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규봉 종밀 소론찬요 병서 해설 3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30

 

세밀하고 견고하니 금강이로다
 
반야는 모든 것을 끊으니 因位고
佛果는 끊을 것이 없기에 智라

第二明經宗體中 二
제 2, 경의 종체를 밝힘에 둘이 있으니,
初 宗者 統論佛敎 因緣爲宗 別顯此經 則實相般若 觀照般若 不一不二 以爲其宗 以卽理之智 觀照諸相 故如金剛 能斷一 切 卽智之理 是爲實相 故如金剛 堅牢難壞 萬行之中 一一不 得昧此 故 合之 以爲經宗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은 “시공을 초월한 그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숨어있던 자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첫 번째. 종(宗)에 관한 것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논한다면 인연으로써 종지를 삼았지만, 이 금강경만 가지고 별도로 말한다면 실상반야(理經, 堅)와 관조반야(行經, 利)가 하나(眞空)라 할 수도 없고 둘(妙有)이라 할 수도 없는 것으로써 그 종지를 삼았다. 이치에 卽한 (진리와 일치하는) 지혜로써 여러 모습을 관조(觀照)하기 때문에 금강이 능히 일체를 다 끊어 버리는 것과 같고, 지혜에 즉한 이치(지혜로 관찰하는 진리)가 곧 실상(實相)이 되기 때문에 금강이 견고하여 파괴되기 어려움과 같으니, 만행 가운데 하나라도 어둡지 않으므로 이 두 반야를 (실상반야와 관조반야) 합하여 경의 종지로 삼았다.

二 體者 文字般若 卽是經體 文字 卽含聲名句文 文字性空 卽是般若 無別文字之體 故皆含攝 理無不盡 統爲敎體

두 번째. 체(體)에 관한 것인데, 문자반야(敎經, 明)가 곧 이 경의 몸통(體)이다. 문자는 소리와 이름과 구절과 문장을 포함하는 것이나, 문자의 성품이 공(空)하므로 이것이 곧 반야이다. 문자에는 따로 몸통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섭수하여 이치가 다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통틀어서 가르침의 체(敎體)로 삼았다.

〈보충설명〉
1. 실상반야는 진리 그 자체(理經)를 말합니다. 관조반야는 사물을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렇게 空한 그리고 如實한 관찰에 비추어 실천(行經)하는 반야를 말합니다. 문자반야는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써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금강경 경전(敎經) 등이 바로 문자반야에 해당됩니다.
또, 실상반야는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堅으로 그 속성을 표현합니다. 관조반야는 모든 군더더기와 불순함을 제거하기 때문에 날카롭다는 뜻의 利로 그 속성을 표현합니다. 문자반야는 경을 통해 진리가 밝게 드러나기 때문에 밝다는 뜻의 明으로 그 속성을 표현합니다.

2. 以卽理之智의 卽은 둘의 모습이 원만한 하나임을 표현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第三分別處會中 二
제 3, 법을 설한 장소와 모임을 분별함에 둘이 있으니
初 摠明佛說大部處會中 二 初 六百卷文 四處十六會說 一 王舍城鷲峰山 七會 山中 四會 山頂 三會 二 給孤獨園 七會 三 他化天宮摩尼寶藏殿 一會 四 王舍城竹林園白鷺池側 一 會 後 此經 卽第二處第九會 第五百七十七卷

첫 번째. 부처님이 대부반야를 설하신 장소와 모임 두 가지를 모두 밝히셨으니, ① 600권 금강경은 4곳에서 16회 설해졌다. 첫 번째 설법은 왕사성 취봉산에서 7회에 걸쳐 행해졌는데 산 중턱에서 4회, 산 정상에서 3회다. 두 번째 설법은 급고독원에서 7회, 세 번째 설법은 타화천궁마니보장전에서 1회 행해졌다. 네 번째 설법은 왕사성 죽림원 백로연못가에서 1회 행해졌다. 그리고, ② 이 경은 두 번째 장소(급고독원)에서의 제 9회 설법인 제 577권 (능단금강경)에 해당된다.

後 別明傳譯此經時主 前後六譯 一 後秦羅什 二 後魏菩提流 支 兼譯天親論三卷 三 陳朝眞諦 兼譯金剛仙論 及本記四卷 四 隋朝笈多 兼譯無着論兩卷 五 唐初玄奘 又日照三藏 譯功 德施論二卷也 六 大周義淨 幷再譯天親論三卷 上六人 皆三 藏

두 번째. 별도로 이 경전을 전해서 번역한 시기와 인물을 밝히니 전후로 6번의 번역이 행해졌다. ① 첫 번째 번역은 후진의 구마라습이요 ② 두 번째 번역은 천친의 반야론 세 권도 함께 번역한 후위의 보리유지 ③ 세 번째 번역은 금강선론과 본기 네 권도 함께 번역한 진 나라의 진제 ④ 네 번째 번역은 무착의 반야론 두 권을 함께 번역한 수 나라의 급다 ⑤ 다섯 번째 번역은 당 나라 초기의 현장과, 공덕시론 두권을 번역한 일조삼장 ⑥ 여섯 번째 번역은 천친의 반야론 세 권도 아울러 다시 번역한 대주의 의정이다. 위의 여섯 분 선지식은 모두 三藏법사(學德이 높고 經律論 三藏에 달통한 스님)다.

今 所傳者 卽羅什 弘始四年 於長安草堂寺 所譯也 天竺 有 無着菩薩 入日光定 上昇兜率 親詣彌勒 稟受八十行偈 又將 此偈 轉授天親 天親 作長行解釋 成三卷論 約斷疑執以釋 無 着 又別造兩卷論 約顯行位以釋

오늘에 전해진 것은 구마라습이 홍시 4년(402년)에 장안의 초당사에서 번역한 것이다. 천축에 무착보살이 있었는데, 일광의 선정에 들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80줄에 이르는 게송을 받았다. 이 게송은 다시 천친보살에게 전수되었다. 천친은 긴 줄의 해석을 달아 세 권의 반야론을 완성하였는데 의심과 집착을 끊어 없애는 관점에서 해석을 달았다. 무착은 별도로 두 권의 반야론을 지어서 (바라밀 실천의 관점에서) 줄과 위치를 잡아 해석을 달았다.

今科經 唯約天親釋義 卽兼無着 亦傍求餘論 採集諸疏 題云 纂要 其在玆焉

이제 금강경을 과목한 것은 오직 천친과 무착이 해석한 뜻에 의거한 것이며, 또한 기타의 논(論)도 구해 참고한 것이며, 여러 소(疏)도 채집한 것이니, 제목을 ‘찬요(纂要)’라 한 그 뜻이 여기에 있다.


第四釋通文義中 二
初解題目
제 4, 경문과 그 뜻을 해석하여 통하게 해주는 데 둘이 있으니,
처음은, (금강반야바라밀경) 제목을 해석하였다.
金剛者 梵云跋折羅 力士所執之杵 是此寶也 金中最剛 故名 金剛 帝釋 有之 薄福者 難見 極堅極利 喩般若焉 無物可能 壞之 而能碎壞萬物

금강이란 것은 범어로 발절라이니 금강역사가 가지고 있는 방망이가 곧 이 보배다. 금 가운데에 가장 강하기 때문에 이름을 금강이라 했으니, 제석천왕이 이 방망이를 가지고 있으나 박복한 사람은 보기 어렵다. 지극히 견고하고 지극히 예리하여 반야로 비유했으니, 어떤 물건으로도 파괴시키지 못하나 능히 만물을 부술 수가 있다.

涅槃經 云譬如金剛 無能壞者 而能碎壞 一切諸物 無着 云金剛 難壞 又云能斷 又云金剛者 細牢故 細者 智因故 牢者 不可壞故 皆以堅喩般若體 利喩般若用

열반경에 이르기를, “비유하건데 금강을 능히 파괴시키는 것은 없으나 일체의 모든 사물을 깨뜨릴 수 있다.”라고 하였고, 무착도 이르기를 “금강은 파괴하기 어렵되 또한 능히 끊어버린다.”라고 함과 동시에 또 이르기를 “금강이라고 함은 세밀하고 견고한 까닭이니, 세밀하다는 것은 지혜의 인이기 때문이며 견고하다는 것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으니, 이 모두 견고한 것으로써 반야의 체를 비유한 것이요 날카로운 것으로써 반야의 용을 비유한 것이다.

又 眞諦記 說六種金剛 一 靑色 能銷災厄 喩般若 能除業障 二 黃色 隨人所須 喩無漏功德 三 赤色 對日出火 慧對本覺 出 無生智火 四 白色 能淸濁水 般若 能淸疑濁 五 空色 令人空 中行坐 慧破法執 住眞空理 六 碧色 能銷諸毒 慧除三毒 傍兼 可矣 非堅利之本喩

또, 진제기에서는 6가지로 금강을 설명했는데, 첫 번째 청색(靑色)은 능히 재액을 소멸시키니 반야가 능히 업장을 제거함을 비유함이요, 두 번째 황색(黃色)은 사람들이 구하는 바를 이루어주니 무루공덕을 비유함이요, 세 번째 적색(赤色)은 해에 의지해 불을 내니 혜(慧)가 본각에 의지해 無生의 지(智)의 불을 내는 것이요, 네 번째 백색(白色)은 더러운 물을 깨끗이 하니 반야가 의심과 혼탁을 맑게하는 것이요, 다섯 번째 공색(空色)은 사람들로 하여금 허공가운데서 다니고 앉게 하니 지혜로 법집(法執)을 깨트려서 진공의 이치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요, 여섯 번째 벽색(碧色)은 모든 독을 소멸시킬 수 있으니 지혜가 삼독(三毒; 貪嗔痴)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 진제기의 비유는) 곁에 두고 참고로 얘기하는 것은 가능해도 (금강의) 견고하고 날카로움에 대한 본래의 비유는 아니다.

般若者 正云慧 卽照五蘊空 相應本覺之慧 是也 若約學者 從淺至深 言之 則攝聞思修三慧 摠爲般若 故 無着 云能斷者 般若波羅蜜中聞思修 所斷 如金剛 斷處而斷故 又云細者 智因故者 智因 卽慧也

반야를 올바로 번역하면 혜(慧)니 곧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본각의 지혜에 응접하는 것이다. 만일 배우는 사람들의 얕은 지식에서 깊은 뜻에 이르기까지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문사수(聞思修;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 삼혜(三慧)를 포섭해야 총히 반야가 된다. 그러므로 무착이 이르기를 “能斷(끊음의 주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의 문사수(聞思修)요, 所斷(끊을 대상)은 금강이 끊을 곳을 끊어버림과 같다” 라고 했다. 또 “細가 지(智)의 인(因)이 되는 까닭이다” 라고 함은 지의 인(智因)이 곧 혜(慧)이기 때문이다.

依智度論 因位 名般若 果位 名智則聞思修 皆名爲細 細妙之慧 佛智之因矣 般若 能斷 故在因位 佛果 無斷 轉受智名 若依大品經 若字 通智慧二義 故 智與慧 名義 少殊 體性 無別

지도론에 의거한다면 인위(因位)를 반야라 이름하고, 과위(果位)를 지(智)라 이름하고, 문사수(聞思修)를 통틀어 細라 이름하니, 세밀하고 묘한 혜(慧)가 불지(佛智)의 인이 된다. 반야는 모든 것을 끊을 수 있으므로 인위(因位)에 있고, 불과(佛果)는 끊을 것이 전혀 없기(無斷) 때문에 지(智)라는 이름을 받는다. 만약 대품반야경에 의거한다면 ‘若字’는 지와 혜의 두 가지 뜻에 통하는 것이니 고로 지와 혜가 이름과 뜻은 조금 다르나, 체성(體性)은 다름이 없다.

波羅蜜者 此云彼岸到 應云到彼岸 謂離生死此岸 度煩惱中流 到涅槃彼岸 涅槃 此云圓寂 亦云滅度 一切衆生 卽寂滅相 不復更滅 但以迷倒 妄見生死 名在此岸 若悟生死本空 元來圓寂 名到彼岸 若兼般若廻文 應云到彼岸慧

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을 말하므로 응당히 도피안(到彼岸)이라고 이른다. 말하자면, 생사의 이 언덕을 여의고 번뇌의 흐름을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다. 열반은 원적(圓寂)이며 또 멸도(滅度)라 이른다. 일체 중생이 곧 적멸의 모습이라 다시 멸할 것이 없건마는 단지 미혹되고 전도된 까닭으로 망령되이 생사의 견해를 일으키니 ‘이 언덕에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생사가 본래 공해서 애초부터 원적임을 깨달으면 도피안이라 이름할 것이다. 만일 반야를 도로 문자로 돌려 말한다면 (廻文:문장의 구조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 응당 ‘저 언덕에 이르는 지혜’라 할 것이다.

經者 梵音 脩多羅 義翻爲契經 契者 詮表義理 契合人心 卽契理契機 故名契也 經者 佛地論 云能貫能攝 故名爲經 以佛聖敎 貫穿所應說義 攝持所化生故

경(經)이란, 범어 발음으로 수다라인데 뜻으로 번역하면 계경(契經)이다. 계(契)는 (금강경의) 뜻과 이치를 말로써 표현하여 사람의 마음에 계합시키는 것이니, 곧 이치에 계합하고 사람의 근기에 계합하기 때문에 계(契)라 이름한다. 경(經)은 불지론에서 “능히 모든 것을 꿰고 능히 포섭했으므로 이름하여 경이다.” 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聖스러운 가르침으로 응당히 설한 바 모든 뜻을 꿰뚫어 교화할 중생을 섭지하기 때문이다.

此疏 本是爲評經者 指其科段 雖次第科經 而不次第釋文 但 隨難處 卽略擧節目而已 亦不備述義意 義意 悉在傳示者 口 訣 不在疏中 不得但以銷疏 而爲講也 講者 須從首至末 次第 以深玄義意 銷釋經文 難處 卽約疏 易處 卽直說也

이 소는 본래 경전을 강론하는 사람을 위해 그 과목과 문단을 가리켜 놓은 것이니 비록 차제에 따라 경을 과목했으나, 과목한 차제에 맞추어 경문을 해석하지는 않았고, 단지 뜻이 어려운 곳을 따라가며 마디와 목차를 간략히 들어 놓았을 뿐, 뜻을 갖추어 금강경 모두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다. 그 뜻은 모두 전해주고 보여주는 강의자의 구결에 있는 것이지 소(疏)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니, 다만 소의 해석에 국한시켜 강론해야한다. 강론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깊고 현묘한 뜻으로써 경문을 해석해 나가되, 어려운 곳은 소(疏)를 참고하고, 쉬운 곳은 곧 바로 설명해 나갈지어다.
* 이 부분은 규봉의 소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 의해 덧붙여짐.

선시 맛보기
1. 山居秋暝 (王維)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텅 빈 산에 싱그러운 비가 내린 뒤
하늘은 가을 문턱에서 노을에 물드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서 비치고
맑은 샘은 돌 위를 흐르네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대나무 사각거리니 빨래하던 여인이 돌아가고
연잎이 움직임은 고깃배가 지나가네
봄꽃이 지든 말든 그 인연에 맡기지만
王孫은 스스로 내 곁에 머무르네

〈보충설명〉
1. 詩佛로 알려진 왕유는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30대 초반에 상처한 이후 혼자 몸으로 자연과 더불어 말년까지 보냈습니다.
2. 空山: 生死去來, 根塵의 경계가 모두 脫落한 상태.
3. 晩來秋: 노을과 가을은 진리의 순환에서는 用에서 體로 가는 상태.
4.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밝은 달의 비춤과 맑은 샘의 흐름은 텅 비워진 마음(體)에서 지혜로움이 드러나는 것(用).(수행자의 삶.)
5. 蓮: 둥그런 연잎은 圓融한 진리(실상반야), 연잎 위로 솟아오르는 연꽃은 진리의 顯現(관조반야), 연뿌리는 진리의 體와 用이 모두 갖추어진 우리의 本覺을 의미함. 또,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 피어오르며, 작은 물망울이라도 떨어지면 곧 굴려서 떨어뜨리므로 染心을 떨쳐내는 淸淨心을 상징하고, 꽃잎이 벌어짐과 동시에 열매가 맺히므로 煩惱와 菩提가 둘이 아닌 우리의 本覺을 상징하기도 한다. (참고- 사찰의 風磬에 매달리는 잉어도 용이 되는 물고기이므로 煩惱와 菩提가 둘이 아닌 우리의 본각을 의미함.)
6.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고요하던 대나무 숲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는 것은 깨끗하게 빨래하던 여인이 집으로 돌아갈 때 옷자락이 스쳐서 그렇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것은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고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충만한 깨달음의 리듬이 밖으로 표현된 것을 의미한다.
7.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신록이 무르익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인연법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진여의 법계는 변화하는 가운데에 변화하지 않는 실상이 존재한다. 이 실상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꿰어 자유롭게 머무름이 가능하다. 왕유는 인연법을 초월하여 자재롭게 존재하는 이 실상반야를 왕손이라고 표현했다.
2. 왕유의 또 다른 詩句
江流天地外 山色有無中
강물은 하늘과 땅 밖에 사라지고
산은 유무의 가운데에 수 놓인다.

〈보충설명〉
1. 江流와 山色의 流와 色: 동사로 해석해야 함.
2. 강물이 천지 밖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진공이면서 묘유이고 묘유이면서 진공이며, 실상반야이면서 관조반야이고 관조반야이면서 실상반야인 모습.
3. 선사들이 염송에 많이 인용하는 왕유의 또 다른 詩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걷다가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때를 바라보도다.
〈보충설명〉
1. 行到水窮處 坐看運起時의 行과 坐: 현실에 묻어나는 진리의 運用.
行은 動·坐는 靜, 處는 空間·時는 時間, 물과 구름은 無爲의 삶을 의미.
2. 물길이 다 한 곳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흘러나온 곳 즉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의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것. 言說이 끊어진 청정법신의 경계에 다달으면 여러가지로 반연지었던 번거로운 마음을 쉬게 된다. 그리고 時空을 초월한 그 자리에 앉으면 깊이 숨어있던 自性을 발견하게 된다.
3. 물길이 끊어진 산자락에 앉아 발 밑에서 모락모락 일어나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은 자성을 바탕으로 한 무심의 경계.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