眼能見 慧眼 乃能見之 凡夫 但見色身如來 不見法身如來 法身 量等虛空 是故 佛 問須菩提 可以身相 見如來不 須菩提 知凡夫 但見色身如來 不見法身如來 故 言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색신(色身)은 모습이 있는 것이고 법신(法身)은 모습이 없는 것이다. 색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부모가 낳아준 것이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지만, 법신은 형체가 없어서 청황적백(靑黃赤白)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일체의 모습이 없어서 육안으로 볼 수 없고 혜안(慧眼)이라야 능히 볼 수 있다. 범부(凡夫)는 단지 색신의 여래만 보고 법신의 여래는 보지 못하니, 법신은 그 양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가히 겉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하셨을 때, 수보리가 범부는 단지 색신여래만 보고 법신여래를 보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겉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겉모습은 곧 법신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說]佛擧身相問空生 欲明妙圓無相身 空生 本是獅子兒 不曾逐塊能咬人 莫以無相云是斷 非形 終不外於形

부처님께서 겉모습을 가지고 공생(수보리)에게 질문하여 묘하고 원만하며 모습이 끊어진 몸을 밝히고자 하시거늘, 공생도 본래 사자라서 일찍이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쫓지 않고 흙을 던진 사람을 물도다. 모습이 없다하여 모든 것을 단멸(斷滅)로 말하지 말지니라. 모습 아닌 것이 모습 밖에 있는 것이 아니로다.

<보충설명> 無相은 實相이며 法身입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일체의 형상들은 모습이 없는 실상으로부터 벌어져 나온 것입니다. 모습이 끊어진 실상은 모습을 나툰 사물 안과 밖에 두루한 것이니 無相이라하여 형상을 떠나 있거나 형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일체 중생의 몸통 안과 밖에 두루한 법신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圭峰] 相是有爲라 生住異滅이어니와 佛體는 異此일새 故非身相이니라 偈에 云三相이 異體故者는 佛體가 異於有爲三相也니라 住異二相은 同是現在일새 故合爲一이어니와 若細分인댄 卽四니라 故로 唯識에 云生表此法이 先非有요 滅表此法이 後是無요 異表此法이 非凝然이요 住票此法이 暫有用이라하다

相은 有爲라서 生住異滅하지만 佛體는 이와 달리 겉모습이 아니다. 偈에 이르되, “三相(1生, 2住異, 3滅)이 體와 다른 까닭은 佛體가 有爲의 三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住와 異 二相은 같은 現在이므로 合하여 하나가 되고, 만약 細分한다면 곧 사상(생주이멸)인 것이니라.” 하였다. 故로 唯識에서는 “生은 먼저 없던 이 법이 인연 따라 나타남이요, 멸은 이 法이 후에 무로 되돌아감이요, 異는 이 法이 항상 응결된 상태가 아닌 것이며, 住는 이 法이 잠시 작용하고 있음을 표하는 것이니라.”하였다.

[六祖] 色身 是相 法身 是性 一切善惡 盡由法身 不由色身 法身 若作惡 色身 不生善處 法身 作善 色身 不墮惡處 凡夫 唯見色身 不見法身 不能行無住相布施 不能於一切處 行平等行 不能普敬一切衆生 見法身者 卽能行無住相布施 卽能普敬一切衆生 卽能脩般若波羅蜜行 方信一切衆生 同一眞性 本來淸淨 無有垢穢 具足恒沙妙用

색신은 모습이고 법신은 성품이다. 일체의 선악이 모두 법신을 말미암은 것이지 색신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법신이 만약 악을 지으면 색신이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고, 법신이 선을 지으면 색신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범부는 오로지 색신만 보고 법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주상보시를 행하지 못하며 일체처에 평등한 행동을 행하지 못하며 널리 일체 중생을 공경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신을 보는 자는 능히 무주상보시를 행하며 일체 중생을 공경하고 반야바라밀행을 닦아서 바야흐로 일체 중생이 동일한 진성(眞性)으로서 본래 청정하여 때 낄 것이 없고 항사(恒沙)와 같은 묘용(妙用)을 구족했음을 믿는다.

[冶父] 且道 卽今行住坐臥 是甚麽相 休瞌睡

또한 일러보라. 지금의 행주좌와(行住坐臥)는 이 무슨 모습인가? 잠꼬대를 쉴지어다.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법신을 보라 하시니까 야보스님은 범부의 옹졸한 마음에 법신만 긍정하고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를 비롯하여 현실에 나투어진 삼라만상의 모습을 부정할까 저어하여 경각심을 일으키는 문장입니다. 행주좌와 움직이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모습을 감싸고 있는 법신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說] 吾今色身 卽是常身法身 不得離却色身 別求常身法身 若也離却色身 別求常身法身 慈氏宮中 願生兜率 含元殿裡 更覓長安 所以 道 卽今行住坐臥 是甚麽相 要見常身法身 直須向行住坐臥處 覰破 始得 離却日用 別求常身法身 便是鬼窟裏 作活計 所以 道 休瞌睡

나의 이 색신이 곧 상신(常身)인 법신(法身)이니, 이 색신을 여의고 따로이 법신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약 색신을 여의고 따로 항상한 법신을 구한다면 자씨궁(慈氏宮→도솔천에 있는 부처의 궁전, 당래의 교주인 미륵이 주석하고 계심)에 있으면서 도솔천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요, 함원전(含元殿→장안에 있던 唐代의 궁전)에 있으면서 다시 장안을 찾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말씀하시되, “지금의 행주좌와(行住坐臥)는 이 무슨 모습인가?” 라고 하신 것이다. 상신인 법신을 보고자 한다면 바로 모름지기 행주좌와처를 향하여 엿보아 깨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상신법신을 구한다면 곧 귀신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차리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말씀하시되, “잠꼬대를 쉴지니라.”고 하신 것이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