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계(戒)는 청정한 자기실현의 길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3:27

 

 

계(戒)는 청정한 자기실현의 길

글· 광덕큰스님

2004년 11월호


오늘은 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계가 어떤 것인가? 아마 많은 분들이 계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사실은 우리의 미혹한 생활이 속박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속박에서부터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 계입니다. 원래 계는 산스크리트어로 ‘실라(sila)’라고 하여 본래의 뜻은 ‘행위, 습관, 도덕성, 경건한 것’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행해지는 계의 뜻은 몸과 말의 ‘방비지악(防非止惡)’, 즉 그릇된 것을 막고 악한 것을 멈추게 하는 핵으로서 불교의 기본적인 실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포살할 때 항상 읽고 있는 법문에도 그 말이 나옵니다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적에, “계가 바로 그대들의 큰 스승이다. 이 계를 지키고 계를 존중하는 한 내(여래)가 세간에 더 머물러도 더 이익될 바가 없다. 계는 바로 큰 대사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는 어둠에 있어서는 밝은 등불과 같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보배와 같고, 병든 자가 나은 것과 같고, 또 멀리 간 사람이 집에 돌아온 것과 같은 평화함이 있고, 속박되고 갇힌 자가 풀려나온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다.” 하고 계의 소중함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계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실제로 계가 그럴 만한 것입니다. 인간이 즉 우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진리, 태양 같은 진리를 완전히 해방하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 가운데 전적으로 실현하여 우리와 우리의 국토에 완전한 청정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계의 근본은 각성(覺性)


여기 주보에 계의 열 가지 뜻이 있다고 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꼼꼼히 한 대목 한 대목 깊이 생각해보고 들여다봤습니다. 정말 계에 대해 참으로 말씀 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일반적으로 계 법문을 즐겨서 법을 설하는 데 참석해 보면, 계의 그 뿌리에 대해서 비교적 과거에 말씀하시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계의 뿌리, 계가 나오는 근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들이 없는 걸로 저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계는 그 근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각성(覺性)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 근원이 각성이라는 것이어서 인간의 무한성, 절대성, 완전성, 대자유성에 대한 완전한 해방, 그것을 목표로 해서 계가 설해지고 있는 것이 근본입니다. 물론 몇 가지 다른 차별도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여기 열 가지 뜻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공감이 갔습니다.

첫째는 습근(習近)이라고 했습니다. 익히고 가까이 한다. 깨달음의 진리, 내 생명의 진리, 거짓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생명이 아니라, 늙고 병드는 생명이 아니라, 죽지 않는 생명, 불멸의 생명, 영원한 생명, 진실한 나를 익히고 거기에 가까이 가는 것, 계는 그런 것입니다.

계는 물론 지지계(止持戒)라고 해서 ‘무슨 행을 하지 말라’ 하여 멈추게 하는 계, 작지계(作持戒)라 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라’ 하는 적극성을 요구하는 계 등 두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불광에서 계 받으신 분들은 제가 철저하게 작지계 입장에서 계를 설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계는 무작위, 행(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라는 작지계 입장에서 기왕에 설명을 해 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습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 계의 두 번째 뜻은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본성이라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진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 계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본성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잊어버린 종교와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적인 진리는 행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행은 진리에 근거한 행의 작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 누구냐?” 했을 때 “행동이다.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행, 이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깊은 진리 자체를 묻지 말고, 그 행동 자체에서 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행동이라는 것은 형상적인 것으로만 항상 파악하고, 관념적인 한계 가운데서 논리적인 구성을 하여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그 모두를 쉬어버렸을 때 행이 바로 그 본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청량이라고 합니다. 청량이라고 하면 시원한 뜻이 아닙니까. 무엇이 시원하다는 것일까요? 활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이 쉬지 않고 우리의 몸을 사르고 있습니다. 죽음이 거기서 오는 것입니다.


번뇌의 불길이 쉬니


불광 보살님이 얼마 전에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스님, 이제 알았습니다. 여태까지 생사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었습니다.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인가.’ 이제 알고 보니까, 번뇌가 쉬면 생사가 없는 것이며 번뇌가 있는 것이 생사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왜 이제서야 알았습니까?” “아유, 이제까지 그것을 몰랐습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가 소화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정말 우리 불광 가족 가운데서 이런 분들이 발견된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뇌라는 이것이 바로 불길입니다. 내 몸을 태우고 이 세계를 태우는 불길입니다. 이 번뇌의 불길은 이 몸을 불사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있는 전체를 불살라버립니다. 세계를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그 번뇌에 따라서 생사가 반복되고 세간이 바뀔 뿐만 아니라 개인도 번뇌의 성질에 따라서 번뇌의 불길이 크고 작은 데 따라서 행·불행이 벌어지고 환경조건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를 어떻게 조종하느냐에 따라서 생활 환경도 바뀌어지는 것이고 번뇌를 쉬면 생활이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번뇌가 끊어질 때 시원함, 청정함을 거기서 얻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안온입니다. 편안하다. 이것은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식으니까 마음의 편안함, 안온함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 다음은 안정입니다. 고요하고 편안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흔들리고 번뇌에 휘감겨서 흔들리고 불안했던 상태가 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적멸, 고요하고 고요한 것입니다. 깊은 마음, 안정의 깊은 자리가 바로 적멸입니다.

그 다음에 단정하고 엄정하다고 하는 의미의 단엄입니다. 이것은 바른 계행 자체가 단정하고 엄정할 뿐만 아니라 계행을 지키는 그 마음이 단정하고 엄정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금생에도 그 사람이 계행을 잘 지켜서 단정하고 엄정할 뿐 아니라 내생에도 또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계는 바로 단엄입니다. 그 다음에는 정결입니다. 계행은 부정이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두수(頭首)로서 첫머리,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수행은 계행으로부터


우리 불법 중에 기본적인 수행이 세 가지입니다. 계·정·혜입니다. 계는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계행에 관한 것이고, 정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혜는 지혜입니다. 이 세 가지는 불교의 기본적인 수행으로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계·정·혜 이 삼학을 비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는 여기 물그릇이 있다고 한다면 그릇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릇이 안정되고 견고해야 합니다. ‘계기완고(戒器完固)’라고 하지요. 계의 그릇이 완전해야 그 그릇에 담겨진 물이 고요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물은 무엇인가? 물은 정(定)입니다. 안정된 마음입니다. 몸과 행동이 흔들리고 거칠며 나쁘면 그 마음에 평화와 안정과 기쁨이 깃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이 완고해야 정의 물[定水]이 고요하고 맑아지는 것입니다. 정의 물이 맑고 맑아야 혜월방현(慧月方現), 지혜의 달이 바야흐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흔들리지 않는 맑은 물, 그 위에 달이라고 하는 그림자가 제대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행이 바탕이 되어서 수행도 있고 지혜도 나오는 것입니다. 계행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행을 무시하고 항상 뒤흔들어 놓아서는 행이 나빠져서 정이 나올 여지가 없고 혜가 나올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일체 도법과 일체 깊이 있는 우리 생명의 위신력은 이와 같이 정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정의 뿌리는 혜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를 두수, 즉 첫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 인간 완성을 하고, 진리 완성을 하고, 국토 완성을 하기 위한 첫머리가 바로 계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찬탄입니다. 계행을 갖는다는 것은 찬탄입니다. 왜 찬탄이 되느냐 하면, ‘그야 착하고 좋은 일을 하며 남한테 거친 일을 하지 않으니까 찬탄이라고 그러겠지’ 하고 쉽게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불광, 반야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한 번 깊이 더 봐야 합니다.


계의 기본구조


반야가 무엇인가? 반야는 내 몸뚱이 육체 하나로서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런 한계사항, 나는 나, 당신은 당신, 모두는 모두, 각각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는 대립된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대립을 보는 나, 모든 사람이 대립이 없는 깊이에 간 것입니다.
엄지손가락, 새끼손가락, 이 여러 손가락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갑을병정 모두를 함께 보면서 개개의 것을 다 인정해 주며 하나의 생명, 하나의 뿌리라고 보는 것이 반야의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이것은 없다고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 있듯이, 찬탄이 무엇이냐 하면, 계행이라고 하는 것이 청정한 뿌리에 근거한 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뿌리에 근거한 행을 하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서로 좋은 것입니다. 만인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계가 원래 이런 반야와 같이 근본 생명, 근본 진리에 뿌리해서 그것에 근거한 행위를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찬탄하면 옆 사람이 삐쭉대지 않고 함께 기뻐해주는 것입니다. 찬탄이라는 말은 이런 깊이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계행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이 앞에서 말씀드린 사불괴신(四不壞信)입니다. 그런데 ‘왜 계행이라는 것이 핵이냐’ 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뜻 때문에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따지자면 이 계는 속박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무한성을 직접 실현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기의 발휘, 진실한 자기 생명의 전개, 청정한 본성의 유감없는 발휘, 이것이 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해석하기를 지지계의 입장으로 보지 아니하고, 작지계라고 하는 적극적인 행의 입장에서 제가 계를 해석하고 계를 보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광 형제들은 계를 이렇게 해석하는 저와 십여 년을 지내기 때문에 많이들 그렇게 돼 가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책임을 느낍니다. 지난 번 바라밀교육 중 김영태 교수님이 강의가 끝난 다음 각자 레포트를 써오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레포트를 써서 낸 것 중에 하나를 읽어봤는데, 거기에 보니까 부처님의 생애와 그 모든 것을 자기 나름대로 동일적인 눈으로 보고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 반짝이는 샛별이 솟아오르는 순간에 싯달태자가 도를 이루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작년에 성도제 때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다 버리고 중도적인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 그것이 무슨 뜻인가? 모든 생각을 다 쉬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반짝이는 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내 생명! 반짝임이고, 일체 중생 생명의 반짝임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계의 기본 구조입니다.


계의 궁극적 목적


물론 계에는 지금 말씀드린 세 가지 외에도 남한테 혐오스런 행을 하지 않는다든가, 단체 생활 가운데 그 질서를 지킨다든가, 하여 계를 분류할 때 성계(性戒)와 차계(遮戒)라고 구별합니다. 본래부터 나쁜 짓이다 하는 것, 예를 들면 살생, 도적질, 삿된 음행, 망어(도를 깨치지 못했으면서 깨쳤다고 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은 계라고 따로 정하지 않아도 본래부터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계라 하고, 그 다음은 단체생활 가운데 있어서 행하면 안 된다든가, 대개 술 마시는 것 등 그 자체는 선악이 아니지만 악이 수반되는 차계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계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본성의 청정한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서 행동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핵입니다. 그것에 반대되는 행, 그릇된 행을 멈추게 하고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게 만드는 것이 계의 근본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이 받게 되는 기본적인 오계, 또 재가불자들이 일 년에 한 번씩만 지켜보는 팔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팔계는 오계에다 세 가지를 더 보탠 것이지요. 방탕하고 방랑한 짓을 하지 말라든가, 음계에 대해서도 출가한 스님네들은 완전한 불음계지만은 재가불자는 삿된 음행만 금하는 것인데 그 날 하루만은 철저하게 지킨다든가, 또 함부로 먹지 않는 불비시식(不非時食)이라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해서 오후에 안 먹는다든가 하는 것까지 합해서 팔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재가불자들의 계입니다.

오계, 팔계, 십계, 이백오십계, 삼백사십팔계는 출가한 스님네 계입니다. 그리고 보살계는 재가, 출가가 함께 받게 되는 십중대계, 사십팔경구계 등 여러 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계의 근본은 우리 청정한 본성 본연의 덕성을 행동으로 유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복귀입니다. 완전한 자기 회복입니다. 청정한 자기의 실현, 이것이 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의 계라는 것이 청정한 본성, 나에게 지니고 있는 진실한 자기의 실현, 그 행동화 그것이라면, ‘나의 진실한 생명이라고 이르는 본성 생명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제가 무수히 얘기해 왔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고 그 동안에 제일 강조한 것이 이것입니다.

불교의 목표가 여러 교학, 복잡한 이론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본성을 깨달아 본성이 가지고 있는 부처님 성품, 완전무결성, 그것을 완전히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자기가 완전한 진리로 바뀌고, 자기가 사는 국토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육체가 있고, 육체가 있는 이 세계가 있으며, 세계 속에 내가 있다’ 하여 적어도 세계와 나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부들이 보는 현상에 매인 인식이고 좀더 깊이 살펴보면 나와 세계는 각각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것은 염불을 열심히 한 사람이거나 참선을 한 사람들은 압니다. 일심으로 염불을 하다보면 염불하는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 하나만 되고, 바라밀 하면 바라밀 하는 일념만 되었다가, 마침내 일념도 없어진 상태의 마음이 되었다가, 거기서 더 들어가면 마침내 내 마음과 이 세계가 한 쪽으로 이어져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