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1

通達無我法者 2011. 1. 6. 00: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무지로 인해 잘못된 견해가 생기지만

무지와 잘못된 견해는 서로 내용이 다릅니다.


무지는 괴로움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자아가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무지는 실재(實在)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탐심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고, 무아를 자아로 압니다.


무지는 단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만,

잘못된 견해는 무지보다 더 깊은 병에 속합니다.


모르는 것은 지혜가 나면 그만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결코 지혜가 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견해는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있다는 사견으로 인해 불선심이 일어나고

악행을 해서 사악도에 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부처님의 고행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천인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음식을 조금씩 섭취하고 푸른 콩,

살과키, 렌즈콩, 완두콩의 즙을 조금씩 마시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러한 음식과 즙을 조금씩 섭취하자 나의 육체는 극도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몸은 음식의 부족 때문에

여기저기 마디풀 또는 큰 고랭이풀을 엮어놓은 것 같았다.

나의 엉덩이도 음식이 부족해서 마치 낙타의 발굽처럼 되고

등뼈는 마치 염주 알을 엮어놓은 것처럼 안으로 구부러져 몸을 떠받치고 있었다.

마치 황폐한 집의 서까래가 여기저기 축 늘어져있듯이

나의 갈비뼈도 영양분의 결핍으로 앙상하게 가지만 보였다.


마치 깊은 우물에서는 물속에 잠겨있는 별을 보듯이

나의 눈동자도 영양의 결핍으로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마치 싱싱했을 때 잘 자란 호박이 바람과 햇빛에 의해서 말라비틀어지듯이

나의 머리의 가죽도 영양분의 부족 때문에 말라비틀어졌다.

그리고 뱃가죽을 만지려고 하면 대신 등뼈가 만져지곤 했다.


이처럼 나는 필요한 영양분의 부족 때문에 뱃가죽이 등뼈에 말라붙어있으며

배설물을 내보내려면 음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그리고 몸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손발을 두드리곤 했다.

내가 그렇게 할 때 신체의 부분에서는 영양의 부족 때문에 썩은 부위가 떨어져나가곤 했다.


이때 나를 본 사람들은 말했다.

고행자 고타마는 검다. 어떤 이들은 고행자 고타마는 검지 않고 푸른색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행자 고타마는 검지도 푸르지도 않으며 황갈색이다.


이것은 순수한 피부색이 영양분의 부족 때문에 손상되어서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의 어떤 바라문이나 고행자도 날카롭고 고통스럽고

뼈를 깎는 듯하고 살을 도려내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이 이상은 아니지만 이렇게 높은 정도로 그것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미래의 어떤 고행자나 바라문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뼈를 깎는 듯하고 살을 에는 듯한 감각을 경험할 것이며

그들 또한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높은 상태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든 고통스럽고 어려우며 금욕적인 것에 의해서는

뛰어난 지고의 지혜, 통찰, 인간의 상태를 초월할 만한 가치를 얻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깨달음에는 또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오랫동안의 고통스러운 금욕은 결과적으로 헛된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더 증가될 뿐이었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초인간이 되었지만, 빈약하게 영양을 공급받은 그의 육체는

혹사당하는 것을 지탱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우아했던 자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시들어버렸습니다.

황금색의 피부는 창백하게 변했고, 혈관을 말라버렸고,

육체와 근육은 움츠러들었고 눈은 푹 빠져서 흐릿해졌습니다.


그의 모습은 살아있는 해골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으면서 여전히 나란자라 강둑에 머물면서

최고의 상태, 완전한 평화의 상태를 얻기 위해 명상하면서 그는 계속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군이 다음과 같이 상냥하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은 여위고 몰골은 형편이 없다. 죽음이 당신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당신의 많은 부분이 이미 죽음에 놓여있다. 오로지 생명만 남아있다.

오, 착한 자여, 살아나야 한다. 삶이 더 좋은 것이다.

살아야만 당신의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불의 희생제를 하면서 많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도대체 이러한 고행을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고행의 길은 힘들고 어려우며 쉽게 성취할 수 없다.’

마군은 고타마의 면전에서 이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고타마가 응답했습니다.

‘오, 사악한 자여, 경솔한 무리들아,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여기에 왔구나.

자그마한 공덕도 나에게는 조금도 유익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마군아, 공덕이 필요한 건 바로 너다.

확신, 자기제어, 인내, 지혜가 지금 나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것에 전념하고 있는데

너는 왜 세속적인 삶에 대해서 자꾸 묻고 있느냐.


심지어 강의 물줄기도 부는 바람에 마르는데

왜 이와 같이 고행하는 나의 피가 마르지 않겠느냐.

피가 마를 때 담즙과 점액질 또한 마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육체가 소모되어 갈 때 나의 마음은 더욱더 맑아질 것이다.

나의 선정, 지혜, 그리고 집중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면서 최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욕망을 바라지 않는다.

존재의 순수함을 유지해라.


감각적 욕망이 너 첫 번째 무리이다.

둘째, 성스러운 삶의 혐오이다.

세 번째, 굶주림과 목마름이다.

네 번째는 갈망이다.

다섯 번째는 게으름과 치둔한 것이다.

여섯 번째는 두려움이다.

일곱 번째는 의심이고

여덟 번째는 비방과 고집이다.

아홉 번째는 칭찬과 명예를 얻는 것, 그리고 나쁜 명성을 얻는 것이다.

열 번째는 자신을 칭찬하면서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마군아! 이것이 나의 적인 사악한 자의 무리들이다.

(다시 말하면 마군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군아, 비겁한 자는 그 적을 이겨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극복한 자는 행복을 얻게 되리라.

이제 나는 문사초를 휘날리리라.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정복을 당해서 사느니

차라리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게 나에게는 더 좋다.


어떤 고행자와 바라문들도 이 전쟁터에 뛰어들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한 길을 알지도 못하여 걸어가지도 못한다.

사방에서 코끼리를 정렬하고 있는 마군에게

군대를 보내면서 나는 전쟁터로 나아간다.


마군은 나를 밀어낼 수가 없다.

신들과 이 세상에 정복하지 못한 너희들의 군대를

마치 굽지 않은 그릇을 돌로 쳐서 깨뜨리듯이 나의 지혜로 파괴해버릴 것이다.


나의 마음을 제어하면서 선정의 상태를 튼튼히 다져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제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나의 가르침을 근면하게 의욕적으로 수련하면서

너희를 개의치 않으면서 가는 그들의 길에 고통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고타마 싯다르타는 마군에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극단적 고행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미얀마 마하시 선원에 있는 세인예인이라고 하는

사일런스 빌딩에서 수행을 할 때였습니다.

그곳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무문관과 같은 곳인데, 밥을 날라다주면 먹고,

그리고 자유롭게 오직 혼자서 수행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냉병을 맞았습니다.

냉병을 맞은 후에 도무지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숟갈을 떠도 체해서 고통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밥을 날라다주는 미얀마의 시자가 단식한다는 사실을 알고

큰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종이에다가 영어로 단식 중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놀란 시자가 그 사실을 마하시 큰 스승에게 보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큰 스승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당장 단식을 풀어라. 단식은 안 된다.’ 라고 해서

제가 불가피하게 단식을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이 왜 단식을 풀라고 하는지 저는 그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안 이야기로 미얀마에서는 수행자가 결코 극단적 고행이나

단식 같은 그러한 극단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매우 금기시한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이 이러한 고행의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과정들이

매우 지성을 나약하게 하고 불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행자 고타마는 고행이

그 당시 구도자들에 의해 해탈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지만,

자기의 경험을 통하여 그 무의미함을 확신하고,

실제적으로는 지성을 나약하게 만들어버려서

결국 정신이 퇴보하고, 정신을 핍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발달을 더디게 하는 성향이 있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탐닉을 버린 것처럼,

극단적인 자기금욕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중간의 방법을 채택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의 가르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중도’입니다.


그는 부친이 파종제에 참가하고 있을 때 잠부나무의 서늘한 그늘아래에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숨쉬는 것에 집중하여 첫째 선정을 얻게 되었던 것을 회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적당한 육체는 정신적인 발전에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육체를 기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조금 거친 음식을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그와 함께 있었던 다섯 명의 동료들은 고행자 고타마가

어떠한 진리든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진리를 자신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행하는 방법을 바꾸자

실망하고 그의 곁을 떠나서 구도자 아시빠타나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고행자 고타마는 사치스러워서 고행하는 것을 그만두고

안락한 생활로 되돌아갔다고 비난했습니다.

도움이 가장 필요한 결정적인 시기에 동료들은 그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고타마 싯다르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부지런히 정진해나갔습니다.


비록 치열한 고행기간에는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오히려 이제는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흔히 위대한 성자들은 혼자 있을 때 고독한 숲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좋은 조건을 성숙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계속해서 정진을 했습니다.


거친 음식을 먹고 잃었던 힘을 되찾으면서

그는 쉽게 젊은 시절에 얻었던 첫 번째 선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선정을 얻었습니다.

선정을 발전시키면서 완전히 하나로 모아진 그의 마음은

이제 모든 사물의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시키는 잘 닦인 거울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고요하고 맑게 정화되고 욕망과 번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빈틈이 없으며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생각으로 전생의 기억을 돌아보는데 마음을 돌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43  (0) 2011.01.06
12연기와 위빠사나/42  (0) 2011.01.06
12연기와 위빠사나/40  (0) 2011.01.05
12연기와 위빠사나/39  (0) 2011.01.05
12연기와 위빠사나/38  (0) 201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