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정신희유분/3/능히 일념으로 무념에 돌아가라

通達無我法者 2008. 10. 4. 16:08

 

 

능히 일념으로 무념에 돌아가라
 
인연 끊어 사물에 물듦 없으면
맑고 싱그러운 본마음 드러나니

<사진설명>덕민 스님이 지난 9월8일 봉행된 월산대종사 부도탑비 제막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冶父]水到渠成 終日忙忙 那事無妨 不求解脫 不樂天堂 但能一念歸無念 高步毗盧頂上行

물이 다다르면 개울이 되노니, 종일토록 허둥대지만 저 일에는 방해될 것 없도다. 해탈도 구할 필요 없고 천당을 즐거워할 필요도 없노라. 다만 능히 일념으로 무념에 돌아가면, 높이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를 밟아 노닐 것이니라.

<보충설명> 물의 근원인 빗방울이 바다에 다다르면 바닷물 전체와 한 모습이 됩니다. 이런 한 모습의 도리를 깨친다면 따로 해탈을 구할 것도 없고 천당을 즐거워 할 것도 없이 곧바로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도 밟고 다닐 수 있습니다.

선시 맛보기

작년 이맘 때 淸明이라는 두목지의 시를 소개하며 언급했듯이, 중국에서 청명한식은 큰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은 두보가 안록산의 난을 만나 한식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촉나라에 머물며 지은 시를 소개합니다.
두보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을 지닌 채 배위에서 삶을 마감한 시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허 스님도 갑산에서 은둔해 지내는 동안 한식이 되면 종종 이 시를 쓰셨습니다. 아마도 두보의 향수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경허 스님이 쓰신 두보의 시를 만공 스님이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만공 스님이 스승의 자취를 생각하며 만감에 젖어 많이 울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중생의 죽음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이라는 보살의 마음으로, 시봉하던 동주를 살해한 비적 대신 살인자의 누명을 끌어안은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제자로서의 회한도 섞여 있었겠지요. 경허 스님의 서간문은 구소서간의 문체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마 두보의 한식시(寒食詩)를 썼을 때도 두보와 한마음이면서 향수를 달랬던 것 같습니다.

小寒食舟中作
(소한식날 배 안에서 짓다)

佳辰强飮食猶寒 隱几蕭條戴鶡冠

명절 한식이라 마지못해 먹은 음식 더욱 더 차갑구나.
책상에 앉은 자리 쓸쓸하고 초라한 鶡冠을 덮어 쓰네.

春水船如天上坐 老年花似霧中看

봄물이 불어나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 하고,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에 보이는 듯 희미하여라.

娟娟戱蝶過閑幔 片片輕鷗下急湍
어여쁘게 희롱하는 나비는 한가로이 장막을 지나가고,
여기 저기 경쾌한 갈매기 무리는 급한 여울에 내려오네.

雲白山靑萬餘里 只看直北是長安

흰 구름 푸른 산 만여리에 떠있는데,
똑 바로 북쪽을 바라보니 바로 고향 장안이네.

<보충설명 第一聯> 청명절에는 날씨가 건조하므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지피지 않고 미리 지어놓은 찬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명절이라지만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먹는 찬밥이 입맛을 돋울 수 있겠습니까? 타향살이 나그네에게는 따뜻한 음식에도 마음이 추워지는데 하물며 찬밥을 먹는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보충설명 第二聯> 노인의 눈에 꽃이 안개 속에 있는듯하다는 것은 쓸쓸한 객지에서 늙어가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모습입니다.

<보충설명 第三聯> 초라한 관을 쓰고 홀로 명절을 보내지만 그래도 자신이 쳐놓은 장막을 날개 짓 하면서 오가는 어여쁜 나비와 여울까지 내려온 갈매기 떼가 처절한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鏡虛의 詩
(범어사 菩提樓에서의 해제시)

神光豁如客 金井做淸遊

신령스런 광명이 툭 트인 나그네가
금정산에서 청정하게 노닐도다.

破袖藏天極 短笻劈地頭

낡은 장삼자락에다 온 하늘을 집어넣고
짤막한 지팡이로 온 땅을 쪼개버리네.

孤雲生遠峀 白鳥下長洲

외로운 구름은 먼 산 봉우리에 살아나고
흰 새는 길고 긴 모래톱에 내려앉네.

大塊誰非夢 憑欄謾自幽

이 큰 땅덩어리를 어느 누가 꿈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으리.
난간에 기대어 스스로 그윽하게 읊조리네.

<보충설명> 하늘과 땅을 모두 통신(通身)으로 결합시키고 진공묘유로 活計하는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더덕더덕 붙은 인연을 모두 끊어 사물에 물듦이 없으면 맑고 싱그러운 본마음이 드러나서 산자락에 구름이 피어오르고 긴 여울에 백조가 내려앉는 것처럼 자연스런 묘유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몸을 의지하는 이 땅덩어리는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니 붙잡을 수 없는 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옷자락에 전 우주를 집어넣고 유유자적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