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깨달음에 이르는 길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4:33

 

 

깨달음에 이르는 길

글· 광덕큰스님

2004년 10월호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 동안 반야바라밀을 공부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철저하게 믿고 실천하여 부처님의 참된 뜻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 행동으로 옮겨, 정말 부처님이 바라시는 바 진실한 자기 실현을 지향하는 그런 공부를 해왔습니다. 거기에 이르려면 수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보물이 있어 그것을 건지려고 할 때, 먼저 육지를 걸어서 바닷가에 이르러 얕은 데서부터 차차 깊은 데로 들어가 마침내 정말 깊은 곳에 있는 보물을 건져내는 수많은 과정이 있는 것처럼, 그 사이에 부처님의 법문이 수없이 많습니다.


팔만사천 가지 법문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지요.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이 수많은 과정, 수많은 근기, 차별 있는 개성들을 하나하나 조복하고 정리해가면서 필경에 청정, 무위, 진실도 가운데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참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법문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이 여러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차별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 그 차별성으로부터 출발해서 마침내 차별이 없는 근원적인 하나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법문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밀 교학 강좌에서 그 동안 ‘영원하신 부처님’이라는 제목으로 김영태 교수가 네 차례에 걸쳐서 강의를 해주셨고, 고익진 교수가 원시불교인 아함교학에 대해서 90분씩 이틀간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아함의 경우는 반야심경을 공부하신 분이 아시는 것처럼 바로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는 법문입니다. 말하자면 마음 깊이에 어떻다든가 많이 닦아서 아는 도리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깝게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러한 감각 현상, 현상 경계로부터 시작해서 차차 깊은 데로 들어가도록 인도해주시는 그 첫째 법문이 바로 아함교학에서 열려지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깊은 데 있는 보물이 목표이고 그 보물을 얻고자 거기를 가고자 하니까 그런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은 여러 사람에 대응해서 설법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에 차별이 있듯이 아함의 가르침을 통해서 업론(業論)이라든가 십이처설(十二處說), 십팔계(十八界) 등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오온(五蘊)·사제(四諦)의 가르침, 중도(中道),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등 이러한 말씀의 과정을 하나하나 배워서, 마침내 이 말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관한 문제라든가 생활 조건의 문제, 생산과정의 문제 등이 알아집니다.

그리고 그 근원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묻게 될 때, 더 깊은 문제에 이르게 되어 여러 사람들의 의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이렇게 얕은 데서 들어가는 법문이 있는가 하면, 또 그 과정을 지나서 당신의 깨달음을 직접 말씀하신 대목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천차만별이지요.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에 대한 직설


반야바라밀은 범부의 눈으로 보이는 범부세간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진리의 눈으로 보신 바 진리 그 자체, 그것을 직접 배우고 믿고 행하는 아주 고차원의 법문에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하고 행한다고 하는 불법의 수행도 역시 우리가 보는 바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진리의 눈으로 보신 바 진리의 세계를 믿고 행해서 마침내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길이 될 것이며, 또 그것이 가장 바르고 곧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스스로의 직접 체험을 통해서 그 세계에 이르는 방법도 있고, 우리 반야바라밀 수행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생명의 진실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행하는 반야바라밀 법도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와 같이 행하고 체험해서 스스로 자기 것을 만드는 방법이요, 하나는 부처님 말씀을 믿고 그 가르침의 내용을 스스로 행함으로써 자신 가운데 이룩하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앞의 경우에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언덕을 넘어가야 되는 것이고, 후자의 반야바라밀의 경우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같으나 행이 있다는 경우입니다.

자칫하면 행에 상이 있는 것이 우리 일상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경에는 계속해서 “무주상, 상에 머묾이 없다. 상에 머물지 말라. 자신이나 경계나 모두가 불가득이다.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공이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무한한 바라밀 행의 전개를 가르치면서도 집착이 없는 분야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이 워낙 깊은 데에 있고 또 궁극적인 가르침의 실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다수의 중생에 대해서 그 근기에 대응하는 본이지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의 직설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직설은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


초기에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우리들이 실천하는 수행 중 사불괴신(四不壞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 허물 수 없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첫째 “부처님은 한량없는 공덕이시고, 한량없는 지혜이시고, 한량없는 위신력이시고, 신통자재하셔서 일체 중생을 구하신다.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 하는 부처님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 이것은 아마 초기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두 번째는 ‘법’으로서 불·법·승이라는 법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중생들의 가지가지 차별성 있는 그릇된 길, 나쁜 것, 병든 것들을 고쳐주는 좋은 약이다. 묘한 약이다. 나도 또한 가르침을 따르고 행해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진리를 스스로 체득해서 그것을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 주리라.” 하고 원을 세우는 법에 대한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승(僧)’입니다. 승은 스님입니다. 스님들은 도를 닦아서 진실한 경계에 이르러 계(戒)·정(定)·혜(慧)를 갖추게 됩니다. 몸으로 지키는 행이 주가 되는 계, 마음에 동요가 없는 깊은 안정·선정, 그 깊은 안정 속에서 나타나는 혜(智慧), 이 모두를 갖추신 스님들은 바로 이 세간의 복전이십니다. “우리도 그 가르침을 따라서 그와 같이 배우리라.” 이것이 세 번째 ‘승’에 대한 믿음이요, 염원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계행(戒行)입니다. 계행은 “모든 계와 부처님 계법의 가르침은 큰 위신력이 있어서 모든 악을 끊고 그릇된 길로 가는 중생들을 바르게 인도해 주는 힘이 있다. 나도 또한 정진해서 이 계법을 잘 호지하고 지니리라.” 하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사불괴신으로서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육념(六念)


그리고 비슷한 것이 ‘불, 법, 승, 계’ 이 네 가지에다가 ‘시(施, 보시), 천(天, 천상)’을 더해 육념법(六念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 당시 초기에 수행하는 기본적인 강목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보시하면 큰 공덕이 있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탐착심이라고 하는 악도에 들어가고 자기 자신을 고통스러운 길로 이끄는 그러한 것을 조복 받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생의 간탐심 같은 무거운 병을 고치는 이 계법을 존중하고 닦고 보시를 행해서 나도 또한 이렇게 중생을 섭수하리라.” 하는 보시에 대한 신앙과 실천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천상으로서 “계행을 닦고 보시를 행함으로써 고통이 없고 지혜가 밝은 천상에 나리라.” 하는 염을 해서 그렇게 수행을 하면 차차 마음이 안정이 되어 선정에 들게 되고 마침내는 번뇌가 없는 열반 쪽으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육념법이 부처님 초기에 있어서 불자들의 기본적인 믿음이었지만 이것의 기본적인 격식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큰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로써 공덕을 지어서 천상에 간다든가, 계행을 닦아서 천상에 태어난다든가 하는 그러한 보상을 바라는 계행이거나 보시가 아니라는 점이 다르지요. 경에도 보시에 대해서 철저하게 주는 자와 받는 자와 또 주는 물건에 대해서 “집착심을 놓아라. 그것은 실로는 없는 것이다. 불가득이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근원은 공이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시면서 “큰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에 집착이 없는 무주상의 보시가 진실한 보시다.” 하고 말씀하셔서 상이 없는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또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부처님 당시 초기의 대중들은 깊은 법문 말씀을 들어서는 이해가 안 되니까 이 몸으로 보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닦기 시작해서 마침내 그 과보로써 편안하고 안락하며 자유가 많은 세계에 태어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나 보다 궁극적으로 진리 자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 자신이 진리가 되는 성불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 육념법이라고 하는 그 당시의 기본적인 수행 강목은 그 골격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여튼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필경에 성불의 길을 가게 만들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 중생의 근기와 차별성에 따라서 각각 하신 법문이십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성불이라고 하는 완성에 와서야 쉰다는 것을 다시 되풀어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