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완전한 지혜이신 부처님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4:35

 

 

완전한 지혜이신 부처님

글· 광덕큰스님


부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인 것을 맨 먼저 아십니다. 두 번째는 여실하게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은 바 중생들의 업(행위)과 과보(행위의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법이라고 합니다. 남한테 거친 행위를 하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지 몰라도 나쁜 짓 하고 거친 행위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은 나쁜 마음 거친 상태로 그 마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행, 거친 행을 해서 그 결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있는지 몰라도 피해를 입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스스로가 그 피해를 입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해에서 회피할 수도 있고 피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가지고 자기가 향상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치고 어둡게 하고 거칠게 했던 그 마음 상태는 그 사람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찍혀진 것이 스스로의 원인이 되어서 똑같은 결과를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그런 형태가 자기에게 나타나버립니다. 제 마음에 있는 대로 제 몸에 나타나버립니다. 부처님은 여실하게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중생들의 지은 바 행위와 결과 그 모두를 다 아십니다.

세 번째는 중생들이 마음을 닦는다고 해도 여러 가지 차등의 마음을 씁니다. 고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삼매에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이 여러 차별이 있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 그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깊은 것이고 어디가 마지막인가 그 깊고 얕은 곳을 다 아십니다. 네 번째는 중생의 능력과 성질이 뛰어나고 혹은 못하고 하는 중생 개개의 차별되는 능력을 다 아십니다. 다섯 번째는 중생이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말씀인 그 모두를 중생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하나하나 다 아십니다.

여섯 번째는 중생의 성질과 소질이나 그 행위를 다 아십니다. 일곱 번째는 인간과 천상과 모든 세계에 태어나는 행의 인과를 다 아십니다. 아무개가 천상에 태어났는데 어떤 행과 어떤 인연을 만나서 천상에 났다든가, 금생에 불행을 만나고 고통을 받고 어떤 일을 해서 마침내 그것을 벗어났는데 그것에서 구원받게 된 인연은 어떻게 됐다든가, 이러한 것을 부처님은 다 사무쳐 아십니다. 여덟 번째는 과거세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다 아십니다. 아홉 번째는 천안(막힘 없는 지혜의 눈)으로써 중생의 나고 죽는 때와 미래에 선악세계를 다 아십니다. 열 번째는 번뇌가 다해서 참으로 말끔한 청정한 본성, 이 본성 전체가 노출됐는가. 번뇌가 다 꺼졌는가 안 꺼졌는가, 도를 완성했는가 완성하지 못했는가, 이 모두를 다 아십니다.

말을 요약해서 하면 부처님은 완전한 지혜이십니다. 태양의 빛이 한국을 비추고 소련을 비추고 미국을 비추고 태평양을 비추고 온 우주를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진리로써 당신을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이 우주가 생겨서 우주가 없어지든 우주가 생기기 이전에서부터 우주가 생겨서 우주가 없어진 후까지라도(저는 그것을 겁전 겁후라는 용어를 씁니다) 겁이라는 시간 세계, 공간 세계에 벌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생기기 이전과 생겨서 오래오래 머물다가 없어지는 그 동안과 아주 없어져서 아무 것도 없어진 후까지도 결정적인 그 모두를 부처님은 다 아십니다. 그것은 진리가 궁극적인 존재인 까닭에 궁극적인 실재는 진리인 까닭에 이 진리 자체이신 부처님은 내 마음 내가 알듯이 그 모두를 다 아십니다.


부처님의 대비원력


가끔 제가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마는 천안통이 열린 아나율 존자는 온 대천세계를 보기를 손바닥에 있는 과실을 보듯이 본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이신 까닭에 무상법인 까닭에 막힘이 없이 일체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이 세계 모두가 맑은 바다에 하늘에 있는 초롱초롱한 별을 비롯해 모든 것이 그대로 바다의 물에 비치는 것처럼(해인삼매라고 하지요), 일체 세간과 그 모두를 부처님께서 다 아십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일체와 더불어 당신이 하나를 이루시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행, 크신 지혜가 거기서 열려오는 것입니다. 중생을 어떻게 인도해야 되고 중생을 어떻게 건져야 되는 것을 아십니다. “이 진리 완전한 성품, 그 진리 그대로 사는 모든 중생들이 어째서 꿈을 꾸고 꿈 속에 빠져서 미혹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슬프다. 이것을 깨우쳐 주자.” 하는 대비원력이 더욱 크게 나시고 그래서 온갖 방편을 기울이셔서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시고 여러 시대에 나타나시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시며 여러 가지 법문을 여십니다. 그래서 중생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님 하나로 통해 있는 하나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낙동강, 대동강, 한강, 섬진강, 이 강물들이 하나의 바닷물과 통하는 것처럼 일체 중생 하나하나가 따로따로가 아니라 모두가 부처님 진리의 큰 바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도리를 깨닫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크신 활동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우리가 항상 읽고 있는 법화경 여래수량품 끄트머리에 나오듯이 “나는 항상 중생들이 도를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알고 제도할 만한 방편을 따라서 가지가지 법을 설하며 매양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지혜에 들어가 하루빨리 성불하게 할까 하느니라.” 하며 당신은 잠시도 쉬지 않으십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


여기 중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도리를 다 아시고 치우침, 즉 양변을 떠나 중도에 계십니다. 양변이라는 것은 ‘있다, 없다’ 하는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두 쪽입니다. 어둡고 밝은 것, 생과 사, 좋고 나쁨, 밉고 고움 등 전부 상대적인 것을 양변이라고 합니다.

수행에 있어서 고행하는 것, 고통스러움이 수행이다 해서 고를 취하는 것은 고행주의입니다. 또 고가 수행이 아니라 세상은 즐거운 것이다.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을 취하고 즐겁게 마시고 즐겁게 놀고 즐겁게 뛰고 즐거운 것에 빠지는 것은 쾌락주의입니다. 고행과 쾌락, 그것도 양변입니다.

“부처님은 고행과 쾌락의 양극단을 여의고 중도를 깨달았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마는 부처님은 이러한 중도에 계십니다. 중도에 계신다는 것은 이 모두를 지워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모두를 초월한 근원적인 자리, 거기에 머무신 뜻입니다. 이 모두를 초월한 자리, 이것은 바로 참으로 있는 실재라고 제가 그런 용어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쪽을 여읜다는 것은 바로 일심입니다.
중도는 바로 일심을 통해서 들어간 것이고 이 일심을 통해서 양변 즉, 좋다 나쁘다, 밉다 곱다, 생과 사다 하는 그 두 쪼가리, 이 상대적인 세간,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을 벗어나서 그 모두를 함께 싸고 넘어선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 중도의 자리입니다. 중도의 자리는 근원적인 진리의 자리입니다. 양쪽에 치우침이 없는 아주 바른 길을 중도라고 하는 것이 보통 교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중도가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입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중도에 머무십니다.


부처님의 방편시현


그리고 모든 문자나 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각하는 바를 다 아시고 순간에 이 세간의 모든 일을 다 아십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해서 일체를 비추시고 다 아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여기서 이 큰 법당을 세계로 친다면 이 큰 세계에 자리를 펴고 앉았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두 다리 뻗고 자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깨신 분이 나와서 보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꿈 속에서 뒹굴고, 어떤 사람은 꿈 속에서 침을 흘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꿈 가운데서 일을 어떻게 하든 소리를 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꿈 속에서 잠꼬대를 할 것이고, 가지가지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편안히 잠도 잘 잘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범부들 세계에 꿈을 깨신 분이 오셔서 그 일체를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꿈을 깬 사람, 즉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아시고, 이 사람 가운데서 모두가 아주 밝은 지혜와 능력이 있는 것을 다 아시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꿈길에서 헤매는 것을 건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모두를 아신다고 하는 것이 첫째 대문이고 바다에 비친 해인삼매에 관한 대문, 화엄경의 한 대문을 추려 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온갖 방편을 베푸셔서 중생을 제도하려고 그러십니다. 몸을 나투실 때 여러 가지 몸을 나투십니다. 부처님 모습을 나타내시고 그 밖에 보살의 모습을 나타내시고 이 세간에 모든 사람들의 몸으로 나투시고 혹은 천상 사람의 몸을 나투십니다.

부처님에 대해 우리 형제들은 아주 확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부처님은 한 분이십니다. 부처님은 법이시며 진리이십니다. 두 진리가 없기 때문에, 한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부처님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한 부처님이 뜨거운 자비심으로 저 중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저 중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연등불도 되시고 약사여래불도 되시고 아미타불도 되시고 모든 부처님이 되십니다. 법신불이십니다. 부처님은 법이십니다. 법이 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불교계에서 잘도 알면서도 ‘여러 부처님이 계셔서 이 부처님은 뭘 좋아하시고 저 부처님은 뭘 싫어하신다’며 비뚤게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