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2

通達無我法者 2011. 3. 2. 01:1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할 때 통증이 생긴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통증은 아플만한 조건이 생겨서 아픈 것입니다.


통증은 단지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法)입니다.

법을 법으로 보지 않고 없애려고 한다거나 화를 내고 자세를 바꾼다면

그 순간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통증 때문에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좌선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통증이 생긴 것이므로

통증 때문에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참기 어려운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것이므로

통증으로 인해서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원인을 알려고 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원인은 대상을 알아차린 결과로 알아야 하며,

이렇게 아는 것이 지혜로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제 19장,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상, 고, 무아는 오온의 실재에 관한 지혜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들은 너무도 빠르게 한 순간에 흘러가기 때문에

명확히 표현할 수 없고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것이 얼마나 빠르게 일어나는지

혹은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머무는 속도는 빛이 머무는 것의 백만분의 1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무상을 봐야 합니다.


다시 주인의식으로 돌아가 보시죠.

수행자는 반드시 들숨의 의식과 날숨의 의식을 주의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반드시 이들 들숨과 날숨의 의식이 일어날 뿐만 아니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호흡을 보는 것만이 아니고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생멸을 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도 몇 가지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알아차리면 유익합니다.


첫째, 호흡을 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신념처 수행입니다.

둘째, 호흡하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심념처 수행입니다.

호흡은 몸에서 일어나지만 호흡하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심념처 수행이라고 합니다.

셋째, 호흡의 단단함과 부드러움, 뜨거움과 차가움, 밀고 당김, 수축하고 팽창함,

가벼움과 무거움, 좋아함과 싫어함 등 호흡을 이러한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수념처 수행입니다.

넷째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무상을 아는 법념처 수행입니다.

이렇게 호흡 하나에서 신,수,심,법 사념처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호흡을 알아차릴 때 심념처 수행은

호흡하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호흡을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호흡하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영어로 하면 noting하는 것을 watching한다고 합니다.

또 우리말로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수행 방법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위치는 몸이 아니고 전면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옆이나 위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몸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마음자리에 두면 몸이라는 특정한 위치에 상관없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편의상 전면에서 알아차린다고 하는데

몸의 위치가 아닌 마음자리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호흡을 알아차리실 때는

전면에서 마음으로 호흡을 알아차리신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의 전면을 빨리어로는 빠리무깡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수행하시기를 원하신다면 한국명상원에 오셔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우시면 쉽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들숨의 의식을 알아차리면 그것 역시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날숨의 의식을 알아차려도 또한 그것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의식을 무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뒤따르는 의식 즉, 먼저 있는 의식이 이미 사라졌다고 아는 의식을

위빠사나의 도(道)라고 부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호흡을 알아차리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져 버린 의식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리고 사라진 것을 아는 의식이 위빠사나 도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도는 실재하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름다운 경치와 웅장한 건물은 감동을 줍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동을 줍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나 상대가 친절하게 대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술적인 것과 고귀한 것들이 많이 있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은 보이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보는 자신의 마음도 그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보는 지혜야말로 가장 진실한 감동입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이 있고,

이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한 감동입니다.

지금 수행자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감동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다른 감동을 바라지 마십시오.

위빠사나의 도의 지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가

번뇌를 여의게 하고 바로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하는 시간 내내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고,

또한 그것들의 무상함을 자각하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무상과 도, 무상과 도,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관념적 대상의 고요함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사마타의 도입니다.

또 실재하는 대상의 무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되고,

이렇게 알아차리면 다음 단계로 무상과 고, 무아를 아는 마음과

위빠사나의 도 두 가지만 있습니다.

외부와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은 이들이 때때로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빠알리어 경전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이처럼 빛과 같이 빠른 마음은 번뇌라고 하는 손님에 의해서 더렵혀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때때로 일어나는 생각들을 손님이라고 합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라서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서 손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번뇌가 찾아온 것을 손님이라고 보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손님으로 맞이하는 순간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을 찾아온 망상, 졸음, 통증, 괴로움, 즐거움,

그런 모든 방문한 것들은 모두 손님입니다.

우리는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그 말은 그것들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현상이므로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손님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척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향유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올만해서 왔으면 ‘왔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도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심념처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 수행을 해야 합니까?

명상원에서만 수행을 해야 하는가요?

아닙니다. 정답은 심념처는 마음이 일어나는 곳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걷는 중에 걷는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걷는 동안에 수행을 해야 합니다.

걷는 것을 아는 동안 각각의 발걸음마다 제각기 다른 의식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라진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먹고 마시는 중에 이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동안 현재를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또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첫 번째 특징은 현재에 있는 실재하는 것을

현재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렇게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찰나 집중이 되어서 지혜가 납니다.


두 번째 특징은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네 가지 분명한 앎은 바른 행동과 바른 믿음을 갖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분명한 앎이란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시기나 상황이 적절한지,

또 내가 알아차리는 대상이 바른 대상인지,

또는 어리석지 않은지를 능동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의 깊은 알아차림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다 밀착하여 주의 깊게 알아차릴수록

수행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매우 큽니다.

산만함과 불안, 그리고 혼란함이 많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머물러 자리 잡기 쉽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수행자는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 중에 망상이 들어 올 때도 망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나서

즉시 망상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도 한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연속되는 것일 뿐입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본래 가지고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휩쓸려 들어옵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고정관념으로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무엇을 하거나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실제로 행동을 할 때 행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속되는 과정을

모두 알아차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 뒤에 알아차리면 그 사이에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시간은 항상 현재에 머물러야 합니다.

조금만 틈이 생기면 과거나 미래로 갑니다. 그러면 즉시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바로 이 생각이라는 것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여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만이 망상을 하지 않아 집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거의의 시간은 집착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신체가 접촉할 때마다 부딪치는 것을 부딪치는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번뇌가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러면 진실한 마음을 쫓겨나고 도둑이 들어와서 설칩니다.

누구나 알아차리지 못하면 도둑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하면

사람을 볼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을 좋아서 소유하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데 싫어서 미워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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