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덕민 스님은 “『금강경』의 내용을 바르게 새겨 일상생활에서 올바로 실천하지 않고 경구 또는 경의 이름에만 집착한다면 그 것 또한 금강경에 속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松江 鄭澈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 月掛南溪樹
소소한 낙엽소리, 후두둑 빗소리로 알았네. 동자에게 물었더니 문밖에 나가 보고, 달이 남쪽 골짜기 나무에 걸렸다네.
〈보충설명〉 1. 송강선생은 전생에 스님이었다는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2. 第1句와 第2句는, 소소하게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절에 올랐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잠을 청하는데 낙엽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같이 들리는 것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3. 第3句와 第4句에서는 모든 사람의 視線을 달 하나에 집중시킵니다. 빗소리로 착각하여 사유를 묻는 나그네의 시선도, 문 밖으로 나가서 사정을 알아보는 동자승의 시선도 달에 집중됩니다. 이렇게 주지와 동자와 나그네의 시선이 모두 달에 모여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한 모습’으로 찍혀 나오는 것이 바로 선시(禪詩)입니다.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 告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密 以是名字 汝當奉持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셨다. “이 경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할지니, 이 이름으로 너희는 마땅히 받들어 지녀야 하리라.
〈보충설명〉 일반적으로 경전의 제목은 경의 뒷부분에서 언급되는데 금강경은 제13분, 여법수지분에서 언급됩니다. 그 것은 아마 경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는 가르침에 깊은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금강경의 수지독송이 일상생활 전체에 묻어나와야 함을 재삼 강조하려는 뜻을 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법수지’라는 말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아서 금강경 내용대로 받들어 지니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그 뜻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법’은 經이고 體며, ‘수지’는 반야바라밀이고 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짓는 모든 相을 떨쳐내고 진리를 사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행주좌와 일상에서 진리다움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금강경 내용을 바르게 새겨 일상생활에서 올바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經句 또는 경의 이름에만 집착한다면 그 것도 금강경에 속박되는 것입니다. 무상과 무위를 본질로 삼은 수지독송에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자칫 금강경이라는 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說]從初敷座 極至於此 一經體備 說義已周 由是 空生 請安經名 以求奉持 如來 於是 叩其兩端 兩手分付
금강경의 시작 부분 敷座(부처님께서 자리를 깔고 앉으신 법회인유분)에서 여기(제13, 여법수지분)에 이르러, 한 경전의 몸통이 갖추어지고 뜻을 설하신 내용이 두루해졌다. 그래서 수보리가 경전 이름 두기를 청하고 그 이름으로 받들기를 구하니, 여래가 여기에서 그 양끝을 잡아 양손으로 나누어 주셨다.
〈보충설명〉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경의 제목뿐만 아니라, ‘너희가 마땅히 봉지(奉持)하라’ 하고 두 단으로 분부하셨다는 뜻입니다.
[冶父]今日小出 大遇 오늘 조금 투자해서 큰 대접을 받았다.
〈보충설명〉 수보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름 두기를 청하였는데 큰 진리를 답으로 응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火不能燒 水不能溺 風不能飄 刀不能劈 軟似兜羅 硬如鐵壁 天上人間 古今不識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바람이 능히 나부끼게 하지 못하고, 칼로도 능히 자를 수가 없도다. 부드럽기는 도라 솜과 같고 굳세기는 철벽과 같으니, 천상도 인간도 예나 지금이나 알지 못하도다. 이잇-!
〈보충설명〉 금강경은 진리이고 알음알이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는 너도 모르는 소리고 나도 모르는 소리여서, 허물을 살짝 감추는 감탄사입니다.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密 則非般若波羅密 是名般若波羅密
“어찌 그러한가? 수보리여! 부처님 말씀의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보충설명〉 수보리가 경의 이름을 물으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지만, 진리의 입장에서는 그 이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의 제목에 집착하면 그 제목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한 번 부정을 하고, 그냥 수지독송하기 위해서 반야바라밀이라 이름 붙였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冶父]猶較些子
오히려 뭔가 조금 이상하다.
〈보충설명〉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하셨으면 그냥 그대로 이름 붙이면 되지, 다시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뭔가 이상하고 미심쩍다는 표현입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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