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일체 속박에서 벗어나는 법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3:24

 

 

오늘 시작되는 이 「대명품」 법문은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장애가 없이 일체 속박에서 벗어나고 원만한 성취를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재난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통과 전장, 수많은 장애를 입고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내지 그와 같이 해서 궁극적인 성취인 성불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제석천왕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0일 기도를 시작하면서 대명품 법문을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석에게 이르셨습니다. 여기서 제석은 바로 제석천왕을 말합니다. 제석천왕이라고 하는 제석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인간계 이외에 인간보다 밝고 착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세계, 즉 천상이 있는데 그 천상의 기본적인 세 등급 중 1등급인 욕계의 제2천을 이르는 말입니다.


 


세 등급이라고 하면 욕계와 색계, 무색계를 삼계라고 하고 그 가운데 우리 인간들이 사는 데를 욕계라고 하지만 욕계 가운데도 천상이 있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그 세계는 끝나지, 무슨 천상이 있고 지옥이 있을까보냐. 다 세상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 내고 좋은 일 하면서 살라고 그저 달래는 말이 아니냐.” 하고 아마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지극히 짧은 눈 앞만 보고 조금도 먼 거리를 보지 못하는 자기 의식에 머물러 살지, 의식의 차원을 조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사람들의 고집입니다. 모르면 몰랐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되는 거지요.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것도 인간 정도의 기본적인 의식 차원을 가지고 그 정도의 맑은 마음, 착한 마음, 그만큼의 안정된 마음, 밝은 마음을 지녀서 그 정도에 상응하는 세계를 선택해서 자기 세계가 벌어져서 나온 것입니다.


 



 

고정된 채널에서 벗어나야


 


말하자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어느 방송을 들을까 하고 우리는 마음대로 채널을 돌려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채널에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마는 의식이 묶여버린 사람은 채널 하나만 알고 다른 채널은 모르기 때문에 한 채널만 듣게 됩니다. 자기 마음 의식의 고정된 상태에 따라서 고정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100이라고 하는 상태의 열쇠가 되어 있으면 자기가 가는 길이 100이라는 길이 되어버리고, 100이라고 하는 길의 문도 그 열쇠로 열려져 버립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길도 아니고, 세계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한 채널만 듣는 사람은 다른 채널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한 채널밖에 방송이 없는 줄 압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기 세계밖에 모르니까 그렇지, 그것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깊은 자기에 도달해보면 자기는 한 채널만 아니라 그 밖의 수많은 방송주파를 파악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비유로써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처럼 천상이라고 하는 세계나 천상 가운데서도 여러 천상이 있다거나 중생이라도 여러 중생이 벌어지는 것도, 중생이 되는 근본이 마음 상태에 있고 그 정도에 따라 그 세계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세계가 분명히 여기 지금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만큼 천상이 또한 있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확신을 합니다. 누구든지 이 부분에 대해서 이 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안정해서 맑고 고요하고 깊은 마음에 머무르게 되면, 말하자면 번뇌망상,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도 한계를 벗어난 그런 깊은 마음 정도에 가버리면 인간 이외의 세계를 자기가 갈 수도 있으며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리광명을 움직이는 사람들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사실인즉 내 몸뚱이의 나인 것처럼 보이지마는 몸뚱이가 내가 아닙니다. 몸뚱이는 나타난 조그마한 싹이고 이 몸뚱이라는 싹을 나타내기 이전에는 이 대지와 같이 큰 것입니다. 대지 가운데 조그만 몸뚱이 같은 싹이 나왔다가 조금 자랐다가 조금 있다가 시들어 가지고 끝나고 마는 것인데 ‘이것이 나다’ 생각하는 것이 범부들입니다. 그렇지마는 눈 밝은 사람, 대지와 허공과 천지가 자기인 줄 아는 사람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영원히 생생한 채 있는 것입니다.


 


제석천왕에게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반야바라밀을 듣고 수지하고 친근 독송 정억념한다.” 이것을 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불광에 처음 와서 두 달이 지나도록 법문을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특징이고 제가 배운 것이 그것뿐입니다. 제가 배운 것은 아시다시피 세속의 책들 읽은 것 하고, 그 다음에 책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선방에 들어가서 눈 감고 앉아서 참선한 것이 모두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문자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와 이론으로 알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절에 들어가서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집에 앉아서 부모 잘 모시고 대접 받아가면서 공부를 하든지 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절에 들어가서 그 야단이겠습니까? 문자와 이론 가지고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문자와 이론 이전의 것을 직접 파악하려니까 그 야단입니다. 저는 선방에 살면서 뭘 얻지는 못했어도 서당개 삼년 동안 오락가락하다가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시피 저는 풍월은 읊지 못하나마 들은 것이 그래도 그 쪽이니까 말과 이론 이전의 것,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말로만 그러는데, 실지로 뭐냐는 것이지요.


 


이것을 말하자니까 불광의 독특한 것도 되고 제 말도 독특한 것이 되고 여러분께서 불교를 배워도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야바라밀을 듣고(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 진리광명이 자기 생명 가운데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반야바라밀을 굴린다. 바로 자기 생명, 진리광명을 움직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온몸으로 반야바라밀을 염하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대명주를 외우면 스스로 몸에 괴로움이 없고 또한 남도 괴로움이 없고 둘이 다 편안하느니라.”


 


마하반야바라밀은 저 사람과 이 사람 사이에 대립이 없습니다. 저 사람과 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친해질까, 저 사람이 누구인가? 어른일 때도 있고, 스승님일 때도 있고, 친구일 때도 있고, 사업할 때 동업자일 때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과 사이가 좋아지고자 할 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상대방과 막힌 것을 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립이 아닙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일체의 기도를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광 가족들 중 서울서 기도하여 부산에 있는 사람이 성취했다든가 또 절에서 기도했는데 병원에 있는 환자 분이 나았다는 등 장소를 달리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 서로에게 막힘없이 일체를 하나로 이루는 상태, 대명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대명주는 입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외워야 합니다. 몸이 외울 정도니까 많이 외워야 하며 일심으로 외워야 합니다.


 


어느 보살님의 전신 류마티스가 나았던 얘기부터 시작해서 갑상선이 나았던 일, 가정적으로 그렇게 곤란했던 일들이 마하반야바라밀 몇 달 하고 나서 깨끗하게 되었고 그저 기쁜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어디서 생겼는가? 딴 것이 아니라 마하반야바라밀 열심히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잠 안 자면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은 대명주, 내 몸 자체가 반야바라밀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몸으로 외우는 대명주를 배우면 무장애, 즉 장애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심이 되는 것이며, 부족함 없는 원만심이 되는 것이며, 무엇인가 성취하는 성취심이 되는 것이며, 우리 모두 그렇게 되자는 것입니다.


 


 

정진과 기도는 둘이 아니다


 


오늘부터 50일 특별 정진에 들어갑니다. 정진이라고 하면 개인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고, 기도라고 하면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광에 있어서는 “정진과 기도는 둘이 아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이 스스로 부지런히 닦는 정진은 하지 않고, 마음 가운데 소망은 있어서 구하는 것만 가득한 상태를 기도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혹 몰라도, 우리 불광에서와 같이 스스로 끊임없이 닦고 정진을 거듭하여, 자신의 마음이 청정으로 바뀌고 자기의 본성이 부처님의 광명으로써 더더욱 충만해가는 자신이 되어갈 때, “내가 근본이 바뀌는데 다른 소망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0일 정진에서 성취하는 것은 각자가 안으로 깨달음을 이룬다고 하는 지혜의 성장뿐만 아니라 몸의 환경, 사업의 환경, 가정의 환경, 그 밖의 모든 환경이 뒤바뀌는 기도까지 한꺼번에 되는 것입니다. 이번 50일 정진을 통해서 여러 형제들이 더욱 크게 성장하고 더욱 크게 뛰고 더욱 크게 기도를 성취해서 모두 모두가 대성취를 하는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