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금강경 야보송의 원상 해설 (上)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32

 

 

야보 스님이 ‘원’을 그린 까닭은?
 
모든 법 원상 밖 벗어날 수 없으니
이를 일러 일구-법계라 하네

법은 홀로 생기는 것이 아니거늘
누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사진설명>"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내가 진리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스님이 토암산 일대를 산책하고 있다.

야보스님은 금강경제목을 소개하면서 원을 그렸습니다. 승가에서 원은 마음의 달을 상징하며 동시에 절대적 진리 (삼라만상이 생기기 전. 유교에서는 태극이 생기기 전)를 뜻하기도 합니다. 경허스님도 열반의 때에 둥근 원을 하나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송을 지었습니다.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의 달이 홀로 둥근데, 신령스런 빛이 삼라만상을 삼켰도다. 광명과 청정경계를 모두 잊었는데 다시 이것은 무엇인고?)

경허스님 게송에서의 광경구망이란 곧 원상조차도 잊었을 때를 일컫는 것입니다.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된 경허스님의 수덕사문중은 법명과 당호에 달이 들어갑니다. 월면, 혜월, 수월… 등, 달이 들어 간 법명과 당호 만 잘 이해해도 불법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금강경 야보송에는 원상이 세 번 등장합니다. 야보스님의 원상에 대해 함허스님은 어떻게 설명하였는지 공부해봅시다.

설의) 圓相之作 始於南陽忠國師 國師 傳之 耽源 源 傳之仰山 源 一日 謂仰山曰國師 傳六代祖師 圓相九十七介 授與老僧 臨示寂 時 謂予 曰吾滅後三十年 有一沙彌 來自南方 大振玄風 次第傳授 無令斷絶 吾詳此讖 事在汝躬 我今付汝 汝當奉持 山 旣得 遂焚之

원상의 최초 작품은 남양 혜충국사에게서 비롯되었으니, 혜충국사가 그 원상을 탐원에게 전하시고 탐원은 다시 앙산에게 전했다.
탐원이 어느 날 앙산에게 일러 가로되 “국사께서 6대조사가 전해준 원상 97개를 이 노승에게 주시고, 열반할 즈음에 나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입멸한 30년 뒤에 어떤 사미가 남방으로부터 와서 크게 선풍을 떨칠 것이니, 이 원상을 차례대로 전해 주어서 단절됨이 없게 하라’ 하셨는데 내가 이 예언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아마도 너를 두고 전한 이야기 같다. 내가 이제 너에게 주노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지니라.” 하셨다. 앙산이 이 원상을 얻고 모두 태워버렸다.

源 一日 謂仰山曰向所傳圓相 宜深秘之 山 曰燒却了也 源 曰 此乃諸祖 相傳底 何乃燒却 山 曰某 一覽而已知其意 能用卽得 不 可執本也 源 曰在子卽得來者 如何 山 於是 重錄一本 呈似 一無舛 訛

탐원이 어느 날 앙산에게 “지난번에 내가 전해준 원상을 마땅히 깊이 비밀리에 간수할지니라.” 하셨다. 앙산이 “이미 태워버렸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탐원이 “그 것은 모든 조사가 서로 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태워버렸는가?” 하며 다시 물었다. 앙산이 대답하기를 “제가 한 번 보고 이미 그 뜻을 다 알아서, 능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에 원상에 대해 집착할게 없었습니다.” 하였다. 탐원은 “너에게 주었을 때는 네가 원만히 얻었다 할 수 있으나, 앞으로 공부할 사람에게는 어찌 보여 주려는가?” 라고 질문했다. 앙산이 이 때 다시 한 책을 기록하여 바쳤는데 하나도 어그러지거나 잘못됨이 없었다.

源 一日 上堂 山 出衆 畵一圓相○ 以手 托起 作呈勢 卽叉手 而立 源 以兩手 交拳示之 山 進前三步 作女人拜 源 遂點頭 山 卽禮拜 此 圓相所自作也

탐원이 어느 날 법상에 올랐다. 앙산이 대중 가운데서 나와 일원상을 그리고 양손으로 받쳐 증정하는 자세를 취한 후 곧 차수(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댐)하고 서 있었다. 탐원은 두 손으로 주먹을 마주하여 받아드는 모습을 보였다. 앙산이 앞으로 세 걸음 나가서 여인의 절을 하였고 탐원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앙산은 즉시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이 것은 원상이 처음 만들어졌든 모습으로 환원된 것이다.

今師 題下 畵一圓相 意旨如何 卽文字 拈出離文字底消息 若是離文 字底消息 擬議得마 計較得마 不可以有心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語 言造 不可以寂默通 直饒釘嘴鐵舌 也卒話會不及

이제 야보스님이 (금강경) 제목 아래에 하나의 원상을 그린 뜻은 무엇일까?문자에 나아가 문자를 벗어나는 소식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렇게 문자를 떠난 소식이라면 어찌 머리를 써서 이해할 수 있겠으며 이리저리 헤아려서 얻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내어서도 구할 수 없으며, 무심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적묵으로도 통할 수 없으니, 아무리 못처럼 단단한 부리나 쇠 같은 혀(변재)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설명에 도달할 수 없다.

然雖如是 畢竟作마生道 生佛 同源 妙體無物 三世諸佛 出不得 歷代 祖師 出不得 天下老和尙 出不得 六道輪廻 亦出不得 三世間 四法 界 一切染淨諸法 無一法 出此圓相之外 禪 謂之最初一句子 敎 謂之最淸淨法界 儒 謂之統體一太極 老 謂之天下母 其實 皆指此也 古人 道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 猶不會 迦葉 豈能傳」者 是也

비록 이러하지만 필경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중생과 부처의 근원이 같고 (원상의) 묘한 바탕은 물아(物我)가 따로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원상을 벗어날 수 없고, 역대 조사들도 벗어날 수 없으며, 천하의 노덕 화상들도 벗어날 수 없고,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들도 또한 벗어나지 못한다. 삼세간(시간)과 사법계(공간)의 일체의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의 어떤 한 법도 이 원상 밖을 벗어날 수 없으니, 禪에서는 이 것을 일러 최초의 일구(一句)라 하고, 敎의 입장에서는 가장 청정한 법계라 하고, 유교에서는 통일된 몸의 하나의 태극이라 하고, 노자는 천하의 어머니라 하는데, 그 실체는 모두 이 원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옛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 모습은 응축된 모습의 원이었다.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가섭이 어찌 능히 전하겠는가?” 함이 이 것이다.

〈보충설명〉 원상은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깨달았다’ 하면 상이 남겨지므로 법상(法相)에 걸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49년 동안 설법을 하고서도 나중에 한 마디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法不孤起 誰爲安名

법은 외로이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누가 이름을 붙였는가?

〈보충설명〉 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내가 진리다’ 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를 이름 붙여 도라고 하면 오히려 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언어도단이라 하여 부처님께서 진리에 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수보리나 가섭과 같은 선지식은 곧 알아차리지만 중근기, 하근기의 범부중생은 그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범부중생으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려면 누군가가 불법에 관해 부처님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언설에 의해 진리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니 법은 혼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