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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0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초능력에 현혹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는 가볍게 생각합니다.

산다는 것의 근본 원인이 무명과 갈애라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어리석어서 탐욕을 부리며

탐욕이 계속되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초능력은 탐욕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초능력은 집중에 의해서 나타나는 정신적 현상일 뿐이지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번뇌를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능력을 가지면 과시할 위험이 있어서 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기대는 사람도 자꾸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로 얻는 지혜만이 자신을 청정하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에서 선심의 대표적인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선심과 마찬가지로 선심도 한 가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의 마음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선심을 대표하는 마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했을 때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탐욕 없음을 관용(寬容)으로,

성냄 없음을 자애(慈愛)로, 어리석음 없음을 지혜(智慧)로 말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탐욕 없음이 관용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냄 없음이 자애를 말하거나 어리석음 없음이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반대로 비교할 수 있지만

수행을 할 때는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이 반드시 관용, 자애, 지혜는 아닙니다.

 

탐욕 없음은 단지 탐욕이 없는 상태의 수준이고,

성냄 없음은 단지 성냄이 없는 상태의 수준이고,

어리석음 없음은 단지 어리석음이 없는 상태의 수준입니다.

 

이때는 단지 탐욕이 없는 상태일 뿐이지 지혜가 포함된 관용의 수준과는 다릅니다.

의식에는 여러 가지의 지혜의 계층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념처경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의하면,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서로 반대가 아니고 별개로 구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도 별개로 구분 하셨습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별개로 구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탐욕이 있을 때는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탐욕이 없을 때는 이 마음이 관용은 아닌 것입니다.

단지 탐욕이 없을 뿐이지 이 마음이 관용이 아닌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냄이 있을 때도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냄이 없는 마음이 반드시 자애인 것은 아닙니다.

 

똑 같이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 지혜가 있는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탐욕이 있다가 없으면

그것을 관용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정신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의 마음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마음이 함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종류도 다릅니다.

 

관용이 있는 마음도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또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또 평온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런 마음을 구별할 것 없이

탐욕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는 마음일 때는 그냥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는 마음일 때는 그냥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일 때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는 탐욕의 반대가 관용이지만 이것은 상대적 의미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는 탐욕의 반대가 반드시 관용은 아닙니다.

이때 탐욕이 없는 마음은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이고,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겼기 때문에 생긴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야

비로소 관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탐욕이 있는 마음일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 탐욕이 없는 마음일 때는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관용이 있는 마음일 때는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탐욕이 있고 없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다음 3가지로 마음을 분류해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릴 때 어떤 마음이거나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 다음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관용이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자애가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지혜가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탐, 무진, 무치를 알아차리면 자연스럽게 관용, 자애, 지혜라는 완전한 선심이 일어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부터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의 마음을 차례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입니다.

 

불선심인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 같이 선심인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불선심과 선심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선심을 알아차리면 선심이 됩니다.

그리고 선심을 알아차리면 교만해지지 않고 지혜가 더욱 발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쁜 것만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나 모든 것들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선심도 알아차려야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원인은 많습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오는 고통이 사실은 더 큽니다.

 

갈애는 바라는 마음인데 일반적으로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하여 괴로움을 일으키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고 고통을 줍니다.

 

나쁜 마음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경계하기 마련인데

좋은 것은 이런 경계가 무너져서 알아차림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자리 잡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 못지않게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지혜가 나셨지만

항상 자신의 지혜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알아차림을 지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가 없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래서 수행의 세계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 되었거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관용은 탐욕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단지 탐욕이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을 받아들이고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관용에는 반드시 보시의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 모두 적용됩니다.

 

관용은 받아들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바라는 마음이 없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움켜쥐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나 상대에 대해서 부드러움과 관대함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남을 위해서 베풀 수 있습니다.

 

관용은 선한 마음으로 유익하며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쁨과 평온한 느낌이 함께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관용이 있고, 지혜가 없는 관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극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관용이 있고,

자극을 받아서 유발되어 일어나는 관용이 있습니다.

 

이렇듯이 마음은 단순하지만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마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어떤 마음이 되었거나 일어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자아가 있으면 완전한 관용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있는 관용일 때는 어떤 목적을 가진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해도 관용을 베풀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아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을 보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관용의 공덕이 감소됩니다.

 

이렇듯이 유신견이 있으면 어느 때가 되었거나

선한 마음을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바꾸어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관용은 선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선한 마음인 관용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살아오면서 생긴 탐욕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누구나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용은 부단한 노력 끝에 오는 것이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만이 고요함에 의해서 평온을 얻고

이러한 평온으로 인해 기쁨이 함께 합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을 때는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관용이 있을 때는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관용이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관용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탐욕에 빠지거나 또는 자신이 너그럽다는 자만에 빠집니다.

 

이때의 관용은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관용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더욱 지혜가 발전합니다.

 

 

둘째, 자애(慈愛)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입니다.

 

불선심인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같이 선심인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애는 성냄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단지 성냄이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번영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숭고한 사랑입니다.

 

자애의 대표적인 마음은 마치 어머니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뿐인 외아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진정한 마음입니다.

이때의 자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집착에서 오는 애정이 아니고

진심으로 자식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숭고한 사랑으로 가족, 사회, 인류,

존재계에 있는 모든 종류의 생명에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무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장벽이 없습니다.

 

이처럼 차별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풉니다.

이런 마음일 때라야 비로소 엄청난 힘을 가진 성냄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성냄은 성냄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애를 통해서만 성냄이 사라집니다.

 

자애로운 마음이 모든 생명을 향해서 무한한 사랑을 보낼 때 자신이 무시되지 않습니다.

나는 없고 오직 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모든 생명 속에 자신도 하나의 생명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고 나와 남이 모두 포함된 무한한 사랑입니다.

 

자애는 4가지의 무량한 마음과 함께 있습니다.

4가지 무한한 마음을 한문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합니다.

이 4가지란 자애[愛], 동정[悲], 기쁨[喜], 평정[捨]으로

이 마음을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비(慈悲)라고 했을 때는

사랑을 뜻하는 자애와 연민의 정인 동정이 함께 포함된 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으로 더욱 선심을 키워야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