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실체론(實體論)-2.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0. 19:13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그대가 몇 가지 요점들을 이해한다면 달마의 가르침은 알기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인도 밖에서 생겨난 모든 종교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지만, 환생의 문제에서만큼은 일치한다. 그들 모두는 그대가 하나의 생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대는 과거에 수많은 생을 거쳐왔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때가지 앞으로 계속 수많은 생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삶은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것을 배우는 학교일 뿐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삶과 죽음의 바퀴를 돌게 될 것이다. 평균 수명 70년, 80년 정도의 한 생애가 인간 삶의 전부라면, 그것은 그대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데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못 된다. 그리고 그 70년 중에서 삼분의 일은 잠을 자며, 삼분의 일은 그대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으로 보낸다. 나머지 삼분의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여러 가지 것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카드놀이나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들에게 가서 묻는다.
"당신은 이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까?"

그러면 그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그것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위 '킬링 타임'이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대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대는 시간을 그저 흘려 보낼 여유가 없다. 그대는 시간을 죽일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그대를 죽이는 것이다. 매 순간 시간은 그대를 죽음에 더욱 가깝게 가져간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을 헤아린다면…… 하루에 두 번 하는 면도 시간은 얼마이며,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그대는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흘려 보내는지 모른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 미국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7시간 반을 텔레비전을 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것은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저 앉아서 모든 종류의 난센스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담배를 피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가? 어떤 사람은 줄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대는 신문을 읽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가? 신문이 어떤 유용한 뉴스를 가져다 주는 때는 드물다. 그저 온갖 비리들과 불행한 소식들만 가져다 줄 것이다. 살인, 강간, 자살, 전쟁 등등을 말이다. 그것들은 그대로 하여금 이런 것이 세상이며,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들은 그대에게 전 세계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문에는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는 소식을 보도하는 일은 결코 없다. 아마 그런 것은 뉴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명상의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갔다고 보도하는 신문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분노와 욕심과 어리석음을 넘어서 고요한 평화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 신문이 있는가? 그것은 뉴스 거리가 안 되는 것이다.

한번은 버나드 쇼가 질문을 받았다.
"뉴스란 어떤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개가 사람을 문 것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

그대가 70평생을 살면서 사람이 개에게 물린 뉴스를 듣는 숫자를 세어 보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오직 한 생애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너무나 빨리 끝나 버린다. 왜 서양인들은 그런 빠른 생활 속에 사는가? 그런 생각은 바로 유대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화살같이 빠른 세월 속에 산다. 그들은 항상 달려가고 있다. 그것도 오직 한번밖에 없는 기회이다. 인생은 짧고 이루어야 할 야망은 너무 많다. 그들은 가장 큰 부자가 되어야 하고,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하며, 할 일이 수천 가지나 되지만, 인생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루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도무지 요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통조림을 따는 것이 전부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간편하게 길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왜 요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고요한 상태 속에 있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하다. 그저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처럼 보인다. 그래서 명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음악 감상조차 하나의 일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명상이란 것이 그것을 하기에는 하나의 생애가 너무 짧다는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했다. 죽음은 너무 빨리 찾아오고 그들은 여유를 누릴 수가 없다.

동양에서는 영적 성장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하나의 바퀴라는 생각에서 나온 느긋함이 사람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었다. 그대는 몇 시간이고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 삶이 급해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대에게는 영원함이 쓸모 있는 것이 되었다. 그대에게는 단지 70년만 남은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매우 가난하다. 그들은 각자에게 모두 70년의 시간만 주어져 있다. 동양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내면은 매우 부유하다. 그 뒤에는 영원함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의 생은 그대를 지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 70년의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지루함을 느끼기가 불가능하다. 돈을 쫓아야 하고, 권력과 명예를 쫓아야 하며, 여자나 남자를 쫓아야 한다. 그대가 이 모든 것에 완전한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이런 일이 어리석은 짓임을 확실히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하나라도 완벽하게 얻지 못한다.

모든 생을 가, 나, 다, 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대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백만 개의 생을 돌이켜 볼 때, 그대는 모든 여자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라는 말을 모든 여자들에게 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백만 번의 생을 통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생각만 해도 이제 그것은 지겨운 일이다. 그런 철없는 짓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 생각 때문에 그대는 성숙할 것이다. 그대는 이런 놀이를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 왔고 이제는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이제는 철이 들 때도 된 것이다.

명상은 이런 동양적 사고 방식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그대가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그대는 돈도 벌어 보았고, 부자도 되어 보았다. 정치가가 되어 권력도 잡아 보았고, 성직자가 되어 명예도 얻어 보았다. 그대는 그런 모든 것을 다 해보았고 그럴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한번 그대가 그 사실을 이해한다면…… 앞으로도 그런 무의미한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제 실수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은 그대가 바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그대가 이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할 필요가 생겨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찾는 일이다. 그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추구해 보았고 그 결과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길이 그저 돌고 돌아서 그대는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한다. 거기에는 사실 어떤 목표도 없다.

이런 원대한 시각을 얻게 되면, 그대는 갑자기 지금까지 해 온 모든 행위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랑과 다툼, 분노와 탐욕 그리고 질투 등을 말이다. 그대는 이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제 진부한 삶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찾아야 한다. 이제 나는 나의 진정한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수백만 번의 생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의 본질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적 지혜의 토대가 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싫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사라(samsara, 윤회)의 본뜻이다. 삼사라, 즉 윤회는 끊임없이 도는 생사의 바퀴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에 집착해 있다. 그대는 자신의 감각에 속고 있다. 그만큼 그대는 어리석다. 이제 그런 행위를 멈춰라. 수많은 세월 동안 해 오던 구태의연한 행위들을 벗어나는 뭔가를 시작하라. 그대가 항상 내일로 미루어 오던 그 일을 말이다.

동양의 경전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해하지 못한 말은 그들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든지, 혹은 동의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장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꽃피운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위적인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으로 남기를 결심했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그것을 말로 표현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을 때에만 그러했다.

인도에서는 매일 발행되는 신문 기삿거리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영원한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서 진리로 남을 것이다.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그 말들의 진실성은 영원히 도전받지 않을 것이다.

서양에서 조간 신문은 저녁이 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휴지보다도 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침 뉴스는 오후 뉴스가 나오면 쓸모 없게 되고, 저녁 뉴스가 나오면 오후 뉴스는 또 그 가치가 없어진다. 저녁 뉴스는 밤 뉴스가 나오면서 역시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밤 뉴스 역시 다음날 아침 뉴스가 나오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경전들은 그것이 처음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세월이 가도 언제나 신선하다. 그러나 그것은 경전에 담겨 있는 것들을 경험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경전은 재미없는 산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한번 경험한 뒤부터 산문은 시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말들은 침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말들은 그대가 존재의 영원한 침묵의 춤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서양에는 그러한 책이 없다. 나는 서양의 철학서들과 신학서들을 다 읽어보았지만―그것은 정말 지루한 여행이었다―동양의 경전에 비견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양의 책들은 모두 마음에 해당되는 것들만 적어 놓았다. 하지만 동양의 경전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마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그대 내면의 존재와 그 지복(智福)의 경험들에 관해 이야기해 놓았다. 그것은 하나의 환희이며, 광대한 존재계를 감싸는 우주적인 기쁨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지식 때문이다.

나무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순수하기 때문이다. 바다와 산들 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가장 멀리 있는 별들도 그 기쁨을 누린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그것들은 지식의 덫에 걸려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