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장엄정토분/2/수행을 더하여 진리를 장엄하라

通達無我法者 2008. 10. 4. 16:26

 

수행을 더하여 진리를 장엄하라
 
 
모태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중생제도를 마쳤도다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則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여!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고 하겠는가 아닌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유루적인 장엄이 아니므로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冶父]孃生袴子 靑州布衫

갓난아기의 가랑이 터진 바지요, 청주의 베옷이로다.

<보충설명>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청정한 마음이 장엄정토의 불사보다 우선이란 뜻으로 가랑이 터진 바지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소박한 베옷을 끌고 온 것입니다. 젖은 기저귀를 바꾸기 쉽게 가랑이를 터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바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는 옷인데 아주 정겹고 편안한 옷입니다. 품질 좋기로 유명한 청주의 베는 굵고 거칠지만 한번 옷을 지어 입으면 여러 번 손질하여 늙을 때까지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화려하거나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입니다.

[說]孃生袴子 純而無雜 然 唯古非今 靑州布衫 儉而無華 然 但質無文 本始合體 文質彬彬 始可名爲十成莊嚴

갓난아기의 가랑이 터진 바지는 순수해서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지만 오로지 오래 묵은 것이요 새것은 아니다. 청주의 베옷은 검소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단지 바탕 뿐이요 무늬가 없으니, 본시(本始)가 합체되어 무늬와 바탕이 잘 어울려야 비로소 가히 원만한 장엄이라 이름 붙일 수가 있다.

抖擻渾身白勝霜 蘆花雪月轉爭光 幸有九皐翹足勢 更添朱頂又何妨

더러움이 다 떨어져 나간 깨끗하고 원만한 몸이 서리보다 더 희니, 갈대꽃과 눈 속의 달이 서로 빛을 다투도다. 다행히도 아홉 길이 언덕의 소나무에 한쪽 다리를 들고서 졸고 있는 학이 있는데, 붉은 점을 정수리에 덧붙인다 하여 어찌 방해가 되겠는가.

<보충설명> 갈대꽃의 흰빛과 설월(雪月)의 흰빛은 차갑고도 깨끗하여 더러움이 모두 떨어져 나간 순수한 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한쪽 다리를 들고 조는 듯이 서있는 학은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고고하고 완전한 진리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진리의 모습에 붉은 점으로 장엄을 더한다고 해서 허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가 진리이며 아름다운 바탕(質)입니다. 거기에 수행을 더하는 것이 장엄이며 무늬(文)가 되는 것입니다. 바탕도 중요하지만 무늬도 중요하듯이 본분도 중요하지만 신훈도 중요한 것입니다.

선시 맛보기

禪門拈頌 第 1券 1則 兜率

不離兜率 已降王宮 未出母胎 度人已畢
도솔천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미 왕궁에 내려오셨고,
모태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중생을 제도해 마쳤도다.

<보충설명>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반가이 맞이하며 지혜의 등불을 밝힙니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셔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한 생애를 우리는 8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팔상성도’로 기립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 탄생이 팔상성도 가운데 하나지만, 忘我의 공부가 익은 부처님과 조사들의 깨달음에서 보면 팔상이 모두 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에 계시면서 왕궁을 내려오시고 모태에 있으면서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은 ‘시무애 처무애(時無碍 處無碍)’ 즉, 시간과 공간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禪門拈頌 第 1券 2則 周行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
天上天下 唯我獨尊
두루 일곱 걸음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신 후, 한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은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에 오로지 나만이 홀로 존귀하도다.”

淨嚴遂云
承春高下盡鮮姸 雨過喬林叫杜鵑
人靜畵樓明月夜 醉歌歎酒落花前
봄을 맞이하니 높은 데나 낮은 데나 모두 신선하고 고우며,
비가 살짝 스쳐가니 큰 나무 숲에서 두견새가 절규하네.
사람의 자취 없어 고요하고 아름다운 누각 위로 밝은 달이 걸렸는데,
떨어지는 꽃 앞에서 술에 젖어 기쁨을 노래하네.

古人云
春山疊亂靑 秋水漾虛碧
寥寥天地間 獨立望何極
呵呵呵是甚麽 東西南北唯是我
봄 산은 겹겹이 흐드러지게 푸르고, 가을 물은 허공에 넘실거리며 푸르도다.
고요하고 고요한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 있으니 이보다 더 지극할 것 있겠는가.
하하하! 이 뭐꼬? 동서남북에 오로지 나 하나 뿐.

<보충설명>
1. 아기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일곱 걸음 옮긴 것이 주행(周行)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기 부처님의 발을 연꽃이 떠받쳐 주었다고 합니다.

2. 일곱이라는 수는 인도에서 희망과 행운을 나타내는 수인데, 칠각지의 상서로움을 상징하기도 하고, 일곱 걸음 씩 걷는다는 사자의 위엄과 뭍에 오를 때 일곱 걸음 걷는다는 용의 위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3. 周行을 주제 삼아 많은 선지식이 송을 지었는데 여기서 소개한 淨嚴遂의 頌은 고요함 가운데에 묘유가 살아있으면서도 두견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오롯이 살아나고, 古人의 頌은 진리의 모습이 똑 떨어지게 드러납니다.

4. 사방을 둘러보았다는 뜻에는 四相을 없애고 사성제를 닦으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5.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을 땅을 가리켰다는 뜻은 유정과 무정이 모두 절대평등의 한 모습에 포섭되고, 삼계를 모두 진리의 한 세계로 승화시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아기부처님 그 자체가 되어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경탄스럽게도 부처님의 탄생은, 진리 당처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원만보신 노사나불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의 길상과 위신력이 집대성 된 것을 의미합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