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실체론(實體論)-4.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0. 19:16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음과 실체, 마음과 세상, 그것은 정말로 고약한 악순환이다. 마음은 그대의 생각이 투사된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투사된 세상이 다시 그대의 마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으로 그 고약한 관계는 서로를 지지해 주며 계속 된다.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투사를 지지해 주며, 그대의 투사는 그대의 마음을 지지해 준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환상 속에 산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하며 실체는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체와 그의 마음은 모두 고요하며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마디(samadhi)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실체도 존재한다. 그대가 이 악순환을 벗어날 때 모든 것이 심오한 침묵 속에 빠진다. 사마디라고 하는 말은 정확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완전한 균형 속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단어들을 갖고 있는 언어이다. 그 단어들은 사전적인 설명이 아닌 경험으로만 그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에 비해 다른 언어들은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는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일한 언어이다. 그것은 일부러 창조되어진 언어이다. 그 말들은 보통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다. 인도 역사상 한번도 나라 전체가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상용한 적이 없었다. 많은 언어들이 태어나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다가 사라지곤 했다. 라틴어나 히브리어, 팔리어와 프라크리트어 등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어에 속한다. 그 언어들도 한때는 살아 있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게 되자 죽어 버렸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사람들에게 결코 공용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들만의 언어였으며 그래서 그 단어들은 항상 두 가지 뜻을 지녔다. 하나는 사전적인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에 대한 실존적인 의미를 지녔다.

산스크리트어에는 비야디(vyadi)와 사마디(samadhi)라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비야디는 영혼이 병들었다는 뜻이고, 사마디는 영혼이 건강하고 전체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적인 의미이다. 사마디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육체는 건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 사람이 그의 육체가 병들어 있어도 사마디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그대가 병들어 죽는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도 사마디를 이를 수도 있다. 그때 그대의 영혼은 완전한 건강을 찾게 된다. 전체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가 사마디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존재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마디와 같은 말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어에 그와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토리'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슷한말이지 동의어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일본인들은 사토리란 단어에 대해서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토리는 사마디의 일별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순간적인 것이다. 사마디를 언뜻 한번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대는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얼핏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봉우리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마디를 일별(一瞥)하는 사토리도 무척 아름다운 것이지만 사마디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사마디는 절대적인 명료함 속에서 나타나는 그대 자신의 본성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순수함이며 절대적인 깨어 있음이다. 사마디는 그대의 진정한 안식처이다. 사마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없이 떠도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뿌리가 없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사마디는 그대로 하여금 존재계에 뿌리를 내리게 해준다. 그것은 그대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그대의 잠재력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디에 이르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마음을 떨쳐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넘어가라. 그리하면 그대는 사마디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오직 마음이 유일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마음을 강화시키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전 세계에 있는 우리의 모든 교육 체계가 바로 그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적을 키우는 것이며, 우리의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좀더 지성적인 세계에서라면 명상은 모든 학교에서 필수과목이 될 것이다. 모든 대학에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목이 되어야 한다. 사마디의 맛을 보지 않는 한, 그 학생에게 대학 졸업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자격증도 주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교육 체계에서 명상을 기본 과목으로 채택할 수 있다면, 그때 사람들은 정치가도 될 수 있고 사업가도 될 수 있다. 생산 공장에 가서 일할 수도 있고, 음악가나 화가, 무용가나 배우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명상에 관한 경험이다. 그것은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기본적인 공통 요소가 될 것이다.

사람이 명상을 하더라도 그 재능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그가 무슨 직업을 갖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성스러운 자질을 부여할 수 있다. 그가 구두를 수선하거나 도로를 청소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아름다움을, 은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디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 세계를 환희심에 가득 찬 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 단지 한가지 간단한 사실만 받아들여진다면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의사나 기술자나 과학자가 되더라도, 그대가 무엇이 되더라도 명상은 모든 직업과 모든 종류의 교육에 기본적인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전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핵무기 때문에 공포에 떨 필요가 없다. 인구는 자연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각성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계가 인구 과잉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낳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줄 필요가 없다. 왜 그가 자신의 자녀를 재난이 다가올 세상에 태어나게 하겠는가? 누가 자신의 자녀가 3차 대전을 겪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누가 자기 자시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명상은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와 그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책이다. 명상(Meditation)과 약(Medicine)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약은 육체를 위한 것이고 명상은 영혼을 위한 것이다. 병을 치료할 때에 그 둘을 모두 갖추어야 완전히 건강해질 수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고타마 붓다와 달마 같은 그의 제자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아무것도 제 본성 혹은 자성(自性)을 가진 것이 없다. 이 말은 [그대의 의식이 순수한 허공]이란 뜻이다. 거기에는 어떤 집착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완전히 텅 비어 있으면서 또한 가득 차 있다 빛으로, 기쁨으로, 향기로 가득 차 있으면서 또한 완전히 비어 있다.

사람들을 서로 구분 짓는 것은 자성이 아니다. 그대가 사마디 속에 있는 순간, 나무들 역시 사마디 속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산들도 사마디 속에 있으며, 별 또한 사마디 속에 있다. 그대는 존재계 전체가 사마디 속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지금까지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 우주의 전체성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달마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철학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행동하라고, 질문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대는 어떤 것도 질문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을 더 많이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묻는다. 그대는 삶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떤 해답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행동하라.

그대가 잘못할 때 그대는 이미 잘못되었다. 그대가 묻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질문할 때, 그대의 마음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그대에게서 사마디는 그리 멀지 않다. 질문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대가 그 질문에 해답을 찾게 되는 순간, 그대의 마음은 더욱더 강해지고 굳어진다.

그래서 달마는 말한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 그대가 해답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행동하라.'

그대가 그저 행동하고 마음을 초월할 때 그대는 진정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해답이란 바로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