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무비스님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4만년때 ‘출현’

通達無我法者 2009. 10. 19. 23:24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4만년때 ‘출현’

5. 제4불 구류손불(拘留孫佛)

拘留孫佛 現在賢劫第一 偈曰

見身無實是佛見 了心如幻是佛了 了得身心本性空 斯人與佛何殊別

(如云 身心一如 身外无餘 山河大地 甚處得來)

구류손 부처님은 현재 현겁(賢劫)의 첫 번째 부처님이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몸이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은 부처님의 견해이며

이 마음이 환영과 같다고 아는 것은 부처님의 아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그 본성이 텅 비었음을 알았다면

이 사람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랴.

(이를테면 ‘몸과 마음은 같은 것이며 몸 밖에 다른 것은 없으니 산하대지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말과 같다.)

           

현재 현겁의 첫번째 부처님

1회 설법으로 4만명 제도해

해설 구류손 부처님에 대하여 <장아함경>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4만년을 살 때 출현하셨다고 되어있다. 그 외에도 종성은 바라문이며 성은 가섭이며 아버지는 예득(禮得)이며 어머니는 선지(善枝)며 안화성(安和城)에 살았다고 하였다. 설법은 1회며 제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4만 명이라고까지 하였다.

게송의 뜻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 즉 부처님이 이 육신과 마음과 산하대지를 보는 눈은 어떨까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보통 인간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과 부처님이 아는 것의 차이점이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이렇게 눈에 보이고 희로애락의 감정과 산하대지도 지금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있는 것이라고만 알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부처님은 이렇게 있는 것을 보면서 한편 텅 비어 없는 것으로도 본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이 몸과 이 마음과 산하대지가 텅 비어 없음을 보아 알면 부처님의 견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란 존재의 실상을 바로 꿰뚫어 보고 인생과 세상의 진실을 알아서 그 진실에 어긋나지 않게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불교에는 모든 존재를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다른 몇 가지 점을 소개하였다. 첫째는 보통 사람들이 모든 현상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상견(相見), 또는 유견(有見), 또는 가관(假觀)이라 하여 상종(相宗)의 견해라 한다. 둘째는 무상하고 허무한 것이라고 보는 것을 공견(空見), 또는 무견(無見), 또는 공관(空觀)이라 하여 공종(空宗)의 견해라 한다. 셋째는 있음과 없음을 같이 보고 상(相)과 공(空)과 유(有)와 무(無)를 통시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실상을 실상대로 보는 것을 중도관(中道觀), 또는 성종(性宗)의 견해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의 차이점을 옛 선사들은 아주 쉽게 설명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산시산 수시수(山是山水是水)라는 말이다. 고전에도 대장경 제종부와 사전부에 무려 42회나 등장하는데 그 한 예문을 소개한다. <속전등록(續傳燈綠)> 22권에 나오는 말이다.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은 푹 쉬어 버림을 얻고 나니 예전처럼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도 존재의 있음의 견해에서 존재를 없음으로 볼 줄 아는 것(見山不是山)이 무엇보다 어려움으로 불교에서는 더 높은 차원의 중도적인 견해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공으로 보고 무상(無相)으로 보는 것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래서 공관을 주창하는 반야부의 경전이 무려 600권이나 되며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 그토록 많이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에 대한 불교적 안목을 가졌다하더라도 그 차원은 차이가 많이 난다. 궁극에는 있음과 없음,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안목과 그 안목에 부합하는 일상생활의 삶이 되어야 한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