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구경무아분/1/나라는 상 버리고 바라밀 실천하라

通達無我法者 2008. 10. 8. 16:30

 

 

<사진설명>금강산도 화첩 중 연사만종. 겸재 정선(1697~1759) 作.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이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어디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

〈보충설명1〉 구경(究竟)이란 부처와 중생의 구별 없이 모든 존재가 한 모습으로 어우러진 경지이며, 또한 마음과 외경(外境)이 한 모습으로 승화된 경지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틈이 있어 한 생각이라도 일어난다면 구경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가르침은 세속적 학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선가(禪家)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충설명2〉 반야바라밀법의 차원에서 무아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닿는 삼라만상도 모두 생멸의 속성을 지닌 채 밖으로 드러난 그림자일 뿐이지 진정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무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고 하여 무아가 다만 斷滅의 상태인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갖가지 꽃을 질펀하게 피워주는 봄이나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해주는 가을처럼 무아는 없는 듯 있는 것입니다.

〈보충설명3〉 부처님의 세계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 무아의 세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였기 때문에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것이고 또 무아로서 대중을 향해 설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나’는 무지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 빚은 業의 境界입니다. 수행자가 ‘나’라는 상을 머리에 이고 공부한다면 아무리 보시와 인욕 등의 바라밀을 잘 실천한다고 해도 아상과 인상 등의 장애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무아의 상태가 되어야 진정한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무아일 때라야 금강경 공부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보충설명4〉 금강경 하권에서는 그동안 금강경 수지독송의 부사의한 공덕에 대해 설법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금강경 三十二分 가운데서 가장 긴 과목인 구경무아분에 이르러서는 금강경 공부가 더욱 무르익도록 설법이 진행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동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보살은 아상 ·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다고 설하셨지만 아주 미세한 입장에서의 ‘나’라는 상이 혹시라도 남아 있으면 구경에 이르지 못하므로 다시 되풀이하여 철저한 무아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아가 이루어졌을 때에 비로소 세간을 정화시키는 부처가 되는 것이고, 최상의 부자가 되는 것이고,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佛告須菩提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할 때에는 당연히 이와 같은 마음, 즉 ‘나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는 마음을 내야하며,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고는 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생각의 흔적조차 없어야 하니라”

〈보충설명〉 금강경 상권의 대승정종분에서 언급된 내용을 구경무아분에 이르러 좀 더 미세하고 구체적으로 반복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구경무아의 텅 빈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마음을 텅 비우라는 것을 멍청해지라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 모습의 구경무아를 놓치지 않으면서 삶을 엮어 나가는 것은, 마치 야구선수가 베이스를 지키면서 홈인하고 경기를 진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것은 또 추운 겨울에 산자락에 쌓였던 눈이 따스한 봄이 되어 녹아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움이 맑고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冶父]有時因好月 不覺過滄洲

즐겁게 달구경 하는 사이 창주를 지나치도다.

〈보충설명〉 창주로 가다가 달빛이 너무 좋아서 감상하는 동안 창주를 지나쳐 버렸다는 뜻입니다. 일변도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나’라는 상을 없애고 무아의 달빛을 즐기면 창주에서 벌어지는 世間事로부터 멀어지고 해탈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삶의 궤적마다 훌륭한 작품이 나옵니다.

若問云何住 非中及有無 頭無纖草盖 足不履閻浮 細似虛析 輕如蝶舞初 衆生滅盡知無滅 此是隨流大丈夫

만일 어디에 머무를지 묻는다면 중간에도 아니요, 있는 쪽에도 아니요, 없는 쪽에도 아니라고 하리라. 머리에는 실오라기 한 가닥도 풀잎 한 조각도 덮여 있지 않고, 발은 염부주의 땅을 밟지도 않았도다. 미세하기는 먼지를 쪼갠 듯하고, 가볍기는 나비의 처음 날개 짓과 같도다.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했다는 흔적조차 없음을 아나니, 이것이야말로 성현의 흐름을 따르는 대장부로다.

〈보충설명〉 무아의 경지는 상을 내어 머물 곳이 있을 리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뚝 끊어진 마음이어서 중간이나 有無에 머무는 바가 없지만 그 씀씀이는 하늘과 땅과 한 모습을 이룹니다. ‘나’를 부정함으로써 사물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큰 나’가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六祖]菩薩 若見有衆生可度 卽是我相 有能度衆生心 卽是人相 謂涅槃可求 卽是衆生相 見有涅槃可證 卽是壽者相 有此四相 卽非菩薩也

보살이 만일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아상이요, 능히 중생을 제도했다는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인상이요, 열반을 구하려 한다면 이것은 중생상이요, 열반을 증득하겠다고 마음을 내어 갈구하면 이것은 수자상이니, 이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所以者 何 須菩提 實無有法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어떤 까닭에서인가?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보충설명〉 진정한 의미의 구경무아는 너와 내가 서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서 따로 구할 것이 없습니다. 별빛이 반짝이면 그 것이 곧 내 자신의 반짝임이고, 하늘 한가운데 떠서 어둠을 밝히는 달빛도 확실한 내 모습 그 자체입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