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6. 참다운 공덕을 지어야 지복(智福)을 받음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20:34

 

 

6. 참다운 공덕을 지어야 지복(智福)을 받음


또 묻기를, "부처님께서 경에서 설하시기를, '중생으로 하여금 절을 짓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향을 사르고 꽃을 흩거나 장명등(長明燈)을 밝히거나 밤낮으로 여섯 차례 예불을 하거나 재계(齋戒)를 지키고 예배하는 등 갖가지 공덕을 닦게 하면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하셨거늘, 이제 말씀하시길, '마음을 관찰하는 한 법이 모든 수행을 다 거두어들인다'고 하시니, 이러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마땅히 허망한 것이겠습니까?"

답하길, "부처님께서 설하심은 경에 한량없는 방편이 있다. 중생들의 근기가 둔하고 열악하여 아주 깊은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므로 유위(有爲)의 일을 빌려 무위(無爲)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 만약 다시 안으로 행하여 수행하지 않고 오직 단지 밖으로 구하여 복만 희망하여 얻고자 한다면 옳지가 않다.

가람(伽藍),이라는 말은 범음(梵音)이요. 이 말은 청정한 곳이라는 것이다. 만약 영원히 삼독(三毒)을 제거하고 항상 육근(六根)을 청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안팎이 청정하면 이것이 바로 수행하는 가람이다.

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은 곧 일체중생이 구하는 것이다. 이른바 온갖 깨닫는 행을 닦을 때에 여래의 참된 용모와 미묘한 형상을 빌리는 것인데 어찌 쇠와 구리로 주조하여 지은 것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자는 몸으로써 화로를 삼고, 법으로써 불을 삼으며, 지혜로써 공장을 삼고, 삼취정계(三聚淨戒)와 육바라밀(六波羅密)로써 본보기를 삼아서 몸 가운데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녹이고 단련해서 두루 일체 계율(戒律)에 들어가 본뜨는 가운데 가르침과 같이 받들어 행해서 한 가지라도 결루(缺漏)됨이 없게 하면 자연히 참된 용모의 상호를 성취하리라. 이른바 구경에 영원히 존재하는 미묘한 법신(法身)이요, 이는 유위(有爲)의 무너지는 법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도(道)를 구함에 참된 용모를 주조할 줄 모른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문득 공덕을 이룬다고 하겠는가?

향을 사른다는 것은 또한 세간의 형상이 있는 향이 아니오, 나아가 이것은 무위정법(無爲正法)의 향이다. 모든 냄새나는 더러운 것을 좋은 향기로 바꾸어 무명(無明)의 악업(惡業)으로부터 모두 소멸하게 하는 것이니, 그 정법의 향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계향(戒香)이니 이른바 능히 모든 악을 단절하며, 능히 모든 선을 닦는 것이다. 둘째, 정향(定香)이니 이른바 대승(大乘)을 깊이 믿어서 마음에서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셋째, 혜향(慧香)이니 이른바 항상 몸과 마음을 안팎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 해탈향(解脫香)이니 이른바 능히 무명(無明)의 결박을 끊는 것이다. 다섯째,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이른바 지각(知覺)하고 관찰함이 항상 밝아서 걸림 없이 통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향을 이름하여 최상의 향이라고 하는 것이니 세간의 향으로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날에 모든 제자로 하여금 지혜의 불로써 이러한 무가보(無價寶)의 향을 사루어서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하셨다. 지금 시절의 중생은 어리석고 근기가 둔하여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밖에 불을 가지고 세간의 침단(沈檀)이란 훈육(薰陸)의 질애(質碍)한 향을 사루어서 복된 과보를 바라니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꽃을 흩는다는 것은 이치가 다음과 같다. 이른바 바른 법이란 공덕의 꽃을 널리 설하여 유정(有情,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들을 이롭게 하고, 온갖 진여(眞如, 있는 그대로 참다운 존재)의 성품을 다스려서 장엄(莊嚴)을 두루 베푸는 것이니, 이 공덕의 꽃은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것으로서 끝내 항상 존재하여 시들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꽃을 흩으면 한량없는 복을 받거니와 만약 말하기를, '여래께서 제자들이나 중생들로 하여금 고운 비단을 마름질하고 초목을 꺾어서 꽃을 흩게 하셨다'고 한다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깨끗한 계행을 지키는 이는 천지 안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해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못 알아 해치는 것도 큰 죄를 받거늘, 하물며 다시 요즘에 청정한 계율을 범하고 만물을 해치면서 좋은 과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익을 얻고자 하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장명등(長明燈)이라는 것,은 바르게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느끼고 아는 것이 분명한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모든 사람은 항상 몸으로 등잔받침을 삼고, 마음으로 등잔을 삼으며, 믿음으로 심지를 삼고, 계행이 증진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을 삼으며, 지혜를 밝게 통달한 것을 비유하여 저 등불의 광명과 같은 것이다. 항상 이러한 깨달음의 등불을 타게 하여 밝음이 일체 무명(無明)의 어리석은 어둠을 깨뜨리게 해야한다. 능히 이러한 법으로 차츰 밝혀 깨달으면, 이는 곧 한 등으로 백 천 등을 켜되 등과 등이 빛을 이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음으로 장명등이라 이름한다.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이름을 연등(燃燈)이라고 하는 의미도 이와 같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여래께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허망한 행을 하여 유위(有爲)에 집착하여 세간의 소유(蘇油)로 등을 켜서 빈방을 비추는 것으로써 가르침대로 한다고 하니, 어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부처님의 미간(眉間)에 있는 털 하나의 광명으로도 십만팔천의 세계를 비추고, 신광(身光)을 다 나타내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게 되는데, 어찌 이런 세속의 등을 빌려서 이익을 삼겠는가? 이런 이치를 깊이 살펴보면 응당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으리라.

여섯 차례 행도(行道, 예불)한다는 것은 육근(六根)안에서 항상 불도를 행한다는 뜻이다. 부처란 깨달음이다. 때때로 나아가 온갖 깨닫는 수행을 닦아 육근을 조복(調伏)시키고 육정(六情 : 육근)의 청정함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는 것을 육시(六時)의 행도(行道)라고 하는 것이다.

탑(塔),이란 몸과 마음이니, 밝은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면서 생각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과거 성현들도 이 도를 실천하여 열반을 얻었는데 세상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르니 어찌 도를 실천한다고 하겠는가? 근기가 둔한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찍이 안으로 닦지 않고 오직 밖으로 구함만을 집착하여 질애(質碍)한 것을 가지고서 세간의 탑을 에워싸서 밤낮 분주하게 세간의 탑을 돈다. 수고롭게 스스로피로하기만 하고 진성(眞性)에는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 미혹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참으로 가여운 일이다.

재계(齋戒)를 지키는 이는 마땅히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헛수고만 하게 된다. 재(齋)라는 것은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려서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요, 지(持)라는 것은 보호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계행을 여법(如法)하게 보호하여 가지고서 반드시 육정(六情)을 금하고 삼독(三毒)을 제어하며 부지런히 감각의 관찰을 닦아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요달하면 이름하여 재(齋)를 행한다고 할 수 있다.

재계(齋戒)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음식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희식(法喜食)이니 이른바 여래의 바른 법에 의지하여 기쁘게 받들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열식(禪悅食)이니 이른바 안팎이 맑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요, 셋째는 염식(念食)이니 이른바 늘 부처님을 생각하되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요, 넷째는 원식(願食)이니 이른바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늘 바른 원을 행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해탈식(解脫食)이니 이른바 마음이 항상 청정해서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오정식(五淨食)을 갖는다는 것은 이름하여 재식(齋食)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런 다섯 종류의 깨끗한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재계를 지킨다고 한다면 전혀 옳지 않다.

단식(斷食)이란 무명과 악업의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문득 접촉되면 이름하여 재계(齋戒)를 깨뜨리게 되는 것이니, 재(齋)를 만약 깨뜨림이 있으면 어떻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미혹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몸과 마음을 멋대로 행동하여 모든 악업을 짓고 방자하게 욕정을 탐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서 오직 밖의 음식만을 끊고는 스스로 재계를 지킨다고 하니, 어찌 어리석은 아이가 썩어 문드러진 시신(屍身)을 보고 말하길 산 사람이라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혀 옳지 않다.

예배(禮拜)라 하는 것은 항상 법답게 한다는 것이니, 반드시 이치의 바탕이 안임을 밝히고 밖의 변화가 현상의 형상임을 밝혀야 한다. 이치는 버릴 수 없는 것이요, 현상은 행하고 감춤이 있다. 이러한 뜻을 알아야 만이 나아가 법을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예(禮)라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요, 배(拜)라는 것은 굴복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성(眞性)을 공경하는 것이며 무명(無明)을 굴복하는 것을 이름하여 예배한다고 하는 것이다. 공경하기 때문에 감히 헐뜯고 손상하지 못하며 굴복하기 때문에 하여금 쫓아 달아나지 못한다. 만약 능히 악한 감정이 영원히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존재하면 비록 나타난 형상이 없을지라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며 그 형상이라는 것은 곧 몸의 형상이다. 하여금 모든 세속을 위하고자 함으로 겉으로 겸손하게 하심(下心, 마음을 낮춤)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밖의 몸을 굴복해서 공경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것을 쓰면 나타나고 그것을 버리면 감추어지니, 밖을 들어 안을 밝혀서 성(性)과 상(相)이 상응(相應)하게 한다. 만약 다시 이법(理法)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밖의 형상에 집착하면 안으로는 곧 미혹됨으로 탐진치(貪瞋癡)를 쫓아서 항상 악업을 행할 것이요, 밖으로는 곧 헛된 몸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니, 어찌 예배한다 하겠는가? 성인에게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범부를 속여 윤회에 덜어짐을 면하지 못하나니 어떻게 공덕을 이룰 것인가? 이미 얻은 것이 없으니 어떻게 도를 구한다 하겠는가?

 

달마어록의 출처는 엠파스 블로그 백운청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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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백운청산 : http://blog.empas.com/mangsang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