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정신희유분/1/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 14:39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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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中에서 中庸의 道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소인은 중용을 지키지 못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답게 살면서 항상 때에 알맞게 행하는 것이요,
소인의 중용은 소인노릇 하면서도 꺼려할 줄 모르는 것이다.

中庸 中에서 道의 體用

君子之道 費而隱

군자의 도는 풍성하고도 감춰져 있다.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之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

匹夫匹婦의 어리석음으로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匹夫匹婦의 불초(不肖)로도 중용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능히 행할 수 없는 바가 있다.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 語小天下莫能破焉

천하가 크더라도 사람을 모두 감싸주지 못하여 오히려 서운한 바가 있거늘,
군자의 큰 도를 말하자면 천하의 어떤 물건으로도 능히 실을 수 없고,
적음을 말한다면 천하의 어떤 물건으로도 쪼갤 수 없다.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시경에 이르길, ‘솔개는 광활한 하늘을 나르고 물고기는 연못에 펄쩍 뛴다.’ 하였으니,
천상천하에 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匹夫匹婦로부터 시작하여 그 지극함이 천지(天地)에까지 드러난다.

<보충설명1> 비(費)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 것처럼 현상적으로 풍성하게 관찰할 수 있는 만상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은(隱)은 텅 빈 상태로 모습을 숨기고 있어서 실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하고 장대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금강경의 진공묘유와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보충설명2> ‘부부’ 이하의 문장은 중용의 체와 용을 어리석은 사람도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만, 그 지극한 데 이르면 名相이 끊어져서 성인이라 하더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행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는 뜻입니다.

正信希有分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 올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은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과 장구(章句)를 듣고서 실상의 믿음을 내겠습니까?”

<보충설명> ‘정신희유’는 말세에 태어난 중생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매우 희유한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의 묘행무주분과 여리실견분에서는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말세의 중생들은 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로 불과(佛果)의 싹을 틔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소명태자가 정신희유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정신희유분은 말세중생이 얼마나 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수보리의 질의에 대하여, 말세중생의 근기에 알맞은 수행지침을 내려주는 부처님의 응답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佛 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한 뒤, 후오백세(後五百歲)에도 계율을 지니며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장구에 능히 신심을 내고 이것을 실상의 진리로 삼아 수행하는 이가 있을 것이니라.”

<보충설명> 대집경에는 부처님 열반 후에 500년마다 불법이 쇠퇴해 가는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멸후 첫 번째의 오백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라 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시대이고, 두 번째 오백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라 하여 선정으로 깨달음을 얻는 시대이고, 세 번째 오백년은 독송다문견고(讀誦多聞堅固)라 하여 경문을 많이 독송하고 연구하여 공덕을 닦는 시대이고, 네 번째 오백년은 다조탑사견고(多造塔寺堅固)라 하여 탑과 절을 많이 지어 공덕을 닦는 시대이며, 마지막으로 지금의 우리가 사는 시대에 속하는 다섯 번째 오백년은 오오백세 혹은 후오백세라고도 하는데 투쟁견고(鬪爭堅固)라 하여 세상에 투쟁과 갈등이 많이 일어나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공덕이 사라지는(→百法隱沒) 시대입니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마땅히 알라. 이런 사람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넷·다섯 부처님의 시대에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무량한 천만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장구를 듣고 곧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니라.”

[冶父]金佛 不度爐 木佛 不度火 泥佛 不度水

금으로 만든 부처님은 화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도다.

<보충설명> 아무리 좋은 금이라도 모습으로 꾸며진 부처님은 가짜이며 용광로에 들어가면 없어집니다. 갖가지로 장엄된 모습의 보신(報身)과 화신(化身)도 역시 모습이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모습이 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신의 모습을 부처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 단하천연선사는 한 겨울 추위에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법당의 목불을 태웠습니다. 절의 원주는 대단히 놀랬지만 실상의 부처는 모습과 관계없이 불생불멸이며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하천연선사의 뜻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하선사를 흉내 내어 진리의 상징으로서 또는 신앙의 상징으로서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을 보며 모습이라고 여겨 통째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예를 올리며 상징으로 모셔진 부처님을 통해 실상의 모습을 달관해야 합니다.

三佛形儀總不眞 眼中瞳子面前人 若能信得家中寶 啼鳥山花一樣春

세 가지(금, 나무, 진흙) 부처님의 형상과 거동이 모두 참되지 못하니, 눈 가운데 눈동자요 얼굴 앞의 사람이로다. 만일 능히 자기 집 안의 보물을 믿을 수 있다면, 우는 새와 산꽃이 한 모습의 봄이로다.

<보충설명> 금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세 가지 부처님은 모두 눈 속에 눈동자가 있는 것과 같고 얼굴 앞에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평범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신 부처님도 그 모습은 평범한 우리와 같이 눈앞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사물을 따라 그림자가 생기므로 그림자를 보고 실제의 사물을 알아내듯이, 세 가지 부처님의 형상은 비록 가짜이고 그림자이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진짜 부처님을 찾아야 합니다. 백화가 만발한 동산에서 말없이 수놓은 봄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거동인 행주좌와에서도 실상의 부처를 보아야 합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