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금강경 야보송의 원상 해설 (下)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34

 

「금강경」이라 이름붙인 사람 누구인가?
 
범부-성인도 답을 알지 못하니
우선 방편으로 금강이라 칭하네

본래 검은 것도 흰 것도 아닌데
곳에 따라 청색-황색으로 드러나네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이 갈대가 우거진 한 숲에서 포즈를 취했다.

설의) 法之一字 直指圓相 安名二字 直指經題 法不自名 要因名現 所 以安名 所以 道 摠持無文字 文字現摠持 應云法不孤起 所以 安名 而云誰爲安名 語忌十成故 恐成死語故 圓話自在 免夫招謗又 法不自名 所以安名 然雖如是 安名者 誰 若道黃面老子安 黃面老子 未嘗安 何則 自從鹿野苑 終至拔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若道 不是黃面老子安 今此經題 從甚處得來 且道 是安名 不是安名

법이라는 한 글자는 곧바로 원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안명(安名)이라는 두 글자는 곧 경의 제목을 가리키는 것이니, 법은 스스로 이름 붙이지 아니하고 이름으로 인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안명’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총지는 문자를 떠났지만 문자를 통해 총지가 드러난다”라 하였으니, 응당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는지라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붙인다(所以安名)’라고 해야 하는데, ‘누가 이름을 붙였는가(誰爲安名)’라고 숨겨 말한 것은, 말이 완벽한 것을 꺼리기 때문이며 죽은 말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니, 원만한 말로 자유자재하여야 비방을 면할 수 있다.

또, 법은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금강경)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황면노자가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라도 황면노자는 일찍이 이름을 붙인 적이 없으니 어찌 그렇다고 해야할까? 녹야원에서(처음 설법하신 곳) 발제하(마지막 설법하신 곳)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말씀도 설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황면노자가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그렇다면 이제 이 금강경의 제목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얻어진 것이겠는가? 다시 말해보라. 이름을 붙여야 되는가, 이름을 붙이지 않아야 하는가?

〈보충설명〉 함허스님이 설의를 통해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의문을 제시해 주는 것은 공부한 만큼 맛보고 실력대로 요리하면서 가져가라는 소리입니다. 대중은 스님들께 많이 물으면서 꾸준히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皁白 隨處現靑黃

마하, 대 법왕이여!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도다.
본래 검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지만 곳에 따라 청색으로 황색으로 드러나도다.

〈보충설명〉 마하대법왕이란 원상을 가리키는 것이며 전체 뜻은 모습이 없는 곳에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부산의 범어사 주련에도 이 게송이 걸려 있습니다.

花發看朝艶 林逐晩霜 疾雷 何太擊 迅電 亦非光

꽃이 피니 아침마다 고운 모습 볼 수 있고 낙엽이 물드니 늦서리 내리도다. 우뢰는 어찌 그리 급하게 치는가? 아무리 빨라도 번개 또한 빛이 아니로다.

〈보충〉 꽃이 핀다는 것은 진리 당처에서 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법왕을 여의지 않고 신통방광하는 모습이니 (體에서 用을 일으키는 것)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이치입니다. 저녁무렵 서리에 낙엽이 지는 것은 用을 접어 體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적멸의 모습이지요. 轉句와 結句에서의 우뢰와 번개는 아무리 빠르고 소리가 커도 대법왕(우리 마음)의 광명에 비교하면 소리가 큰 것도 아니고 빠른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凡聖元難測 龍天 豈度量 古今 人不識 權立號金剛

범부나 성인도 원래 (일원상의 자리를) 헤아려서 답을 얻기 어려운데, 용이나 천상의 존재인들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우선 방편으로 금강이라 불러 보노라.

설의) 法王 非指丈六金身 人人本有底一着子 能爲萬像之主 故 號 爲法王 古人 道 法中王最高勝 恒沙如來同共證者 是 法王之爲體也 孤高更無上 廣博無邊表 乾坤 在其內 日月 處其中 恢恢焉蕩蕩焉 逈 出思議之表 故 號爲大法王 無短云云 實相無相 本來云云 無相現相 花發云 云 當處出生 當處寂滅 疾雷云云 妙旨迅速 難容擬議 凡聖云 云 箇事極幽玄 智識俱不到 非但古人罔措 亦乃今人 不識 爲止小兒 啼 權且立虛名 只如依權現實底道理 作마生道 月隱中峰 擧扇喩之 風息大虛 動樹訓之

법왕은 석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하나(일착자)’이니, 능히 만상의 주인노릇을 하므로 법왕이라 하는 것이다. 고인이 말한 “법 가운데 왕이여, 가장 높고 수승하여 항하사 같은 여래들이 모두 함께 증득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법왕의 몸통 되는 것이 홀로 높아 다시 위가 없고, 넓고 넓어 가이없고 바깥도 표할 수 없어서,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고 해와 달도 그 가운데에 처해 있다. 넓고 크고 탕탕해서 생각이 미치는 범위를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대법왕이라 이름한 것이다. ‘무단~’운운은 실상의 모습이 없다는 뜻이요, ‘본래~’운운은 상 없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상이 나타났다는 뜻이요, ‘화발~’운운은 진리라는 당처에서 출생해서 당처에서 적멸한다는 뜻이다. ‘질뇌~’운운은 (대법왕, 일원상의) 묘한 뜻이 신속해서 생각으로 이리저리 재는 것이 용납되기 어렵다는 뜻이요, ‘범성~’운운은 대법왕의 낱낱 일들이 지극히 그윽하고 현묘하여 지식으로는 모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니, 비단 옛사람들이 이름을 두지 못한 것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람들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웠을 뿐이다. 단지 방편에 의지하여 실상의 도리를 나타내려면 어떤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달이 산봉우리를 넘어가 숨으면 부채를 들어 달을 비유해서 가르쳐 주고, 바람이 태허에 잠적하면 나무를 흔들어 가르쳐야 할 것이다.

〈보충설명〉
1. 慧忠(唐): 속성은 염(苒). 육조혜능에게 인가를 받고 여러 명산을 다니다가 남양 白崖山 에서 40여년을 지냄. 숙종, 현종, 대종의 3대에 걸쳐 국사로 지내면서 善政을 펴는데 많은 도움을 줌. 남악 慧思의 종풍을 사모하였고 시호는 大證禪師.

2. 仰山慧寂(唐): 속성은 섭(葉). 위산의 법을 이어 위앙종을 개창. 10대 후반에 왼손의 藥指와 小脂를 끊고 결심하여 출가. 혜충의 제자 탐원(眈源)에게서 禪의 가르침을 깨닫고 潙山의 靈祐를 만나 깊은 경지에 도달. 15년 동안 위산에 있다가 앙산으로 옮겨 선풍을 선양하여 위앙종을 이룩함으로써 마조 계통의 첫 번째 종단을 탄생시킴. 그리고 883년 77세를 일기로 소주 동평산에서 입적. 시호는 智通大師.

3. 三世間: 衆生世間, 國土世間(器世間), 智正覺世間(득도의 연화장세계)

4. 四法界: 事法界(차별이 존재하는 현상계), 理法界(차별을 초월한 진리의 경계), 理事無碍法界(현상과 실체가 不二의 관계에 있는 것), 事事無碍法界(현상계가 곧 절대적인 不思議 경계임을 인정하는 것)

5. 摠持: 모든 진리를 함축하여 한 덩어리로 보는 것. 圓相과 같은 의미.

6. 丈六金身: 석존을 일컬음. 석존은 일장육척의 키에 전신이 자마금색으로 덮였다 함.


禪詩 맛보기

飮酒 (陶淵明)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사람들이 모인 곳에 집을 지었으나, 수레소리· 말소리가 들리지 않누나.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그대에게 묻노라. “어찌하면 그럴 수(자유자재함)가 있겠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바깥 세상도 절로 멀어진다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국화를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꺾어 들고, 그윽히 남산을 바라보니,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 기운은 저녁놀에 아름다운데, 나는 새는 서로 서로 돌아가도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가운데 들어있는 참된 의미를, 변설하고 싶지만 말을 잊었네.

〈보충설명〉
1. 而無車馬喧: 사람들이 많이 모여 시끄러운 곳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덜커덩거리는 수레바퀴소리나 말의 울음이 들리지 않음은 바깥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아공과 법공의 일원상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

2. 心遠地自偏: 마음이 바깥 세상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감각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뜻.

3.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體에서 用을 일으키는 것(從體起用). 남산을 향해 국화를 꺾어든 도연명의 모습은, 연꽃을 들고 웃음을 나눈 부처님과 가섭의 모습과 같은 모습. 바짝 마른 학이 자태가 더 아름답고 소리도 더 큰 것처럼, 꽃들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사라지는 계절이 되어서야 서리를 맞으며 외롭게 피는 국화도, 마치 수행자의 모습처럼, 바짝 마를수록 향기가 더욱 더 그윽하다.

4.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일상생활의 모습을 접고 절대적인 진리로 환원하고 귀의한다는 攝用歸體(用을 섭수하여 體로 돌아감). 아침에 종소리를 점점 올리고 저녁에 종소리를 점점 내리는 승가의 생활도 從體起用, 攝用歸體의 이치에 맞춘 것.

5. 欲辨已忘言: 老子 道德經에서의 ‘道可道 非常道~’와 같은 뜻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