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山艤雜錄)

61. 젊은 패기에 휘둘린 시자, 너그럽게 봐주지 않은 스승

通達無我法者 2008. 3. 5. 20:49
 

 

 

61. 젊은 패기에 휘둘린 시자, 너그럽게 봐주지 않은 스승

/ 설암(雪巖)스님과 무준(無準)스님

 

앙산사 설암(雪巖)스님은 무주(婺州)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남달리 뛰어나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경산사 무준(無準)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때마침 범종을 주조하여 그에게 소(疏)를 청하자 스님은 게송을 지어주었다.


온 몸통이 오직 하나의 입인데

백번 달군 풀무 속에 물흐르듯 흘러나온다

범종소리 농울져 석양을 돌려보낸 뒤에

또다시 밝은 달을 누대 위로 오르라 재촉하네.

通身只是一張口  百煉鍊中袞出來

斷送夕陽歸去後  又催明月上樓臺


이에 무준스님은 그에게 시자의 소임을 맡겼다. 소임이 만기가 되자 무준스님은 그 직책을 대신할 사람을 청해 왔는데 설암스님은, 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스님은 무준스님이 보낸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창문에 엎드려 심한 구토 소리를 냈다. 무준스님은 그의 마음을 알고 일부러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아이는 복이 없는 놈이다. 시자직을 그만두자 피 토하는 병까지 걸렸구나!”

하고 크게 성을 냈으나 설암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지로 세상에 나왔을 때, 여러차례 법을 잇는 향불을 올렸지만 어느 분을 위한 것이라고는 밝히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낡은 좌복 위에서 땅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졌으니,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는 다시 향을 품 속에 넣고 법좌에 앉았다. 그가 앙산사의 주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무준스님을 위하여 향을 올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준스님이 스승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설암스님은 당시 젊은 나이에 패기에 휘둘린 것이며 무준스님은 당대 큰스님으로서 너그럽게 참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리가 이처럼 어긋나게 된 것이리라 여겨진다. 큰 사찰을 맡아 불자를 잡는 주지들은 이 일을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